영화 <우먼 인 윈도> 2021년
《우먼 인 윈도》(The Woman in the Window)는 A. J. 핀의 2018년작 범죄 스릴러 소설로, 작가의 데뷔 작품이다. 광장공포증을 앓는 전직 정신과 의사가 집 안에서 이웃집의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남편이 들이닥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저 여자는 이번에야 말로 덜미를 잡히고 말 것이다.
212번지의 창에는 커튼도, 블라인드도 없다. 적갈색 타운하우스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갓 결혼한 모츠 부부가 살았다. 두 사람이 금세 갈라서기 전까지, 나는 모츠 부부와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수시로 그들의 SNS를 확인하는 사이였을 뿐, 메이시스 백화점 사이트에는 아직도 두 사람을 위한 결혼선물 레지스트리가 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식기 세트를 주문할 수 있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면, 저 집 창문에는 아직 천 쪼가리 하나 걸려 있지 않다. 212번지는 벌거벗은 붉은 몸뚱이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 채, 텅빈 눈으로 길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다. 나 역시 피하지 않고 그 시선과 마주한다. 그곳에는 중개업자를 게스트룸으로 이끄는 안주인이 있다. 저 집은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사랑의 장례식장이 있다면 바로 저곳일까. (P11)
나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켜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내 책상 앞에 자리를 잡고 니콘을 집어 들었다.
207번지의 부엌에서는 건장한 아버지가 TV화면에서 나오는 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눈에 대고 줌인했다. 투데이쇼였다. 잠시 고민했다. 카메라를 내리고 우리 집 TV를 켜서 이웃과 같은 방송을 시청할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 앉아 렌즈 너머로 그의 TV를 시청할 것인지를 두고.
나는 전자를 선택했다.
건물 정면을 본 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구글이 스트리트뷰를 제공해주었다. 하얗게 회반죽을 바른 벽, 희미하게나마 보자르풍이 느껴지는, 망대가 꽂힌 집이다. 여기서는 집의 한쪽 면으로 시야가 국한된다. 동쪽 창을 통해 부엌과 2층 응접실, 그리고 그 위의 침실을 포착할 수 있다.
어제 한 무리의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TV와 소파, 오래된 장식장들을 들여왔다. 남편이 모든 것을 지휘했다. 그들이 이사 온 밤 이후로, 부인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P31-32)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싸우는 우리 중 대부분은 집에 묶여 있다. 밖에 있는 더럽고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다. 나는 드넓은 하늘, 끝없는 수평선, 단순한 노출, 야외에 있다는 미칠 것 같은 스트레스로부터 숨어 있다. '열린 공간‘, DSM-5가 애매하게 지칭하는 그 내용은 186개의 각주로 정의되어 있다.
의사로서, 나는 환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한다. 환자로서의 나는 (이편이 맞는 말이리라) 광장공포증이 내 삶을 망가뜨렸다고 말하는 대신, 차라리 내 삶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P46)
히치콕 감독의 영화 <39계단>을 상영하는 예술영화관에서 우리가 만났던 밤, 에드와 나는 서로의 역사를 함께 훑었다. 고전 누아르와 스릴러로 나를 끌어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의 어머니라고 에드에게 말했었다. 10대 시절의 내가 반 친구들 대신 진 티어니나 제임스 스튜어트와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는 말도. “귀엽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날 밤 난생처음 흑백영화를 본 에드는 그렇게 말했다. 두 시간도 채 안 되어,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있었다.
‘네가 먼저 덮치려던 거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에드를 상상해본다.
올리비아가 태어나기 전, 우리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영화를 보곤 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오래된 서스펜스 영화였다. <이중배상>, <가스등>, <파괴공작원>, <빅 클락>..... 그 시절 우리는 흑백으로 살았다. 나에게 그 밤들은 오래된 친구를 다시 만나는 자리였고, 에드에게는 새 친구를 만드는 기회였다. (P58)
..... 그리고 그다음 순간, 새총에서 출발한 돌멩이가 나를 향해 날아온다. 돌멩이는 점점 커지다가, 구부정한 내 배를 있는 힘껏 강타한다. 입이 창문처럼 벌어진다. 그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나는 빈집이다. 서까래가 썩어가고 찬바람이 윙윙거리며 소용돌이치는, 지붕이 신음하며 주저앉은.
...... 나는 신음한다. 쓰러진다. 무너진다. 벽돌을 짚은 한 손과 허공을 가르는 다른 손.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타는 듯한 나뭇잎. 어둠,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비추는 한 줄기 빛, 그리고 좁아지는 시야. 녹아내린 흰빛이 눈을 가린다. 깊고 두터운 웅덩이가 만들어질때까지 표백되는 시야. 나는 소리를 질러보려 노력한다. 입술에 모래가 느껴진다. 콘크리트의 맛이 느껴진다. 피 맛도 느껴진다. 바닥 위를 빙빙 돌고 있는 사지가 느껴진다. 땅이 파문을 일으키며 몸을 들어 올린다. 몸이 공기 중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요동친다.
지금과 똑같은 일이 지금과 똑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뇌 한구석 어딘가가 기억해낸다. 낮은 파동의 목소리들이 기억난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단어들이 맑고 선명하게 튀어오른다. ‘넘어졌어요, 동네 사람들, 아무도, 미쳤어’와 같은 단어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없다.
나의 팔이 누군가의 목에 감긴다. 거친 머릿결이 내 얼굴을 문지른다. 힘없는 두 다리가 땅 위에서, 그리고 마룻바닥에서 난투를 벌인다. 이제 집 안이다. 현관의 차가운 공기를 가로질러, 거실의 따뜻함 속으로 마침내 들어온 것이다. (P84-85)
한손에는 텀블러, 다른 손에는 니콘을 들고 서재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남쪽 창과 서쪽으로 난 창 가운데에 웅크리고 앉아 동네를 훑는다. 일종의 재고관리. 에드는 그렇게 부르길 좋아한다. 저기, 요가원에서 돌아오는 리타 밀러가 있다. 땀으로 반짝이는 그녀의 한쪽 귀에 휴대전화가 붙어 있다.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줌인한다. 그녀는 웃고 있다. 나는 그녀가 중개업자와 통화 중인지 궁금해졌다. 아니면 남편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214번지 밖에서는 바서먼 부인과 남편인 헨리가 계단 아래로 조심스레 발을 내딛고 있다. 그들만의 고상함과 지성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길을 나서는 중이다.
나는 서쪽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행인 두 명이 두 동짜리 건물 앞을 어슬렁대고 있다. 그중 한 명이 덧문을 가리킨다. “골대로 적당하다.”
세상에, 이제 대화까지 지어내다니.
나는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실제로 들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카메라를 조심스레 공원 건너편 러셀 씨네로 돌렸다. 어둑한 부엌에는 아무도 없다. 블라인드가 반쯤 감긴 눈처럼 내려와 있다. 하지만 한 층 위, 응접실 창문 가까이에서 이선과 제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줄무늬가 있는 2인용 소파에 앉아 있다. 그녀는 노란 스웨터를 입고 간결한 쇄골 라인을 드러냈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목걸이 펜던트가 협곡을 오르는 등반가같다.
렌즈를 비틀자 이미지가 또렷해진다. 그녀는 빠르게 말하는 중인데, 환하게 웃자 하얀 이가 드러난다. 손은 공중에서 허둥거린다. 이선의 눈은 무릎에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수줍은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그러고 보니 필딩 박사에게 러셀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뭐라고 할지 알고 있다. 나 스스로도 이 상황을 분석할 수 있다. 나는 핵가족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엄마, 아빠, 아이 하나가 있는 가족. 내 가족의 정확한 복사판. 한 집 건너, 바로 이웃에, 내가 속했던 가족이, 내 것이었던 삶이 있다.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삶이 바로 공원 건너에 있다. 물론, 공원 이편의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래서 뭐?’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요즘은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켜고 입술을 문지른다. 그리고 다시 니콘을 들어 올려 렌즈를 들여다본다.
그녀가 나를 마주보고 있다.
나는 무릎에 카메라를 떨어뜨린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맨눈으로 봐도 그랬다. 입을 벌린 채, 이쪽을 노골적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인사한다.
숨고 싶다.
인사에 답을 해야 하나? 눈길을 돌려버려? 마치 근처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보며 눈을 깜빡여볼까? ‘거기 계셨군요?’
아니다.
카메라가 발 쪽으로 떨어지며 공중제비를 돈다. “됐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두운 층계참을 향해 방을 빠져나간다. (P123-125)
갑작스러운 비명.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듯, 겁에 질린 생생한 비명.
나는 부엌 창문으로 향한다.
집 안은 조용하다. 심장이 요동친다.
어디에서 난 소리일까?
바깥에는 저녁 불빛이 일렁이고, 바람이 나무를 스친다. 길에서 난 소리인가, 아니면.....
다시 한 번 비명.
깊은 곳에서 나오는, 대기를 찢는, 핏빛의, 광적인 비명. 207번지다. 열린 응접실 창문으로 커튼이 바람에 날린다. ‘오늘은 날이 따뜻해요.’ 비나가 그렇게 말했었지. ‘창문 좀 열면 어때요?’
나는 건너편 집을 바라본다. 나의 눈은 부엌과 응접실을 훑다가 갑자기 이선의 침실로, 다시 부엌으로, 갑작스레 방향을 틀며 움직인다.
그 남자가 제인을 공격한 걸까? ‘그는 통제가 심한 편이죠.’
전화번호가 없다.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급히 꺼내려다 바닥에 떨어뜨린다. 제기랄. 그리고 전화번호 안내 서비스에 전화한다.
“주소를 말씀해주시겠어요?” 무뚝뚝한 말투다. 나는 대답한다. (P171)
우리는 예정보다 열흘 일찍 별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어쩌면 에드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편이, 꽤나, 엄격하게 말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나는 원칙적으로 동의했을 뿐이다.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 에드가 중개인을 내세울 때까지도 말이다.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왜’ 리지는 스스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걱정해야 할 대상은 정작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왜’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문법을 중시했으며, 여전히 중시할 웨즐리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그렇다. 하지만 틀렸다. ‘왜’는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여기에서는. 언제, 어디서라는 정보가 바로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다.
그에 대한 답은 각기 이러하다. 지난 12월, 버몬트. 우리는 올리비아를 아우디에 태우고 9번 도로를 따라 헨리 허드슨 브릿지를 건너 맨해튼을 빠져나갔다. 두 시간 뒤, 뉴욕 주 북부를 지나던 우리는 에드가 뒷길이라고 부르길 좋아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P197)
그녀는 이제 정말로 시뻘게져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나는 부엌 조리대에서 니콘을 켜고 활동을 시작한다.
“이제 혈관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을 가로질러 카메라를 손으로 받쳐든다. 그리고 창문으로 이동한다.
“날 들여보내줘. 날 들여보내줘, 날 들여보내줘.”
나는 창유리에 기대어 카메라를 눈으로 가져간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제인이 튀어오른다.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렌즈를 돌리자 그녀가 선명해진다. 또렷하다. 목걸이가 반짝거린다. 가늘게 뜬 눈과 벌어진 입. 그녀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찔러댄다. “불 필요하세요?” 다시 찌르기, 머리카락이 풀리며 뺨 위로 흘러내린다.
줌을 더 당기자, 그녀가 왼쪽으로 돌진하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숨을 참아보세요.” 나는 텔레비전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창문을 마주보며 니콘을 눈으로 가져간다.
제인이 다시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걷는 게 아주 느리고 이상하다. 비틀거린다. 블라우스가 적갈색으로 물들어 있다. 내가 지켜보는 동안, 적갈색은 배까지 번지낟. 그녀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가슴을 더듬는다. 가느다랗고 반작이는 무언가가 거기에 꽂혀 있다. 마치 칼자루처럼.
칼자루.
피가 목구멍으로 올라온다. 붉은색이 입을 메운다. 턱이 힘없이 늘어지고 이마에 주름이 생긴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녀는 한 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흐느적거린다. 다른 한 손은 앞으로 뻗어 창문을 가리키려 한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정확히 나를 향한다.
나는 카메라를 떨어뜨린다. 다리 아래로 떨어진 카메라가 줄에 매달린 채 덜렁거린다.
제인의 팔은 창문에서 멈춘다. 부릅뚠 눈은 애원하고 있다. 입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멈출 정도로 느려진 어느 순간, 그녀는 창문에 손을 짚으며 한쪽으로 쓰러진다. 유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남는다.
나는 서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그 장면에 압도당한다.
움직일 수가 없다.
공간이 그대로 정지한다. 세상이 그대로 멈춘다.
시간만이 앞으로 휘청거리며 나아간다. 그제야 나는 움직인다.
나는 뒤돌아 카메라 줄을 팽개치고 방을 가로지른다. 엉덩이가 부엌 테이블에 부딪힌다. 나는 온몸을 떨며 조리대로 달려가 유선 전화를 집어 들고 전원을 누른다.
무반응. 먹통.
언젠가 데이비드가 한 말이 기억난다. ‘꽂혀 있지도 않은데요.’
데이비드.
나는 전화기를 버리고 지하실로 질주한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부르고, 부른다. 문손잡이를 움켜쥐고, 세차게 당긴다.
아무도 없다.
계단으로 달려간다. 올라가, 쭉, 쭉, 벽에 부딪힌다. 한 번, 두 번, 층계참 근처의 마지막 계단에서 나는 서재로 거의 기어 들어간다.
책상을 확인한다. 휴대전화가 없다. 분명 여기다 뒀는데.
스카이프.
손이 날뛰고 있다. 나는 마우스를 찾아 책상으로 질주한다. 스카이프 더블클릭, 다시 또 더블클릭. 안내 메시자가 들린다. 다이얼에 911을 때려 넣는다.
붉은 삼각형이 화면에 등장한다. 비상 전화 연결 불가. 스카이프는 전화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망할, 스카이프.” 나는 포효한다.
서재에서 벗어나 계단을 내려간다. 모퉁이를 돌아 침실 문을 통과한다.
이쪽 협탁, 와인병과 액자뿐이다. 저쪽 협탁에는 책 두 권과 독서용 안경.
침대, 침대에 있나? 나는 양손으로 이불을 낚아 올려 탈탈 털어낸다.
휴대전화가 미사일처럼 허공으로 발사된다.
나는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안락의자 밑으로 처박히기 전에 튀어오른다. 손을 뻗어 단단히 낚아챈다. 그리고 잠금을 해제하고 비밀번호를 누른다. 흔들린다. 잘못 입력, 다시 누른다. 손가락이 미끄러진다.
시작화면이 나타난다. 나는 전화 아이콘을 누른다. 키패드를 누른다. 그리고 911에 전화한다.
“911입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웃이.” 나는 입을 열지만 제동이 걸린다. 구십 초 만에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춘다. “이웃이 칼에 찔렸어요. 이런, 세상에! 도와주세요.”
“알았습니다. 진정하세요.” 그는 마치 실제상황이 아닌 것처럼, 아주 느릿느릿한 조지아 말투로 대답한다. 귀에 거슬리는 말투다. “주소가 어떻게 되시죠?” (P213-215)
노렐리는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 손가락으로 화면을 드래그한다. “상황실 직원은 그 이후로 육 분간 대기했습니다.” 그녀가 설명을 이어간다. “구급대원들이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요.”
현장. 그들은 그 현장에서 무엇을 찾아냈을까? 제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잘 모르겠네요.” 갑자기 피로가 몰려온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나는 천천히 부엌을 둘러본다. 식기세척기 밖으로 빠져나온 식기류와 쓰레기통에 버려진 깨진 유리병들. “무슨 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폭스 박사님.” 리틀 형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아무에게도요.”
나는 그를 바라본다. “무슨 말이죠?”
그는 허벅지 부근의 바지를 끌어올리며 내 옆으로 와서 쪼그리고 앉는다. “제 생각에는” 그가 말한다. “박사님께서 마신 메를로 와인과 복용하신 약, 그리고 보고 계셨던 영화 때문에 조금 흥분하셔서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목격하신 것 같군요.”
나는 그를 노려본다.
그는 눈을 껌뻑인다.
“내가 다 지어냈다는 거예요?” 파리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형사는 거대한 머리를 흔들어댄다. “아뇨, 부인. 자극제가 너무 많았고, 전부 머리에 작용했다는 겁니다.”
입이 떡 벌어진다.
“부작용은 없는 약물입니까?” 형사가 나를 압박한다.
“있어요.” 나는 대답한다. “하지만…….”
“환각이죠, 아마?”
“모르겠어요.” 나는 알고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다.
“병원 의사 말로는 복용 중인 약물의 부작용이 환각이라던데요.”
“환각이 아니었어요. 실제로 봤다고요.” (P261-262)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있나요?”
“아직.”
“주치의에게는요?”
“할 거예요.” 에드에게도. 나중에.
이제야 조금 조용해진다. 난로 불꽃만이 조용히 잔물결을 일으킨다.
그녀를 바라본다. 불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달아오른 비나의 피부를 본다. 그냥 내게 장단을 맞춰주는 걸까? 나를 믿고 있을까? 나는 그 사실이 궁금해진다. 분명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은가? 이웃이 부인을 칼로 찌르고, 다른 여자를 데려와서 자기 부인 노릇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아들은 너무 무서워서 진실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그럼 제인은 지금 어디 있다고 생각하세요?” 비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다시 정적. (P279)
그냥 그렇게 됐어.
나는 그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가볍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 나와 내가 처한 상황이 그랬다.
그렇게 됐다.
잔을 들고 소파로 간다. 펀치가 꼬리를 앞뒤로 흔들며 쿠션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나는 그 옆에 앉아 허벅지 사이에 잔을 끼우고 고개를 젖힌다.
일단 도덕은 한쪽으로 제쳐두자. 사실, 도덕적인 문제도 아니지 않은가? 세입자와의 섹스 말이다. 믿을 수 없는 건 그 짓을 내 딸 침대에서 했다는 것이다. 에드가 알면 뭐라고 할까? 나는 몸을 움츠린다. 물론 알 길이 없겠지만 그래도. 저 이불을 불태워버리고 싶다. 작은 말이고 뭐고 간에.
집이 나를 둘러싸고 호흡하낟. 괘종시계의 가짜 심박 소리가 째깍거린다. 방 전체가 어둠 속에 잠겼다. 흐릿한 어둠. 나는 나 자신과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내 유령을 바라본다. (P337)
서재 윙백에 틀어박힌 채, 나는 머릿속 생각들을 건조기에 넣고 돌린다.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나였지만, 그 여자가 제인의 부엌에 나타났다. 나는 황급히 서재에서 빠져나갔다. 내 집에 금지구역이 생긴 셈이다.
나는 벽난로 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본다. 12시가 다 되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움직일 수 없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낼 수 있다. 체스판, 나는 체스를 잘 둔다. 집중하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림자가 카펫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다. 마치 나에게서 멀어지려는 듯이.
데이비드는 제인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제인 역시 데이비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 병의 와인을 마신 다음이라면? 데이비드가 커터를 빌려간게 언제였지? 제인이 비명을 질렀던 그날이던가? 아니었던가? 데이비드가 그걸로 제인을 위협했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한 일을 저질렀을까?
나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내 머리도 한때는 잘 정리된 문서 보관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낱장의 종이들이 이리저리 떠다닌다.
아니야. 멈춰. 이미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너무 많이 돌렸어.
그렇다면 여기서 멈추자.
나는 데이비드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까? 폭행으로 구속되어 한때 ‘살았다는’ 것. 상습범이라는 것. 커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나는 내가 목격한 것을 목격했다. 경찰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비나가 뭐라고 하든, 이선이 뭐라고 하든.
아래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몸을 일으켜, 층계참을 살금살금 지나, 서재로 간다. 러셀 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P340-341)
지금이다. 그 여자가 혼자 있는 동안. 알리스타가 끼어들 수 없는 순간. 지금이야. 피가 거꾸로 쏠린다.
지금이야.
나는 복도로 튀어나간다. 계단을 달음질친다. 생각으로 안 된다면, 행동하면 된다. 생각으로 안 되는 거라면. 생각하지 마. 생각을 해봤지만, 여태 어떤 결론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정신 이상의 정의는 말이야, 애나.” 웨즐리 박사는 곧잘 아인슈타인을 언급하며 내게 상기시키곤 했다. “같은 행동을 하고, 또 하고, 또 하는 거야. 다른 결과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행동을 개시해.
물론, 내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행동을 반복한 시간 말이다. 게다가 병원 침대에 드러누웠던 것까지 포함하면. 그 짓을 다시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어찌 봐도, 나는 미쳤다. 좋다. 나도 알 필요가 있다. 게다가 내 집이 안전한지조차 더는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P359)
고요. 절대적인 고요.
마치 자동차라는 자궁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눈앞은 흐릿했다. 하지만 순간, 나는 차로 들어오는 빛 한 줄기를 포착했다. 앞 유리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나는 소리를 들었던 방식으로 고요함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차에 깃들어 있었다.
구부리고 있던 몸을 펴서 문고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불안감을 없애려는 듯 잠시 삐걱거리던 문짝은 이내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안 돼.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기어가, 바닥에다 아픈 등을 대고 발로 문을 힘껏 밀었다. 문은 눈을 밀치며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이내 멈추었다. 나는 발뒤꿈치를 창문에 대고 타악거리며 발로 차기 시작했다. 우물쭈물거리던 문이 열리자, 차 안으로 눈더미가 쏟아졌다.
나는 낮은 포복으로 차를 빠져나갔다. 눈이 부셔서 크게 뜰 수가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먼 하늘을 밝히는 여명이 보였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새로운 세계를 탐색했다. 하얗게 물든 협곡, 멀리 내려앉은 강물, 내 발밑에 깔린 안락한 눈의 양탄자.
휘청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그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유리가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소리였다.
한 발, 또 한 발씩 눈을 헤치며, 차 앞쪽으로 다가가 찌그러진 유리 모양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수석으로 돌아와 뒷좌석으로 들어갔다. 나는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잔해로부터 끄집어냈다. 올리비아 먼저, 그다음이 에드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두 사람을 나란히 땅에 눕혔다.
그렇게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하얀 숨을 내쉬는데, 시야가 또다시 흐려졌다. 하늘이 불룩해지면서 내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눈을 꽉 감고, 내 심장박동을 들었다.
나는 목놓아 울었다. 날것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몸을 뒤집어 올리비아와 에드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꽉 끌어안는데, 눈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는 그렇게 발견되었다. (P401-403)
그런 식으로, 그런 순서로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타박상과 호흡기 손상을 치료받는 사이, ‘남편분께서는 이겨내지 못하셨습니다’라고 전하던 응급실 의사조차도.
사십 분 후 내게 다가와, ‘유감입니다만 박사님........’이라고 말했던 책임 간호사조차도. 그녀는 문장을 마치지도 못했다. 마칠 필요가 없었다.
에드의 친구들도, 그 일을 겪으면서 나와 올리비아에게 친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힘들게 깨달았다. 조의를 표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동안 간간이라도 연락해준 친구들조차 그 말 대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가버리다니, 이제 더는 우리 곁에 없구나. 간혹 무뚝뚝한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떠났어.
비나조차도 그러지 않았다. 필딩 박사조차도.
하지만 노렐리가 그 일을 해냈다. 주문을 깨고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당신 남편하고 딸은 죽었다면서요. (P442)
여기서 정지. 나는 몸을 비틀며 눈을 뜬다. 천장이 프로젝션 스크린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제인의 모습이다. 내가 제인으로 알고 있는 여자. 그녀가 부엌 창가에 서 있다. 땋은 머리가 어깨 사이에서 달랑거린다.
이 장면은 슬로모션으로 재생된다.
제인이 나를 향해 돌아서고, 나는 그녀의 환한 얼굴에 줌인한다. 반짝이는 펜던트 때문에 카메라가 노출을 조정한다. 이제 뒤로 빠져서, 화면을 넓게 가져간다. 한 손에는 물잔이 들려 있고, 다른 한 손에는 브랜디 한 잔이 들려 있다. “브랜디가 이런 상황에서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서라운드 음향으로 울려 퍼진다.
나는 그대로 화면을 멈춘다.
웨즐리라면 뭐라고 했을까?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뽑아볼까, 폭스.
질문 하나, 왜 그녀는 나에게 자신을 제인 러셀이라고 소개하는가?
...... 질문 하나에 따르는 부가 질문, 그녀가? 그 이름을 먼저 입에 올린 것은 나 아니었나? 그 이름으로 그녀를 부른 사람이?
나는 필름을 다시 앞으로 감아,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다시 개수대로 돌아간다. 재생. “건넛집에 가려던 참에.....”
그랬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그녀가 누구인가를 이미 결정해버린 순간, 내가 판을 잘못 읽은 순간.
그렇다면 질문 둘. 그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빨리감기를 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을 응시한다.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녀의 입을 바라보는데, 내가 먼저 말을 한다. “공원 건너에 사시는 분이시군요.” 내가 말한다. “당신이 제인 러셀이군요.”
그녀는 얼굴을 붉힌다. 입술이 떨어지며 그녀가 말한다.......
그런데 무슨 소리가 들린다. 화면 밖에서 나는 소리.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 (P512-513)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선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곁눈질한다. 의심하고 있다.
“정말 못 보신 거예요?”
“못 봤어. 나는 단지 너희, 나는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치는 것만 봤어. 그뿐이야. 그리고 케이티의......” 나는 가슴 앞으로 손을 내젓는다. “무언가가 꽂히고.....” 말소리가 잦아든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못했어.”
이선은 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대화를 한다면서 2층으로 갔어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케이티 셋이서요. 저는 제 방에 있었지만 다 들렸어요. 아버지가 경찰에 전화하려고 하자, 그.... 케이티가, 이선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죠. 아이 얼굴을 보고 지낼 수 있어야 한다고. 양부모라도 막을 수 없다고. 그러자 어머니가 케이티를 향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어요. 다시는 나를 못 만나게 하겠다고요. 그리고 일순간 모든 것이 조용해졌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제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그녀는....”
이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씩씩거렸다. 아이는 흐느끼며 가슴 속에서 부글대던 것을 토해냈다. 감정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그는 왼쪽을 돌아보며 앉은자리에서 움찔댄다.
“케이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녀를 찌른 거죠.” 이선은 손가락으로 제 가슴을 찌른다. “봉투칼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멈춘다. “잠깐만, 누가 그녀를 찔렀다고?”
이선이 울먹거린다. “어머니가요.”
나는 시선을 고정한다.
“다른 사람이 절 데려가도록 놔두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요.” 딸꾹질이 끼어든다. “저를 데려가버리도록 두지 않겠다고.” 이선은 몸을 늘어뜨린 채 눈썹 위에 손그늘을 드리운다. 흐느끼는 동안 아이의 어깨가 흔들린다.
어머니가요. 내가 잘못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아이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두 눈을 감는다.
“..... 그리고 케이티가 다시는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할 거라고.”
나는 이선이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를 듣는다.
얼마 후, 또 다른 흐느낌이 이어진다. 나는 제인을 생각한다. 진짜 제인, 어미 사자의 본능과도 같은 감정, 협곡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똑같은 충동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를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했어요. 다시는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할 거라고. (P548-549)
이선의 등이 천창으로 떨어진다. 유리가 마구 흔들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본다. 마치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얼굴.
봉투칼이 한쪽으로 미끄러진다. 이선은 손으로 유리를 짚은 채 몸을 일으킨다. 내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시간마저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그때, 천창이 산산조각 난다. 폭풍우에 묻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이선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설사 비명을 질렀다 해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깨져버린 천창 가장자리로 비틀비틀 기어간다. 그리고 집으로 이어지는 우물 안을 들여다본다. 빗방울이 허공에 곶힌다. 불꽃을 보는 것 같다. 그 아래 층계참에는 깨진 유리가 은하수처럼 흩어져 있다. 그리고 더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어둡다.
나는 폭풍우 속에 서 있다. 그저 멍할 뿐이다. 빗물이 발치에서 찰랑거린다. (P596)
그나저나, 그녀의 진짜 이름을 알아냈다. 이웃 사람들을 탐문 수사한 리틀 형사가 말해주었다. ‘수’였다. 실망이다.
공원은 눈밭으로 변했다. 너무 깨끗해서 반짝이기까지 한다. 그 너머에는, 제정신이 아닌 언론들이 ‘10대 살인마의 400만 달러짜리 저택!’이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집이 눈부신 하늘 아래 웅크리고 있다. 창문은 모두 닫혔다. 사실 400만 달러짜리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345만 달러는 그다지 섹시하게 들리지 않겠지.
집은 비어 있다. 비어 있은 지 몇 주가 지났다. 리틀 형사는 그날 아침 재차 방문했다. 경찰이 도착하고, 구급대원들이 시신을 치운 다음이었다. 이선의 시신, 알리스타 러셀은 체포되었다. 살인 방조죄였다. 그는 아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죄를 시인했다고 한다. 이선이 말한 그대로였다. 분명 알리스타는 무너졌을 것이다. 오히려 제인이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녀가 뭘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리틀 형사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노렐리도 마찬가지이고요.”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형사는 다음 날에도 들렀다. 기자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눌러댔다. 나는 그들을 깡그리 무시했다. 적어도 일 년 넘게, 바깥세상을 무시하는 일만큼은 잘해왔으니까.
“좀 어떠세요, 애나 폭스 씨?” 리틀이 물었다. “이분이 그 유명한 박사님이로군요.”
내 뒤를 이어 서재에서 나오는 필딩 박사를 보며 리틀이 말했다. 박사는 이편에 멍하니 서서 형사를 바라본다. 형사의 몸집에 얼이 빠진 것이 분명했다. “박사님과 함께여서 다행입니다.” 리틀 형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도 그쪽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필딩 박사가 대답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난 6주 동안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안정되었다. 일단 천창을 손봤다. 청소업체에서 나와서 집을 깨끗이 정리했다. 나는 술을 줄이고 약을 제대로 먹고 있다. 사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있다. 문신을 한, 팸이라는 이름의 기적을 행하는 카운슬러 덕분이다. 그녀는 첫 만남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고쳐주었죠.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건.”
“그거 아주 새롭군요.”
나는 데이비드에게 사과하려고 열두 번도 넘게 전화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지금 어디 있을지 궁금하다, 잘 지내고 있는지도. 나는 아래층 침대 밑에 박혀 있던 이어폰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올라와서 서랍에 보관해두었다. 혹시라도 전화가 올지 모르니까.
그리고 몇 주 전, 나는 아고라에 재가입했다.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어찌 보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환자의 치료와 안녕을 증진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줄곧 에드와 올리비아를 물리치는 중이다. 항상,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종종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나는 혼잣말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P602-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