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베티 블루> 1986년
베티 블루(Betty Blue '37.2)는 1986년에 개봉된 프랑스의 장 자끄 베넥스 감독의 영화이다. 제목에 등장하는 37.2도는 여자가 임신할 수 있는 최적의 온도이자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체온이라고 한다.
우리는 식탁을 치웠다. 나는 베티가 들고 온 두 개의 가방을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베티는 벌써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녀 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수돗물이 보였다. 베티는 반투명한 촉각과 연보라빛 심장을 가진 이상한 꽃을 머리에 떠오르게 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그런 색깔의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여자는 많지 않았다. 나는 침대 위에다 가방들을 던져 놓았다.
“이봐,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한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흠, 자긴 그렇게 생각해?”
“그래. 난 누가 옆에만 있어도 신경이 쓰이지만 그래도 베티가 오니까 기뻐.”
다음날 아침, 베티는 나보다 먼저 일어났다. 누군가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그런 건 까맣게 잊고 살았다. 함께 하는 아침 식사라는 게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더 이상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옷을 입었다. 그녀의 등뒤로 지나가면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내 커피 사발 앞에 앉았다. 베티는 눈망울을 굴리면서 수상 스키처럼 넓은 빵에다 버터를 발랐다. 나는 싱글벙글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루의 시작치고는 정말 멋진 아침이었다.
내가 말했다.
“좋아, 오늘은 일을 후다닥 해치워야겠다. 시내로 나갈 건데, 어때, 나랑 같이 갈래?”
베티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바라크를 빙 둘러보았다.
“아니, 아냐. 이것들 좀 정돈해야 할 것 같아. 응, 그러는 게 낫겠어.”
그래서 나는 그녀를 남겨 두고 나왔다. 차고로 가서 소형 트럭을 꺼냈다. 이윽고 나는 모텔 프런트 앞에다 차를 세웠다. 조르쥬가 의자에 앉아 배 위에다 신문지를 활짝 펴놓고서 졸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로 가서 세탁물 자루를 집어 들었다.
조르쥬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 자네 왔어?”
그는 자루 하나를 움켜쥐더니 하품을 하면서 나를 따라왔다. 우리는 트럭 안에다 자루를 던져 넣고 다시 모텔로 돌아왔다.
조르쥬가 말했다.
“어제 그 여자 또 봤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루 하나를 끌어당겼다.
“자넬 찾는 것 같던데. 아니, 자넬 찾던 거 아니었나?”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며 나를 따라왔다. 해가 쨍쨍 내리쬐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르쥬가 덧붙여 말했다.
“연보라색 미니스커트에 긴 흑발 머리 여자 말야.”
그때 베티가 바라크에서 나오더니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P14-15)
그녀가 말했다.
“자기,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네!”
“응, 그런 것 같아.... 괜찮아.”
“에디는 막 잠들었어. 불쌍해서 원.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더라.”
나는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다. 베티가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근데, 왜 웃어?”
“아무것도 아냐. 피곤해서 그래.”
베티는 커피를 한 잔 시켰다. 나는 석 잔을 마셨다.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이런 게 좋아. 자기와 함께 이런 곳에 있는 거 말야. 마치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는 사람들 같아.”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건지는 알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눈을 껌뻑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북빙양의 얼음 덩어리 속에 재워진 두 마리 동태처럼 서로 꼭 껴안고 자동차로 돌아왔다. (P172)
베티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베티, 우리 다른 일을 해보자. 피자나 도시 얘기는 더 이상 하지도 말고, 내 책도 잊어버리는 거야, 어때?
조용한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분이 유쾌해졌다. 그런 몇 가지 상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그럴 생각이 떠올랐더라면 그 자리에서 기운이 빠져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을 테지만, 몽상가들을 돌보시는 성인께서 보호해 주셔서 나는 우울한 생각에 젖어들지 않을 수 있었다. 베티와 내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며 원고 이야기는 더 이상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 우리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우편함 쪽으로 불안스러운 눈길을 던져 보지도 않는다.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고 보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조용히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음미해 보면서 다시 집 문지방을 넘어섰다. (P177)
내려와 보니 피아노 한가운데였다. 폭포수 밑에 놓인 검은 바위들처럼 피아노들이 거리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불빛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전혀 없었다. 피아노들은 말이 없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한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다행히 건반 옆쪽에 팔꿈치를 기댈 만한 곳이 있었다. 그곳에 팔꿈치를 괴고 손으로 턱을 받쳤다. 건반들이 한 줄로 쭉 보였다. 하품이 나왔다.
피아노 앞에 앉게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알았다. 리듬이 아주 느리고 조명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손가락 세 개로 짧은 멜로디 정도는 뽑아 낼 수 있었다. <도>음부터 내보기 시작했다. 귀를 기울이고 음을 들어 보았다. 가게 안에 퍼지는 음을 한 음도 놓치지 않고 두 눈으로 뒤쫓았다. 고요가 돌아오자, 또다시 쳐보았다. 정말 끝내 주는 피아노였다. 이 피아노는 내 연주 실력이 형편없음에도 자신의 속깊은 마음을 다 내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제가 가진 최상의 것을 나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제 길>을 찾아낸 피아노를 만난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P178)
소파는 케케묵은 것이었다. 무게가 적어도 3톤은 나갔다. 양탄자를 둘둘 말아서 치워야 했다. 소파의 바퀴가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방안을 온통 질질 끌었다. 이런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있었다. 하지만 그럴 가치가 있는 여자와 살고 보면 이것저것 너무 딱딱거리지 않고 해줄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게 내가 찬장을 옮겨 놓으면서 생각한 거였다. 베티의 눈에 이번에는 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고 비쳤기 때문이다. 나는 겉으로 투덜거리는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잠자리에 들러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가구 두세 개쯤이야 얼마든지 옮겨 줄 수 있었다. 사실 베티를 위해서라면 방법만 안다면 산이라도 옮겨 놓아 주었을 것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도 했고, 때로는 그렇지 않을까 봐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를 감당할 능력이 되는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다. 여자들은 좀 이상할 때도 있고 기분이 비틀리면 더없이 지겨운 존재라는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베티를 위해서 내가 충분히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 반성해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생각은 주로 저녁나절에 내가 먼저 잠자리에 들었을 때, 그녀가 욕실 선반에서 크림을 집어 드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생기곤 했다. 어쨌든 이런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건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노력을 해야지 그냥 놓아두고 구경만 하고 있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둘 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솔직히 결국 나중에는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 휘청거렸다. 아직 기운을 다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짐짓 만족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러고 나니까 분위기가 확 달라졌네.”
베티는 내 옆에 앉아 무릎에 턱을 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음, 글쎄...... 다른 것들도 손을 봐야 할까 봐.”
내가 물었다.
“그럼 내 엉덩이는 어쩌고?”
“아니 뭐, 나도 지쳤어. 그냥 한번 해본 소리야.” (P188-189)
베티가 완전히 새파래지기 전에 팔을 붙잡았지만 베티는 이내 나를 떠밀어 냈다. 꼭두새벽에 시작된 이 일이 도대체 한밤중인데도 아직 끝장이 안 나고 계속되고 있었다. 지금은 한겨울이었다. 오늘 하루는 값을 아주 비싸게 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한푼도 더 내놓고 싶지 않았다. 위험할 건 없었다. 그래서 다짜고짜로 그녀의 점퍼 깃을 움켜쥐었다. 베티는 아직 항복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창고의 칸막이 벽에 베티를 가두어 놓고 콧물을 훌쩍거렸다. 이 밤은 나를 미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체면이라도 건지려면 이쯤에 그만두는 게 좋아!”
이 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베티는 내 말을 듣지 않고 발버둥을 쳤지만, 나는 구불구불 주름진 함석에다 그녀를 밀어 붙였다. 더 이상은 기운이 없었다. 설령 그러고 싶었다 하더라도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베티의 내면 속에 있는 무엇인가도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베티는 울부짖기 시작하더니 함석판에다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창고가 지옥의 문에 달린 종소리처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런 상태의 베티를 보니 나는 정말로 맥이 탁 풀렸다. 베티는 입이 비틀렸고 내가 전혀 낯선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 얼굴을 뜯어 보았다. 그런 베티를 더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광기도, 그녀의 비명 소리도, 그녀가 손톱 발톱 다 드러내고서 신경발작을 일으키면서 내 얼을 빼놓고 있는 방식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정신이 돌아오게 하려고 베티의 따귀를 때렸다.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무슨 신비적인 광기에 휩싸여 마귀를 쫓아낼 임무라도 맡은 사람처럼 손으로 힘껏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 순간 경찰차 한 대가 마치 비행 접시처럼 내 옆에 나타났다. 나는 베티를 놓아주었다. 경찰차 문들이 열리는 동안 베티가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경찰차는 아이들 장난감처럼 파란 빛을 내고 있었다. 젊은 경찰관 한 명이 자동차에서 땅바닥으로 내리면서 충격을 덜 받기 위해 재주넘기를 하더니 두 다리를 딛고 손끝으로는 내 쪽을 향해 권총을 겨누는 게 보였다. 나이 든 경찰관 한 명이 다른 문으로 정상적으로 내렸다. 그는 긴 곤봉 하나를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여기, 무슨 일이오?”
나는 침을 삼키기도 무지하게 힘들었다.
“이 사람이 속이 좀 불편해서요. 내가 때리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신경 발작을 일으킬까 봐서 그랬어요. 믿기 어렵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나이 든 사람이 웃으면서 내 어깨에다 곤봉을 얹었다.
“왜 믿기 어렵다는 거요?”
나는 코를 훌쩍거렸다. 베티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한숨을 토해냈다.
“좀 나아지는 것 같군요. 그만 가봐도 되겠어요.” (P220-221)
나는 서두를 것 없이 가게로 돌아왔다. 익힌 사과 한 조각이 눈물처럼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길가 한가운데에 걸음을 멈추고 숨을 들이마셨다. 다행히 이 세상에서는 천국을 거의 거저로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순간 덕분에 상황은 원래의 제 차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차원이란 무엇일까? 피아노 두세 대를 팔아치우려고 몸부림치는 건 분명 아닐 것이다. 그건 하찮은 게임에 불과했다. 그것 때문에 내 인생이 쑥대밭이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봄날 아침처럼 달콤한 사과 파이 맛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피아노 파는 일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아노에 너무 정신이 빠져 있었다. 광기라는 건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정신은 늘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설령 오늘 피아노를 한 대도 못 판다고 하더라도 화병에 걸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초연한 사람처럼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 대쯤 팔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문을 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베티가 계산대 안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종잇장 하나를 흔들어댔다.
내가 말했다.
“이 사과 파이 좀 먹어 봐!”
베티는 미소치고 진짜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천국에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얼굴이 환하게 퍼져 있었다. 누가 봤다면 나한테서 결혼 신청이라도 받은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글쎄, 너무 환상을 품으면 안 될 것 같아. 요샌 장사가 정말 안 된대. 전반적으로 다 그렇다던데 뭘. 오늘 한 대도 못 판대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대. 세계 경제가 그렇다는데 난들 어쩌겠어.”
베티가 실실 웃었다.
“해해해!”
“나 같으면 웃기까지는 안 하겠다. 상황을 직시할 뿐이지.”
베티가 종잇장을 부채처럼 흔들어대는 모습에 나는 호기심이 이끌렸다. 하늘이 파랗게 개이기는 했어도 아직은 겨울이라 그렇게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이 굳어졌다. 방금 발바닥에 못이라도 밟은 사람처럼 핏기가 가셨다. (P236-237)
가게 문을 닫는 데에는 유감이 없었다. 아직 시간이 좀 이르기는 했지만 무리하게 행운을 잡아늘이고 싶지도 않았다. 피아노 한 대를 팔았으면 이미 행복하다고 생각할 줄도 알아야 했다. 우리는 해가 비치는 쪽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베티는 어떻게 해서 피아노를 팔게 됐는지 얘기해 줬다. 나는 관심있는 척하며 열심히 들어 주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약이 올라서 그녀의 이야기에 별로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삼키게 될 고기 단자 생각이나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내 옆에서 연신 요란하게 움직거리고 있는 이 여자는 발광(發光)성 물고기떼를 생각나게 했다.
봅의 가게 앞을 막 지나가는 참인데, 그때 봅이 달려나왔다. 시선이 멍하고 정신이 나가 있었다.
내가 말을 건넸다.
“헬로우, 봅.”
그의 목울대가 괴물의 관절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안으로 쑥 밀어 넣어 주고 싶을 정도로.
“큰일났어! 아르쉬가 욕실에 갇혔어! 갇혀서 꼼짝못하고 있어! 큰일이야, 벼락맞을 자식 같으니라고! 창문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맙소사! 너무 높아서....”
내가 말했다.
“아르쉬가 욕실에 갇혔단 말야?”
“그렇다니까. 10분 전부터 안니가 문에다 대고 그 자식한테 말을 하고 있는데, 대답을 안 해. 지금 찔찔 짜고 있어. 거기다가 수도꼭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단 말야. 빌어먹을, 편안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참이었는데. 대체 애새끼는 뭐하러 낳았을까?”
나는 봅을 따라 아파트 둘레의 정원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동안 베티는 아파트로 올라갔다. 풀밭에는 큰 사다리가 누워 있었다. 나는 봅을 도와 사다리를 들어올리고 벽에다 기대 놓았다. 하늘은 환했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봅이 사다리 기둥을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처음 가로대 두 개를 딛고 올라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꿍얼거렸다.
“난 못 해. 정말이지, 난 못 해. 난 정말로 미쳐 버리고 말 거야.”
“왜 그래?”
“자넨 모르겠지만. 난 그 망할 고소 공포증이 있단 말야. 도저히,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 꼭 단두대에 올라가는 기분이야.” (P238-239)
세면대가 막혀서 물이 사방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처리하고 나서 문을 열었다. 품에 아기를 안은 안니가 문 앞에 있었다. 꽤 괜찮게 빠진 여자였지만, 입이 약간 물렁하고 눈길에 사나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타입이었다.
내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유리 조각 조심해야 할 거예요.”
“아! 도대체, 아르쉬발드, 도대체 너 왜 이렇게 속을 썩이니?”
바로 그 순간 봅이 숨이 턱에 닿아서 헐레벌떡 들어왔다. 바닥의 물 웅덩이들을 쳐다보더니, 이윽고 그의 눈이 내게로 올라왔다.
“세 살짜리 애새끼가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자넨 상상도 못 할 거야. 봐, 어제만 해도, 냉장고 안에 갇힐 뻔했다니까!”
갓난아기가 앙 울음을 터뜨리더니, 조그만 보랏빛 얼굴을 응축시키면서 보기 고약하게 찡그리기 시작했다. 안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이런, 벌써 시간이 됐네.”
그녀가 뒤로 돌아서면서 원피스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봅이 말했다.
“이것 보라고. 그럼 걸레질은 누구 차지가 되지, 이젠? 나야. 난 애물단지가 저질러 놓는 무지막지한 짓거리들을 치다꺼리하느라고 하루 온종일을 다 보낸단 말이야.”
아르쉬는 제 발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물 속에서 첨벙첨벙거렸다. 꼬맹이는 제 아빠가 하는 말에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었다. 베티가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아줌마랑 가서 책 읽자.” (P240)
“여보, 가서 애를 재워야겠어.”
내가 물었다.
“봅, 뭐 안주거리 좀 없을까?”
“있고말고. 가게에 가서 뭐든 원하는 대로 가져 와.”
안니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눈에다 힘을 잔뜩 주어 그녀에게 묘석처럼 차가운 시선을 던져 주고는 1층으로 내려왔다. 꼬셔서 잘 넘어가는 남자로 취급받는 건 딱 질색이었다. 살다 보니 나는 너무 쉬운 일은 회피해 버려야 곤경에 잘 빠지지 않는다는 걸 종종 깨닫곤 했다. 내게도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을 잘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이 괴롭게 느껴졌던 적은 아직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내 흥미를 이끈 유일한 일이었다.
가게는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안개 속처럼 잘 안 보이는 가게 안에서 안주거리들을 찾느라고 잠시 지체했다. 볶은 아몬드, 이거야말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주전부리 거리였다. 아몬드가 아래쪽에 있었으므로, 나는 웅크리고 앉아 꺼내서는 한 꾸러미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느라고 정신이 약간 딴 데에 쏠려 있었던지, 그녀가 오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냥 뺨에 가벼운 바람기를 느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그녀가 내 목덜미를 붙잡더니 내 얼굴을 자기 사타구니에다 처넣었다. 나는 아몬드를 놓쳐 버렸다. 후다닥 빠져 나와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안니는 일종의 정신 착란에서 나오는 최면 상태에 빠진 듯이 보였다. 불타는 듯 뜨거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떨고 있었다. 내가 미처 적절한 대응책을 찾아내기도 전에, 안니는 허겁지겁 원피스에서 젖가슴을 꺼내고서 내게 바싹 엉겨 붙었다.
그녀가 말했다.
“어서요! 오, 하느님, 어서 서둘러요.”
안니는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한쪽 다리를 집어 넣었다. 그녀의 그것이 내 넓적다리에 와서 부딪쳐 비트적거렸다. 나는 빠져 나왔다.
안니는 마치 방금 1천 미터 달리기라도 하고 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안니의 유방은 어슴푸레한 햇빛 속에서 보니 훨씬 더 커보였다. 살갗이 외설적으로 하얗게 보였고 유두는 내 쪽으로 겨누어져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들어 보이고서 말을 시작했다.
“안니.........”
그러나 안니는 잽싸게 내 손목을 낚아채더니 자기 젖가슴에다 내 손을 갖다 대면서 또다시 내게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고 비벼댔다. 이번에는 나도 그녀를 진열대 쪽으로 힘껏 떠밀어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미안해요.”
욕망의 파도가 어뢰처럼 그녀의 배(腹)에서 빠져 나가 가게에다 불을 붙여 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P242-243)
이따금씩 우리는 처음에는 그냥 단순히 조그만 균열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때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때때로 인간의 고독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소름이라는 것이 돋는다. 이빨을 덜덜 떨리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안니의 두 팔에 감자 튀김 꾸러미를 하나 안겨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올라왔다. 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두 잔에 술을 따랐다. 나는 금붕어들에게 건배를 하며 술잔을 비웠다.
나중엔 안니와 봅이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가라고 우리를 붙잡았다. 끈질기게 고집을 부리며 붙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베티에게 말했다. 네가 결정해. 네가 중국 음식 먹으로 가자고 했잖아. 베티가 대답했다. 좋아, 난 찬성이야.
봅이 덧붙여 말했다.
“특히 이젠 애새끼들이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놀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먹을 걸 좀 가지러 봅과 함께 가게로 다시 내려갔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식품이 피아노보다 월등히 실질적이고 훨씬 안심이 되는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효 기간이 앞으로 5년이라는, 마늘 향내 나는 크루통까지 있었다. 건조된 생선 수프에 넣으면 딱 좋은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포도주 값은 내가 낼게.” (P245)
이런 산책은 삶을 충만하게 채워 줄 수 있으며, 우리가 가진 어떤 야심도 허무로 환원시켜 버린다. 감전된 기분이 이런 것일까? 내 삶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산책이었다. 하지만 나는 부추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별똥별까지 한 개 보였다. 하지만 소원을 빌 수가 없었다. 아니, 소원이 하나 있었다. 오, 하느님, 천국이 있다면 이것과 비슷하게 해주소서. 힘이 나고 기분이 경쾌하니 정말 좋았다. 열여섯 살 때의 일이 생각났다. 나는 데이트하러 나갈 때면 재미로 통조림 캔들을 죽 세워 놓고 던져 맞추곤 했다. 그때는 아직 한번도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명랑한 소년이었다.
우리는 거리 모퉁이의 고무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는 쓰레기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뭇잎도 많고 모양이 아직 훌륭한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나무가 메말라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고무나무를 살려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고무나무는 군도 같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끊어져 가는 불쌍한 야자나무 같았다.
내가 물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
“어머, 이것 좀 봐, 나뭇잎이 돋아나오려고 해!”
“근데 이 늙은 고무나무를 보고 왜 이렇게 내 마음이 싱숭생숭할까.”
“아래층의 피아노들과 함께 놓으면 되겠어.”
나는 그 불행한 나무를 잡아 뽑아서 옆구리에 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스코트처럼 나뭇잎들이 부딪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뭇잎은 운모(雲母)처럼 반짝거렸고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춤을 추었다. 이 고무나무는 감사를 할 줄 아는 나무인 것 같았다. 나는 방금 이 나무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부여한 셈이었다.
나는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워 미소를 머금고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굉장한 하루였어!”
“응.”
“넌 어떻게 생각하니? 가게 문을 연 첫날에 우린 피아노를 팔았어. 이거야말로 행운의 징조가 아니겠니?”
“넘겨짚지 말아.”
“난 넘겨짚지 않아.”
“자긴 마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그럼 넌, 피아노 판 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 안 하니?”
베티가 자기 스웨터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좋은 일이지.” (P248-249)
“자기는 뭘 모르는가 본데, 남자들만 불을 피울 줄 아는 게 아냐.”
“그건 그래. 하지만 대개 불끄는 법은 남자들만이 알고 있지.”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쪽 뺨을 바위에 다 대고 길게 쭉 뻗고 누웠다. 어둠 속에서 가는 나무토막들이 똑똑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졌다. 모기 소리도 들렸다. 베티가 불을 놓자 왠지는 모르지만 다시 힘이 솟아났다. 몸을 일으켰다. 입 안이 깔깔했다. (P258)
“.... 우린 머지않아 과녁이 끝없이 돌고 돈다는 걸 깨닫게 되지. 그때부터 우린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거야. 삶에 목표를 정해 놓는다는 건 스스로를 사슬에 얽어매는 거나 다름없어.”
두 번째 물고기가 걸렸다. 에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어렸을 때 여긴 물보다도 물고기가 더 많았는데.”
내가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난 길이 환하게 불밝혀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정대로 우리는 점심때쯤 철수했다. 낚시하러 와서 나는 물고기를 낚을 노력도 하지 않았다. 사실 별로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다. 우리는 재수없이 걸려든 물고기 세 마리를 들고 봅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정원에 있었다. 세 여자가 토스트에 속을 끼워 넣고 있는 중이었다. 봅은 여자들이 얘기를 나누면서 토스트 만드는 걸 보고 있었다. 나는 울타리를 펄쩍 뛰어넘은 다음 말했다.
“문제가 생겼어. 기적이 일어난다면 또 모르지만, 물고기 세 마리로 어떻게 삼사십 명을 먹여 살려야 할지 모르겠어.” (P322)
어느 누가 내 기분을 좀 낫게 만들어 줄 만한 사람으로 보이는가? 우스운 일이다. 안 그런가? 예쁜 여자들이 몇몇 보였지만 나는 그 여자들을 추하다고 생각했고, 남자들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뭐 내가 너무 단순화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하게 이러쿵저러쿵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그늘 속으로 뒷걸음쳐 들어가 있고 싶었다. 나는 슬프고 차가운 세계를 원했다. 희망도 없고, 바닥도 없고, 빛도 없는 세계를, 사실이 그랬다.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기분이 최악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모든 게 어딘가로 빨려들어가 사라져 버렸으면 싶을 때가 있다. 머리에 하늘만 이고 있었으면 싶어질 때가 있다. 내 기분 상태가 그랬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도 싫었으므로 나는 괜히 바쁜 사람처럼 사방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후 베티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물었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어? 한참 전부터 자기를 보고 있었어.”
내가 농을 쳤다.
“네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 어떤지 보고 싶어서 그랬지. 퍼렇게 멍든 내 눈탱이를 보고 여자들이 날 따돌리잖아.”
베티가 내게 웃어 보였다. 나는 지옥의 문 앞까지 가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참인데 베티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P324)
또 수영을 했고, 또 수영을 했다. 그러자 배가 고팠다. 샤워를 하려면 또 돈을 내야 했다. 주차장에서 자동차를 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래도 돈, 저래도 돈이 필요했다. 나중엔 내 두 손에는 잔돈으로 받은 동전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내 그림자가 쫓아오는 것보다도 더 빨리 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이 동네는 흡사 거대한 슬롯 머신과 같았다. 하지만 아직 덤으로 주어지는 무료 게임은 못 해봤다.
우리는 가짜 밀짚으로 만든 파라솔 아래의 테라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맞은편 길가에는 스무 명 정도의 젊은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 여자들은 각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한 명씩 데리고 있었다. 밖에서 일을 하는 아빠와 집에서 혹은 밖에서 심심해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엄마를 가진 그런 금발 머리 꼬마들 타입이었다. 레스토랑 종업원이 우리에게 설명하기를, 그 앙증맞은 꼬마들에게 오디션을 받게 하려고 엄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귀여운 코흘리개들이 <미래를 건설합시다>라는 문구로 보험 회사 광고를 촬영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으로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분히 웃기는 아이디어라고도 생각되었다. 기쁨과 건강과 돈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런 꼬마들을 보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안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쎄, 어떤 의미에서는 말이다. (P365)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저절로 술술 써졌다. 하지만 베티가 알게 될까 봐 매우 조심스럽게 작업을 했다. 대개는 밤에 글을 썼다. 베티가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낌새가 보일라치면 부리나케 매트리스 속에다 필기를 숨겼다. 그녀에게 헛된 망상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더욱이 나는 50년 전의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건 차라리 핸디캡이었다. 결국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의 골치를 썩이려고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감수성이 예민한 남자였다. 내 골치를 썩이는 건 오히려 그들이었다.
여름이 깊어 감에 따라 피아노 판매도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민하지는 않았다. 나는 일찌감치 가게 문을 닫곤 했다. 분위기가 갖추어지면 저녁때 뭐라고 글을 쓸지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함께 산책을 나가곤 했다. 돈은 아직도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베티는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는 일에도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하기야 그 나머지 일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세금을 낸다든지 생활 필수품을 사들이는 것 외에 우리에게는 돈이라는 게 별로 쓸모가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피아노를 팔아야만 하는 형편은 아니었다! 돈이란 물건은 참으로 희한하고 요상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그러니까,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아등바등할 필요 없이 나는 밤 12시나 새벽 1시가 되면 수첩을 꺼내고서 꼼짝 않고 새벽까지 글쓰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잠은 오전에 좀 잤고 때로는 오후에 몇 시간 눈을 붙이기도 했다. 글쓰는 작업은 천천히 진전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고압 건전지처럼 힘이 마구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새벽이 오면 간밤의 몇 시간에 대한 마지막 흔적들을 지워 버리곤 했다. 쓰레기통에다 연기가 따끔따끔 눈을 찌르는 담배와 맥주 깡통들을 던져 넣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이면 언제나 베티를 바라보곤 했다. 지금까지 까맣게 채운 종잇장들이 과연 베티에게 가치가 있는 것일까 어떨까 자문해 보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해보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작가로서 상당히 높은 위치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그럼으로써 스스로 겸허해지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그 시기 동안 내 두뇌는 하루 24시간 내내 회전했던 것 같다. 나는 작업을 서둘러야, 몹시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책 한 권을 쓰는 데에는 터무니없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생각이 들때면 나는 미칠 듯한 불안감에 숨이 막히곤 했다. 이 일을 좀더 일찍 시작하지 않은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고, 이 감색 수첩을 열기까지 그렇게 많은 세월을 기다려 온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우라질, 나도 글쓰는 네 모습을 보고 싶었어. 넌 뭐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니?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줄 알았니? 실제로는 몇 달간이나 침대에 누워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이리저리 뒤척이지 않았나 말이다. 나는 빛 한 줄기도 못 본 채 삭막한 회색빛 사막을 가로지른 거야. 헐벗은 사람처럼 광막한 사막을 떠돌아다녔어. 그런데 넌 그게 재미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P382-383)
여자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그러더니 여자는 그렇게 나를 의자에다 앉혀 놓은 채로 10분간은 족히 고문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어나서 이 사무실에 등을 돌리고 나가 버린다는 것은 베티에게 가는 가장 어려운 길이었다. 한참 후에 나는 눈을 감으면서 여자에게 대답했다. 결국은 모든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여자에게 약속을 해야 했다. 이런저런 온갖 잡다한 번호들을 대다보니 나는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그런 게 존재하는지 어떤지조차 모르고 살았던 자질구레한 내용들까지 대야 했다. 여자는 내 약점을 이용해, 볼펜을 입에다 물고 돌리더니 음험하게 이렇게 내뱉었다. 음, 그런데 말이에요, 같이 산다는 그 여자 말인데요, 당신이 그 여자를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베티, 네 혈액형이라든지, 네가 태어난 촌락 이름이라든지, 네가 어린 시절에 앓았던 잡다한 질병들과, 네 어머니 이름과, 네가 항생제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따위를 내가 알고 있었어야 했을까? 이 여자 말이 정말로 옳을까? 나는 너를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을까? 나는 씁쓸하게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해보았다. 이윽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반쯤 접고 굽신거리면서, 딱딱거려서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 뒷걸음을 쳐서 나왔다. 문을 닫을 때에는 여자에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런데 병실이 몇 호지요?”
“2층요. 7호실이에요.” (P390-391)
술을 마시는 동안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싸움이 훨씬 더 맹렬하게 개시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나한테는 오히려 더 편안했다. 나는 식탁 밑으로 두 다리를 뻗고서 두 손을 배 위에다 얹고 깍지꼈다. 사실 나는 지금 무슨 난리가 나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었다. 주위에서 뭔가가 요란하게 움직인다는 게 느껴졌다.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고 물건들이 바닥에 나뒹굴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내 슬픔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작은 비스킷처럼 바스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던 것에 축복이라도 하고 싶었다. 불빛과 인간 존재와 무더위와 시끄러운 소음의 칵테일이 그것이었다. 나는 조심조심 술잔을 가득 채운 다음, 앉은 자리에서 잔뜩 몸을 쪼그렸다. 이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남자들과 여자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갈가리 찢고 있었다. 작가들은 사랑도 없고, 광기도 없고, 정열도 없는 데다가, 특히 문체까지 전혀 없는 소설들을 배설하듯이 마구 써갈겨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놈들은 우리를 저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내 문학적인 고찰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창 밖으로 달이 보였다. 위풍당당한 적갈색의 만월이었다. 차츰차츰 미모사 줄기 같은 팔로 자신의 한쪽 눈을 상해한 나의 작은 새가 생각났다. 그때서야 형형색색의 사발들이 방안에서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닌다는 것을 깨달았다. (P395)
“지금 선생님의 원고를 갖고 있는데요. 다음번 우편물에 계약서를 보내겠습니다.”
나는 식탁 한쪽 구석에 엉덩이를 걸쳤다.
내가 말했다.
“좋아요, 인세는 12퍼센트 주십시오.”
“10퍼센트요.”
“그럽시다.”
“선생님의 책은 제 마음에 꼭 들었습니다. 머지않아 곧 인쇄소로 넘어갈 겁니다.”
내가 말했다.
“그래요, 서둘러 주십시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좋습니다. 곧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에, 하지만 앞으로 며칠간은 제가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급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모든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지금 일이 척척 진행되고 있습니다.”
“잘됐군요.”
“좋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현재 새로 쓰고 계신 작품이 또 있습니까?”
“예,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잘되시기를 빕니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그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근데, 잠깐만요. 죄송합니다만, 아까 성함이 뭐라고 하셨죠?”
그는 자기 이름을 반복해 말해 줬다. 다행이었다. 하도 느닷없이 당한 일이라 어느새 그의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나가 있었다.
냉장고에서 소시지를 하나 꺼내서 녹였다. 가스불 위에다 물 냄비를 얹어 놓았다. 맥주를 들고 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내 평생 가장 미친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경질적인 웃음이.
병원에 일찍 도착했다. 아직 면회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집에서 너무 일찍 출발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빨리 달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집 안에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베티가 그토록 고대하던 소식을 마침내 베티에게 가져 왔다. 이 소식을 들으면 베티는 두 다리로 펄쩍 뛰어 일어나지 않을까? 남아 있는 한쪽 눈으로 내게 윙크를 해주지 않을까? 나는 긴급 사태라도 난 것처럼 화장실로 곧장 달려가 그곳에서 프런트의 남자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는 반쯤 잠이 든 것 같았다. 층계는 비어 있었다. 나는 층계를 살금살금 올라갔다. (P406-407)
여하튼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죽어 가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체중기 위에 올라섰다. 몸무게가 3킬로그램밖에 안 줄어 있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가끔씩 손을 물어뜯으며 자신을 되는 대로 내박쳐 둔다고 해서 사람이 말라 죽어 버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혈색까지도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세상을 떠날 때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베티는 그 반대였다. 내게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갔다. 모든 것을, 그러고 보면 때때로 그녀가 내 곁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요새는 여자가 쓴 책을 보면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남자를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는지 하는 이야기다. 다행히 나 같은 작가가 있어서 남녀간의 전쟁을 피하고 있다. 나는 여자들이 모두가 그렇게 돼먹지 못한 건 아니며, 그런 경향은 지나가고 말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사방에다 외치고 있다. 나는 베티야말로 내게 모든 것을 준 여자라고 크게 외치고 싶었다. 내 생애에 베티가 없었더라면 내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얼마든지 기꺼이 말할 수 있었다. 아무렴. 얼마든지 되풀이해 말하고 싶었다. 한 여자가 내게 모든 것을 주었다고..... 그럴 때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나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랫소리가 생각났다. 그럴 때면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며칠을 그대로 지냈다. 봅과 안니에게는 사정을 설명했다. 나를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봅이 술병을 들고 찾아오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문을 열어 주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비탈길을 신속히 올라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남들이 나를 조용히 내버려두어야 했다. 전화기는 코드를 뽑아 버렸고 텔레비전은 켜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판사로부터 내 책의 교정쇄를 받았다. 그걸 받고 나니 기분이 달라졌다. 이것은 내 일일 뿐만 아니라 베티의 일이기도 했다. (P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