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2005년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는 리처드 스타크(Richard Stark)라는 필명으로 쓴 《파커 시리즈》가 유명하다. 『액스』는 1997년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베스트셀러로, 2005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이 소설을 토대로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를 연출했다. 박찬욱 감독의 한국 영화 <어쩔 수가 없다>(2025)도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한다.
오늘이 바로 운명의 날이다. 사흘 전. 그러니까 지난 월요일에 나는 마저리에게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의 작은 공장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고 얘기해두었다. 금요일 오전에 면접이 있으니 목요일에 올버니로 가서 늦은 오후 비행기를 타고 해리스버그로 향하게 될 거라고. 그곳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금요일 아침에 공장으로 갔다가 금요일 오후에 다시 올버니로 돌아오게 될 것 같다고. 그러자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펜실베이니아로 이사를 가게 되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면 다행이게?”
내가 말했다.
마저리는 아직도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태평한 마저리를 탓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건 이 문제를 철저히 비밀에 부쳐온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하지만 가끔 외로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서둘러 이 위기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살인이라도 능히 해내야 한다. (P8)
나는 일을 벌이기 전에 확실히 해두고 싶다. 이 남자는 표적의 동생이거나 사촌일 수도 있으니까.
“하버트 에벌리?”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난......”
날 모르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말을 대신 맺어준다. 맞아. 당신은 날 모를 거야. 앞으로도 알 기회가 없을 거고. 나 또한 당신을 알 기회가 없을 거야. 왜냐하면 당신을 알아버리면 때가 왔을 때 당신을 죽일 수 없게 되거든. 미안하지만 난 반드시 당신을 죽여야 해. 당신이 아니면 내가 죽게 되거든. 이 방법을 내가 먼저 떠올렸으니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
나는 레인코트 밑에서 루거를 꺼내 열린 유리창 밖으로 불쑥 내민다.
“이거 보여?”
그가 총을 빤히 쳐다본다. 보나마나 많은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이 총 살래요? 오다가 찾았는데 당신 총입니까? 마지막 순간에는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게 될지 모르겠다. 그가 총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방아쇠를 당긴다. 루거는 튀어 오르고, 그의 안경 왼쪽 렌즈는 산산이 부서진다. 그의 왼쪽 눈에는 수직 갱도 같은 구멍이 뻥 뚫린다. 그 구멍은 지구의 중심까지 이어질 듯이 깊다.
그가 뒤로 넘어간다. 법석 부리지 않고 그냥 반듯하게 쓰러진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우편물이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P22)
미쳐서 나가지 마. 그냥 나가.
지난 1~2년간 대량 인원 삭감에 대한 소문이 돌았었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소수의 직원들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전 준비에 불과했고,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95년 10월, 급료 지불 수표와 함께 노란색 용지가 도착했을 때 나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한동안은 비참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게 사무적이고 직업적으로 느껴졌다. 버려진 게 아니라 양육되고 있다는 느낌. 하지만 나는 버려진 게 틀림없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할시온 밀스의 벨리알 밀에서 일하는 직원 수는 2,100명에서 1,575명으로 줄었다. 무려 4분의 1이 해고된 것이다. 우리 제품 라인은 완전히 접혔다. 11번 기계는 고철로 전락해 팔렸고, 우리 작업은 캐나다의 계열사가 고스란히 흡수해버렸다. 내게는 5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안에 새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봉급은 크리스마스 시즌까지는 정상적으로 지급됐다. 고마운 사람들. (P24-25)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 나는 한 특정 종이, 그리고 한 특정 제조 방법만을 전문으로 했다. 내가 잘 알았던 분야이며 아직까지도 자신 있는 분야다. 하지만 그 일을 처음 시작했던 25년 전, 내가 그린 밸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했을 때, 그러니까 할시온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산업 용지를 다뤘다. 나는 ‘종이’라는 복잡한 주제의 전문가였다.
사람들은 종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여기서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사실 종이는 전혀 따분하지 않다. 그것이 만들어지는 방식, 그것의 수백만 가지 용도.....
우리는 종이를 먹기까지 한다. 특수 용지 판지가 대량 생산되는 아이스크림의 결합제로 쓰인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요지는 종이에 대해서만큼은 나만 한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생소한 특제품에 대한 약간의 훈련만 거치면 제지 업계의 어떤 관리자도 가뿐히 맡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널려 있고, 회사들은 교육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을 뽑아 자신들의 조건에 맞게끔 교육시키기보다는 이미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을 원한다. 이미 다른 곳에서 관련 교육을 받은 사람. 적은 보수와 혜택에도 맡겨진 일이 의욕을 불태울 사람.
나는 광고들을 유심히 살핀 후 이력서를 보내보았다. 아무 답이 없었다. 질문만 늘어갈 뿐이었다. 내가 희망 봉급을 너무 높게 불렀나? 이력서에 세련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나? 뭔가 중요한 사실을 빼놓진 않았나?
여기 내 이력서가 있다. 담백함과 진실과 투명함을 테마로 삼았다. 나이를 속이지도 않았고, 내 기술과 경력을 과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 활동 내역만큼은 꼼꼼하게 기록해놓았다. 왠지 내 다재다능함을 숨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아님 말고. (P26-27)
원래 컴퓨터는 가족 공용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빌리 전용이 돼버렸다. 이제 컴퓨터는 녀석의 방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 1994년, 나는 가족에게 컴퓨터를 선물했었다. 구조조정으로 해고당하기 1년 전, 경제적으로 안정권에 들어 있었을 때. 그때는 지출이 많았다. 주택 융자와 세금과 학자금과 식비와 자동차 연료비와 옷 구입비. 더 이상은 힘들게 됐지만 당시에는 영화도 꽤 많이 빌려 봤었다. 그런 지출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출만큼이나 수입도 괜찮았다. 그런 지출을 전부 감당하고도 남았음은 물론이다. 돈의 들락거림은 건강한 몸의 들숨과 날숨처럼 환상의 궁합을 자랑했었다. 가족을 위해 컴퓨터를 구입하는 건 사치였지만 터무니없는 사치는 아니었다.
찰스 디킨스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이렇게 말했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19파운드 6펜스면 행복한 사람이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20파운드 6펜스면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1년 소득이 제로까지 떨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 걸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나? (P35)
할시온에서 인계 기간을 보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했던 일 중의 하나는 실직하는 방법에 대한 강연을 듣는 것이었다. 우리의 조언자들 중 한 명은 단호하지만 상냥한 여자였다. 그녀가 맡은 일은 우리에게 가혹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 격려 연설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었다. “몇 년 전 항공우주 산업에 침체기가 찾아들었을 때 재능 있는 기술자들이 여럿 해고됐습니다. 시애틀의 기술자 다섯 명은 좌절하지 않고 아이디어를 모아 혁신적이고 시장성 높은 게임을 개발해냈습니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프로젝트였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두 번째 차를 팔아 돈을 마련해보려 했지만 극심한 불황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친척, 친구, 그리고 전 직장 동료들에게까지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가까스로 독일의 벤처 투자가들의 주목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죠. 그 자본가들은 기술자들의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했고, 혼쾌히 투자 결정을 내렸습니다. 양측이 직접 만나 계약을 체결하면 끝날 일이었어요. 뮌헨의 투자자 세 명이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왔고, 시애틀의 기술자들도 들뜬 마음으로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뉴욕의 한 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났고, 미팅은 화기애애하게 진행됐습니다. 기술자들은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릴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한 투자자가 물었습니다. ‘스케줄을 확실히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투자를 하면 그 돈으로 가장 먼저 뭘 하겠습니까?’ 그러자 기술자 중 하나가 대답했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들 자신에게 체불 임금을 챙겨줄 겁니다.’ 미팅은 그렇게 끝나버렸습니다. 기술자들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됐죠. 멍한 기분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아남고, 성공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이겁니다. 아무도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 아무도 우리에게 빚을지지 않았다는 것. 일자리와 봉급과 중산층의 멋진 삶은 권리가 아닌,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전리품입니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죠. ‘그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은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당신에겐 기술과 의욕, 두뇌, 재능, 그리고 신의 선물한 개성이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이용해 그 전리품들을 쟁취할 것이냐는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 카운슬러의 설명이었다.
나는 그 메시지를 가슴에 새겼다. 그녀도 내가 이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조언을 듣지 못한 이들이 작성해 보낸 이력서들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그들은 카운슬러가 언급한 무지몽매한 기술자들과 다르지 않다. 세상이 자신에게 봉급을 빚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내가 받아 본 이력서들 중 4분의 1에서 그런 거만함과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대부분 이력서의 문제점은 그보다 훨씬 단순하다. 그들의 목표가 잘못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관심을 갖고 반응할 만한 광고를 만들어 실었다.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제한을 두는 건 좋지 않다. 그들은 가망 없는 자리에까지 집착을 보일 만큼 필사적이다. 벼락 맞기를 기대하며 이력서를 돌리고, 실제로 운 좋게 채용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하지만 제지업은 다르다. 특히 내 전문인 특수 산업 용지를 취급하는 회사들을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이 분야의 아마추어다. 나는 그들이 걱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간혹 근심을 자아내게 하는 이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 나보다 살짝 나은 자격을 갖춘 사람들. 나와 같은 배경을 가졌지만 이력서상 학력이 나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사람들. 나를 차선책으로 밀어낼 능력이 있는 사람들. 만약 광고가 진짜였고, 나 역시 그들 틈에서 이력서를 보냈었다면.
에드워드 조지 릭스 같은 사람들. (P38-40)
나 자신이 제어되지 않았다. 자꾸 머릿속에 많은 가능성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해고된다면…… 이를테면 과도한 음주로 주어진 작업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거나 작업 현장의 여직원과 불륜을 저질렀다고 잘린다면. 다발성경화증 같은 소모성 질환에 시달려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면. 불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그래. 안 될 거 없어.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잖아. 교통사고, 심장마비, 석유난로 화재, 뇌졸중……
그가 갑자기 죽어버린다면. 아니면, 갑자기 중병에 덜컥 걸려버리거나. 그럼 나를 반기겠지? 모든 면에서 그보다 나은 사람이 불쑥 나타났으니.
필요하다면 그를 죽여야 했다. (P52)
나는 채용되지 않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내게는 그저 또 하나의 실패일 뿐이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특별하다. 이번에는 차선책이 마련된 상태에서 면접을 보았다. 계획 말이다. (결의가 흔들리기 전에 제대로 써먹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나는 확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화요일 면접에 임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외부인의 시각으로 모든 걸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절망만을 키워놓았을 뿐이다. 내가 본 버트 데보레, 바로 이 버크 데보레, 지난 반세기에 걸쳐 완성된 이 사람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
내가 비우호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내가 성격 나쁜 염세가라는 뜻도 아니다. 그저 충분히 우호적이지 않다는 뜻일 뿐이다. 젊은 시절, 학교와 군대에서 내가 속한 그룹과 조화롭게 어울리려고 무던히 애를 썼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노력이 자연스럽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취직해 7년간 그린 밸리 구석구석을 돌며 산업 용지를 팔고 다니던 시절. 나는 세일즈맨으로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끊임없이 지어 보이는 웃음, 활기 넘치는 모습, 악수, 격려, 어떻게 해서든 상대에게 내 반가운 감정을 생생히 전달해야 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요란스럽게 친분을 과시하는 타입도 아니고, 겉치레로 친절을 베푸는 타입도 아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일즈맨 시절 나는 수많은 새로운 농담들을 배워 달달 외운 후 고객들에게 적절히 써먹었다. 오후의 전화 상담을 앞두고는 긴장을 풀기 위해 보드카를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그러니 술에 절어 지내는 날이 많았을 수밖에. 세일즈맨으로 몇 년 더 일했더라면 아마 진작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제품 라인 감독은 내게 있어 완벽한 자리였다. 붙임성은 필수였지만 품위를 지켜야 했고, 우호적이어야 했지만 감독으로서 그 수위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화요일에 분명해졌다. 나는 다시 세일즈맨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력서는 나로 하여금 문간을 넘도록만 해줄 뿐이다. 물론 그 정도 효력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내 경력,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판매 도구다. 그리고 면접은 구매 권유다. 거기서 내가 팔려고 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P56-57)
민주주의의 밑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목적으로만 리더들을 지지하는 것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항상 흑자를 내고 주주들에게 두둑한 배당액을 보장하는 우량 기업들이 한 푼의 이윤이라도 더 뽑아내기 위해, 그래서 임원들의 백만 달러, 천만 달러, 2천만 달러짜리 보상 패키지를 보장하기 위해 수천 명의 직원들을 해고한다.
이 바닥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적이 누구인지, 하지만 적을 안다고 해결된 건 없다. 당장 주주 천 명을 죽인다고 내가 뭘 얻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2천 명의 쓸 만한 직원을 해고한 임뭔 일곱 명을 죽인다 한들 내가 뭘 얻어낼 수 있겠나?
내게 득 될 건 아무것도 없다.
최고경영자들과 그들을 그 자리에 앉힌 주주들이야말로 내 진정한 적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문제일 뿐 내가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일이 아니다.
여기 이 여섯 통의 이력서, 내가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건 이것들뿐이다. (P66)
어릴 적, 한동안 공상 과학 소설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스푸트니크(구소련이 쏘아 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가 발사되기 전까지, 스푸트니크가 발사됐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모든 공상 과학 잡지들, 내가 본 모든 영화와 텔레비전 쇼들은 미국이 우주에 대한 자연적인 권리가 있다고만 주장했었다. 내가 접한 모든 이야기 속의 탐험가와 개척자와 우주의 저돌적인 사람들은 전부 미국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러시아가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우주선을, 러시아가!
우리는 그 충격으로 공상 과학 소설과 영화와 텔레비전 쇼를 끊어버렸다. 남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서부극으로 관심을 돌렸다. 적어도 서부극에서는 누가 이기게 될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푸트니크가 우리 세대의 관심을 공상 과학물에서 떼어놓기 전 우리는 ‘자동화’라고 불리는 무언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접해왔었다. 머지않아 자동화가 지능이 필요 없는 일터를 장악하게 될 거라고 했다. 물론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단순한 조립 라인이었다. 인간의 뇌 기능에 해가 되고,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따분하고, 반복적인 작업들을 기계들이 떠맡게 될 거라나.
자동화된 미래는 항상 인류에게 좋은 일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나는 기계에 밀려 더 이상 따분한 작업을 못하게 된 인간들의 운명이 궁금했다. 보나마나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겠지? 밥은 먹고 살 수 있을까? 기계가 세상의 모든 일자리를 차지해버리면 인간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까? (P79-80)
내 이름은 버크 데보레다. 쉰한 살이고, 코네티컷 페어본 페너리 우즈가 62번지에 살고 있다. 실직 상태로 지난 2년을 보냈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군대에 다녀온 후 지금껏 단 하루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었다.
실직 상태가 길어지니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까지 척척 해내게 됐다. 업계지에 가짜 구인 광고를 싣고 나와 같은 처지에 실직자들로 하여금 이력서를 보내게 만들었다. 내 경쟁자들 말이다. 난 그 이력서들을 꼼꼼히 훑어본 후 나보다 나은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이들을 추려 차례로 죽였다. 그들에게 내 자리를 빼앗길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일하고 싶었다. 그 갈망이 나로 하여금 이런 미친 짓을 벌이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총 네 명을 죽였다. 첫 번째 살인은 보름 전에 저질렀다. 5월 8일 목요일. 내가 죽인 사람의 이름은 허버트 C. 에벌리였다. 난 코네티컷 폴 시티의 처치워든 레인 가에 자리한 그의 집 앞에서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
두 번째 희생자는 에드워드 G. 릭스였다. 난 그만을 표적으로 삼았지만 그의 아내가 날 자신의 어린 딸과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바람에 그녀까지 죽이게 됐다. 난 지난 목요일에 메사추세츠 롱홈에 자리한 그들의 집에서 그 일을 벌였다.
마지막 희생자는 어젯밤 뉴욕의 리치게이트에서 봉변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에버릿 다인스였고, 내 차에 치어 숨졌다.
정말 후회스럽다. 내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유족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나로 인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겐 더 미안하고, 난 나 자신을 증오한다. 이 미친 짓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게 내 고백이다. (P113-114)
(..... 이제 나는 그들의 비밀 이름까지 알게 됐다. 그들의 주변 사람들조차 모르는 이름, 경찰이 아니고서는 느껴볼 수 없는 힘이다. 아는지 모르지만 범인 수색을 하거나 체포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릴 때 경찰은 항상 중간 이름을 사용한다.)
다이어스 에디의 ‘에디(eddy, 소용돌이)’는 후사토닉 강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포코차우그라 불리는 작은 개울의 소용돌이를 의미한다. 이쪽 지역에서는 인디언 이름을 흔히 접할 수 있다. 포코차우그보다 더한 이름도 많다.
봄은 에디의 계절이다. 해빙과 봄비 때문이다. 마을의 주도로인 뉴 헤이븐 가는 포코차우그의 서쪽 제방을 따라 뻗어 있다. 그 길은 개울이 왼쪽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곳이 바로 목적지다. 거기서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지역 볼거리 중 하나인 소용돌이를 볼 수 있다. 도로와 개울 사이에는 작은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다. 5월의 일요일 오후. 그곳에는 총 일곱 대의 차가 주차돼 있다. 내 차까지 여덟 대다.
싱크에서 물 빠지듯 소용돌이치는 개울 위로는 인도교가 놓여 있다. 대 여섯 명이 껍질이 벗겨진 나무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소용돌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게까지 볼 만한 현상은 아닌데도, 인도교는 튼튼한 강철 받침에 널빤지를 덮어 만들어놓은 것이다. 포코차우그 너머로는 작은 공원이 펼쳐져 있다. 여기저기 둥근 돌들이 튀어나와 있고, 피크닉 벤치와 계절에 따라 영업하는(소용돌이처럼) 매점도 보인다. (P136-137)
카운슬러와의 첫 상담은 화요일로 잡혔다. 마저리는 주정부가 아닌, 성당을 통해 상담을 준비해왔다. 11년 전 서스튼 신부와 상담을 가졌을 때처럼.
“그의 이름은 롱거스 퀸란이에요.”
그의 사무실이 자리한 마샬(미국 일부 도시의 경찰서를 통칭하는 말)로 향하는 동안 아내가 말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우리의 카운슬러가 남자라니, 마저리는 여성 카운슬러를 원했을 텐데. 나는 놀란 기색을 애써 지웠다.
“롱거스, 이상한 이름이군.”
“그런 집안인가 보죠, 뭐.”
아내가 말했다.
지어진 지 얼마 돼 보이지 않는 4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은 마샬의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의료 서비스 단지, 미드웨이라..... 어디와 어디의 중간 지점이라는 거지? 삶과 죽음 사이? 제정신과 광기 사이? 어제와 오늘 사이? 희망과 절망 사이? (P148-149)
어둠 속에 누워 혹시 그런 이유로 해고된 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프로그램의 주장이 아니라, 그저 내 생각일 뿐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비정한 임원과 거친 실업가들의 야만적인 결정이 단지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내려진 거라면? 그래서 건실한 회사에서 직원들을 마구 쫓아내고, 모든 걸 삭감해버리고, 인간적 비용과 자신들의 인간성 마저도 외면해버리고 있는 거라면?
2000년.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날.
어쩌면 그래서 내가 이토록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내놓은 어떤 해명보다 훨씬 설득력 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모든 걸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망치가 떨어질 때, 모든 게 정지 상태에 빠져버릴 때를 대비해서.
밀레니엄은 생산적인 직장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는 생산적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잘라버리는, 이 말도 안 되는 경영 방식을 부추기고 있다. 단지 2000년이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실직한 이유도 인류가 미쳐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오래가지 않아 극심한 공포에 눈을 뜨게 된다. (P160)
하지만 나는 충동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 대고 차분하게 속삭였을 뿐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오, 그래. 그 친구가 문제야. 그래서 제거해야겠어.” 진심 그대로를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남자 친구를 죽이는 순간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바뀔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에서 정상적인 일로 바뀌는 것이다. 살인이 정상적인 반응이 돼버린 다는 뜻이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말이다. 사람을 죽이는 건 어찌 보면 굉장히 간단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다는 것,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무장한 킬러다. 무자비한 괴물. 내 안에는 바로 그 괴물이 담겨 있다. (P162)
장기간의 실직 상태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해고된 직원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친다. 중산층에 가해지는 타격이 특히 크다는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의 입장에서는 (나는 아직도 중산층에 남기 위해 바둥거리는 중이다) 우리가 최대 피해자라는 생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자인 사람들은 인생에 극단적인 굴곡이 많다는 걸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도 있는 법. 하지만 우리 중산층은 인생의 매끄러운 진행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고소득 계층으로의 진입을 포기했으니 우리를 밑바닥으로 내몰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회사에 충성했으니 우리의 생계를 끝까지 책임져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우리 중산층은 가운데에 껴서 보호받고 지켜져야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돼버렸다. 가난한 이가 형편없는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냥 사회복지 수당을 받아 살면 된다.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일이다. 백만장자가 무모하게 벤처 기업에 투자했다가 쫄딱 망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그 여파는 몇 개월, 아니, 몇 년 넘게 이어진다. 심한 경우에는 한때 마음껏 누렸던 경제적인 능력과 안전과 자부심을 영영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 처참하게 내팽겨쳐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까지 내팽겨쳐진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탈선하고(다행히 우리는 아직 그런 문제가 없지만), 결혼 생활도 파탄 난다.
내 결혼 생활도 파탄 나기를 원하는가? 절대. 이 모든 건 내 실직 상태가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이다. 내가 아직 할시온 밀스에 다니고 있었다면 마저리는 다른 남자와 어울려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한심한 직장에 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나도 이렇게 사람을 죽이러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P170-171)
당신이 대형 사무실 건물들을 상대로 하는 에어컨 수리 서비스 회사의 사장이라고 생각해보라. 수리공 자리가 하나 나니 서른 명이 이력서를 보내온다. 그들 모두 몇 년 이상의 에어컨 수리 경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대게는 2개월짜리 에어컨 수리 코스를 수료하고 손에 넣은 자격증과 사반 세기에 달하는 특수 용지 제조 경력뿐이다. 과연 당신은 나를 채용하겠는가? 아니면 아직 그럴 만큼 미치지는 않았는가?
은행가 출신 자동차 세일즈맨, 제임스 할스테드의 경우를 보자. 그걸 재훈련으로 볼 수 있나? 그는 은행가처럼 생겼다. 한마디로, 메르세데스 세일즈맨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이미 정장이 있다. 그가 지금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재훈련에 임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재훈련에 실패했기 때문인가? 그가 마저리의 품에서 위안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내일의 새로운 신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형 컴퓨터처럼 버려졌기 때문일까? 은행이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서? 일주일에 사흘씩 통근 열차를 타고 게임 같은 일터로 나가던 풍요로운 삶을 잊지 못해서?
옛 직장 상사가 그의 봉급을 아껴 모은 돈으로 메르세데스를 사러 불쑥 찾아온다면 과연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설마, 하지만 그는 옛 직장 상사를 알아볼 것이다. 물론 모른 척하고 바보처럼 미소를 흘리며 차를 팔겠지.
바로 그것이 재훈련이다. (P222)
그는 거실에 들어와 있다. 회색 양복 차림의 호리호리한 남자. 그는 소파 위에 걸린 액자를 들여다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윈슬로 호머의 바다 그림. 우리가 왜 그 복제품을 소유하고 있는지 나도 모른다. 몇 년 전, 액자 가게에서 그걸 집어온 마저리가 무안해하며 말했다. “썩 마음에 드는 그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윈슬로 호머의 진짜 작품을 사다놓을 순 없잖아요. 괜찮죠, 버크?”
물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우리는 벽에 못을 박고, 액자를 걸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사람 속은 정말 알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무리 상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해도, 그 그림의 어떤 점이 마저리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는지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바로 그게 교훈이다. 복제품의 표면은 평평하다. 진품이 아니라는게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넘실대는 바다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의 요동.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만 봐서는 그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없다. 마저리의 속을 깊이 들여다볼 수 없다 해도 상관없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중요한 건 그뿐이다. 아내를 더 깊이 알아보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아내가 나를 속속들이 알려 한다면? 그건 달가울까?
기척을 느꼈는지 형사가 나를 돌아본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턱으로 그림을 가리킨다.
“어릴 적에 배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아버지가 선원이셨거든요. 데보레 씨이시죠?” (P230-231)
같은 총. 내가 어리석었다. 그리고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들이 두 사건을 이렇게 연결 지을 줄은 몰랐다. (윌리스&켄덜의 인사 담당자가 참견하지 않았으면 영영 밝혀지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을까? 그동안 수많은 경찰 프로그램과 영화를 봐왔으면서, 그들이 탄도 분석에 대해 주절거리는 걸 지겹도록 들었으면서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니. 나는 그저 이 총이 지난 50년간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 믿고 일을 벌였을 뿐이다. 기록이 없으니 추적의 염려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 총이 남기게 될 흔적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도 세워놓지 않았다.
이 총에 목숨을 잃은 이는 두 명이 아니라 네 명이다. 메사추세츠 사건이 그렇게 종결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탄도 분석을 통해 코네티켓 사건과 연결 지어 수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에버릿 다인스에게는 총을 쏘지 않았고.
마지막 표적에게도 이 총을 쓸 수 없게 됐다.
그럼 어쩐다? 더 이상 무기를 쓸 수 없게 됐으니, 내게는 또 다른 총이 없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새 총을 구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 범죄자들이야 식은 죽 먹기이겠지만 나는 그들 세상에 살지 않는다. 섣불리 그들을 따라하다가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릴 게 뻔하다. 그 정도는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총은 깨끗하고,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해준다.
칼로 찔러? 목을 졸라?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렇다고 다시 차로 들이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사고를 위장한 살인은 몇 번이고 가능하지만 또다시 손상된 차를 몰고 다니면 누구라도 수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건 한 번이면 족하다. 아니, 한 번도 지나치다.
유리잔을 들고 다니면서 낯선 이에게 “이거 마셔요.”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어쩐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경고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남은 이력서는 한 통, 그리고 팰런, 둘만 더 해치우면 모든 게 끝이 난다. 어떻게 해서든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것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P240-241)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일자리와 동일시합니다. 데보레 씨. 마치 사람과 일자리가 동일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직장을 잃으면 그들은 마치 스스로를 상실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존재 가치의 상실,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좌절감 말입니다. 그렇게 자학이 시작되는 겁니다.”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난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나는 말했다.
“하지만 우울하고 화가 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당신의 일부를 앗아 갔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나요?”
그가 말했다.
“그들이 앗아 간 건 내 인생입니다. 내가 아니고요. 그들은 내게서 융자를 갚을 능력, 아이들을 돌볼 능력, 아내와 좋은 시간을 보낼 여유를 앗아갔습니다. 직장은 직장일 뿐입니다. 직장은 내가 아니라고요. 퀸란 씨. 지난 5개월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압니까? 한때 서로 의지하며 친하게 지내온 동료들이었습니다. 나랑 같이 해고된 수백 명의 직원 말이죠. 우린 항상 그 신뢰를 앞세워 함께 싸워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내 적이 됐습니다. 서로 경쟁해야 하는 관계가 돼버렸으니까요. 그게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카운슬러들은 절대 이런 얘길 하지 않죠. 우리가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는 것.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나는 말했다.
그가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적이라고요, 데보레 씨? 그들이 적이란 말입니까?”
“우리 모두는 서로의 적이었습니다. 다들 그걸 알고 있었죠. 그들 얼굴만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늘 한자리에 모여 점심을 먹던 동료들이 언제부터인가 멀리 떨어져서 혼자 식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자리 알아봤어?’ 하고 물으면 무조건 아니라고 잡아뗐죠. 그렇게 서로 거짓말을 하게 됐고, 결국 우정도 깨져버렸습니다. 더 이상 동료가 아니었던 거죠.”
“더 이상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군요.”
“우린 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경쟁 상대였을 뿐이었어요. 모든 게 변해버린 것이죠.”
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지했다.
“그렇게 이기주의가 시작된 거였군요.” (P252-253)
차를 몰아 재활용 센터로 가는 동안 나는 지금껏 내가 벌여온 일들을 차례로 떠올려본다. 첫 번째 표적을 제거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도, 그의 이름이 뭐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허버트 에벌리. 맞아, 바로 그거야.
그때는 얼마나 간단하고 매끄럽고 깔끔했었나. 그 경험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때문에 모든 게 가능해졌고, 그 후로도 모든 일이 그처럼 손쉽게 풀릴 거라 믿었다. 만약 엑스먼이 내 첫 번째 표적이었다면 나는 진작에 이 프로젝트를 포기해버렸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학습이다. 생소한 일을 처음 하게 되면 누구나 어설프기 마련이다. 첫 번째 시도는 그저 기본기를 익히기 위함일 뿐이다. 두 번째 시도. 약간의 실수는 있겠지만 첫 번째 시도보다 눈에 띄게 매끄러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게 학습은 반복된다. 그 일에 완벽해질 때까지 초기의 학습곡선은 가파르게 상승한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익히게 되니까. 시도가 거듭될수록 상승폭은 점점 줄어들고, 그에 따라 학습곡선도 완만해진다. 그렇게 완벽함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것이다.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아직은 멀었다. 하지만 허버트 에벌리 이후로 많이 노련해진 건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은 기술을 앞으로 더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것이다. (P290)
또 다른 테이프 조각을 콧구멍을 막아버린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째서 몸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나는 그가 서서히 숨져가는 동안 싱크대 서랍을 차례로 뒤진다.
내게 필요한 건 양초다. 정전이 잦은 시골에서 손전등과 양초는 필수다. 이 집 주방 어딘가에도 분명 양초가 보관돼 있을 것이다.
그래, 여기 있군. 노끈과 철사와 여분의 열쇠들 틈으로 짧고 굵은 양초 하나가 보인다. 성당에서 기도용으로 쓰는 양초와도 많이 닮았다. 찬장에서 접시를 꺼내 스토브 옆에 내려놓고 양초를 세워놓는다.
팰런이 내는 소리가 나를 거슬리게 한다. 필요한 양초를 찾았으니 더 이상 주방에 남아 저 끔찍한 소리를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나는 스포츠 재킷을 챙겨 들고 주방을 나온다.
집 안을 걸어나가며 스포츠 재킷을 몸에 걸친다. 다른 쪽 주머니에는 장갑과 강철 파이프가 담겨 있다. 파이프를 쓸 일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버리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장갑을 끼고 현관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내 손이 닿았던 모든 것을 장갑으로 문질러 닦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의 침실 전등을 제외한 집 안의 모든 불을 꺼놓는다. (P322)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 내 목적과 목표는 간단하다. 나는 내 가족을 잘 돌보고 싶다. 이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고 싶다.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떳떳하게 생활하고 싶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결승점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CEO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미안한 마음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
레이프 팰런을 제거하고 맞는 첫 주말. 나는 머릿속에서 모든 근심과 계획을 지우고 휴식다운 휴식을 즐긴다. 이제는 연락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채워야 할 자리가 생겼으니 분명 연락이 올 것이다.
하지만 월요일에도 연락은 오지 않는다. 오후 중반, 나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마저리는 카니 박사 사무실에 나갔다. 나는 울리지 않는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거실을 빙빙 맴돈다. 자꾸 불길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이력서가 있었나? 내가 받아야 할 전화를 그 누군가가 받은 게 아닐까? 혹시 아카디아 내부에서 대체 직원을 뽑아 급히 현장에 투입시킨 건 아닐까?
또 내가 나서서 그 자식을 없애야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더 이 짓을 해대야 공정한 기회가 주어질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필사적으로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내게 일자리가 주어질 때까지.
이제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알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는 내 인생에 장애가 되는 모든 이를 내 방식대로 처리할 것이다. 공과 사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다 쓸어버릴 것이다.
빌어먹을 전화벨만 제때 울려주면 모든 게 매끄럽게 마무리될 텐데. (P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