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런닝 맨> 1987년
빈부 격차가 극심해지고 심각한 환경오염이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까운 미래, 스물여덟 살 벤저민 리처즈는 상사와 다투고 회사를 그만둔 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중병에 걸린 딸의 약값마저 대지 못하게 된 리처즈는 돈을 건 TV 게임쇼 '러닝 맨'에 출연하기로 결심하고 테스트를 거쳐 참가자로 발탁된다. '러닝 맨'은 참가자가 추격자들의 감시를 피해 30일 동안 생존하면 10억달러를 받는 게임이다. '스릴러의 거장'으로 불리는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1982년 펴낸 장편소설로,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을 박진감 넘치게 묘사했다. 돈을 위해 목숨을 건 게임을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대중의 모습이 씁쓸함을 자아낸다.
이 책에서 묘사한 가까운 미래는 2025년이다. 소설 속 2025년은 경제난과 실업이 극심하고 거리에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며 환경오염으로 사망률이 치솟은 데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시대로 표현됐다. 이 소설은 1987년 개봉한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미국 영화 '런닝 맨'으로도 제작됐다. 최근 원작을 기반으로 에드거 라이트가 감독하고 글렌 파월이 주연한 리메이크작 '더 러닝 맨'도 제작돼 후반작업을 거쳐 2026년 11월 개봉할 예정이다.
실라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창백한 빛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체온계를 바라봤다. 뒤쪽의 창문 밖에는 이슬비가 내리고, 공영주택 단지의 고층 건물들이 교도소의 회색 포탑처럼 솟아 있었다. 아래의 통풍구에는 줄에 널린 해진 빨래들이 펄럭였다. 쓰레기통 사이로 쥐와 포동포동 살찐 길고양이들이 뛰어다녔다.
실라가 남편을 쳐다봤다. 리처즈는 멍한 얼굴로 식탁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 ‘프리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몇 주째 프리비만 보고 있었다. 그답지 않았다. 리처즈는 늘 프리비를 싫어했다. 모든 공영주택 아파트에는 법에 따라 프리비가 설치되어 있긴 하지만, 프리비를 끄는 것이 아직 불법은 아니었다. 2021년 ‘의무 혜택법’이 여섯 표 차로 3분의 2를 얻지 못해 통과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두 사람은 프리비를 절대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캐서린이 병에 걸린 이후로 남편은 큰돈이 걸린 프로그램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 때문에 실라는 몹시 두려웠다. (P5)
고층 건물들과 주택단지, 철망 울타리, 헐벗은 노숙자들만 가득한 주차장. 도로에 분필로 써 놓은 음담패설은 이제 빗물에 번져 흐릿했다. 깨진 창문과 쥐, 젖은 쓰레기봉투가 인도를 뒤덮고 배수구로 쏟아져 내렸다. 무너진 회색 벽에는 개발새발 갈겨쓴 낙서들이 있었다. 흰둥이들아, 해 지기 전에 꺼져라. 우리 동네는 도크 피워, 너희 어미가 간지럽댄다. 바나나나 벗겨. 토미는 푸시 먹는대요. 히틀러 쩔었지. 메리, 시드, 유대인 놈들을 죽여라. 70년대에 설치된 제너럴 아토믹스 사(社)의 낡은 나트륨 조명은 돌과 도로 조각에 맞아 부서진 상태였다. 기술자가 조명을 고치러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신권 달러에만 움직인다. 기술자들은 부자 동네에서 꿈쩍도 안 했다. 부자 동네는 끝내주지. 허파 버스가 오르락내리락하며 쌩쌩 지나가는 소리 외에는 사방이 고요해서 리처즈의 발소리만 울려 퍼졌다. 이 전쟁터는 밤이 되어야만 활기가 돌았다. 낮에는 고양이와 쥐, 그리고 쓰레기 더미 위를 기어다니는 살찐 흰 구더기들 외에는 움직임이 없는 황량한 회색의 침묵만 흘렀다. 이렇게 멋진 2025년이 썩어 가는 악취만 가득했다. 프리비 케이블은 도로 아래에 안전하게 묻혀 있었다. 바보나 혁명가가 아니라면 누구도 케이블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프리비는 꿈의 원료이자 생계 수단이었다. 헤로인은 봉지당 구권 12달러이고, 프리스코 푸시는 알약 하나에 구권 20달러지만, 프리비는 무료로 흥분시켜 주었다. 게다가 운하의 건너편에서는 꿈의 기계가 하루 24시간 작동했지만, 그 기계는 신권 달러로만 작동하며, 고용된 사람들만 신권 달러를 가질 수 있었다. 운하 남쪽의 공영주택 단지에는 약 400만 명이 살고 있었으나 대부분 실업자였다. (P11-12)
“마지막 질문이에요. 벤저민. 당신이 거짓말을 하면 알 수 있다고 하진 않겠지만, 당신에게 연결된 기계가 어떤 식으로든 매우 강한 신호를 줄 겁니다. 혹시 자살 충동 때문에 이 게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나요?”
“아니오.”
“그럼, 이유가 뭔가요?”
“내 어린 딸이 병들어서 의사가 필요했소. 약도 필요하고, 병원 치료도 받아야 하오.”
볼펜을 끄적였다. “다른 이유는?”
리처즈는 없다고 말할까 했지만(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니까), 모든 사실을 터놓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마도 거의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더러운 소년과 의사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말을 한번 털어놓아야 응집되고 구체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형성되지 않은 감정적 반응을 억지로 말로 옮기려 할 때처럼.
“난 오랫동안 일자리를 못 얻었소. 이미 짜 놓은 판에서 쪼다 역할만 하더라도 다시 일하고 싶소.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싶단 말이오. 난 자존심이 있소. 당신도 자존심이 있지 않소. 의사 양반?”
“자존심은 결국 사람을 망칠 뿐이죠.”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볼펜 끝을 꾹꾹 눌렀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리처즈 씨......”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이름을 정중하게 부른 것은, 리처즈가 더 할 말이 있든 없든 이 면담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P40-41)
“리처즈 씨, 당신은 <러닝 맨>에 참가하게 될 예정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가장 큰 프로그램이죠. 참가자에게도 가장 수익성이 높으면서 위험한 쇼입니다. 여기 제 책상에 최종 동의서가 있습니다. 서명해 주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먼저 왜 당신이 선발되었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앞으로 닥칠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리처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킬리언이 깨끗한 책상 깔개 위에 서류철을 꺼내 놓았다. 리처즈는 그 서류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았다. 킬리언이 서류를 펼쳤다.
“벤저민 스튜어트 리처즈. 28세. 1997년 8월 8일 하딩시 출생. 2011년 9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도시 남부 수공업학교 재학. 불복종으로 두 차례 정학. 교감이 등을 돌린 틈을 타서 허벅지를 차셨군요?”
“젠장, 내가 찬 건 엉덩이였소.”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처즈 씨의 말씀이 맞겠죠. 16세에 실라 리처즈. 결혼 전 성은 고든인 여성과 결혼하셨고요. 노조의 충성 서약과 임금 통제 조항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고 노조에 가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존스버리 지사장을 ‘후장이나 밝히는 개자식’이라고 불렀군요.”
“그렇소.”
“당신의 근무 기록은 들쭉날쭉하고, 해고된 횟수가..... 어디 보자.... 총 여섯 번이네요. 불복종과 상급자 모욕, 권위에 대한 악의적 비난 등.”
리처즈가 어깨를 으쓱했다.
“요약하자면, 당신은 반권위주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일탈적이지만, 감옥에 가거나 정부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고, 어떤 약물에도 중독되지 않을 정도로 영리한 사람입니다. 심리학자는 당신이 다양한 잉크 얼룩에서 레즈비언, 배설물, 오염 가스를 배출하는 차량을 보았다고 보고했습니다. 또한 특별한 이유 없이 과도하게 웃는다고 했습니다.” (P53-55)
“당신은 화요일 밤 생방송에 출연하게 됩니다. 이후 프로그램은 테이프와 필름, 그리고 가능한 경우엔 트라이캐스트. 생중계까지 조합한 형태로 진행될 것입니다. 저희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참가자가 개인적인 파멸에 다다를 때는 예정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중계한 전례가 있습니다.
규칙은 단순합니다. 당신이 잡히지 않고 도망치는 동안 당신이나 당신의 생존한 가족은 시간당 신권 100달러를 받게 됩니다. 저희는 당신이 48시간 동안은 사냥꾼들을 속일 수 있을 거라 가정하고, 도피자금 4800달러를 제공합니다. 물론, 48시간이 지나기 전에 잡히면 미사용 금액은 반환됩니다. 당신에게는 먼저 도망갈 수 있도록 12시간이 주어집니다. 30일을 버티면 그랑프리를 받는데, 상금은 신권 10억 달러입니다.” (P56-57)
리처즈가 나가자, 안내원이 재빨리 은신처에서 나와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앞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리처즈 씨,
저는 면담할 때 당장 돈이 몹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죠?
소문과 달리 게임사는 선불금을 미리 제공하지 않습니다. 괜히 ‘출연자’라는 단어의 화려함에 속지 마세요. 당신은 프리비 스타가 아니고, 그저 위험한 작업을 하는 대가로 매우 높은 보수를 받는 평범한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게임사에는 제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습니다. 봉투 안에 있는 것은 당신이 앞으로 받게 될 보수의 10퍼센트입니다. 하지만 신권 달러가 아니고, 달러로 교환 가능한 게임 상품권입니다. 제 짐작대로라면 당신은 부인께 이 상품권을 보내겠죠.
그러면 부인은 이 상품권이 신권 달러보다 좋은 점이 한 가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상품권을 법정화폐로 인정하고 받지만, 돌팔이는 그렇지 않거든요.
진심을 담아,
댄 킬리언 (P59)
관중의 소음에 리처즈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그들의 증오에 찬 외침은 거의 광란의 절정에 도달했다. 바비는 군중이 조금 조용해질 때까지 1분 정도 기다린 다음 다시 말했다.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으세요. 리처즈 씨?”
“30일 꽉 채울 거요.” 리처즈가 침착하게 말했다. “너희들 중에 날 잡을 놈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더 많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먹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고, 누군가는 토마토를 집어 던졌다.
바비 톰슨이 다시 군중을 향해 외쳤다. “리처즈 씨는 유치하고 허세 가득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우리의 무대를 떠나게 됩니다. 내일 정오에 사냥이 시작되죠. 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해 두세요! 어쩌면 허파 버스에서.... 제트기 안에서.... 3D 진열대 앞에서...... 혹은 동네 킬볼 경기장에서 여러분 옆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는 하딩에 있겠지만, 내일은 뉴욕? 보이시? 앨버커키? 콜럼버스? 혹은 여러분의 집 밖에 몰래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을 신고하실 건가요?”
“네에!” 관중들이 소리쳤다.
리처즈가 갑자기 관중을 향해 양손을 들어 손가락 욕을 했다. 이번에 관중들이 무대로 돌진하는 모습은 연출에 따른 흉내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관중들이 카메라 앞에서 리처즈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면 앞으로 펼쳐질 흥미진진한 중계를 모두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네트워크 직원들이 그를 무대 왼쪽의 출구로 급히 빼돌렸다. (P76-77)
어떻게 도망칠까?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리처즈는 평범한 참가자의 입장이 되어 보려 애썼다. 가장 먼저 찾아온 충동은 당연히 순수한 동물적 본능이었다. 땅속으로 숨는다. 굴을 파고, 그 안에 웅크린다.
그래서 리처즈도 그렇게 했다. 브랜트 호텔.
사냥꾼들도 그런 걸 예상할까? 그렇다. 그들은 달아나고 있는 사람을 찾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숨어 있는 사람을 찾을 것이다.
사냥꾼들이 은신처에서 리처즈를 찾을 수 있을까?
리처즈는 매우 간절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변장은 훌륭했지만, 조급하게 만들어졌다.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항상 몇몇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는 이미 표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 안내대의 직원, 아침을 가져다준 벨보이, 어쩌면 42번가에서 들어갔던 성인 쇼에서 스쳐 지나간 남자들 중 하나가 알아챘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작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P93-94)
“리치와 딩크 모란이 공해 즉정기를 만들었어요. 딩크가 책을 보며 그림을 그렸고, 커피 캔과 자동차에서 훔친 부품들로 만들었죠. 지금은 골목에 숨겨 놨어요. 1978년에는 오염 지수라는 게 있어서 1부터 20까지 표시했대요. 여기까지는 이해되죠?”
“응.”
“오염 지수가 12에 도달하면, 날씨가 바뀔 때까지 공장과 오염을 일으키는 시설들은 가동을 중지해야 했어요. 1987년까지 연방 법률이었는데, 개정 의회에서 폐지됐어요.” 침대 위의 그림자가 팔꿈치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천식에 걸린 사람을 많이 알죠, 그렇지 않나요?”
“그렇지.” 리처즈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나도 천식 증세가 조금 있어. 공기 때문인 것 같아. 젠장, 덥고 흐리고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 날은 집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건 다들 아는 거잖아.....”
“기온 역전 현상이에요.” 브레들리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래, 많은 사람들이 천식을 앓고 있어. 8월과 9월에는 공기가 기침 시럽처럼 걸쭉해지잖아. 하지만 폐암은......”
“아저씨가 말하는 건 천식이 아니에요. 그건 폐기종이에요.”
“폐기종?” 리처즈가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굴려 보았다. 어렴풋이 익숙하긴 했지만, 정확한 뜻은 떠오르지 않았다.
“폐의 모든 조직이 부풀어 오르는 거예요. 숨을 들이쉬고, 또 들이쉬고, 또 들이쉬어도 계속 숨이 차죠. 그런 사람들 많이 보지 않았어요?”
리처즈가 생각해 봤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그런 식으로 죽어 간 사람을 여럿 알고 있었다.
브래들리가 리처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런 병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보스턴의 오염 지수는 좋은 날에도 20이에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담배 네 갑을 피우는 것과 같아요. 공기가 나쁜 날에는 수치가 42까지 올라가죠. 노인들은 도시 여기저기서 픽픽 쓰러져 죽어요. 사망 진단서에는 천식으로 적히죠. 하지만 문제는 공기라고요. 공기, 공기. 그런데도 놈들은 계속 내뿜고 있어요. 하루 24시간 내내 대형 굴뚝으로 뿜어 대고 있다고요. 부자 놈들이 그러고 싶으니까.
200달러짜리 코 필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두 개의 막 사이에 살균제를 적신 솜 조각을 조금 끼워 넣은 것뿐이죠. 그게 다예요. 유일하게 쓸 만한 물건은 제너럴 아토믹스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그걸 살 수 있는 건 돈 많은 놈들뿐이죠. 놈들이 우리에게 프리비를 틀어 주는 건 밖에 못 나가게 하려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 문제도 안 일으키고 이대로 앉아서 숨 쉬다 죽게 하려는 거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시장에서 가장 싼 제너럴 아토믹스 코 필터도 신권 6000달러는 해요. 우리는 책을 보면서 스테이시를 위해 10달러로 만들었어요. 손톱 반달만 한 크기의 소형 핵전지를 사용했어요. 전당포에서 7달러에 산 보청기에서 꺼낸 거예요. 어때요, 괜찮은 거 같아요?” (P139-140)
이틀이 지났다.
리처즈는 연기를 잘했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연기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듯이 움직였다. 리처즈는 이틀 동안 호텔 방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7시에 일어나 로비에서 성경을 읽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호텔 직원들은 리처즈에게 관대하면서도 경멸하듯 친절을 베풀었다. 제한적으로 합법화된 살인, 이집트와 남미에서의 세균 전쟁, 그리고 ‘하나만 낳고, 하나는 죽여라.’라는 네바다의 유명한 낙태 법령이 있는 이 시대에 반쯤 눈이 멀고 (호텔비를 지불한) 어설픈 성직자에게 어울리는 친절이었다. 교황은 구시렁대는 96세의 노인으로서, 그런 사건들에 대해 횡설수설하는 그의 칙령은 7시 뉴스의 마지막 유머 코너에 소개되었다.
리처즈는 도서관에서 대여한 특별 열람실에서 혼자 ‘회의’를 진행했다. 그는 열람실의 문을 잠그고 공해에 관한 책을 읽었다. 2002년 이후의 자료는 거의 없었는데, 별로 없는 자료조차도 이전에 작성된 자료들과 앞뒤가 맞지 않았다. 정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느리지만 효율적인 이중사고를 실행하고 있었다.
정오가 되면 리처즈는 호텔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모퉁이에 있는 간이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사과했다. 일부 사람들은 “괜찮아요, 신부님.”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은 무심하게 욕을 뱉고 그를 밀쳤다. (P161)
리처즈는 기도하듯 무릎을 꿇고 다시 앞유리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이번에는 총알이 유리를 뚫고 구멍을 냈다.
차가 그를 향해 덮쳐 왔다......
리처즈가 왼쪽으로 뛰었지만, 강화된 강철 범퍼가 그의 왼발을 강타해 발목이 부러지고, 그는 얼굴부터 땅에 처박혔다.
순찰차의 엔진이 과열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또다시 땅을 파내며 급회전했다. 이제 헤드라이크가 다시 그를 비췄다. 모든 게 강렬한 흑백으로 변했다. 리처즈는 일어나려 했지만, 부러진 발목이 그를 지탱하지 못했다.
리처즈는 숨을 심하게 헐떡이고 흐느끼며 다시 다가오는 경찰차를 지켜봤다. 모든 게 극도로 선명해지고 초현실적으로 변했다. 아드레날린에 잠긴 환각 속에서 모든 게 느리고, 의도적이고, 연출된 것처럼 보였다. 다가오는 순찰차는 거대한 눈먼 들소 같았다.
기관단총이 다시 드르륵 소리를 냈다. 이번에는 총알이 왼팔을 관통하며 그를 옆으로 밀어냈다. 묵직한 차가 방향을 틀어 리처즈를 들이받으려 했다. 순간적으로 리처즈가 운전석에 있는 사람을 향해 확실한 사격을 할 수 있었다. 한 발을 발사하자, 앞유리창이 차 안쪽으로 터졌다. 차는 천천히 땅을 파듯 옆으로 미끄러지며 구르기 시작하더니, 위로 솟아올랐다가 뒤집혔다. 차의 지붕이 아래쪽으로 뒤집힌 상태로 떨어진 후 다시 옆으로 누웠다. 엔진이 멎었다.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정적 속에서 경찰 무전기가 칙칙거리는 소리가 깨끗하게 들려왔다. (P190-191)
모두 끔찍한 선택이었다.
‘고맙네요. 파라키스 부인. 정말 고마워요.’
리처즈는 일어나 단열재를 털어내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머리 붕대를 벗어서 그 위에 던졌다. 잠시 생각한 후에 붕대를 단열재 속에 파묻었다.
이제 지팡이로 쓸 수 있는 물건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차에 진짜 목발을 두고 내렸다는 어이없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겨드랑이 높이까지 오는 판자를 하나 찾았다. 판자를 지하실 위의 땅바닥으로 던져 올리고, 철근들을 붙잡으며 힘겹게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리처즈는 위로 올라오자 땀이 흐르며 몸이 오들오들 떨렸는데, 자신의 손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새벽의 희미한 잿빛 햇살이 어둠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버려진 개발지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가 숨어 있기엔 정말 좋은데......’
안 된다. 그는 숨는 사람이 아니라, 도망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게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 아니었나?
뿌옇고 백내장 같은 안개가 잎이 떨어진 나무들 사이에서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리처즈는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잠시 멈췄다가 북쪽의 버려진 쇼핑몰을 따라 난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리처즈는 딱 한 번 멈춰서 목발 끝에 코트를 감싸고 다시 걸었다. (P202-203)
“어디에 있나요, 친구? 메인주 동부의 경찰 절반이 방금 전에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도로..... 록랜드를 통과했습니다.”
리처즈는 목을 길게 빼서 가게 위의 간판을 봤다. “1번 고속도로에 있는 길리스 타운 라인 스토어&에어스톱이라는 곳이야. 알겠어?”
“네, 뭐.....”
“잘 들어, 이 벌레 같은 놈아. 내 인생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한 게 아냐. 여기로 사진기자를 보내. 빨리. 그리고 이 소식을 방송으로 내 보내. 긴급 속보로. 난 인질을 잡고 있어. 인질의 이름은 어밀리아 윌리엄스, 어디 사람이냐면.....” 리처즈가 어밀리아를 바라봤다.
“팰머스.” 어밀리아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팰머스 사람이야, 안전하게 통과시켜 주지 않으면 여자를 죽일거야.”
“맙소사. 퓰리처상의 냄새가 나네!”
“아니, 그건 그냥 네가 바지에 지린 냄새야.” 리처즈가 말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었다. “소식을 알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메인주의 짭새들이 알았으면 좋겠어. 검문소에서 경찰 세 명이 우리를 날려 버리려 했어.”
“경찰들은 어떻게 됐나요?”
“내가 죽였어.”
“세 명 다요? 환장하겠네!” 수화기에서 떨어진 목소리가 멀리서 소리쳤다. “디키, 전국 케이블 열어!”
“경찰이 총을 쏘면 여자를 죽일 거야.” 리처즈는 진지한 말투로 말하려 애쓰면서, 어렸을 때 TV에서 봤던 조폭 영화들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여자를 구하고 싶거든 나를 통과시켜 주는 게 나을 거야.” (P229)
“잘 들어요. 게임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게임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오락이라고 말했어요. 그전에는 이런 게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죠. 로마 시대에도 검투사들이 똑같은 일을 했었잖아요. 또 다른 게임도 있어요. 포커. 포커에서 가장 높은 패는 ‘스페이드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예요. 그리고 가장 힘든 포커는 ‘파이브 카드 스커드’죠. 테이블에 카드 네 장을 공개하고, 한 장은 홀카드로 뒤집어 놓아요. 동전만 걸면 누구든 게임에 참여할 수 있죠. 다른 사람의 홀카드를 보려면 50센트 정도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판돈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홀카드가 점점 커 보이지 시작해요. 베팅이 열두 번 쌓여서 평생 모은 돈과 차, 집까지 걸면, 그 홀카드는 에베레스트보다 커지죠. 「러닝 맨」도 그거랑 비슷해요. 다만 나에겐 베팅할 돈이 없고, 놈들에겐 인력과 화력과 시간도 있다는 차이가 있죠. 우리는 놈들의 카지노에서 놈들의 카드와 놈들의 칩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어요. 내가 잡히면 게임을 접어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내가 게임판을 살짝 조작했을 수도 있어요. 록랜드의 언론사에 전화를 걸었잖아요. 언론사가 내 스페이드10이었죠.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도록 했기 때문에, 저놈들은 나를 안전하게 통과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첫 번째 검문소 이후로는 나를 깔끔하게 처리할 기회가 없었어요. 네트워크가 가진 힘의 근원이 바로 프리비이니, 이 상황이 웃기지 않나요? 프리비에 나오면, 그게 바로 진실이 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경찰이 내 인질, 즉 부유한 중산층 여성을 살해하는 모습을 전국의 사람들이 보게 되면, 그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어요. 저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없죠. 이 체제는 이미 신뢰를 너무 많이 잃은 상태로 힘겹게 돌아가고 있으니까. 재미있지 않나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어요. 이미 도로에서 문제가 터졌고, 경찰과 사냥꾼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거예요. 어떤 남자가 나에게 나와 같은 사람들과 가까이 붙어 있으라고 했었어요. 그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맞는 말을 했는지 잘 몰랐을 거예요. 저들이 나를 저렇게 조심스럽게 다루는 이유 중 하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에요.” (P248-249)
“내 말 잘 들어!” 리처즈의 목소리가 넓게 펼쳐진 제트 공항을 가로질러 울려 퍼졌다. 경찰은 긴장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군중이 웅성거렸다. “내 코트 주머니에는 다이나코어 고성능 플라스틱 폭약 5킬로그램이 들어 있다. 일명 ‘블랙 아이리시’. 5킬로그램이면 반경 500미터 안의 모든 물건과 사람들을 날려 버리기에 충분하다. 아마 이 공항의 연료 저장 탱크까지 폭발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 지시 사항들을 한 치라도 어기면, 당신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내 버릴 것이다. 폭약에는 제너럴 아토믹스 격발 링이 달려 있다. 나는 그 링을 반쯤 당겨 놓았다. 조금만 흔들려도 다들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거야.”
군중 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갑자기 사람들이 파도처럼 움직였다. 바리케이드에 서 있던 경찰들은 막아야 할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들과 여자들이 도로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갔고, 정문으로 쏟아져 나가고, 제트 공항 주변의 철망 울타리를 기어 올라갔다. 사람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서 멍하고 절박한 얼굴이었다.
경찰도 불안하게 이리저리 서성였다. 어밀리아 윌리엄스가 본 어떤 얼굴에서도 불신의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리처즈?”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거짓말이다. 차에서 내려.”
“나가겠다.” 리처즈도 큰 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그 전에 요구할 게 있다. 연료를 완전히 채우고 비행 준비를 갖춘 제트기를 원한다. 승무원은 최소 인원으로 구성하라. 제트기는 록히드/제너럴 아토믹스 또는 델타 초음속 기종이어야 한다. 비행 가능 범위는 최소 3200킬로미터는 되어야 한다. 90분 내로 준비해.”
카메라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플래시가 번쩍거리며 터졌다. 언론사 사람들도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5억 명의 시청자들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압박도 당연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실재했다. 이 직업도 실재했다. 그렇지만 리처즈가 말하는 5킬로그램짜리 블랙 아이리시는 어쩌면 그의 놀라운 범죄적 사고방식이 만들어 낸 허구일지도 모른다. (P251-252)
악몽 같았다.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와 리처즈의 반쯤 깨어 있는 병든 정신의 조명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온 악몽 같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환영이나 환각에 더 가까웠다. 그의 뇌는 하나의 층위로 항로 문제와 매콘의 사라지지 않는 위험에 대처하며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층위에서는 뭔가 어두운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추적 중. 확인.’
어둠 속에서, 밤 속에서 윙윙거리는 거대한 자동 제어 장치가 돌아가고 있었다. 알려지지 않은 스펙트럼으로 빛나는 적외선 눈. 계기판과 오락가락하는 레이더 화면의 창백한 초록색 인광.
‘목표 고정. 조준 완료.’
시골 도로를 덜컹대며 달리는 트럭들. 3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삼각형으로 배치된 평상형 트럭들에 실린 극초단파 안테나가 밤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박쥐 날개를 타고 전자파가 끊임없이 날아갔다. 반사되고, 반향되었다. 강렬한 삑 소리와 사라져 가는 잔상은 레이더의 회전하는 빛이 약간 더 남쪽 위치로 옮겨 갈 때까지 남아 있다.
‘확실한가?’
‘그렇다. 뉴어크 남쪽 300킬로미터. 뉴어크 범위 안에 있을 수도 있다.’ (P291)
“당신이 보이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제트기 내부의 인터검이 조종실의 무선 장비를 통해 전달되고 있습니다. 당신이 총에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보이는 것만큼 심하지는 않소. 숲에서 좀 긁힌 것뿐이오.”
“아, 네. 숲속의 달리기는 유명하죠. 바비 톰슨이 바로 오늘 저녁 방송에서 그 사건을 찬양했습니다. 물론, 당신이 현재 펼치고 있는 활약도 함께. 내일 그 숲에는 당신의 셔츠 조각이나 탄피를 주우려는 사람들이 몰려들 겁니다.”
“정말 유감이오. 거기서 토끼를 봤었는데.”
“리처즈. 당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참가자 중 최고였습니다. 행운과 실력이 어우러져, 당신은 그야말로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에게 거래를 제안하려고 합니다.”
“어떤 거래요? 전국으로 방송되는 총살형이라도 하려는 거요?”
“이번 비행기 납치는 가장 화려했지만, 동시에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당신이 처음으로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땅을 떠날 때 그들을 다 놔두고 왔죠. 심지어 당신을 보호하는 여성도. 당신은 그녀가 당신의 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리처즈, 거기에는 우리 사람들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드디어.”
“사람들이 내게 계속 그렇게 말했지만, 난 아직도 숨을 쉬고 있소.” (P299)
“이제 거래를 합시다.” 킬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둡고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이든 이제는 표면의 바로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리처즈는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다시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다. 손을 뻗어 프리비를 끄고 싶었다. 더 이상 킬리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깊은 곳에서 느리고 끔찍한 떨림이 시작되는 게 느껴졌다. 실제로 말 그대로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는 프리비(Free-Vee)를 끄지 못했다. 당연했다. 어쨌든 공짜(free)잖아.
“사탄아,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리처즈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킬리언이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니오. 본론을 말하시오.”
킬리언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리처즈는 자신의 마음속 어딘지 알 수 없는 방 하나가 심령적으로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신음하는 게 느껴졌다. 마치 가난한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골목에서 자는 술주정뱅이의 유령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매콘은 끝났습니다.” 킬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당신은 매콘을 힘없는 달걀 껍데기처럼 깨 버렸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그의 자리를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이미 겪을 수 있는 충격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던 리처즈는 믿을 수 없는 충격 속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밀리아는 이제 핸드백을 돌려받았다. 그들에게는 거짓말을 하거나 가짜 환상을 리처즈에게 들이댈 이유가 없었다. 그는 부상을 당했고, 혼자였다. 매콘과 도너휴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왼쪽 귀의 바로 위에 총알 한 발이면 소란도 없고 혼란도 없이 귀찮지 않게 깔끔하게 그를 끝낼 수 있다.
결론: 킬리언은 전적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
“미쳤군.” 리처즈가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가 봤던 최고의 도망자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도망자는 어디를 찾아봐야 하는지 잘 알죠. 조금만 눈을 더 크게 뜨고 보면, <러닝 맨>이 단순히 대중을 즐겁게 하고 위험한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진행하는 게 아님을 알게 될 겁니다. 리처즈, 네트워크는 항상 새로운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P308-309)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사실이다. 심지어 리처즈의 몸뚱이도 이 살육 기계 같은 체제를 위한 전형을 만들어 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은 적응하고 돌연변이할 것이다. 1만 년이든 5만 년이든, 그들의 폐는 자체 여과 시스템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산소가 공기 중에서 부차적인 요소밖에 되지 않을 때, 그들은 봉기해서 인공 필터를 뜯어내고, 그 주인들이 버둥대고 발길질하고 두드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그렇다면 벤저민 리처즈에게 미래는 무엇일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다 개 같은 불평거리일 뿐이었다.
비탄의 시대가 올 것이다. 저들은 그것을 예상하고 대비할 것이다. 분노의 시대, 반란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공기 중에 고의적으로 독을 풀었다는 사실을 다시 세상에 알리려다 실패로 끝나게 될 시도들도 있을 것이다. 저들이 그 문제를 처리할 것이다. 리처즈를 돌봐줄 것이다. 언젠가 그가 저들을 돌봐 줄 것이라 기대하며, 본능적으로 리처즈는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처즈는 자신이 그 일에 어떤 천재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들이 리처즈를 도울 것이고, 치유할 것이다. 약과 의사들, 마음의 변화. 그리고 평화.
그의 호전성이 쓴풀처럼 뽑혀 나갔다.
리처즈는 사막에 있는 사람이 물을 바라는 것처럼 평화를 간절히 바랐다. (P315)
매콘이 갑자기 일등석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는 리처즈를 한눈에 훑어보고 상황을 파악했다. 매콘이 총을 꺼내 들었다. 그와 리처즈가 동시에 발포했다.
매콘이 일등석과 이등석을 가르는 캔버스 천 사이로 사라졌다. 리처즈가 털썩 주저앉았다. 몹시 피곤했다. 배에 큰 구멍이 뚫렸다. 창자가 보였다.
어밀리아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뺨을 아래로 당겨 마치 플라스틱 마녀 얼굴 같아 보였다.
매콘이 비틀거리며 일등석으로 돌아왔다. 그는 웃고 있었다.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것 같았는데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매콘이 두 발을 쐈다. 첫 번째 총알은 리처즈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두 번째 총알은 리처즈의 쇄골 바로 아래에 맞았다.
리처즈도 다시 쐈다. 매콘이 방향을 잃고 춤을 추듯 두어 번 비틀거렸다.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일등석의 두툼한 흰색 스티로폼 천장을 올려다봤다. 마치 이등석 천장과 비교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쓰러졌다. 사과즙 압착기에서 나는 사과 향처럼, 화약 타는 냄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밀리아는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리처즈는 그녀의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P328-329)
이제 제트기는 신이 손으로 떠받친 듯 거대한 굉음을 내며 운하를 건너갔다. 문간에 서 있던 푸시 중독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마지막 먹은 마약의 꿈이 그를 환상의 세계로 멀리 데려가는 것 같았다. 모든 음식이 공짜이고, 모든 원자로가 깨끗한 제너럴 아토믹스의 천국으로.
엔진 소리에 사람들이 문으로 나와서 핼쑥한 불꽃들처럼 목을 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쇼윈도들이 덜컹거리다 안쪽으로 떨어졌다. 도로변의 쓰레기들이 미친 듯이 펄럭이며 볼링장 같은 도로로 쓸려 갔다. 경찰이 전기봉을 떨어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지만, 자신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행기는 여전히 하강 중이었다. 이제 은빛 박쥐처럼 지붕들 위를 미끄러지듯 날고 있었다. 우현의 날개 끝이 ‘글래머 컬럼 매장’의 벽을 겨우 4미터쯤 비껴 갔다.
전파 간섭이 일어나 하딩 전역의 프리비가 하얗게 변했고,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고 두려운 불신의 눈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천둥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킬리언이 책상에서 고개를 들어 사무실의 한쪽 벽 전체를 가득 채운 통유리 창문을 바라봤다.
도시 남부에서 크레센트까지 이어지며 반짝거리던 도시의 전경이 사라졌다. 창문 전체를 가득 채운 것은 다가오고 있는 록히드 트라이스트 제트기였다. 비행기의 야간 항행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완전한 놀라움과 공포, 의혹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찰나의 순간에, 킬리언은 자신을 노려보는 리처즈를 볼 수 있었다. 리처즈의 얼굴은 피범벅이었고, 그의 검은 눈동자는 악마의 눈처럼 불타고 있었다.
리처즈가 씩 웃었다.
그리고 킬리언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젠장.....” 킬리언이 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P339-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