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방범> 2023년
영화 <모방범>(2002)은 나오키상 수상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미스터리 추리소설 「모방범」을, <39 형법제39조>, <검은 집>의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이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를 주연으로 영화화하였다.
[1]
1996년 9월 12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쓰카다 신이치(塚田眞一)는 그날 아침에 일어난 일과 주변 풍경을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매일 다니는 산책로에서 무엇을 보았고, 누가 곁을 스쳐 지나갔는지, 공원의 화단에는 무슨 꽃이 피어 있었는지를.
요 일 년 사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뭐든 기억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매 순간들을 사진을 찍듯 머릿속에 새겨둔다. 사람들과 나눈 대화에서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보관해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상사들은 매 순간마다 단단히 붙잡아두지 않으면 언제 소리도 없이 부서져버릴지 모를 정도로 연약하기 때문이다. (P7-8)
신이치가 이시이 부부의 집에 들어온 지도 어언 열 달이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로키와 함께 산책을 나가는 것이 신이치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이시이 부부는 원래 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로키를 데리고 산책하는 일이 늘 부담이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신이치는 아주머니가 덩치 큰 로키에게 겁을 먹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 때문인지 로키는 신이치를 가장 잘 따랐고, 신이치도 로키를 돌보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시이 부부는 신이치가 개를 잘 데리고 노는 것을 보고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시이 부부는 로키를 기르게 되었을까? 신이치는 몇 번이나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물어보면 대답이야 해주겠지만, 분명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그건. 저 개가 불쌍해서 할 수 없이 기르게 된 거야. 이시이 부부는 그렇게 대답한다. 그렇다. 이시이 부부는 불쌍한 것을 보고는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다. 신이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나도 로키와 똑같은 처지야. 이시이 부부는 그런 생각을 하는 신이치를 바라보면서, 그래, 로키와 네가 똑같은 처지라고 생각하겠지, 우리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부부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신이치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P8-9)
“이게 무슨 냄새야?”
그녀는 신이치를 향해 말했다.
“이 냄새 때문에 우리 킹이 이상해진 것 같아.”
신이치는 여자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킹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방금 킹이 쓰레기봉투 안에서 끄집어낸 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갈색 종이가방이었다. 킹은 그 끝자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턱을 열심히 움직이며 다시 물었다. 종이가방이 뜯어졌다. 내용물이 드러났다. 악취가 더 강해졌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신이치는 킹이 입에 물고 있는 그 내용물의 정체를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말았다.
사람의 손이었다. 팔꿈치 아래쪽, 손가락이 신이치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아침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신이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똑같은 일이 일 년 전에도 있었다.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된다. 비명과 피, 그리고 멍하니 바라보는 나.
저도 모르게 신이치는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한 손, 잘린 팔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손톱은 화단 속에서 활짝 피어난 코스모스의 꽃잎처럼 엷은 자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P15-16)
쓰레기통의 종이가방에서 나온 사람의 팔을 보고 신이치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여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결국 전화로 경찰서에 신고한 것은 산책중에 여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온 중년 부부였다. 중년 부부는 침착한 태도로 경찰차의 사이렌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든 구경꾼들로부터 두 사람을 지켜주면서,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호기심 왕성한 장난꾸러기들이 쓰레기통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현장 증인만으로는 부족해 신이치와 소녀가 경찰서까지 가게 되었을 때도 킹과 로키를 맡아서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경찰차에 동승한 형사는 나프탈렌 냄새가 풍기는 양복 차림에, 방금 수염을 깎았는지 코 아래와 턱 주변이 파르스름했다. 형사는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댔지만, 신이치는 기억하지 못했다. 귀에 들리는 거라곤 쓰레기통 속의 내용물을 보았을 때 여자가 지른 비명과, 그것에 겹쳐서 떠오르는 기억 속의 자신의 비명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종이가방 바깥으로 비어져나온 손가락, 똑바로 신이치를 가리키던 손가락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너야, 하고 지목하는 듯한 그 손가락. 바로 너야, 신이치. 너에게 돌아왔어. 놓치고 말았지만, 결국 나는 이렇게 돌아왔어. 이번에야말로 너를 잡고 말 테야.
그 손은 바로 죽음의 신이라고 신이치는 생각했다. (P33)
시게코는 채널을 바꾸어보았다. 그러나 온통 와이드쇼 아니면 드라마 재방송뿐이었다. 시게코는 욕실로 가서 쇼지가 목욕하면서 즐겨 듣는 방수 라디오를 켰다. 채널을 NHK로 맞추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현장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텐데요?”
그 사건이다! 시게코는 볼륨을 높였다.
“그렇습니다. 방금 발견된 핸드백은 올 6월에 행방불명되어 현재 실종신고가 된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20세 여성의 소지품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발견된 오른팔이 후루카와 마리코 씨의 것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 시게코는 놀란 나머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쳤다. 욕실 거울에 입을 멍하니 벌린 시게코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후루카와 마리코.
‘리스트에 있는 여자다!’
서랍 속에 쑤셔넣었던 쓰다 만 원고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여자들, 그녀는 왜, 무슨 사연이 있기에 모습을 감춘 것일까? 또는 무엇이 그녀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는가?’
그 의문이 하나의 사건이 되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시게코는 등허리에 한기를 느꼈다. (P60-61)
1994년 5월 가와고에에서 기시다 아케미의 전단지를 본 다음, 시게코의 마음속에서는 호기심과 흥미와 충동 같은 것이 한꺼번에 솟구쳐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글을 한번 써보라는 <사브리나> 편집장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만일 독자적으로 르포를 쓴다면......’
자신의 기획으로 글을 쓴다면 소재는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종된 여자들. 왜 사라진 것일까.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가정과 친구와 연인을 버리고 사라져버린 여자들. 어떤 사정이 그녀들을 그리로 내몰았을까.
시게코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시다 아케미뿐만이 아니었다. 시모다에서 보았던 여자의 웃는 얼굴도 자주 시게코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마도 자신의 행복한 처지와 너무도 대조적인 경우라서 그럴 것이다.
‘써보는 거야, 시게코 씨.’
편집장의 말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해 6월. 신칸센을 타고 혼자서 시모다로 향할 때만 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무 배경도 없이 무작정 찾아온 프리라이터인 시게코에게 시모다 경찰서의 경찰관들이 성의 있게 대해줄 리 없었지만, 안되면 그만이라는 가벼운 기분으로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시게코는 운이 좋았다. 히무로 사키코라는 여자 형사를 만난 덕분이었다. 그녀는 성실한 자세로 시게코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서 그만 시게코는 실종자 르포를 쓰려고 마음먹은 경위와 앞으로 결혼할 상대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고 말았다.
“그랬군요. 그래서 실종 여성에 대한 르포를 쓸 생각을 했군요.”
“그렇지만, 정말 내가 쓸 수 있을까요?” (P71-72)
“방금 들어온 뉴스입니다. 오후 세시 십분경 방송국 보도국에 익명의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정오 뉴스에서 전한 보쿠도구 오가와 공원 토막시체 유기사건에 관한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나운서는 천천히 그 내용을 읽어나갔다.
“그 공원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팔밖에 버리지 않았다. 후루카와 마리코의 핸드백은 버렸지만, 그 오른팔은 그녀의 팔이 아니다. 그녀들은 다른 장소에 묻혀 있다. 이것을 경찰에 알려주기 바란다.”
요시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사카기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깥으로 나갔다.
“우리 보도국에서는 그 전화 목소리를 녹음해두었습니다. 현재 이 전화가 장난전화인지, 아니면 사건과 실제로 관련된 것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말투로 보아 남자인 것으로 추정되고, 목소리는 음성변조기를 사용한 듯 기계적으로 합성된 목소리였습니다. 자세한 것은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P101)
세상을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오랫동안 해결의 단서가 보이지 않으면 미디어의 관심은 갑자기 시들해져버린다. 최초의 충격이 크면 그 기세 때문에 미디어의 관심도 오래가지만, 그것도 고작 며칠이다. 오가와 공원의 토막시체 유기사건은 그 전형이었다.
9월 12일에 발생해 13, 14, 15일이 지나도 수사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그러자 미디어의 관심도 점점 멀어져갔다. 와이드쇼 같은 데서는 전화를 건 인물에 대해 추리해보고 테이프를 음향분석기에 걸어 그 결과를 보도하기도 했지만, 일 주일이 지나자 그런 움직임도 사라지고 세상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P123-124)
“그렇지. 바로 그야. 가족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은 고독한 고등학생. 그런 그가, 대도시의 마수에 걸려 살해당한 여자의 사체를 발견했어. 세상에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일이 또 어디 있겠어. 일부러 짠 것 같잖아. 여기에 현대사회의 잔혹한 청춘의 일면이 있다. 이런 건 어때?”
싸구려 주간지의 기사 제목 같지만 이타가키의 표정은 심각했고, 시게코도 웃지 않았다.
“시게코, 그를 쫓아. 그를 알아야 시게코가 지금 쓰려는 르포가 성공할 수 있어. 살아남은 소년에서 시작하면 분명 시게코가 쓰고 싶었던 실종 여성들에 관한 르포와 겹치는 부분이 나올 거야. 고독과, 공포가 말이야. 후루카와 마리코의 이름을 취재노트에서 발견한 순간에 느꼈던 시게코의 공포와도 공명하는 부분이 있어. 그거야말로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의 기록이야. 키워드는 ‘갑자기 파괴된 인생’.” (P197-198)
“이번에 그 사진 건에 걸려든 것이 나였기 때문에, 사진을 분석한 것이 우리 데스크였기 때문에 화가 치민 겁니다. 사진을 찾아내서 좋다고 분석에 들어간 것은 우리 데스크입니다. 토막 시체의 투기 순간이 우연히 사진에 찍혔을 가능성이 있다고 좋아하면서.....”
“하지만 과거에도 그런 우연은 있었어.”
간자키 경부는 천천히 말했다.
“우연한 목격, 우연한 유류품, 우연한 일을 계기로 수사가 진전되고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사의 실체가 아닌가. 탐문수사는 바로 그런 우연을 찾아내는 일이고 말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자네 같은 베테랑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경부는 밝게 웃어 보였다.
우연은 범죄자에게는 항상 적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도 터무니없는 사소한 우연 때문에 흐름이 바뀌어버린다. 사소한 것 하나를 잊었다든지, 공교롭게도 그날 비가 내렸다든지, 택시가 바로 잡히지 않았다든지, 그런 작은 일이 범인을 당황하게 하여 증거를 남기는 것이다. 수사란 그것을 끈기 있게 찾아내는 일이다. (P209)
그러다 문득 오늘 아침 뉴스가 떠올랐다. 미타카(三鷹) 시내의 어린이공원에서 교살된 여고생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바로 얼마 전 신주쿠 플라자 호텔에 후루카와 마리코의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범인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던 여고생이라는 것이 밝혀져 큰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시체가 발견되기 직전에 여고생의 집에 그 음성변조기를 사용한 끼끼끼-- 하는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매스컴은 플라자 호텔에 찾아왔던 여고생은 평범하고 얌전해 보이는 소녀였다고 보도했었다. 이번에 시체로 발견된 여학생은, 학교에서는 얌전하게 지냈지만 한편으로는 매춘으로 돈을 버는 이중생활을 했다고 한다. 삼십대 주부인 시게코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그 소녀를, 신원불명의 오른팔의 주인공과 후루카와 마리코에 이은 동일범의 세 번째 희생자로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사회가 확실히 ‘사망’을 확인할 수 있었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오른팔의 주인공도 후루카와 마리코도, 아직 정식으로는 생사가 판명되지 않았다. 시게코가 그렇게 말하자 쇼지는 미간을 찌푸렸다.
“팔을 잘렸으니까 죽었을 거야. 분명 토막살인이라구.” (P223)
쓰카다 신이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르고 삼켜버린 썩은 물을 토해내려는 듯, 마치 위가 뒤집히기라도 한 듯, 한마디 한마디 쥐어짜면서 말을 이어갔다.
“히구치 메구미라는 아이예요. 고등학교 이학년이지만, 지금은 학교를 그만뒀어요. 그만두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히구치 메구미.....”
물론 모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급히 훑어보았던 사와 시 교사 일가족 살인사건에 관한 기사 속에 히구치 메구미라는 이름이 있었던가?
갑자기 기억을 떠올린 시게코가 외쳤다.
“히구치? 그 히구치?”
“히구치가 누군데?”
쇼지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시게코는 누구인지 알았다. 신이치도 시게코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쓰카다 신이치, 일가족 살인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는 입을 비틀며 시게코를 향해 웃어 보였다.
“히구치 히데유키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죽인 범인입니다. 메구미는 그의 딸이구요. 하나뿐인 딸.”
쇼지의 입이 벌어졌다.
“범인의 딸이 왜 너를 만나려고 해? 왜 네 뒤를 쫓아오는 거야?”
숨을 한번 몰아쉬고 신이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달라고요.”
“너에게?”
“예, 나에게, 면회를 가서 아버지 말을 좀 들어달라고.”
신이치의 목소리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친구와 싸우고 나서 울먹이며 어머니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단속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만나보면, 아버지도 희생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그러면 반드시 감형탄원서에 서명을 하게 될 거라고. 메구미는 그래서 나를 쫓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P246-247)
기다는 두려움과 분노가 한데 섞인 눈길로 도로 쪽을 바라보았다. 요시오는 기다 곁을 벗어나 눈물을 닦았다.
마리코는 이미 죽었어.....
지금까지도 구십 퍼센트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십 퍼센트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형사들도 마리코가 살아서 범인에게 잡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런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마리코는 죽었다. 틀림없다. 그런 확신이 솟구쳤다.
오늘, 요시오는 놈의 화를 돋우었다. 놈이 요시오에게 복수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를 리 없다. 마리코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마리코에게 할아버지, 살려줘, 라고 외치게 하면 된다. 그게 가장 효과가 있다.
그러나 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거부했다. 언제가 되면 된다든가, 시키는 대로 하면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다든가,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요시오에게 모욕을 주었을 따름이다.
마리코는 죽었다. 마리코는 벌써 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가버렸다.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요시오는 생각했다. (P289)
두 사람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한 가전제품 가게 앞에서 시게코는 발길을 멈추었다.
진열된 텔레비전 화면이 모두 똑같은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 화면 앞에서 반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뉴스 화면이었다. 신이치는 보았다. 시게코도 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이야......”
신이치가 중얼거렸다.
“유해가 발견된 거예요.”
시게코는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신이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요즘 시게코는 신이치가 오가와 공원에서 잘린 오른팔을 발견한 부분의 원고를 쓰고 있다. 미즈노 히사미와 만날 약속도 해두었다. 그러나 이 유해의 발견으로 취재 예정도 바뀔 것이다.
젊은 여자의 얼굴 사진이 나타났다.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자막이 나와 있다. 그래, 그 핸드백의 주인. 미인이야. 정말 예뻐. 웃고 있어.
문득 신이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놈이 잡히더라도, 분명 놈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이다. 범인 또한 사회의 희생자라는 논리로, 거기에 반론을 펴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런 희생자들만 가득하다. 신이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진짜로 싸워야 할 ‘적’은 누구인가? (P317)
범죄자뿐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기 쉬운 종류의 인간을 사건 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격정도 아집도 금전욕도 아니다.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것은 다케가미가 오랜 세월 형사생활을 하면서 느낀 진심이었다. 술에 취해 싸우다 남을 죽이는 것도, 총기를 들고 무작정 인질을 쏴 죽이는 것도, 클랙슨을 울렸다고 뒤에 서 있는 차의 운전사를 죽이는 것도,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한다고 상대를 플랫폼으로 끌어내려 철로 안으로 밀어넣는 것도, 모두 영웅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나는 영웅이다. 다른 놈하고는 다르다. 나는 영웅이다. 그런 나에게 주의를 주다니. 이 건방진 놈!
벌레처럼 땅을 벌벌 기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아, 이 영웅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것이 그들의 본심이다. 그들만큼 ‘영웅’이란 말에 취하기 쉽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강한 인간은 없다. 지금 다가와가 연기하고 있는 ‘부당하게 박해받는 희생자’도 ‘순교자’ 성격이 강한 영웅담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다가와는 일어설 것이다. 다케가미는 편광유리 너머 비뚫게 보이는 그림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행동 하나에 저 불쌍한 오른팔의 주인공이 돌아올 수 있어.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당신의 행동에 달렸어.”
착 가라앉은 말투였다. 터져버릴 듯이 긴장된 이 분위기 속에서도 기계음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케가미는 아까보다 강한 의혹을 느꼈다. 사람이 바뀐 건 아닐까? 이놈은 처음 전화를 건 인물, 아리마 요시오나 방송국이나 사카자키 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건 인물과 다른 놈이 아닐까?
지금까지 놈은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면서도 늘 자신이 먼저 흥분해버렸다. 머리는 나쁘지 않지만, 자그만 일에 화를 벌컥 내고 어조가 흐트러져버린다. 아리마 요시오에게 나는 불쌍하고 비참하고 더러운 놈이라고 독백하도록 강요할 때는 거의 히스테리 상태였다.
그러나 이 기계음의 주인공은 다르다. 지금까지 전화를 건 놈보다는 모든 점에서 ‘어른’이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은 내 교환조건을 받아들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기계음은 설득조로 말했다.
편광유리 너머에서 다가와는 머리를 들었다.
“정말로 내가 카메라 앞에 서면 그 오른팔의 여자의 유해를 돌려줄 겁니까?”
스튜디오 안은 정적에 감싸였다. 전화벨은 계속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아, 물론이지. 약속은 반드시 지켜.”
그 순간 특설 스튜디오의 전화벨이 갑자기 멈췄다.
침묵 속에서 다가와 가즈요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 부착된 마이크에 신경을 쓰면서, 편광유리 안에서 걸어나와 카메라 앞에, 시청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P361-363)
이전에 오가와 공원의 쓰레기통 건으로 간자키 경부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믿기 힘든 우연이다. 수사를 하다보면 그런 우연과 자주 마주친다. 그러므로 설령 범인이 유해 일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순간을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사진이 날조되지 않은 이상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범인은 그런 수사진의 심리를 역이용한 것은 아닐까?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는 범인의 덫에 걸려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한편으로 다케가미의 직감과 경험은 그에게 사진에 한 장면을 찍히게 하는 것과 고의로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을 범인으로 날조하기 위해 트렁크에 시체를 숨긴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가택수사를 하면 뭔가가 나올 것이다.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의심이 가는 단서들이 너무 많다. 다카이와 구리하시 두 사람은 아마도, 아마도 ‘범인’일 것이다.
그러나...... (P399)
“여태까지 그렇게 했지만, 이번에 약국에서 사건이 일어났을 땐, 구리하시는 자기가 한 게 아니라 가즈아키가 한 짓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넌 그 거짓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맞지?”
가즈아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기죽지 않아도 돼. 네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잖니. 아주 잘한 거야. 이번에는 구리하시 말대로 하지 않았잖니, 아주 훌륭해.”
“그러니까 구리하시 오빠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유미코가 말했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를 때릴 정도로.”
“그래, 그러니까 오빠를 배신자라고 한 거야.”
아야코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배어 있었다.
“이번에는 구리하시의 말을 듣지 않았지? 그런 용기를 낸 거야. 왜 그럴 수 있었을까? 엄마에게 그 말을 해봐. 가키자키 선생님이 힘이 되어준 거니? 아니면, 네 성적이 나쁜 게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눈이 나빠서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가즈아키는 얼굴을 들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게 아냐. 엄마가 내 눈이 나쁠지도 모른다고 한 건 약국 사건 다음이야.”
아, 그런가, 하고 아야코는 생각해보았다. 따지고 보니 그랬다.
“가즈아키가 나보다 더 기억력이 좋네.” 하고 아야코는 웃었다.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가즈아키는 아야코의 눈길을 피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하고 구리하시는 오랜 친구 사이지만, 늘 같이 다닌 건 아냐. 구리하시에게는 다른 친구가 하나 있어.”
“응, 그렇겠지.”
“특히 초등학교 사학년 때는, 만날 나 말고 그애랑 붙어다녔어.”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응, 새 친구가 생긴 거야. 전학 온 애였어.”
“어떤 앤데?”
가즈아키는 피스, 하고 말했다.
“응?”
가즈아키는 “피스”하고 손가락으로 입술 끝을 위로 끌어당기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피스, 얼굴이 피스 마크하고 비슷하게 생겨서 그런 별명이 붙은 거야.”
“이름은 뭔데?”
가즈아키는 ‘피스’의 이름을 댔다. 아야코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P466-467)
그리고 그런 존재가 되는 그날에,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런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그녀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 주제도 모르고 큰 꿈을 품고 접근해오는 모든 쓰레기 같은 여자를 대상으로, 그녀들이 평생 소중하게 품어온 미래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흥미롭고 짜릿한 시간 죽이기였다.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것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구리하시 히로미는 이런 목적을 위해서 여자를 속일 때는 쓸데없이 거드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가상의 존재가 되어 여자를 속일 때도, 자신이 작은 약국을 경영하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교양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바닥에서 끝없이 위로 상승하는 인간임을 여자에게 어필했다. 자산가의 아들, 기업가의 2세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이 나라는 자유롭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내가 바로 그 모델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인생을 꽃피워줄 희망이며, 백마를 탄 왕자이다. (P502)
'나는 이곳을 알고 있어.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이전에도 몇 번이나 본 곳이야. 이장소, 이 풍경.‘
차를 몰며 유령빌딩에 접근하는 동안 줄곧 그런 생각을 했다. 조수석에서 아케미가 뭐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다. 어떻게? 어디서 봤지? 자문을 거듭하면서 빌딩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차를 멈추고 유령빌딩 앞에 내려서면서 구리하시 히로미는 몸을 떨었다.
막연한 생각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다. 휑뎅그렁한 콘크리트 바닥에 무참히 드러난 철골 구조물, 멀리서 보기에는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인간의 뼈처럼 허옇게 보였던 철골이, 가까이서보니 주위에 가득한 밤보다 더 어둡고 검게 보였다. 그러나 희건 검건, 나는 이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유령빌딩 아래는 구경꾼들이 남긴 쓰레기가 마구 흩어져 있었다. 이른 봄의 차가운 밤바람이 쓰레기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휘몰아가고 있었다.
먼지 냄새가 나는 밤바람이 구리하시 히로미의 얼굴을 스쳤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울고 있어.’
구리하시 히로미는 놀랐다. 왜 우는 거지?
문득 생각이 났다. 해답을 찾아냈다. 어떻게 이 장소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여긴 내가 꿈에서 본 장소와 비슷해.’
그 꿈. 내 몸을 돌려달라고 외치면서 작은 여자애가 쫓아오는 꿈. 아무리 도망쳐도 집요하게 따라오는 여자애. 꿈속의 구리하시 히로미는 도망가다 지쳐 넘어진다. 여자애는 작지만 무섭게 힘이 센 손으로 히로미의 입을 벌리고 머리부터 입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그 꿈속에서 구리하시 히로미는 계속 울었다. 달리면서, 도망치면서 울었다. 여자애가 손으로 어깨를 잡을 때도 놀라 울었다.
눈물. 지금 유령빌딩을 바라보며 흘리는 이런 눈물을 꿈속에서도 흘렸었다.
“추워, 우리 돌아가자.”
춥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다.
그러나 구리하시 히로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쉬었다. 철의 폐허, 내가 꿈에서 본 장소다. 이렇게 비슷한 곳이 실제로 있었다니.....
꿈속에서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어린 여자애가 어릴 때 죽은 누나 ‘히로미’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누나는 죽었고, 뒤에 태어난 자신은 살아 있다. 누나의 이름을 물려받아서.
그러나 누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가 누나의 이름을 훔치고, 그녀의 인생을 훔치고, 그녀의 생명을 훔쳤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이것은 히로미의 생각이다. 죽은 누나 생각에만 빠져 지금 눈앞에서 성장해가고 있는 동생의 마음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만일 살아 있었더라면, 네 누나는 너보다 훨씬 착한 아이가 되었을 거야.’
‘네 누나는 왜 일찍 죽어버렸을까, 너는 이렇게 잘만 살고 있는데.’
‘사람들은 죽은 사람 나이를 세서 뭘 하느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얼마나 착한 애였는데.’
어머니는 그가 용돈 투정을 부리면 귀찮다는 듯이 야단만 쳤다. 그런 돈이 어디 있어, 하고. 그러면서도 예쁜 여자 옷만 보면 사와서 그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리하시 히로미는 눈을 떴다. 유령빌딩의 철골 위에 찢어진 비닐 조각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마치 조그만 유령처럼. (P538-539)
[2]
피스는 거짓말을 하면 된다고 했다. 간단한 일이라고 했다. 가능한 한 단순하게, 열성적으로.
오가와 공원 사건의 뉴스를 구리하시 히로미는 일부러 집에서 어머니 스미코와 아침을 들면서 보았다. 그 뉴스를 접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였다.
어머니가 그런 유의 사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구리하시 히로미는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엽기적인 토막살인이라든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 방화나 유괴, 폭행 같은 그런 이야기를 너무도 좋아했다. 그런 사건들은 모두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것일 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남의 불행을 안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니 당연히 오가와 공원 사건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일 것이다. 발견된 것이 오른팔뿐이라는 것을 알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머리나 몸통이 발견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그 어머니 곁에 앉아 구리하시 히로미는 내심 조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멋대로 지껄이지만, 사실은 남의 일이 아니야. 이 여자들을 죽인 범인이 바로 나라구. 오른팔을 잘라서 버린 것도 나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도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젯밤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NHK 종합뉴스가 시작되는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켰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피스는 오른팔은 오후에 쓰레기 수거를 할 때 발견될 테니 참고 기다리라고 했다. (P21-22)
이야기를 하다보니 대화 상대로 꽤 괜찮은 할아버지인 것 같았다. 피스의 직감이 옳았다.
아리마 요시오는 정말로 마리코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했다. 아주 냉정한 반응이었다. 할아버지는 돌대가리가 아니었다.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뻐하며 그 거래에 응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머리를 풀 회전시키면서 다음 행동을 생각해보았다. 근사한 계획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준비를 했다. 신주쿠 플라자 호텔, 일곱시. 프런트에 메시지를 맡겨두겠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정말 바빴다. 워드프로세서로 간단한 문장을 작성하고, 후루카와 마리코의 소지품 중에서 손목시계를 골랐다. 그 손목시계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마리코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번 거래의 재료로 여자의 손목시계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피스는 없었다. 그렇다면 모두 단독행동으로 해야 한다. 나중에 허락을 받으면 된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상대는 피스가 최고의 제목이라고 평한 마리코의 할아버지가 아닌가. 이야기는 피스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는 셈이다. 아리마 요시오를 무대로 끌어내 중요한 ‘등장인물’의 하나로 삼는 것이다.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구리하시 히로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P49-50)
거울 속 얼굴이 웃고 있다.
상체를 모두 비추는 커다란 거울이다. 이 원룸을 보러 왔을 때, 안내를 해준 부동산업자는 방도 욕실도 작지만 이 큼지막한 거울 때문에 젊은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설명했다.
그 말에는 이 원룸은 젊은 여성에게나 어울리지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맞지 않으니 그만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 방을 빌리기로 했다. 그런 말을 했더니 피스는 배를 잡고 웃었다. 히로미, 넌 정말 성격이 삐딱해, 하고.
만일 부동산업자가 히로미라는 입주자를 선호하지 않았다면 일부러 방까지 안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고에다 ‘여성 전용’이라고 써넣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서 고객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웃기는 놈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구리하시 히로미는 입을 벌리고 웃어 보았다. 가지런한 하얀 이가 보였다.
어릴 적에는 입에 비해 작은 이가 싫었다. 그러나 작은 이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이가 크고 길면 억센 촌놈 같아 보일 것이다.
거울 속의 구리하시 히로미는 약간 여윈 얼굴이었다.
히다카 치아키의 시체를 코끼리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리는 게 생각보다 힘들어 히로미는 땀을 흠뻑 쏟았다. 그러고 나서 옷을 갈아입지 않는 바람에 그만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단순한 감기가 아닐지도 몰랐다. 열이 사십 도 가까이 올라 다음날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 히로미는 창문을 열고 병원 간판을 찾아보았다. (P93-94)
그래서 피스에게 전화를 했다. 히다카 치아키를 써먹었으니 어서 다음 행동에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고 보챘다.
“내가 감기가 걸려서 안 되면 피스가 전화해도 되잖아.”
그러자 피스는 웃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전화는 히로미가 하는 게 좋아. 난 히로미만큼 잘할 수 없어. 스스로는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히로미는 정말 말을 잘해. 세상이 원하는 ‘범인상’에 딱 맞아. 난 도저히 그 정도로는 못 해.”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이 벌벌 떠는 연속살인범을 만들어낸 거야. 이건 창조적 행위야.
물론 처음에는 그 ‘연속살인범’이라는 환영 뒤에 숨어서 기시다 아케미와 가우라 마이의 살인이라는 과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이 세상이 살인자의 초상화를 얼마나 정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가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은 충동이 더욱 강해졌다.
“다음은 어떻게 하지?”
피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제는 후루카와 마리코의 유해를 세상에 내보내도 될 것 같은데.”
“뭐? 그럼 파내자는 말이야?”
“그렇지. 그러니까 빨리 감기가 나아야지. 나만 힘쓰는 일을 하는 건 싫거든.”
“알았어. 알았어.” (P98)
거울은 사람을 비춘다. 얼굴을 비추고 눈동자를 비춘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작용일 뿐, 그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거울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 놓고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기쁨이나 자랑스러움을,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점검해주고 자신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철저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이고,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오후 다섯시 반. 창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베란다에 걸어놓은 타월이 유령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 타월을 걷으려고 창 밖으로 나갔다.
그때 그는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다카이 가즈아키가 우뚝 선 채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P99)
“어이, 히로미, 정신 차려. 내가 왜 우메다 사건에 대해 말하는지 모르겠어?”
“.....”
“진범이 우메다에게 한 행동이 뭔지 생각해봐.”
“누명을 덮어씌웠지.”
“겉으로 보면 그것뿐이지만, 사실은 달라.”
피스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구리하시 히로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진범은 우메다에게 완벽한 ‘악’의 모습을 보여준 거야.”
순수한 악.
“우메다에게 원한이 있었던 것도, 돈이 목적이었던 것도 아니었어. 나중에 변호사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도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고 난 생각해. 상식적으로 거절할 게 뻔할 테니까. 목적은 우메다 측을 괴롭히는 거였어. 최종적으로는 거절하겠지만. 그 사이에 많은 고민을 할 테지. 돈을 주면 정말로 진실을 말해줄까 하고 말이야. 실제로 우메다의 무죄가 밝혀지기 전에 범인은 사형을 당했어. 우메다와 변호사는 분명 후회하고 괴로워했을 거야. 범인은 자신이 죽은 후에 그가 괴로워할 것을 알고 거래를 제안한 거지.”
피스는 즐거운 듯이, 아니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난 잘 모르겠어.” 하고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심한 범죄들도 많잖아?”
“더 심한 범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돈을 빼앗는 것?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범죄일 뿐, 악은 아니야.”
그런가. 구리하시 히로미는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흐르면 손을 들고 만다. 그에게는 애당초 깊은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어려운 문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P202-203)
“도쿄 부근에서 비슷한 실종사건을 일으키는 거야. 그리고 충분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 ‘범인’이 활동을 시작하는 거지. 범행 성명을 내고, 유해를 찾게 만들고,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기시다 아케미와 그 여중생도 ‘범인’의 마수에 걸린 것처럼 꾸미는 거지. 먼 길을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게 가장 안전해.”
그렇게 말하는 피스의 얼굴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물론 그 ‘범인’은 가공의 존재야. 나와 히로미가 만들어낸 신기루. 히로미는 그 신기루의 그늘에 숨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면 돼.”
그렇다. 처음에는 그랬다. 모든 것은 기시다 아케미와 그 여중생의 살인으로부터 경찰의 눈길을 돌리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피스의 말에 구리하시 히로미는 무조건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라고 믿었다. 목적은 명확했다. 가공의 연속살인자를 만들어내어 그 그늘 속에 숨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스는 때로 지금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한다. ‘완벽한 악의 모습’이라고?
“우리가 하려는 것도 단순한 범죄가 아냐. ‘악’을 체현하는 거야.”
피스의 말에 점점 열기가 더해져갔다.
“모든 피해자에게, 모든 피해자의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거야. 왜? 우리 딸이 왜 죽어야 했을까? 범인은 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왜, 왜, 왜?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별것도 아닌 놈들이 잔머리를 굴려보겠지. 경찰도 눈을 부라리며 수사를 할 테지. 그러나 그들은 몰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나, 아니 우리뿐이지.”
거기까지 말하고 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만한 가치가 있고, 또 어려운 일이야. 다만, 네가 다카이 가즈아키에게 들키는 바람에 갑자기 계획을 바꾸어서 그놈까지 끌어들어야 하게 됐지만.” (P208-209)
피스의 지시에 따라 구리하시 히로미는 가즈아키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가즈아키? 아, 집에 있어서 다행이야. 내 말 잘 들어. 드디어 찬스가 왔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그 사건 말이야. 범인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어. 가즈아키가 좀 도와주면 좋겠어. 도와줄 거지?
자세하게 설명할 여유는 없지만,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관계가 있으니까 간단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할게. 네가 잠직한 대로 나는 범인을 알아. 나와 아주 가까운 놈이야.
이름? 그건 지금 말할 수 없어. 미안해. 다만, 너도 아는 놈이야. 나보다는 별로 친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어떻게 그걸 알게 되었냐고? 그놈 말이야. 별장을 가지고 있어. 펜션보다 더 멋져. 9월 초였던가. 거기 놀러갔다가 우연히 창고에 들어가게 된 거야. 그런데 거기에, 낡은 의자와 전기스토브 같은 거랑 같이 그 핸드백이..... 오가와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나온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여자애의 핸드백이 있는 거야. 신문지로 싸서 가구 뒤에 숨겨놓았었어. 창고에서 나오려다가 가구에 부딪혔는데, 신문지로 산 물건이 어깨에 떨어졌지. 열어보니 핸드백이었어.
응? ...... 그럼. 분명히 그 핸드백이야. 그 안에 여자 지갑하고 정기권이 들어 있었거든. 거기에 후루카와 마리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어. 그러니까 분명해.
그때는 아직 오가와 공원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어. 그래서 핸드백을 보고서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야. 그 친구, 여자관계가 좀 복잡해야지. 옛날에 사귀던 여자친구일 거라고 생각했지. 지갑까지 있다는 건 좀 이상했지만, 정기권은 기간이 지난 거였거든.
그러다 도쿄로 돌아오기 직전에 문득 생각이 나서 그놈에게 말했지. 창고에 여자 핸드백을 숨겨뒀더라고. 다른 여자가 그걸 보면 곤란할 테니까 빨리 버리라고 말이야. 물론 놀리려고 한 말이었어.
그랬더니 그놈이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짓더라구. 뭐랄까. 두 눈이 바둑알처럼 새카맣게 변했어. 마치 귀신 같았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나 싶었지. (P280-281)
가즈아키는 히로미를 밀치듯 하며 일어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앞뒤 따질 겨를도 없이, 연극의 줄거리를 잊어버리고, 히로미는 낮게 힘준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 그건 좀 곤란해!”
문을 열면서 가즈아키는 뒤를 돌아보았다. 히로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가즈아키가 내 눈을 똑바로 보다니, 나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다니,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히로미? 어디 한번 말해봐. 내가 어떡하면 좋겠어?”
“장기판의 말이 되어주면 돼.”
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즈아키가 연 문 저편에 어느새 피스가 서 있었다. 얼굴 가득 미솔르 머금고, 그 손에는 기무라를 쓰러뜨린 알루미늄 배트가 들려 있었다.
“장기판의 말이 되어주기만 하면 돼, 그것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피스는 배트를 치켜들었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히로미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너머로 붉은 색채가 떠올랐다. (P317)
“피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돼. 너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머리 나쁜 나도 못 속였잖아. 난 여태 네가 한 말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 히로미가 여자들을 죽이고 있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왜 여기까지 왔어?”
“그만두게 하고 싶어서.”
일그러진 코에서 피가 흘렀다. 가즈아키는 힘껏 목을 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걸 그만두게 하고 싶었어. 같이 자수하러 가자고 설득할 생각이었어.”
피스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마치 강아지를 나무라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런 걸 두고 달밤에 혼자 춤춘다고 하는 거야. 히로미는 혼자가 아냐. 그 뒤에는 지휘자인 내가 있어. 그러니까 가즈아키 너는 이길 수 없어. 너는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단 일 초라도 이긴 적이 없잖아?”
“자수하러 가자, 히로미.”
의도적으로 피스를 무시하고 가즈아키는 히로미에게 호소했다.
“이런 일은 더 이상 안 돼. 너는 절대로 그런 인간이 아니었어. 넌 괴로운 일이 많았던 거야. 그래서 인생이 뒤틀렸을 뿐이야.”
“내 인생이 뒤틀렸다고? 너 같은 놈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히로미가 다시 손을 치켜들자 가즈아키는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넌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어. 난 능력이 없으니까 부모님의 일도 제대로 못 이어받고 있지만, 넌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았으니까 어떤 인생이든 선택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 넌 뭐야? 수입은 있어? 친구는? 애인은?” (P329)
육아 노이로제? 그러나 히로미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남자와 동반자살한 과거를 떠올렸다. 그 과거에 대해 아버지가 얼마나 지독하게 욕을 퍼부어댔는지도 알고 있다.
네 어머니에게 속아서 결혼했다고 원망하던 모습도.
혹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한 것은 아닐까. 막 태어난 딸 히로미, 아기 히로미, 이애가 정말 내 자식일까.
또는 아버지가 아기를 무시해버린 것은 아닐까. 네 멋대로 낳았으니 네 멋대로 길러보라고. 너 같은 여자의 피를 이어받은 계집애 따위는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절망한 나머지 그 부정적인 힘을 아가에게 쏟아부은 것은 아닐까.
베개로 아기의 숨통을 막았다. 삼십 년 전.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고의로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의사는 돌연사로 진단했다.
스미코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아기를 죽였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는 태연히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해서 낳고, 그 아이에게 자신이 죽인 아이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히로미.
히로미는 이 세상에 있다. 이렇게 내 손으로 기르고 있다. 그러므로 히로미는 죽지 않았다. 나는 히로미를 죽이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스미코는 과거를 지워버렸다.
“히로미......” (P376)
“위험해. 히로미, 속도를 줄여!”
가즈아키가 다시 핸들로 손을 뻗었다. 그때, 룸미러 속에서 다시 두 눈이 나타났다. 누나의 눈이 아니었다. 기시다 아케미의 눈도, 후루카와 마리코의 눈도 아니었다. 히로미는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이 누구의 눈인지 확인하려 했다.
다음 순간, 가즈아키는 비명을 질렀다.
룸미러 속에 나타난 것은 어머니의 눈이었다. 그 눈이 히로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밀을 알아버린 히로미는 어머니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히로미는 절망적인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내 인생은 저주 받은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주받았다. 나를 저주한 것은 그 여자의 유령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였다. 여자애의 유령은 나와 똑같은 피해자, 나와 똑같은 희생자다.
무릎 위가 뜨거웠다. 타는 냄새가 났다. 가즈아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히로미는 룸미러 속의 두 눈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눈을 떼면 숨이 끊어져버릴 것 같았다. 누나처럼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젊은 여자들을 죽인 것은 잘못이었다. 정말로 죽여야 할 것은 어머니였다. 여자애의 유령을 두려워한 것은 착각이었다. 좀더 빨리, 그 여자애를 두 팔로 끌어안고 도망쳐야 했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손에 죽지 않을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P378-379)
살인자
살인자의 그림자는
살인자의 뒤를 쫓는다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어느 날엔가 살인자를
죽여 묻어버리기 위해
오랜, 오랜 기억이다. 왜 지금 그 생각이 나는 걸까?
히로미가 운전하는 차가 죽음을 향하여 날아오른 그 순간, 피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느낌에 눈을 번쩍 뜨고는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시 십팔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갑자기 기억의 바닥에서 어떤 신호처럼 그것이 떠올랐다. 그 옛날의 ‘살인자’라는 시.
아마도 초등학교 육학년 때였을 것이다. 국어시간에 담임선생이 다음 수업시간까지 뭐든 좋으니 마음대로 시를 한 편 지어오라고 했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다고 했다.
피스는 공부에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P384)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라는 이십대 젊은이. 그들이 그린로드에서 죽었을 때, 일본 열도 전체에서 절규가 터져나왔다. 정말로, 이들이 정말로 범인인가?
이런 사건에는 반드시 모방범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찰도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실제로 그 사건이 일어난 후 하루 이틀 동안은 기무라 쇼지라는 남자의 시체를 싣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두 사람이 일련의 연속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그후 하쓰다이에 있는 구리하시 히로미의 원룸에서 오른팔이 없는 여자의 백골이 발견되자 모방범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유해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방에서 사는 사람이 일련의 사건과 관련되었음을 말해주는 여러 물적 증거도 나왔다. 그 대부분은 사진이었다.
이제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라는 두 젊은이가 범인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죽었다. 이제 사건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젊은 여성들을 겁에 질리게 했던 악몽은 사라졌다.
그리고 마에히타 시게코의 르포 역시 두 사람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범행의 마지막 무대인 ‘유령빌딩’의 폐허 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마에히타 시게코의 그의 첫부분은 이렇다. (P416-417)
인간이 일으키는 재난의 뿌리에는 오로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다케가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은 드물다. 구리하시와 다카이의 행위를 추적 조사하는 것은 인간의 사악함을 파헤치는 일이기도 하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캄캄한 광맥이 끝없이 뻗어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들의 야망이 자기 만족에서 사회적인 갈채를 요구하는 단계로 팽창되어갔다고 상상하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욕망조차 가장 파괴적인 루트를 따라 표현한 그들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환상이라는 왕국 속에서는 작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은 왕이다.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 자체는 결코 사악하지도 않고 죄도 아니다. 오히려 알력으로 가득한 현실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왕에게도 전제군주에 대한 동경은 있다. 그것 또한 누구든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지향이다. 그 또는 그녀는 곧 바깥 세계로 눈길을 돌린다. 영토를 넓히고 자신이 세운 성 안으로 들어오는 시민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연습’을 거듭하여 자신의 역량이 확인되면 기꺼이 길을 떠난다.
그러나 그 앞길은 천차만별이다. 그들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무엇으로 만족을 얻을지, 어느 정도 규모의 왕국을 만들어낼지, 거기서 선정을 펼칠지 독재자가 될지, 결국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하고 다케가미는 생각했다. 어떤 여자는 순종적이고 상냥한 마음을 가진 아내로서 한 남자의 왕비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어떤 남자는 추앙받는 기업인으로서 몇백 명 사원의 왕이 되어 만족할지도 모른다. 어떤 여자는 배우가 되어 어떤 시대의 여자들에게 꿈을 주고, 남자들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되어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는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가 되어 비록 좁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중요한 실적을 쌓아 그곳을 자신의 왕국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다케가미도 데스크 담당자로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의 작은 왕국을 세워가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아내는 그의 시민이다. 동시에 그는 아내의 시민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의 압제를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민을 갈지도 모를 위험에 빠지겠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시민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개척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서로의 시민이 됨으로써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나약하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다케가미는 생각하고 있었다. (P450-452)
건축가는 또 이렇게 말했어. ‘봐, 이 집은 모든 방에 전화기가 있어. 부엌에도, 화장실에도, 계단 층계참에도 있어. 이건 편리를 위해 설치한 게 아냐. 일종의 원격감시장치야. 남편은 바깥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을 거야. 물론 안 걸지도 모르지. 그렇더라도 내가 전화를 걸면 바로 받으라는 무언의 위압을 느낄 수는 있어.’
다케가미는 다시 한번 허공에 집 모양을 그렸다.
“우리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서 한 바퀴 돌아보고 천장과 벽을 올려다보았지. 두 종류의 벽지를 조합해서 벽에 선을 그려넣은 것이라든지, 방의 칸막이를 세운 각도라든지, 처음 보았을 때는 막연히 괜찮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했어. 그 친구가 말하기를, 이 집은 모든 곳이 예각으로 되어 있다는 거야. 예각이란 뭔가 의문을 제기하는 각이라는군. 그러니까 그 집은 감시하고, 추궁하고, 몰아붙이고, 감금하는 공간이라는 거지. 그 집이 남편의 취향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면, 그 남편이 어떤 인간인지는 눈감고도 알 수 있다고. 그 친구는 말했어. 한마디로 질투심에 가득 찬 폭군. 그러니 범인은 그 남편일 수밖에 없다는 거야.
즉, 그 ‘건축가’ 친구는 집을 보면 거기에 사는 인간의 마음을 볼 수가 있어. 인간의 마음은 사는 곳에 그대로 나타나니까. 살인자의 집은 살인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사기꾼의 집은 사기꾼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그 친구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거야.” (P481)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은 하나뿐이야.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없고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
추워서인지 아니면 감정이 격앙되어서인지, 시노자키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다카이 유미코가 무엇을 믿건 그건 자유야. 그녀가 오빠는 결백하다고 생각하고 싶다면, 좋을 대로 하면 돼. 현실과 자신의 믿음이 맞지 않으면 언젠가 그녀도 마음을 바꾸게 될 거야. 그러다 오빠는 결백하지는 않지만 구리하시 히로미에게 이용당한 희생자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몰라. 또는, 구리하시 히로미의 범행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나약한 친구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생각을 백팔십도 바꿔서, 오빠는 나약하고 교활하고 음침한 범죄자이고 그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 분노하게 될지도 몰라. 어떤 생각도 가능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게 바로 자기 스스로를 이해시키는 일일 테니까.
만일 그녀가 오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하거나, 누군가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다면, 그녀의 그런 행위 자체를 그만두게 하거나, 충고를 하거나, 소송 상대가 되어줄 수는 있겠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야.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까지는 들어갈 수 없고, 또 들어가서도 안 돼.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건 쓸데없는 간섭에 지나지 않으니까.
어쩌면 선을 보고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여자에 대해 자네가 신경을 쓰는 건 이해가 가. 그런 마음은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 필요한 거지. 그러나 시노자키, 자네가 다카이 유미코를 만난다 해도 좋은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녀는 더 깊이 상처입게 될 테고, 더 강하게 자신의 신념을 굳힐 거야. 그거야말로 그녀의 인생을 뒤틀어버리는 일이 되는 게 아닐까? 내 말이 틀렸나?” (P493-494)
“버스터미널 앞을 지나다가 유미코가 바쁘게 달려가는 걸 봤거든. 그래서 서둘러 따라온 거야. 도중에 한 번 놓치는 바람에 못 찾을 줄 알았지. 무슨 일이야? 누가 따라와?”
다카이 유미코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버스터미널?” 하고 유미코는 중얼거렸다.
“그래, 거기. 버스터미널.”
남자는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진 손에 손을 겹치면서 부드럽게 다독였다.
“누구 기다리고 있었어? 아니면 버스를 타려고?”
다카이 유미토는 다시 눈을 깜빡거렸다. 이번에는 의지가 들어간 확실한 동작이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버스터미널!”
그녀는 큰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스위치가 켜진 인형처럼 정신을 차렸다.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여기는 어디지? 왜 이런 차를 타고 있지? 마에하타 씨와의 약속은?
“큰일났어. 돌아가야 해!”
“무슨 일이야?”
남자가 놀라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유미코, 괜찮아?”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다카이 유미코는 비명을 질렀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가려 했지만 안전벨트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자, 잠깐, 도망갈 필요 없어. 나야, 나, 아미가와야. 오빠 친구!”
‘오빠’와 ‘친구’라는 단어가 혼란에 빠진 유미코의 귀에 들어왔다. 문에 달라붙은 자세로 그녀는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아미가와......?”
“그래, 아미가와 고이치(綱川浩一). 기억하지? 가게에 놀러 간 적도 있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미코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밝게 웃었다. 남자치고는 드물게 애교있는 웃음이었다.
“이름보다는 별명으로 기억하려나?”
아미가와 고이치는 겸연쩍은 듯 코를 문질렀다.
“네 오빠나 친구들은 나를 ‘피스’라고 불렀어.” (P530-532)
[3]
“시게코 씨가 유족들의 그런 기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루어주었으면 해요. 분노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그 이전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유족들의 고통에 대해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써주기를 바래요. 그것 하나만 부탁할게요.”
시게코는 “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진짜 다카이 유미코라면, 그 사람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 사람이 시게코 씨에게 뭘 바라건, 시게코 씨를 통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기 전에 유족의 그런 마음을 먼저 생각해주길 바란다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쨌든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그래서 목적이 뭔지 들어봐야 해요.”
“맞아.”
시게코는 힘차게 그렇게 대답하며 신이치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눈을 감고 짧게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터미널이 분명하죠?”
“응, 약속 장소는 분명히 여기야.”
그때 시게코는 터미널 입구에서 깜빡이를 켜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웨건을 보았다. 오펠이었다. 독일 차를 좋아하는 쇼지가 이 고물차를 버리고 꼭 사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던 그 차였다.
운전석에는 젊은 남자가 타고 있었다. 옆에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얀 얼굴이 조금 엿보였다.
오펠이 터미널 안으로 들어오자 시게코가 다가갔다. 조수석에 앉은 여자가 시게코의 차와 노란 스웨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오펠이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조수석의 여자가 내려섰다. 다치기라도 했는지 발을 절고 있었다.
“마에하타 시게코 씨세요?”
전화 속의 SOS, 그 목소리였다. (P14-15)
“이윽고 범인의 이름은 잊혀질 테고, 피해자의 이름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질 겁니다.”
약간 화난 듯한 어투로 아사이 유코는 말을 이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사실이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구리하시와 다카이가 얼마나 악독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잊는다는 거죠. 그것도 너무도 간단히요.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려고 합니다. 아리마 씨, 민사소송을 계속함으로써 형사사건 수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세부적인 사실들을 밝혀내고, 조사하고, 기록해 사람들의 기억에 이 사건이 가능한 한 오래, 구체적인 하나의 묘비명이 되어 머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 게 가능할까요?”
“해야만 합니다.”
아사이 유코는 작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쳤다.
“항공기 사고나 천재지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경우에는 그 현장에 위령비를 세워 매년 위령제를 열죠. 이 사건도 그처럼 취급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 사회가 너무도 간단히 이 사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범인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말았기 때문에 이대로 두면 금방 잊혀지고 말 겁니다. 이건 위험해요. 이번 경우는 잊혀진다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시오는 담배를 꺼냈지만 불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라 손에만 든 채 아사이 유코의 심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P32-33)
그러나 그렇게 물은들 대체 어떤 대답이 돌아온단 말인가. 서로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을 확인하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피해자 유족 연합회라는 것도 결국 이름만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유족이 손을 잡으면 정말로 위로가 될까? 사회를 위해, 다음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악한 죄악을 막기 위해 사건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의 고통을 맛보아야 한다.
어느새 손가락에 낀 담배가 긴 재로 변하고 말았다. 손가락 끝이 뜨거웠다. 요시오는 죽은 벌레 껍질 같은 재를 재떨이에 떨어뜨리고, 천천히 담뱃불을 비벼껐다.
“나는 이해할 수 없군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선생의 의도는 알겠습니다. 그런 활동이...... 사건을 잊지 못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을 거라는 뜻도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바로 대답할 수 없어요.”
“물론 즉시 대답해달라는 건 아닙니다.”
아사이 유코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P37)
그러나 이렇게 동창생들의 증언을 모으는 동안에도 시게코는 정작 아미가와 고이치 본인만은 만나보지 못했다. 현주소를 알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안타까웠다.
그런데 취재가 끝나고 원고를 쓰기 시작하는 순간 다카이 유미코가 시게코에게 접근해왔고, 게다가 놀랍게도 아미가와 고이치까지 같이 나타난 것이다.
시게코는 6회 앞부분에 유미코와 피스를 만난 과정을 썼다. 유미코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만날 약속을 했고, 시게코가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공황상태에 빠져버린 유미코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아미가와 고이치가 발견하고 같이 시게코를 만나러 온 것이다.
마치 각본을 짜맞춘 것 같은 일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것도 시게코만이 아는 사실이다. 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다카이 유미코라는 가해자측의 유족을 시게코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연재 단계에서 공표해도 좋을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다카이 유미코는 그녀의 오빠가 구리하시 히로미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빠는 구리하시가 범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던 거예요. 그놈이 그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안 거라구요.” (P54-55)
“그 두 사람에게 어떤 모델이 있다는 뜻이야?”
“모델? 그런 종류의 범죄에 대한?”
“응, 사실이건 픽션이건.”
“그야 당연하지.”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어떤 근거로 단정할 수 있지?”
“근거라..... 시게코. 인간이란 그렇게 독창적인 동물이 아냐. 모두 뭔가를 흉내내면서 살고 있다고.”
참으로 극단적인 인간관이자 인생관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반론 대신 이렇게 물었다.
“당신도 누군가의 흉내를 내면서 살아?”상대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렇겠지, 아마 나도.”
“누구의 흉내?”
“특정한 개인은 아냐. 나는 말하자면 개념을 흉내내고 있는 거겠지.”
“개념?”
“일반 사회의 통념이라고 할까.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회사에는 다니기 싫고, 아침에 못 일어나고, 간단한 문장을 쓸 수 있고, 기억력은 좋지만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고, 육체노동에는 맞지 않는 남자가 만화나 애니메이션 세계에 들어와서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되면 이런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개념.”
“그게 뭔데?”
“그러니까 일본이란 사회에는 나 같은 작가가 갈고리로 긁을 만큼 많다는 거야. 그걸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이야.”
그리고는 약간 진지한 어투로 돌아와서 말을 이었다.
“그 두 사람의 경우는 드런 점에서 조금 특수하다고 해야겠지. 아무리 세상이 썩었다 해도 여자를 납치하고 감금해서 살해하는 남자가 일본 사회에 쓸어담을 만큼 많은 건 아니니까.” (P68-69)
“제 눈에도 아사이라는 여자는 수상해 보여요.”
안심한 듯이 아리마 요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어.”
“네, 히다카 미치코 씨는 속은 거예요. 오늘도 아사이 유코와 그녀의 동료라는 남자는 아리마 씨와 미야케 씨를 불러내서 두 사람에게 착수금 명목으로 돈을 받아낼 계획이었을 겁니다. 히다카 씨는 벌써 백만 엔을 줬다고 했죠? 미야케 씨와 아리마 씨에게 각각 백만 엔씩 받으면 삼백만 엔. 꽤 괜찮은 수입이니까요.”
“그래서 돈을 받은 다음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거지.”
“그럴지도 모르고, 조금 더 시간을 끌어서 새로운 피해자 유족들도 끌어들이려 했을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이 단계에서 자신이 먼저 나서서 가해자의 유족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자고 말하는 변호사는 없을 겁니다. 아사이 유코가 진짜 변호사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건 간단합니다. 제가 확인해볼까요?”
“해준다면 고마운 일이지, 자칫하면 바보가 될 뻔했어.”
“.......”
“히다카 씨를 데리고 온 아사이라는 여자. 정말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더군. 하나뿐인 딸을 잃고, 그것 때문에 이혼까지 하고 어찌 살아야 할지 모르던 히다카 씨가 넘어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나도 그 연설을 듣고 감동하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말을 잘하던가요?” (P99)
“마리코의 원한에 대해 당신이 설명할 필요는 없어.”
“그런 생각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 생각대로 하면 돼. 그렇지만, 다카이 유미코가 다카이 가즈아키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리 가혹한 일을 당해도 괜찮을까? 그 아이가 마리코를 죽인 게 아니오. 그 아이가 마리코를 그런 참혹한 지경에 빠지게 한 것도 아니고, 마에하타 씨. 꼭 당신과 내 입장이 거꾸로 된 것 같구먼. 당신은 누구를 위해 글을 쓰고 있소? 당신의 목적은 뭐지? 당신이야말로 우리 피해자 가족들의 진짜 마음이 뭔지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애당초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지. 당신에게는 그런 필요성이 없으니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바닥도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시게코는 몸이 떨리지 않도록, 아니, 떨고 있다는 것을 아리마 요시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을 멈추고 턱을 당겼다.
“아리마 씨, 화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피해자나 유족들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건 오해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당신은 왜 글을 쓰는 거지?” (P110)
유미코는 면도칼을 집어들었다. 접힌 면도기를 펼쳤다.
은색이다. 녹도 슬지 않았다. 잘 들 것 같았다. 가쓰키 아저씨가 건강했던 시절에는 매일 이걸 사용했을 것이다.
칼날에 유미코의 얼굴이 비쳤다. 입술이, 볼이, 그리고 눈이 비쳤다. 잔뜩 일그러져 있어서 사람의 얼굴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까 거울에 비친 얼굴보다 자화상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아, 난 이런 얼굴이었어.
전화벨이 울리고 있다. 마치 서두르고 있는 것 같다. 네, 알았다니까요. 이제 걱정 마세요. 지금, 다카이 유미코를 처치할 테니까요.
전화벨이 멈추었다.
유미코는 면도날을 왼쪽 손목에 대고 숨을 토해냈다. (P134)
“너무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건 좋지 않아. 그런 행동은 절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아.”
요시오는 쓰레기통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저 쓰레기통은 가득 차 있지? 하지만 철망으로 되어서 아래쪽에든 것까지 잘 보여. 안 보이는 게 보기 더 좋은데 말이지.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번 버린 것을 꺼내서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옛날에는 제 역할을 했다 해도 일단 쓰레게가 되어버리면 그걸로 끝이야. 굳이 끄집어낼 필요는 없지.”
어울리지 않는 설교다. 신이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벤치의 회사원은 잠들어 있었다. 저러다가 감기 걸릴 텐데, 하고 요시오는 생각했다. 깨워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신이치가 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유미코 씨에게 그렇게 관대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 저는 그렇게 못해요. 사, 살인자 쪽 인간의 변명은 절대로 들어줄 수 없어요.”
속이 울렁거려 토하기 직전처럼 입 주위가 부르르 떨렸다. 신이치는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그때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히구치 메구미에 대해, 그녀에게서 도망친 경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걸어온 폭 삼십 센티미터의 길에 대한 설명이었다. (P186)
“방화범은 자신이 일으킨 화재의 현장을 보러 오고, 살인자는 범행현장으로 돌아오지. 피해자의 장례식에도 참석하고,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하기도 해.”
“흠, 자주 듣는 이야기군.”
“범죄심리학자들은, 범인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무의식에서는 경찰이 빨리 자신을 붙잡아서 벌을 주기를 바라는 충동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난 그 이상으로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고 싶고,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더 강하다고 생각해.”
다케가미는 전화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겐자키의 홈페이지를 체크하기 시작한 작년 2월경에 마침 편의점을 노린 시시껄렁한 강도상해사건이 있었어. 그런데 범인을 잡아보니, 그놈이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은 사소한 그 사건에 대해 그 홈페이지에 그럴듯한 의견을 잔뜩 올렸던 거야. 심야의 편의점이 범죄를 유발하는 조건과 도시생활 속에서 인간의 폭력성이 환기되는 이유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말이야.”
다케가미는 눈을 비볐다. 심야에 혼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젊은이의 그림자가 눈에 떠올랐다. 다케가미의 상상 속에서 그 젊은이의 눈에는 흉포한 빛이 번득이지도 않고, 일상의 권태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지도 않다. 다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즐길 뿐이고, 그럴 때면 즐거움으로 눈이 빛난다.
“만일, 이건 어디까지나 만일이지만, 구리하시 다카이 외에 제삼의 인물이 있다면 그놈도 그 강도범과 같은 행동을 할 거야. 사건에 대해 말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릴 테지. 빠르건 늦건 언젠가는 말을 하게 되어 있어. 사건이 진행되고 있을 때 HBS에 전화를 걸었듯이 말이야. 그리고 이번에는 그때처럼 도중에 그만두지 않을 거야.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기분이 확 풀어질 때까지, 지겨워질 때까지 마구 뱉어놓겠지.”
“기분이 풀어지고 지겨워지면 어떻게 할까?”
다케가미의 머릿속에 있는 말을, 이쿠다는 입에 담았다.
“또다시 사람을 죽이기 시작할 거야.” (P196-197)
요시코는 텔레비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캐스터가 말했다.
“현재 경찰이 내세우는 견해가 정말로 타당한지,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우리 HBS는 독자적인 취재를 거듭해 어떤 추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여운을 두고 화면이 바뀌었다. 화면 가득히 커다란 문자가 춤을 추었다.
‘연속살인사건의 주범은 살아 있다.’
그날 저녁은 먹은 것 같지도 않았다. 요시코는 계속 텔레비전만 쳐다보고 있었다. 남편과 마스모토는 기계적으로 식사를 해치우고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번에도 텔레비전에서 이런 걸 방송할 때 범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잖아. 그게 어느 방송국이었더라?”
“같은 HBS였을 겁니다.”
요시코의 귀에 둘의 말소리가 잡음처럼 들려왔다.
1.일련의 사건의 이면에는 지금까지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제삼의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을 X라고 하자.
2.사건의 진범은 이 X와 구리하시이며, 주범은 X이다.
3.다카이 가즈아키는 일련의 범행에는 일절 가담하지 않았지만, 구리하시 히로미가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구리하시와 X에게 협박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HBS의 주장은 크게 이 세 가지였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러했다. (P227-228)
“우리 HBS는 이 사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사회에 불안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수사본부가 모든 것을 구리하시와 다카이의 탓으로 돌리고 빨리 사건을 마무리지으려는 것은 이런 잔혹한 사건을 미해결상태로 남겨두면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소동이 오래 지속되면 모방범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해결하려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진실을 덮어버리면서까지 사회의 평온을 우선하는 것은 옳지 않다. 캐스터는 그렇게 말하고, 게스트 한 사람을 소개했다.
또 평론가나 학자가 나오리라 예상하고 있던 요시코는 깜짝 놀랐다. 캐스터의 옆에는 언뜻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청년이 캐스터와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게스트로 모신 분은 아미가와 고이치 씨입니다.”
캐스터는 카메라를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청년 쪽을 돌아보았다.
“현재는 학원에서 강의를 하신다지요?”
“네, 그렇습니다. 초중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깔끔한 차림에 잘 정돈된 긴 머리카락이 꽤 호감이 가는 청년이었다.
“아미가와 씨는 사망한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의 동창생이시라고요?”
졸린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요시코의 남편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동창생? 이 자식, 잘도 텔레비전에 나왔구만.”
“좀, 조용히 해요, 여보.”
요시코는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프로그램의 전반에서 소개한 HBS의 새로운 견해는 사실 우리가 분석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HBS도 일련의 사건에 대해 취재를 계속해왔습니다만, 이번에 이런 프로그램을 편성하게 된 계기는 바로 아미가와 씨가 보낸 한 통의 편지였습니다.”
화면에 편지를 비추어준다. 목소리가 겹쳐진다. ‘현재 경찰의 수사 방침에 대해 나는 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P232-233)
“그렇습니다. 저는 그를 잘 압니다. 그럴 경우 가즈아키는 혼자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정말 착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히로미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만일 정말로 네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면, 나랑 같이 경찰에 가서 자수하자고요. 그런데 히로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범이 달리 있었지요. 그 결과, 그 주범에게 협박을 당한 겁니다. 그러므로 가즈아키의 행동은 절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협박을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히로미가 주범에게 조종당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로미에게 동정적이었고, 살인을 저지른 다음 정신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그를 감싼 것입니다.”
아미가와의 설명이 끝나자, 캐스터가 한 권의 책을 내밀었다.
‘또하나의 살인’이라는 제목이었다. 저자는 아미가와 고이치. 캐스터는 오늘 이 프로그램이 아미가와의 저서에 따라 전개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 HBS는 앞으로도 아미가와 씨와 협력하여 사건의 진상을 해명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결국 자기가 쓴 책 선전이잖아.” 하고 남편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아다치 요시코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아미가와라는 청년을 만나러 가자.’ (P240-241)
“어디일 것 같아?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어?”
간발의 틈도 두지 않고 건축가가 대답했다.
“이 집 안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이미지라고 했잖나.”
건축가는 다시 눈을 비볐다.
“이 집은 아마도 무대가 아닐까 싶어.”
“무대?”
“응, 자네는 연극 같은 거 좋아하지 않지?”
“그런 문화생활이랑은 인연이 없네.”
건축가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빙긋 웃었다.
“난 연극을 좋아해. 특히 살인극이나 미스터리를 자주 봐. 줄거리도 재미있지만, 세트가 아주 흥미로워.”
“뭐야, 결국은 건물을 본다는 것 아냐?”
“하기야 그렇지. 미국 쪽에서 히트한 연극은 대체로 세트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어. 미스터리 극은 실내극이 많으니까.”
목을 약간 비틀어 허공을 바라보더니 건축가는 말을 이었다.
“그런 연극에서 집이란 비밀을 감추고 있는 상자나 마찬가지야. 그것도 일이 년이 아니라 몇십 년, 몇백 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지. 바다 건너편의 극작가들은 그런 걸 잘 알고 있어. 역시 역사의 차이라고 봐야겠지.”
일본인은 나무와 종이로 집을 짓기 때문에 대체로 한 세대가 지나면 집을 새로 짓는다. 집주인보다 집이 더 오래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돌이나 벽돌로 집을 짓기 때문에 그 안에 사는 사람보다 집의 수명이 더 길다. 집은 몇 세대에 걸쳐 거기에 사는 사람의 역사를 목격하고, 은밀한 애증을 알고, 사건을 간직한 채 외부의 사람들은 누구도 모르게 그것을 숨긴다.
“그렇지만 숨기기만 해서는 사회생활이 불가능하지. 그래서 집이라는 상자 안에 겉으로 보여주어도 좋은 부분을 만들어두는 거야. 그것이 바로 무대지.”
그렇다면 집에 사는 사람은 그곳으로 나올 때만 등장인물이 된다. 스토리도 거기서 진행된다.
“나는 구리하시 히로미가 찍은 이 사진들을 보는 사이에, 뭐라고 할까..... 무대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잘 표현을 못 하겠지만..... 이 여자들은 말이야. 감금된 방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일종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리는 거지. 그녀들을 괴롭히고 사진을 찍은 범인 역시 등장인물이야.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이런 잔혹한 연기를 하는 거지.”
“글쎄. 그건 좀...... 난 이 사진을 찍은 구리하시 히로미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즐겼던 것으로 보여.” (P252-253)
요시오는 신이치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이번에는 이 할아버지 옆에서 나를 도와줘. 내가 어떤 발악을 하는지 지켜봐. 그러면서 너도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을 터득해나가는 거야.”
노인의 손이 가볍게 신이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건 히구치 메구미가 아니야. 바로 너 자신이지. 그애도 그것을 아니까 그렇게 쫓아다니는 것이고,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어떤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거야.”
신이치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았다.
“마음의 위안이요......?”
“그럼. 나만 불행한 게 아니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그애는 생각하는 거지.”
우리는 모두 희생자라고 히구치 메구미는 말했었다.
“너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고 했지.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야. 멋진 결단이야.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문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이제 그애에게 말을 해줘. 이제부터 나는 자책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야.”
신이치는 중얼거렸다.
“그애는 먼저 자기 아버지를 만나달라고 할걸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직접 그것을 인정하라고 말이에요.”
“그럼 이렇게 말해주렴. 내가 느끼는 죄의식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너의 지시는 필요 없다. 너도 너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 스스로 생각해라. 아버지 핑계를 대지 말라고 말이야.”
아버지 핑계를 대지 마.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신이치는 입술이 떨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오랜 병마에서 깨어나는 하나의 징후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병의 원인은 제거했다.
신이치는 울었다. 길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아리마 요시오는 신이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누군가의 팔에 안겨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주 억세고 따스한 팔이었다. 그것은 단지 부모나 어른의 팔이 아니었다.
고통스런 길을 함께 걸어갈 동지의 팔이었다. (P280-282)
손으로 이마를 닦더니 쓰노다 마유미는 얼굴을 들고 노리코와 시노자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비행기 안에서 아미가와 씨가 즐겁게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마도 스태프 가운데 히로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나봐요.”
이번에는 노리코가 몸을 긴장할 차례였다. 시노자키도 이윽고 쓰노다 마유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아미가와 씨가 그 히로미라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어요.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너무해요. 히로미 씨’라고 했던 것 같아요.”
쓰노다 마유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주먹을 쥐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 기억이 떠오른 거예요. 마치 녹화 테이프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내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칠 때, 차에서 내려 조롱하는 듯한 음성으로 구리하시 히로미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였어요. ‘저 여자는 너무 커, 히로미.’ 틀림없어요. 육성으로 들으니 그제야 알 수 있었어요. 구리하시 히로미와 같이 나를 덮치려 했던 사람은 바로 그 아미가와 고이치였어요.” (P315-316)
아미가와 고이치는 어떤 인물일까?
지금까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의 어릴 적 친구이며 가즈아키의 누명을 벗겨주려고 일어선 정의의 청년, 가즈아키의 여동생 유미코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돌봐주고,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하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말을 잘하고, 얼굴까지 잘생긴 젊은이, 그런 분위기와 겉모습에 매혹되어 지금까지 아무도 그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평생 놀면서 지낼 수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 왜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와 같은 공립초중학교를 다녔을까?
조사해보면 사실은 별것 아닌 사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 명함이라도 주고 갔나요?”
시게코의 물음에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 받아뒀어요. 그렇지만 출판사로 연락하게 되어 있어요.”
현재 그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그의 부모는 어디 있을까? 그의 어린 시절은 정말로 그가 말하는 대로였을까? (P340-341)
“그렇기 때문에 아미가와의 주장은 그런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정도로 인상적인 방식으로 등장할 필요가 있었어. 그래서 준비 작업이 필요했던 거야. 우선 유미코가 아크 호텔에서 피해자 유족을 만나 소동을 일으키게 만들고, 그것을 기사화해서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세상에 알리는 거지. 그게 제1단계야. 그다음에는 그녀가 그런 소동을 벌이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이 구리하시와 다카이 공범설을 바탕으로 한 르포로 화제가 되고 있는 마에하타 시게코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제2단계. 그 다음 단계가, 자살을 시도할 만큼 궁지에 몰린 친구의 여동생을 대변해 사람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버리는 지금의 저널리즘, 대표적으로 마에하타 시게코에 대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정의의 칼을 빼들고 나서는 아미가와 고이치의 등장이야.”
요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히사미는 음식이 끓고 있는 냄비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신이치, 꼭 탐정 같아.”
히사미는 젓가락을 들고 냄비 안을 휘저었다. 그리고 요시오에게 야채를 권하며 말했다.
“신이치, 아미가와는 네가 말한 대로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유미코를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난 <또하나의 살인>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어. 다카이 가즈아키는 일련의 유괴살인사건에는 관여하지 않았을 거야. 그는 사건에 말려든 것뿐이야. 원래 성격이 소극적이라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걸 거야.”
“그럼 진범 X가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는 거지.”
아리마 요시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 이렇게 말했다.
“진범 X가 정말로 있다면, 그놈은 아미가와 고이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P371-372)
아미가와의 말대로 신이치는 생존자다. 그러나 책임이 있는 생존자다. 범죄의 계기를 만들어준 죄인이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지금에야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지만 히구치 히데유키가 막 체포되고 아직 사건의 상세한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을 무렵에는 그들이 신이치가 흘린 정보를 듣고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 하나만을 들어 신이치도 그들의 한패가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도 타인이나 경찰측이 아닌 친척들이. 신이치가 부모와 곧잘 다투었던 건 사실이다. 동생과 말싸움을 하다가 손찌검까지 한 적도 있었다. 사춘기 자녀들이 있는 가정이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지극히 평범한 사실들마저 신이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불러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주위의 눈이란 그런 것이다. 진실이 자신에게 직접 닥쳐와 도망칠수 없는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인간은 그것과 직면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해석을 ‘진실’로 채택하는 것뿐이다. 신이치를 의심한 사람들은 그가 아무 생각없이 흘린 말이 참사를 불러왔다는 무서운 가능성에 직면하기보다, 신이치도 그들과 한패라는 설을 선택하는 편이 마음이 편했던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가 사건의 원인이었다는 이해 불가능한 현실을 부정하고, 부모와 동생에 대한 흉악한 살의를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얌전한 소년을 현실화하는 것이 보다 받아들이기 쉬웠던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하지만 그 ‘그것뿐’이 문제다. 지금 아미가와 고이치를 대하는 신이치 역시 그와 같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확실히 신이치는 아미가와가 싫었다. 소름이 끼쳤다. (P376-377)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어둠을 지니고 있어. 범죄자만 사악한 게 아냐. 너나 나나. 다 똑같이 시커먼 부분을 갖고 살아가고 있어. 난 그걸 글로 쓸 거야. 가즈아키의 오명을 씻을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히로미에 대한 글을 쓸까 해. 그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알고 싶어해. 왜냐하면 모두들 자신의 마음속에 구리하시 히로미와 닮은 부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무서워하고, 또 흥미를 느끼는 거야. 나는 그곳에 빛을 비춰주고 싶어. 나라면 아마 마에하타 시게코보다 훨씬 더 잘해낼 수 있을 거야.”
당신의 그 그럴듯한 소신 속에 희생자들이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 있지? 신이치가 겨우 말을 찾아내서 그렇게 물으려고 눈을 들었을 때는, 아미가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다케가미의 이름을 떠올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명함을 받아둘걸, 하고 신이치는 후회했다. 그날 보쿠도 경찰서에서 단 한번 대화를 나누었던 형사를 이런 식으로 찾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리하시와 다카이 사건의 수사본부에 근무하는 형사에게 매달린들 아미가와 고이치가 히구치 히데유키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이치는 이 분노를, 이 불안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논리와 이성적인 사고는 강렬한 감정 앞에서는 바람 앞의 낙엽과도 같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은 늘 살인자의 변명에만 귀를 기울이는 건가? 진범 X가 접근해오기를 기대하면서 경찰이 아미가와에게 경호를 붙이고 있다고? (P391)
다카이 유미코는 뛰어내렸다. 십일층 창문에서, 지상으로.
아미가와 고이치는 커튼이 쳐진 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커튼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할까.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떨어질지도 모를 정도로 몸을 내밀고, 유미코가 떨어진 장소를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귀찮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무섭기도 했다. 어쨌든 앞으로가 큰일이다. 지금까지 이성으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울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어떤 표정도 자유자재로 지을 수 있었다. 어떤 태도라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장소에 따라, 때에 따라, 상대가 바라는 대로, 때로는 상대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태도나 표정까지 날카롭게 알아차리고 먼저 연기할 수 있었다.
천부적인 자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는 것만큼은 정말 싫었다. 거짓 울음은 멋지게 성공한 적이 없었다.
다카이 유미코의 자살에는 아마도 그의 눈물이 필요할 것이다.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공주를 잃은 정의의 기사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 눈물이라는 것을 들킬 정도라면, 아예 울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냉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는 편이 거짓 눈물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다.
그 사진과 워드프로세서로 만든 협박장은 유미코의 손에서 회수해 두었다. 이런 건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잖아? 오늘은 이만 자, 그렇게 말하고 그는 유미코의 방을 나섰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버려진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
구리하시 히로미와 다카이 가즈아키가 죽은 후로 11월 한 달 내내 아미가와 고이치는 오로지 기다렸다. 수사가 진전되기를, 발견될 물증을, 목격증언을,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자신을 향한 것이 있다면 신속하게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많은 것을 만들었다. 다카이 가즈아키의 유서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은 산장에서 썼다. 두 사람이 그렇게 죽은 이상 가짜 유서 따위는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썼다. 심심풀이였다. 히가와 고원 일대의 도로 봉쇄가 풀리기까지 산장에 몸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하늘은 아미가와 고이치의 편이었다. (P434-435)
세타가야의 자택도 부지만 이백 평이 넘고, 넓은 정원에 크고 작은 건물이 세 채 있었다. 시게코가 확인한 한에서는 그 가운데 한 채에 아미타니 부부가, 한 채에 장남 부부가, 그리고 제일 작은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장남 외의 자식들도 모두 독립했지만 부모의 부동산에 살고 있었다.
‘양녀’ 기요미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양녀는 어떤 구실일 것이다.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기요미는 분명 아마타니의 애인이었을 것이다. 자산가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애인에게 어떤 형태로든 재산을 남겨주고 싶을 때 활용하는 것이 이런 양자 제도이다. 아내가 될 수 없으니 자식으로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백 퍼센트 확률에 가깝게, 아미가와 고이치는 기요미와 아마타니 히데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일 것이다. 아미가와 게이스케와 기요미 사이의 기묘하게 짧은 결혼 기간을 생각해보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꽤나 복잡한 가정환경이다. 아미가와 고이치는 어머니에게 누가 아버지라고 듣고 자랐을까.
아미가와 게이스케? 아니면 아마타니 히데오?
아니, 실은 그의 어머니 자신도 누가 아버지인지 확실히 모를 가능성도 있다. 그녀가 아미가와 게이스케와 아마타니 히데오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어쨌든 기요미는 임신했다. 두 남자에게 알린다. 아마타니는 처자가 있는 몸이라 책임을 지기가 힘들다. 아미가와 게이스케는 어떨까? 그가 아마타니 히데오의 존재를 모르고 기요미를 사랑하고 있었다면 그 소식을 기버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한다. 고이치가 태어난다. 행복의 절정이다. 그러나 기요미가 아마타니와 손을 끊을 수 있었을까? 아마타니도 그러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이치가 자신의 자식일지도 모르므로.
그런 복잡한 관계 속에서 일 년 후 기요미는 이혼했다. 그후 기요미가 아마타니 히데오의 양녀가 되기까지의 이 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은 아마타니 가의 분규를 조정하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또는 이 시기에 아마타니와 고이치 사이의 친자 감정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요미가 아마타니의 양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이치가 아미가와 게이스케의 호적으로 돌아간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부인과 자식들의 저항 때문에 기요미 하나만 호적을 옮기자는 타협안이 나온 것일까? 아니면, 친자 감정 결과 아미가와가 친부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일까?
아미가와 게이스케 쪽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재혼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이치라는 과거를 강요당하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과연 아버지로서 애정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고이치는 어머니 곁에 머물고, 이윽고 모자는 아마타니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
그러나 아마타니의 지원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토에스테이트의 사장이나 사원이었던 이들을 찾아가 물어보면 그 주변 사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사 자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옛날 이야기를 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너무 상상력을 발휘해도 좋지 않다. 시게코는 머리를 흔들고는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어떤 경위가 있었건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있다. 유년기에서 사춘기에 걸쳐 아미가와 고이치는 자신의 자리를 찾기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의 자식이건 그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차라리 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아미가와 고이치의 호적둥본을 보면, 그는 지금도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과 같이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일 다른 기자가 아니마가와 고이치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조사를 했다 하더라도 이 호적등본만으로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키포인트는 아마타니 기요미라는 여성이다. 그녀를 조사해야만 이 기묘한 인간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P455-457)
아미가와 고이치의 어머니 아마타니 기요미는 팔 년 전에 그녀의 양아버지이자 애인인 아마타니 히데오에게서 히가와 고원 북쪽의 별장을 넘겨받았다. 다른 곳도 아닌 히가와 고원. 기무라 쇼지가 납치되어 살해당한 곳이며, 수사본부가 구리하시와 다카이의 아지트가 존재할 확률이 높은 곳으로 주목하는 그 장소.
거기에 아미가와의 어머니가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
사장은 갑작스런 전화에 싫은 기색도 없이, 그 산장의 명의를 아마타니 히데오에서 아미가와 기요미로 변경한 것이 자신의 마지막 업무였다고 설명해주었다. (P459)
“아미가와 고이치는 아주 교묘하게 행동했습니다. 그가 한 행동은, 만일 그가 진범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맹점이었지요. 그에 대한 다른 의문이 나올 때까지 그의 성문 감정을 해보려는 생각도 못 했어요. 어떤 방송국도 하지 않았죠.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진범 X를 찾기 위해 전 일본의 남자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조사한다 해도 아미가와 고이치는 제일 먼저 제외될 수 있어요.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합니다. 진범은 숨어 있다고 다들 믿고 있으니까요. 제 발로 밝은 장소로 기어나올 리 없다고요.
아미가와 고이치는 그런 과거의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범죄를 저지른 동기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무엇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우리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미가와 고이치가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사 중 한 명은 그저 거대한 한 편의 연극을 벌이고 싶었던 거라고 설명했지만, 그것도 이해하기 힘들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가 대단한 거짓말쟁이라는 것뿐입니다. 무서울 정도로 말을 잘하는 놈이지요.
그렇지만, 마에하타 씨. 거시말의 유효기간은 짧아요. 그 거짓말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말이죠. 그가 세상에 나온 것은 1월 22일. 오늘까지 며칠이 지났습니까? 사십 일도 넘었습니다. 지금까지 오래 버텨온 셈이에요. 하지만 이제 한계입니다. 놈은 이제 끝이에요.”
시게코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키쓰가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린아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P474-475)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아직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자신의 손으로 사람들을 마구 죽여놓고, 그 죄를 남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가족을 자기 편으로 만들다니, 인간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숨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른느 곳에서 계획을 세우고, 각본을 짜고, 거기에 따라 연출을 했다. 너무도 멋들어진 솜씨였다.
그는 의기양양해 있을 것이다. 작가이면서 연출가이면서 주연배우이기도 하다. 그런 독창적인 각본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뭔가를 흉내낸 것도 아니다. 완전히 오리지널이다.
문득, 시게코의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인간이란 모두 누군가의 흉내를 내고 살아, 시게코.’
시게코는 우뚝 멈춰 섰다.
그렇다. 누군가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동료 작가였던가? 그래, 그는 이렇게도 물었다. 구리하시와 다카이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팬이었어? 그들이 그걸 보고 따라한 거야?
‘그렇지는 않겠지. 만일 그렇다면 누군가가 모델이 된 작품을 찾아내서 소동을 벌였을 테니까.’ (P482)
“가장 큰 유사점은, 이 책에서 다룬 사건에서도 최초로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죽은 다음에....”
“용의자가 죽는다고요?”
“네, 그 다음에 그가 살인범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옵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의 친구죠.”
아미가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스튜디오 안에서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시게코는 말을 계속했다.
“실제로 그 주장에는 꽤 설득력이 있어서 매스컴은 그것을 크게 다룹니다. 사망한 청년이 범인이라고 지목한 주 경찰도 재조사에 들어가고, 연방수사국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판명된 사실이 정말로 충격적입니다.”
시게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스튜디오 안이 적막에 싸였다.
“사실은 죽은 용의자는 결백하고,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해 화제를 모았던 그 친구가 바로 사건의 진범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물증이 몇 가지 발견되어 도망칠 수 없게 된 그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재미있었으니까, 정의의 편을 드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게 유쾌했으니까.’”
시게코가 손에 든 책의 제목은 ‘JUST CAUSE'. 번역하자면 ’왜냐하면‘ 정도의 뜻일 것이다. 물론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범죄소설이긴 하지만 전혀 다른 내용이다. 단지 책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빌려온 것뿐이었다.
“엉터리 같은 소리 지껄이지 마.”
아미가와 고이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출연자들뿐 아니라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방금의 그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시게코는 의자에서 무릎을 조금 옆으로 빼내 아미가와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엉터리가 아니에요.”
심장이 고동치고, 무릎이 떨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에는 땀이 고이고 손가락이 저려왔다.
“모두 이 책에 적혀 있습니다. 사실이에요. 십 년 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십일 년 전입니다. 저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사건도 십일 년 전의 이 사건을 아는 범인이 이 내용이 일본에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흉내내 저지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졸한 흉내입니다. 거창한 모방범이지요. 읽으면서 제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였으니까요.”
아미가와 고이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P493-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