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의 <하이라이즈>

영화 <하이-라이즈> 2016년

by 노용헌

전 세계 SF소설 독자들에게 ‘SF소설의 거장이자 뉴웨이브 운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J. G. 밸러드의 《하이-라이즈》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 [하이-라이즈]는 톰 히들스턴, 제레미 아이언스, 루크 에반스 등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한 배우들의 출연으로 오래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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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랭 박사는 발코니에 앉아 개고기를 뜯으며 지난 석 달 동안 이 거대한 고층 아파트 건물 안에서 일어난 괴상한 사건들을 반추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자 지난 석 달간 그들의 생활이 사악하게 뒤틀렸던 것에는 뚜렷한 시발점도, 명확한 계기도 없었음을 깨닫게 되어 한층 더 경악스러웠다. 슈퍼마켓, 수영장, 은행, 초등학교까지 갖추고 있는 이 고층 아파트 단지는 총 5동으로, 각 동은 40층, 천 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늘 높은 곳에 고립된 것과 마찬가지라서 폭력과 대립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하기는 했다. 그런데 큰 다툼의 초기 불씨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이곳 25층 스튜디오형 아파트에서 시작될 줄이야. 이것은 로버트가 결코 원치 않던 일이었다. 아파트 건물에 차례로 뚫어놓은 구멍들은 집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값비싸게 매겨진 감방이었다. 그래도 평온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익명으로 살 수 있다는 이유로, 로버트는 이혼 후에 이 아파트를 구입했다. 재미있는 점은, 로버트가 사소한 언쟁과 짜증을 유발하기 일쑤인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이천여 명에 달하는 건물 입주민들과 거리를 두며 상당히 조심조심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중대한 사건이 그의 집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의과대학에 강의하러 가기 전 전화번호부들을 모아 태우며 셰퍼드의 뒷다리를 구워 먹고 있는 바로 이 발코니에서 말이다.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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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쯤, 로버트는 샬럿의 아파트로 갔다. 다른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TV 프로듀서인 리처드 와일더라는 남자였다. 떡 벌어진 체구에 호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로, 한때 프로 럭비 선수였다는데 지금은 이 건물 2층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일명 하층부에 속하는 집에서 친구들 --항공기 조종사 그리고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스튜디어스 세 명--을 불러 시끌벅적한 파티를 하곤 해서,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에 대해 말이 많았다. 하층부 주민들은 위층에 사는 이들과는 달리 파티를 여는 시간대가 불규칙했다. 어제 저녁 파티에서 무방비 상태로 얘기를 듣고 있던 로버트에게 앨리스는 이 고층 아파트 어딘가에 몸 파는 이들이 있다는 말을 속삭였다. 스튜어디스들이 위층의 다른 아파트를 드나들며 은밀히 사교 활동을 하는 것이 앨리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곳은 몇 층에 거주하느냐가 누가 우월한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인데, 앨리스는 스튜어디스들이 이 건물의 자연스러운 사회질서를 흐트러뜨린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살다 보니, 로버트는 자신을 비롯해 바로 이웃한 주민들이 상층부 주민들이 발생시키는 소음이나 골칫거리를 더 많이 참고 사는 편임을 알게 되었다. 반대로 상층부 주민들은 자기네보다 아래층에 사는 주민들에 대해 그만큼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로버트는 목소리가 크고 매사에 럭비를 하듯이 밀어 붙이는 리처드가 마음에 들었다. 리처드가 이 아파트 건물에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를 몰고 온 것은 사실이었다. (P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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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최근의 사건들은 이런 냉정한 자들을 적으로 돌린 리처드 와일더와 조종사들의 반란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 냉정한 자들은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고, 인간미 없는 강철과 콘크리트 풍경에 별다른 반감을 갖고 있지 않으며, 정부 기관과 정보처리 기구가 자기네 사생활을 파고든다 해도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기네 유리한 대로 이용할 수 있다며 반기기까지 하는 이들이기에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 스틸 같은 부류는 20세기 후반의 세상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을 제일 먼저 장악했다. 그들은 주변의 이웃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타인과의 깊은 관계가 결여된 와중에도 자급자족한 삶을 살아갔다. 별다르게 필요로 하는 것이 없으니 절망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런 부류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당장의 혼란이 아니라 그 후에 다가올 방종이었다.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냉혹해질수록, 그들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커져갔다. 높은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고층 아파트는 입주민들 간의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는 일까지 떠맡게 됐는데, 실제로 이 고층 아파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건물 내에서 반사회적 행동을 억압하는 장치를 제거하고, 입주민들이 일탈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점은, 자동 운항 상태의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들처럼 입주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껍데기가 대단히 안전하다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입주민들은 멋대로 행동할 자유를 얻게 되고, 제일 어둡고 구석진 부분까지 탐색하려는 의지를 표출하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온갖 기술적 편리를 누리며 살다 보니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병리학적 표현을 아무런 제약 없이 하게 된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 고층 아파트 건물은 바로 그런 점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이었다. (P6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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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은 리처드의 두 발 사이에 놓인 시네카메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어디에 쓰려고요?”

“고층 아파트 프로젝트에 쓸 자료 화면을 따려고.”

헬렌은 리처드에게 웃음기 없는 미소를 지었다.

“또 감옥 다큐멘터리네. 어디서부터 촬영을 시작하는게 좋을지는 내가 제일 잘 알걸요.”

리처드는 헬렌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 극도로 허약한 여자가 눈앞에 정말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가느다란 뼈대를 어루만졌다. 이 여자를 기운 차리게 하고 말리라 마음먹었다. 헬렌을 처음 마난 건 7년 전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헬렌은 그곳 제작자의 조수로 일하는 밝고 자신만만한 여자였다. 말투가 무척 빨라서 리처드에게 더없이 좋은 짝이기도 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침대에 누워 있지 않으면 논쟁을 했다. 그러나 두 아들이 태어나고 고층 아파트에서 생활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헬렌은 아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면서 줄곧 내면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동화책 서평을 쓰는 일도 일종의 정신적 퇴보일 따름이었다. (P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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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러면 좀 더 높은 층으로라도 옮겼으면 좋겠어요.”

턱을 면도하면서 리처드는 아내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미약한 호소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잠재되어 있던 야망을 건드린 것인지도 몰랐다. 헬렌은 이 하층부를 떠나 중층부에 속하는 15층에서 30층 사이로 이사 가는 것을 ‘보다 수준 높은 거주지’로 옮겨 가는 사회적 출세로 여기는 듯했다. 중층부는 여기보다 복도가 깔끔할 뿐 아니라, 주민들이 문화인으로서 교양을 갖춘 데다 관대하니 애들이 쫓겨나듯 거리로 나가 놀 필요도 없을 터였다. (P8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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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하는 그의 결심은 다분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건물과 담판을 짓고 싶은 마음, 이 건물이 제시하는 물리적 도전에 맞서서 이곳을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도 일부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는 이 건물 자체에 점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층층이 쌓여 있는 콘크리트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이 건물 구석구석으로 흐르는 공기와 물의 힘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느낌을 받았다. 앤서니 로열이 그의 몸을 손아귀에 쥐기 위해 고의적으로 건물을 이렇게 설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밤에 아내와 나란히 누워 자다가 불안한 꿈 때문에 종종 잠이 깨면 침실 공기가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의 집을 둘러싼 999개의 집들이 벽과 천장을 통해 그를 짓누르며 가슴속에서 공기를 뽑아내고 있었다. 예전에 수영장에서 아프간하운드를 익사시킨 것도 딱히 그 개가 마음에 안 들었다거나 개 주인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였다기보다는, 이 건물의 상층부에 복수를 하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정전의 어둠 속에서 그 개가 발을 헛디뎌 수영장 물에 떨어졌을 때 그는 얼른 개를 붙잡았다. 다음 순간, 그는 잔인하고 강력한 충동에 사로잡혀 그 개를 물 밑으로 끌어내렸다. 충격을 받아 몸부림치는 개의 몸뚱이를 단단히 붙잡고 끌어내리며, 마치 이 건물 자체와 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리처드는 이 건물의 어마어마한 높이를 의식하면서 샤워를 했다. 차가운 물을 최대한으로 틀어 가슴과 둔부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지게 했다. 헬렌이 불안정하게 비틀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결심은 오히려 더욱 확고해졌다. 마침내 평생토록 오르고자 준비해온 산의 발치에 선 등반가의 결심이 바로 이럴 것이다.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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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리처드는 자신이 이 악취가 진동하는 공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헬렌 얘기로는, 상층부 주민들이 개의 배설물을 일부러 에어컨 송풍관에 집어넣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의 너른 광장에 불어닥친 강풍이 이 건물의 콘크리트 다리 사이로 소용돌이치다 하층부로 몰아쳤다. 리처드는 깨끗한 공기가 들어올까 싶어 창문을 열었으나 먼지와 시멘트 가루만 쏟아져 들어왔다. 찬장과 책장 위쪽까지 이내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늦은 오후, 사무실로 출근했던 주민들이 귀가하기 시작하면서 승강기는 소음과 함께 초만원이 되었다. 승강기 3대는 이미 고장 났고, 나머지 승강기들은 주민들이 조급하게 밀려들면서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되었다. 현관문을 열고 내다보니, 갱도의 승강기에서 먼저 내리려 성질을 부리는 광부들처럼 주민들이 서로를 거칠게 떠다밀고 있었다. 그들은 신경이 잔뜩 곤두선 표정으로, 서류 가방과 핸드백을 방탄복처럼 앞세우고 세게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도 건물 내의 어디든 자유로이 다닐 수 있고, 어떤 서비스든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특히 35층의 수영장과 옥상 전망대의 놀이터 조각 정원에 가보고 싶었다. 카메라를 챙겨 든 그는 큰 아들을 데리고 옥상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이쪽의 승강기들은 고장이거나, 수리 중이거나, 상층부 어딘가에서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상층부의 누군가가 승강기 문이 닫히지 않게 조치를 해놓은 것 같았다. 상층부 전용 출입구로 가면 멀쩡한 고속 승강기가 있을 테지만, 그는 그쪽 출입구의 열쇠가 없었다.

옥상으로 가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더욱 확고해진 리처드는 중층부로 가는 승강기를 타고 35층까지라도 올라가기로 했다. 승강기가 도착하자 그는 아들을 데리고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부비고 들어갔다. 승강기에 탄 이들은 리처드의 여섯 살 난 아들을 노려보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승강기 문이 23층에서 열렸다. 승강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스크럼을 짜더니, 승강기 문을 서류 가방으로 두드리며 리처드 부자를 내리게 만들었다. 마치 내면의 분노를 표출하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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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건물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미 하층부, 중층부, 상층부라는 세 개의 사회집단으로 분리되었다. 1층에서 9층까지는 영화 기술자, 스튜디어스 등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거주하는 하층부고, 11층에서 34층까지는 중층부며, 36층에서 40층가지는 상층부였다. 10층의 쇼핑몰이 하층부와 중층부를 나누는 경계선이고, 수영장과 레스토랑이 들어선 35층이 중층부와 그 위의 상층부를 나누는 역할을 했다. 전체 40층 중에서 3분의 2에 해당하는 중층부에는 자기중심적이지만 기본적으로 고군분투하는 성향을 가진 직업군이 모여 살았다. 즉, 의료 기관과 대기업에서 일하는 의사와 변호사, 회계사, 세금 전문가들인데, 이들은 청교도적이고 자기 절제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중간 계급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강한 결집력을 보여줄 수 있는 이들이었다.

상층부에는 그야말로 상류 계급이 거주했다.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 사업가, 여자 탤런트, 성공 지향적인 교수들이 모여 과두제(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상층부 주민들에게는 전용 고속 승강기와 고급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상층부 계단통에는 카펫까지 깔려 있었다. 상층부 주민들이야말로 이 건물의 선두에 서 있는 이들이기에 관리인도 이들이 제기하는 불만 사항을 제일 우선으로 처리했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수영장과 옥상의 정원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과 레스토랑의 메뉴를 결정했으며, 일부러 음식 값을 높게 책정하도록 하여 다른 층 사람들이 레스토랑에 얼씬대지 못하게 하는 등 고층 아파트 내에서의 삶을 미묘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우정과 승인이라는 당근을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이런저런 후원을 제공하며 중층부 사람들을 교묘하게 쥐고 흔들었다. (P99-100)

현실과 점점 유리되는 이 상황이 리처드는 놀랍지 않았다. 고층 아파트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태는 오로지 입주민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에, 죽은 보석상과 관련해 외부에 입을 다무는 주민들의 태도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보석상의 시신을 목격한 사람만 해도 최소한 천 명은 될 것이다. 그 일이 발생했을 당시 리처드는 발코니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죽은 남자의 시신을 보고 놀랐다기보다는, 발코니로 구경 나온 수많은 주민들 때문이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신고 자체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죽은 보석상은 교양 있고 자부심 강한 사람이라 자살이 아니라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누구 하나 걱정하지 않았다. 지금 수영장 물에 들어가 있는 이들이 발밑 타일 바닥에 굴러다니는 와인 병과 맥주 캔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주민들은 보석상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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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를 둘러싼 아령체조 팀이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곤봉들이 치솟더니 어떤 경고도 없이 리처드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쓰러지기 전 리처드는 그 곤봉들 중 하나를 움켜잡았으나, 다른 곤봉들이 일제히 그를 가격해 앤서니 로열의 발치에 쓰러뜨렸다.

정신이 들었을 때 리처드는 1층 출입구 로비의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변의 형광등 불빛이 천장의 유리판에 반사되며 그를 비추었다. 그 단조로운 불빛은 마치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었던 듯 했다. 늦게 퇴근한 주민 두 명이 옆에서 승강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서류 가방을 단단히 손에 쥔 그들은 리처드를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쯤으로 여기는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오른쪽 귀 뒤를 만져보니 귀뒤꼭지가 잔뜩 부풀어 있었다. 리처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후 휘청거리며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가 유리문에 기대어 섰다. 저 어둠 속에 주차된 차들 중 하나만 잡아타도 어디로든 당장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목을 부여잡고 건물의 정면을 올려다보았다. 37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물 자체의 무게와 육중함 그리고 등반에 실패했다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녹초가 되었다. 깊은 생각 없이 가볍게 등반을 시도했다가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를 거부한 것은 앤서니 로열과 그 패거리가 아니라 이 건물 자체였다. (P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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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는 이 건물이 이웃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심이 갔다. 특히 에베레스트 산이 자기보다 높다는 이유만으로 짜증을 내며 장비도 없이 무작정 등반하고 보는 리처드 와일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심한 척 종일 발코니에서 바깥만 내다보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건물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로버트 랭 같은 개성 강한 인물들이 그의 흥미를 잡아끌었다. 적어도 로버트는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고수할 줄 알았다. 사흘 전 밤에는 앤서니와 함께 리처드에게 따끔한 교훈을 주기도 했다.

리처드의 침입은 사실 아래층 사람들이 수차례 시도한 침입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침실을 나온 앤서니는 문득 리처드 생각이 나서 현관문의 빗장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복도로 나갔다.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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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는 콘크리트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주변에서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주변을 한 바퀴 위이 돌아보았다. 그는 늘 동물원을 갖고 싶어 했다. 고양이 여섯 마리와 온갖 종류의 새들이 다 들어 있는 거대한 새장으로 이루어진 동물원. 지난 수년 간 동물원 설계도를 수없이 그려왔는데, 역설적이게도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고층 아파트였다. 새들이 그들의 본향인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다가 내려와 놀 수 있는 곳. 앤서니는 동물원 외에 대규모 건축물에도 늘 특별한 관심을 쏟아왔다.

새들에게 몰려 도망을 친 것인지, 빗물에 젖은 샴고양이의 사체가 배수로에 쓰러져 있었다. 저 아래 따뜻하고 안락한 아파트에서 살던 이 작은 짐승은 환기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올라와 단 몇 초간 햇빛을 누리다 새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고양이 옆에는 죽은 갈매기 한 마리도 있었다. 앤서니는 죽은 갈매기를 집어 들었다. 의외로 가벼운 무게에 놀라며, 그는 강하게 팔을 휘둘러 사체를 난간 너머로 던졌다. 새의 사체는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끝없이 추락하는 듯하던 갈매기는 주차된 차의 보닛 위에서 하얀 폭탄처럼 터졌다.

보는 이는 없었으나, 있었다고 해도 앤서니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이웃들의 행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들을 발밑에 두고 깔보았다. 앤과 결혼해 5년을 함께 살면서 타인에 대해 그런 편견을 갖게 되었다. 그들 부부가 이곳 입주민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 자들이 자진해서 이 건물의 지정된 구멍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사실과 과도한 책임감만 있지 화려함은 없는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P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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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층 중앙 홀에 도착해서 보니 돌아다니는 이는 별로 없었다. 몇몇 주민들이 크롬으로 도금된 텅 빈 판매대를 쳐다보며 쇼핑몰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은행과 주류 판매점은 문을 닫았고 방범용 창살에는 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앤서니는 개를 데리고 여닫이문을 지나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수영장 안에는 물이 절반밖에 차 있지 않았다. 누렇게 변한 물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얕은 쪽은 석호처럼 바닥이 드러났다. 매트리스가 술병 사이에 떠 있고, 그 주변을 판지 상자와 신문지가 에워쌌다.

시체 한 구가 떠 있다고 해도 다른 쓰레기 때문에 눈에 띄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개가 파손된 탈의실 주변에서 코를 킁킁거리는 동안, 앤서니는 지팡이로 축축한 공기를 휘저었다. 정체된 공기에 활기라도 돌까 싶어서였다. 이대로 계속 여기 머물다가는 질식하고 말 것이다. 잠깐 내려와 있는 동안에도 위층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이 짓누르는 압박감, 이 건물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 사는 천여명의 삶의 무게 때문에 으스러질 것 같았다. (P168-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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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현관문 앞의 그림자 진 곳에 태평스러운 표정을 가장하고 서 있는 스틸이 보였다. 스틸과 그의 무표정한 아내는 모든 상황을 주시하면서 쓰레기 봉지들 사이에 서 있었다. 스틸은 옆 걸음질로 다가와 로버트의 팔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잡았다. 환자가 예상치 못하는 순간에 발치하려고 들 때의 움직임이 바로 이럴 것이다. 스틸이 눈짓으로 위층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저 28층 사람들이 문을 영구적으로 봉쇄하려고 한답니다. 승강기 회로 두 개의 배선을 변경시켜서, 승강기가 1층에서 28층까지 멈추지 않고 곧장 오르내리도록 한다는 거죠.”

“그럼 우리는 어쩌고요? 어떻게 건물 밖으로 나가라는 겁니까?”

“글쎄요. 그들이 우리 입장까지 신경 쓸 것 같진 않은데요. 그들의 진짜 의도는 25층을 경계선으로 삼아 이 건물을 위와 아래로, 즉 고층과 저층으로 양분하는 겁니다. 여기가 바로 전력 시설과 관련해서 핵심이 되는 층이니까요. 이 밑으로 3개 층을 해체시켜 완충 지대로 삼고, 이 건물을 고층과 저층으로 구분하려는 거죠.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완층지대 바로 위니까 안전하다고 볼 수 ......” (P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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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는 칠흑처럼 캄캄한 복도를 돌아다니며 한 번에 계단을 세 칸씩 오르내리는 법, 한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어둠을 시험하는 법, 최대한 바닥에 가깝게 몸을 굽히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법을 익힌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에 건물 안으로 스며드는 태양빛에 대해서는 분노에 가까운 반감을 품었다.

건물 내에서 진정한 빛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번쩍이는 금속성의 플래시였다. 폭력이 자행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방사선도 퍼져나갔고, 주민들은 그렇게 촬영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관음증적 쾌락을 느꼈다. 쓰레기가 널린 복도의 카펫에서 이 새로운 빛을 받으며 자라나는 식물들은 어떤 종류일까? 전기를 먹고 사는 타락한 식물들일까? 바닥에는 시커먼 네거티브필름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플래시, 즉 건물 내부의 새로운 태양에서 떨어진 조각들이었다.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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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더인가에서 개가 낑낑대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20개 층 아래의 어느 집 발코니에서는 짧은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명의 원인이 고통인지, 욕정인지, 분노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잠시 후 또 한 차례 비명이 들리고 의미 없는 통곡이 뒤따랐다. 이런 소리들은 어떤 특정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신 나간 이들의 감정 표출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앤서니는 수행원들 중 아무나 들어와 무엇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는지 보고해주길 기다렸다. 옆집에 사는 여자들 외에, 39층에 사는 갤러리 소유주라든가 38층에 사는 성공한 미용사 같은 젊은 남자 몇 명이 복도에서 쓰레기 봉지 사이를 걸어다니며 보초를 섰다. 이런 비명 소리가 들리면 그들은 손에 든 창에 기대서서 계단의 바리케이드 쪽을 주시하곤 했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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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장에서 볼 때 고층 아파트에서의 삶은 대체로 편안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모든 것이 정상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을 다시 머리에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일은 생리학과 실험실에 가서 학생들을 감독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 전에 우선 청소부터 해야 했다. 벌써 이웃의 두 여자가 복도를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승강기도 작동하게 될 것이다. 엘리너가 이 집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한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다른 집으로 건너가 바리케이드를 해체하고 가구를 새로 들여놓을까 싶기도 했다.

곰곰이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괴상한 쾌감이 느겨졌다. 아무래도 두 여자의 환심을 다시 살 만한 구실을 궁리해봐야겠다 싶었다.

두 여자에게 양을 차츰 늘려가며 모르핀 주사를 놓는 것도 제대로 된 재밋거리를 즐기기에 앞서 시시한 예행연습을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로버트는 난간에 등을 기댔다.

황혼이 지자, 타고 남은 잉걸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꼬챙이에 꿰어진 큰 개의 윤곽은 사지가 절단된 채 거대한 힘으로 밤하늘을 날아가는 인간 같았고, 잉걸불의 불꽃은 그 인간의 피부에 박힌 보석 같았다.

그는 360미터쯤 떨어진 곳에 솟아 있는 또 다른 고층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았다. 일시적으로 정전이 되었는지 7층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곳 주민들이 자기 위치를 파악하느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손전등 불빛이 어둠 속에서 어른거렸다. 새로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그 주민들을 환영하며, 그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P330-332)

영화 하이라이즈 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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