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2007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1938)
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하지만 호사가들은 그의 불운한 인생을 둘러싸고 태어난 전조부터 불길했다고 말하곤 한다. 18세기 최대 재앙인 리스본 대지진(1755년 11월1일) 다음날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아내이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통치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막내딸인 앙투아네트 왕비는 천국에서 태어나 지옥으로 떨어진 비극의 주인공이다.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자 고등연구실습원 교수인 에마뉘엘 드 바레스키엘이 쓴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나날'(여문책)은 그런 앙투아네트의 마지막을 들여다본 역사서다. 편지글, 재판기록, 역사서, 문집 등 다양한 자료를 선별해 왕비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했다. 책은 역사서이자 평전이며 시(詩)이기도 하다. 저자는 낭만주의 시대를 수놓은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쥘 미슐레(1798~1874)가 '프랑스 혁명사'를 쓰며 확립한 드라마틱한 글쓰기의 유산을 따라간다.
[감옥에서]
1794년 4월 판사들 앞에 선 당통은 여전히 환상에 젖어 있었다. “우리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법원을 설립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법원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단두대에 서야 했다. 그는 정치적 법원을 원했지만, 그 정치가 그를 죽였다. 나중에 미슐레(Michelet)는 “이 법원은 단순히 정의의 검이 아니라 찌르는 칼(épée)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공회에서 혁명법원을 설립하면 인권과 사법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온건파인] 지롱드파 베르니오(Vergniaud)는 “베네치아의 종교재판보다 1,000배는 더 두려운 종교재판”이라고 말했다. 혁명법원은 특히 1794년 7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한 후부터 지탄받았고 오랫동안 흉악한 ‘암살자들의 법원’이라고 불렀다. 역사학자 알베르 소렐(Albert Sorel)은 “수행 하인과 망나니들의 관할구역”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특별형사법원은 [첫 판결을 내린] 1793년 4월 7일 이후 10월 29일에 공식적으로 혁명법원으로 변경되었으며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후 점차 구국위원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10월 14일에 출석했을 당시, 이 법원에서 이미 단두대로 보낸 사람은 100명에 이르렀다. 이는 아직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1793년 4월부터 1795년 5월 폐지될 때까지 이 법원은 2,747명을 사형에 처했으며, 거의 같은 수의 무죄 판결을 내렸다. 대규모 재판은 5월에 시작되었고, 그중 오클레앙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파견의원 레오나르 부르통(Léonard Bourdon) 공격사건 재판과 루앙의 음모자들 재판도 있었다. 마라를 살해한 샤를로트 코르데와 퀴스탄(Custine) 장군, 지롱드파 언론인 고르사스(Gorsas)도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았다. 그 외에도 6월 2일에 기소된 21명의 지롱드파 의원과 필리프 에갈리테(Philippe Egaliné), 롤랑 부인(Mme Roland), 1791년에 왕실과 은밀히 소통한 혐의를 받은 제헌의원 앙투안 바르나브(Antoine Barnave)도 잇따라 재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어느 재판과 달랐다. 단순히 왕비의 재판이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사라져가는 세계와 폭력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던 세계, 이처럼 아주 이질적인 두 세계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기회이자 순간이었다. 두 세계는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대를 제거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서로 화합할 수 없는 합당한 이유를 확립해왔다. 한쪽에는 공화국이, 다른 쪽에는 왕정, 왕실, 관습, 풍습이 있었다. 이 재판은 또한 한 여성의 재판이며, 한 어머니의 재판이기도 했다. 끝으로 한 외국인의 재판이었다. (P26-28)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눈에 샤틀레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으리라. 만약 왕비가 4년 동안 수없이 외면과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면, 뒤로 자빠졌을 것이다. 모든 재판은 형쳔없는 증거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재판에 진실이 있었다면, 그것은 항상 변하고 기복이 심한 인간 본성의 진실이었다. 샤틀레는 겨우 마흔 살이었지만, 세상이 그를 권좌에서 쫓겨난 왕비와 갈라놓았다. 그는 한때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 궁에서 즐겁게 지내던 전성기의 왕비가 소중히 아끼던 화가 중 하나였다. 나는 모든 배심원 중에서 샤틀레야말로 진정으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샤틀레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법원 구성원들의 주요 모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열광과 열정, 두려움, 충동과 이성, 진실성과 야망, 증오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자존심의 상처, 사람들의 망설임과 소심함, 이상적으로 그려진 흑백 세계에서 후회 없이 확신에 대한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곳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선인과 악인, 애국자와 배신자가 되었다. 혁명과 반혁명이었다. 이 모든 것의 끝에는 필연적으로 극단주의와 분노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P34)
마리 앙투아네트가 법정에 들어서자, 재판장은 그에게 “피고인들이 앉는 일반 의자에 앉으십시오”라고 권유했다. 재판장은 그에게 “자유롭고 쇠사슬이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신원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재판처럼 혁명법원의 재판도 그럴듯한 형식적 절차를 고수하려고 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왕비의 역겨운 점과 자의적인 면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지옥 가는 길을 좋은 의도로 갈았다 해도, 선량한 사람을 데려갈 수도 있다.
배심원들은 한 사람씩 “루이 카페의 과부 마리 앙투아네트의 혐의를 가장 면밀하게 검토”하겠으며 “증오, 악의, 두려움 또는 애정”을 품지 않고, 자신의 양심과 내밀한 확신에 따라 “자유인에게 적합한 공정함과 확고함으로” 결정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증인들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고, 특히 “증오와 두려움 없이 말하겠다.”라고 맹세했다.
그들은 자기 말과 그 말이 지칭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한 왜곡은 혁명의 가장 깊은 주름 속에서 더욱 커지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자유를 언급하면서, 그 이름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들은 증오, 두려움, 애정을 쫓아낸다고 하면서도 그러한 감정의 지배를 받았다. (P54-55)
마리 앙투아네트가 10월 14일 아침, ‘자유의 법정’에 들어설 때 정확히 누구를 알아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본 것에 대해서는 조금 알 수 있다. 38세인 왕비는 11월 2일이면 39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있으며, 마치 유령처럼 보였다.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어깨에 두른 모슬린 스카프를 앞으로 묶었으며, 흰색 천으로 꽤 단순하게 만든 커다란 과부 모자를 쓰고, 머리는 롤빵 모양으로 아래에서 묶어 리본으로 고정했다. 어떤 이는 그가 맨머리로 법정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럴듯하지 않다. 여성이자 설사 왕비였다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고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예전의 화려한 모자가 아니라 소박한 모자를 썼다. 또한 그가 베르사유 궁에서 수백 벌을 소유했던 드레스 가운데 한 벌도 아니었다.
그가 입은 드레스는 남편이 죽은 뒤 탕플에서 지은 옷이었다. 그가 가진 마지막 드레스 중 하녀였다. 너무나 낡아서 수선해야 했다. 1789년 10월 베르사유 궁을 떠난 이후로 1782년에 작성한 드레스 샘플 목록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그의 의상 관리 목록들과 함께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현재 이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있으며, 남아 있는 품목을 목록과 대조하면 무엇이 사라졌는지 알 수 있다. 실크 샘플은 다음과 같은 항목으로 분류되었다. “궁중 의상(Grands habits), 큰 바구니 위에 입는 드레스, 작은 바구니 위에 입는 드레스, 튀르키예식 드레스, 레위식 드레스, 영국식 드레스, 레딩고트(redinggotes)[여성용 경량 코트].” 이 모든 것은 사라졌다.
이번에는 왕비가 벌거벗은 상태였다. 그는 남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막대한 욕망 속에 숨어 있다가 길을 잃었다. 이제 그는 유행을 쫓는 여성의 꾸밈 속에 있지 않고 자신 속에 있었다. 그는 어떤 장식이나 보석도 달지 않았다. 그는 비엔나에서 지니고 온 시계, 그리고 금으로 만든 결혼 반지와 두 개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미 콩시에르 주리에서 압수당했다. 또한 파리 코뮌 위원들이 ‘부적 반지(bague a talisman)'라고 부르던 것도 빼앗겼다. 그들은 반지에 독이 묻어 있다고 의심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들은 그가 그 반지를 빼앗겼을 때 가장 힘들어했다고 말한다. 이 신비로운 반지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그의 곁에서 시중들던 단 한 사람, 열네 살의 로잘리 라모를리에르(Rosalie Lamorliére)만이 그의 옷 밑에서 검은 끈에 달린 ’매우 귀중한‘ 타원형의 메달을 보았으며, 자신은 그런 물건을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그 메달에 담긴 것이 왕비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아들의 초상화와 머리카락 묶음이었다.
그의 신발만이 과거의 우아함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다. 로잘리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검은 자두색의 예쁜 구두’였으며, 높은 굽은 ‘생위베르티(Saint-Huberty) 스타일'이었다. 그의 유일한 ’예비‘ 신발이었다. 아마도 키를 더 크게 보이고 싶거나 똑바로 서기 위해 신었을지 모른다. (P58-60)
그들은 이미 너무 나갔다. 나중에 그의 지지자와 반대자가 모두 그의 재판을 다시 그려볼 때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지지자는 그가 희생당한 상처의 흔적을 분명히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전혀 다른 이유로 반대자는 그를 더는 너그럽게 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가면이나 화장도 없이 일찍 늙어서 흉측하게 변한 그의 모습을 강조하면서, 그의 어두운 영혼을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혁명가들의 시각에서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육체적 몰락은 여성 본성의 악덕이 갑자기 드러난 것과 같았다. 다시 말해 이 재판은 무엇보다도 상상력의 재판이었다. 바로 이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P66)
혁명 초기부터 왕비의 용기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1789년 10월 5일, 대신들이 자녀를 데리고 베르사유 궁에서 랑부아예(Rambouillet)로 피신하려고 했지만, 그는 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후의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다음 날 새벽, 왕비의 침전에 민중이 난입했다. 그의 호위병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민중이 그의 침대까지 뒤진 후 마치 먹잇감처럼 그를 내내놓으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용기를 내어 마르브르(Marbre)[대리석] 마당 위의 발코니에 섰다.
1792년 4월, 왕실 가족이 튈르리 궁을 마음대로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혼자만이라도 브뤼셀로 가야 한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다시 한 번 거부하면서 왕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6월 20일, 파리 상퀼로트 무리가 튈르리 궁에 몰려들어 왕에게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씌우려는 장면을 창밖에서 본 그는 왕이 있는 회의실로 가서 왕이 모자를 쓰는 데 반대했다. “프랑스인이여, 내 친구들이여, 척탄병들이여, 왕을 구해주세요!”
그는 단지 왕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을 밀어 붙여 저항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구원이란 싸움 속에만 있었다. 바렌에서 오직 그만이 말을 몰아 적대적인 군중 사이를 뚫고 가자고 했다. 8월 10일 아침, 튈르리 궁이 마지막 공격을 받기 직전, 그는 왕실에 적대적인 국민공회로 피신하려는 남편을 막으려고 모든 힘을 쏟았다. 그는 남편이 현장에서 민중과 맞서기를 원했다. “무력이 이곳에 있는데 어디로 가라고 하십니까!”
왕비와 관계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그의 무모함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보다 분열시키며, 지지자를 열광하게 만드는 동시에 반대자를 더욱 분노케 했다. 모든 사람이 1790년 6월에 미라보(Mirabeau)가 한 말을 알고 있었다. “왕 곁에는 한 남자만 있는데, 바로 그의 부인이다.”
사람들은 아주 일찍이 왕비의 힘과 완고함을 예상했다. 그는 장애물이었다. 사람들은 결국 왕비를 희생자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4년 동안 그는 적들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으면서 살았다. 그들은 1789년 10월, 그리고 다시 1792년 6월 20일에 튈르리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골적으로 그를 찾아 죽이려 했다. “오스트리아년, 어디 있느냐? 그의 머리, 머리를 자르자!” 그는 창 앞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낯빛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한 목격자는 그의 용기에서 심지어 ‘초자연적인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의 ‘하얀 전설’은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 (P79-81)
파리의 세관에서 일하던 ‘교활한 악당’인 티종(Tison)과 그의 아내는 코뮌이 탕플에 수위로 파견한 첩자였다. 또한 코뮌에서 제비를 뽑거나 교대로 탕플에 파견한 위원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의사 르클레르(Leclerc), 재단사 레슈나르(Léchenard), 시계공 튀를로(Turlot), 가발사 마티외(Mathieu), 그리고 왕비의 감방 벽난로 근처에 놓인 유일한 의자에 앉아 있는 척하는 환속 신부인 베르나르(Bernard)였다. “나는 수형자들에게 테이블이나 의자를 주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짚단만 줘도 충분하다.” 왕비를 혼자 두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에게는 공화국의 교훈을 계속 내렸다. 그는 죽음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행동, 몸짓, 말, 시선, 심지어 침묵까지도.... 모두 악의적으로 해석되었다.” 라고 프랑수아 위가 말했다. 과거의 왕비가 거의 신과 같은 존재였던 만큼, 평등의 감정이 이제는 간수들에게 단순한 권리를 넘어 일종의 복수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자신들이 누구인지 잊게 만드는 쾌락이 되었다. ‘불운한 포로’의 지지자에게 당연히 그것은 ‘불행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P85-86)
[외국인]
많은 사람이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은 무의미하며, 쓸모없기 때문에 끔찍하다고 썼다. 샤토브리앙은 거듭해서 이 치욕적인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강조했다. “혁명의 첫 번째 범죄는 왕의 죽음이지만, 가장 끔찍한 범죄는 왕비의 죽음이다.” 이후로 그를 모방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바르베이 도레비이(Barbey d'Aurevilly)는 이것이 바로 신의 혁명을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범죄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왕비가 오직 권력에 따른 명예만 가지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군주의 주권을 조금도 나눠 갖지 못했다. 더욱이 1775년 6월 랭스(Reims)에서 축성식을 받지도 않았다. 1791년 3월, 국민의회는 왕비의 섭정권을 모두 박탈했다. 왕의 재판 직전에 한 의원이 국민공회의 연단에서 표현한 대로, 그는 신성불가침하지 않으며 반역자나 평범한 음모자의 무리와 다를 바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국민공회가 남편 루이 16세에게 베풀었던 위엄을 왕비에게 허락하지 않았고, 그에게 형사법원의 모든 모욕을 가하며 그를 왕좌에서 처형대로 끌어내림으로써 마치 일반 범죄자처럼 취급했다. 왕을 죽이는 것보다 더 심하게 그를 죽였다. 그가 왕비였음을 잊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목적 없이, 단지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를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결국 신권적 주권(souveraineté de droit divin)의 뒤집힌 원칙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정치적 맥락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는 사건들이 남긴 논리적 증거 뒤에서 항상 인간의 망설임이 남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왕보다 먼저 그를 재판하려 했고, 그 후 왕이 죽은 뒤에는 감옥에 남겨두었던 그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P97-98)
우연히고 7월에 국민공회에서는 다시 왕비를 공격하고 반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8월 1일, 새로 로베스피에르의 편이 된 베르트랑 바레르(Bertrand Barére)는 구국위원회의 이름으로 ‘오스트리아 여인(Autrichienne)'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바레르는 그가 모든 재앙의 원인이라고 고발하며, 유럽 왕들의 얼굴에 마치 장갑을 던지듯 그를 던졌다. “국민 정의는 그에게 권리를 행사하고, 그를 음모자 재판소에 넘기라고 요구한다. 왕정의 모든 뿌리를 뽑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가 공화국의 땅 위에서 번영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오스트리아 여인에게 타격을 주어야만 프란츠, 조지, 카를로스, 빌헬름에게 그들의 신하들과 군대가 저지른 범죄를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렇듯 바레르는 함부로 왕들의 이름을 불러 그들을 더욱 모욕했다. 프란츠는 황제, 조지는 영국 왕, 카를로스는 에스파냐 왕, 빌헬름은 프로이센 왕이다. 그 후 바레르는 왕비를 콩시에르주리로 이송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인을 체포하며, 파리의 출입문을 모두 폐쇄하게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며 혁명의 대천사인 생쥐스트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더는 오스트리아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그들을 벌하고 무찌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국위원회는 오스트리아에 가장 훌륭한 보복이란 그의 가족에게 교수형과 불명예를 안겨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공화국 병사들이 총검을 가지고 그들을 공격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 후 구국위원회의 가장 열광적인 인물 중 하나이며, 빨간 머리 때문에 ‘호랑이’라고 불리는 비요 바렌(Billaud-Varenne)이 두 번 발언했다. 9월 5일, 그는 10월 3일 이후 ‘인류와 여성의 수치’라고 부를 사람의 처형을 처음으로 요구하고, 일주일 이내에 재판에 부치라고 주장했다. 이 제안은 통과되었다. (P108-110)
1770년에 열네 살인 오스트리아의 작은 대공녀 안토니아가 프랑스에 도착해서, 나중에 혁명가들은 그저 앙투아네트라고 부르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어 루이 15세의 손자인 어린 세자와 결혼했을 때,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개심에 얼마나 무겁게 짓눌리게 될지 전혀 몰랐다. 그는 단순히 왕비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아기를 낳는] 배, 서약서와 담보, 그리고 가차 없이 생겨난 유럽의 새로운 문제의 핵심 조각이 될 운명이었다. 그는 이미 적대적인 세력들 사이에서 ‘기괴한 동맹’이라고 불리던 것의 살아 있는 화신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함정 같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의 인질이 되기 훨씬 전인 1770년에 이미 가문의 이익과 유럽 정치의 희생양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고, 곁에서 어머니의 명령대로 그를 이끌어주고 모국의 이익을 늘 상기시켜주는 메르시 백작의 끊임없는 지도를 받았다. 그래서 그는 새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취향을 각인시켜 지속적으로 형성하면서 자기 위치에 적응하는 한편 프랑스어도 완벽히 구사하려고 노력했지만, 독일어 억양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여전히 ‘오스트리아 여인’으로 남아 있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그와 가까웠던 봉벨(Bombelles) 후작이 1781년 12월에 첫 세자가 태어났을 때 쓴 일기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절망적으로 자신을 위안하려는 사람이 쓴 글처럼 보인다. “우리의 가짜 친구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왕세자의 어머니는 언젠가 자기 아들이 통치할 국민의 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이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P114-115)
마리 앙투아네트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마타 하리(Mata Hari)였으며, 흑색 이야기 속의 사악한 요정, 위대한 조종자이자 당연히 가장 큰 범죄자이며, ‘프랑스의 재앙이자 흡혈귀’였다. 에르만은 재판이 끝나기 직전에 아주 적절히 말했다. “이 모든 사실이 구두 증거가 된다면, 피고를 온 국민 앞에 세워야 할 것입니다. (...) 바로 국민이 앙투아네트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일어난 모든 정치적 사건이 그의 유죄를 증명합니다.”
이것은 한 여성에게 너무 큰 짐이었다. 고발의 무게는 그를 단순한 시민으로 대우할 의도가 없었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는 왕비였기 때문에 유죄였다. 증거가 많든 적든 상관없었다. 그들은 모든 왕비, 특히 외국의 왕비들을 더럽고 악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에베르는 곧 자기 신문에 여느 때처럼 잔인한 축하의 글을 썼다. “나는 (...) 모든 범죄에 대해 그가 유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왕비가 아니었던가? 바로 그 하나의 죄로 그의 목숨을 단축시키기에 충분하다.” (P139-140)
우리는 결코 인생의 어두운 면을 끝까지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반죽을 분리하거나, 무엇이 인간을 두렵거나 비겁하게 만들어 폭력에 굴복시키는지, 무엇이 선의를 가진 인간을 돌이킬 수 없는 일이나 피를 보는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디선가 “악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는 밤을 바라보거나 침묵을 들으려 하는 것과 같다”라고 썼다. (P153)
10월 14일 배심원의 바탕은 명백히 구민회의의 활동적이고 혁명적인 상퀼로트였다. 상퀼로트가 민중을 의미하는 말이긴 해도, 실제로 그들은 절반만 민중에 속했고, 1789년 프랑스 인구 2,600만 명 가운데 약 5퍼센트에 해당하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어떤 것을 상징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일 뿐이다. 앞서 보았듯이, 배심원들은 재판 전에 공소인이 엄선한 사람들이었다. 대다수는 하층 부르주아 계층의 장인, 직업 종사자, 파리의 직능단체 출신이었다.
몇몇은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은 1789년 직전 파리에 정착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다원화, 18세기 후반 파리의 직업 교체와 재편이 부분적으로 혁명의 뿌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P158~159)
진실하거나 거짓이거나 비겁하거나 폭력적이거나 감성적이거나 부드럽거나, 이들 가운데 누가 더 낫거나 나쁜지 가리기 어렵다. 순전함은 보통 행복이거나 선물이지 결코 덕목이 아니다. 아나톨 프랑스는 <신들은 목마르다>에서 이들을 휼륭하게 묘사했다. “열광적인 증언에 따르면, 과도한 일에 치인 그들은 냄새나는 공기 속에서 뇌가 짓눌리고, 윙윙거리는 소리에 귀가 멍해지며, 관자놀이가 욱신거렸지만, 법원이나 공공장소 안팎에서 상퀼로트와 뜨개질하는 여성들의 성급한 재판과 협박을 받으면서 계속 재판을 이어갔다.” (P173-174)
수베르비엘은 결국 지친 전투 끝에 1846년 파리의 루아얄 길(이것은 지어낸 이름이 아니다)에서 90세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그는 혁명이 간직한 드문 사람들 중 하나였다. 프랑수아 제라르(Francois Gérard)는 1819년에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는 초상화에서 검은 프록코트를 입고 목에 흰 타이를 묶은 그의 지적인 눈길, 거물급 부르주아의 친근하고 따뜻한 표정을 보았다. 대개 얼굴을 보고 폭력성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수베르비엘은 마리 앙투아네트 배심원단에서 유일하게 다게레오타입(최초의 사진술) 사진을 남겼다. 아마도 그가 죽기 직전 사진작가 트랭카르(Trinquart)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진에서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매우 노인다운 연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랑스럽게 바스티유 정복자의 메달을 차고 있다. 그의 젊은 친구인 의사 푸미에스(Poumiés)는 그가 끝까지 공화주의 신념과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우정을 지켰다고 말한다. 그는 옛 왕립 감옥에서 가져온 돌 하나를 마호가니 상자에 넣고 프리기아 모자를 씌워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증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장 대표적인 증인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사라졌고, 왕비는 이미 53년 전에 죽었다! (P177-178)
[피고인]
시간의 두께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은 드물고 연약하다. 게다가 그 흔적들은 명백히 정치적 이유로 다시 쓰거나 정리되거나 왜곡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읽기가 더욱 어렵다. 대중의 근거 없는 혁명적 믿음은 일종의 검열과 다름없으며,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후 며칠 간 여기저기서 발간된 재판의 방청 기록은 진정으로 일어난 일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국가기록원의 철제금고 문서에 포함된 미공개 방청 기록은 현장의 생생한 열기 속에서 기록한 상태로 놔두었기 때문에 아마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왕비의 반응에 대한 정보를 조금밖에 얻을 수 없다. 아마도 기록자는 속사포처럼 교차심문이 쏟아지는 것에 놀란 것 같다. 그는 공책의 여백에 피고가 증언을 듣고 대답한 내용을 아주 간결하게 써놓았다. “카페 과부는 남편이 1789년 6월 23일 제헌의회에서 했던 연설을 자신에게 읽어주었다고 인정했다.”, “카페 과부는 라파예트에게 오라투아르 섹시옹의 척탄병들을 해임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선의의 역사’를 계속 부정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답변 뒤에는 분명히 어떤 여인이 있었다.
비록 우리가 가진 자료가 적고 다시 쓰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멀리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지나가는 모습을 몇 번이나 알아보고 놀라게 된다. 그가 마치 병, 모욕, 굴욕, 고립, 감옥의 영향을 하나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틀 동안 그는 자신과 고통을 잘 통제했고, 자신을 재판하는 이들을 향한 멸시도 억눌렀다. 그의 변호인들은 재판 시작 며칠 전부터 국민공회에 편지를 보내 연기 요청을 하자고 권유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미 1791년 10월에 그들을 ‘악당, 미친 사람, 짐승의 떼’라고 비판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바로 전날 요청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틀 이상이나 모든 질문에 일일이 답했고, 어떤 함정도 피하며 넘거갔다. 심지어 질문하는 사람들이 이름이나 날짜를 물을 때도 그는 수정하고 바로잡았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누구도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자신 앞에 선 증인의 일부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허를 찔리고 결국 자신과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용기, 자제력, 온건함을 갖고 맞섰다. 무고하고 연약한 여성의 옹호자들인 공쿠르(Goncourt) 형제, 피에르 드 놀락(Pierre de Nolhac) 역시 부드럽게 말했다고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남편이 재판받을 때 했던 행동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는 자신을 방어했다. 우리는 그의 대답에서 적절한 논리와 관련성을 보면서 정치적 의미에서 감탄하게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촛불만 켜놓은 어두컴컴한 법정에 서 있었다. 그는 재판장 에르만, 푸키에, 배심원들의 끊임없는 질문에 별 불평 없이 차분하고 침착하고 상세하게 답변했다. (P183-185)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의 ‘체계적인 정확성’과 특히 갑작스러운 태도를 빈정거리거나 짜증을 냈다. 어느 날, 왕이 왕비의 시녀들에게 평소보다 조금 더 친절하게 대했을 때 왕비는 신랄하게 말했다. “여러분, 동의하시죠? 나쁜 환경에서 자란 아이임에도 왕이 방금 여러분을 아주 훌륭한 태도로 맞이해주셨네요.” 그는 친구(로젠베르그 백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왕의 취향은 다릅니다. 왕은 오로지 사냥과 기계장치만 좋아합니다. 당신도 내가 대장간에서 무례하게 행동하리라는 것을 인정하시겠지요.”
결론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남편은 지루한 존재였다. 그의 렉퇴르lecteur[책 읽어주는 사람]인 충직한 신부 베르몽Vermond은 그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왕의 됨됨이를 알면 달리 행동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P197)
모든 곳에서 그의 불만이 드러났다. 민감한 감수성, 남을 즐겁게 하고 싶은 극단적 욕망 —부아뉴 부인은 “남을 즐겁게 하고 싶은 과도한 욕망”이라고 말했다—, 도박에 대한 광적인 열정, 치장 욕구, 패션에 대한 폭식적인 열정이 모두 불만의 표시였다. 로즈 베르탱(Rose Bertin)과 미용사 레오나르(Léonard)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의 삶이 불완전하며, 그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신발, 모자, 잡동사니를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소비주의적 습관은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온갖 쓸모없는 물건으로 집을 어지럽히는 것은 유령을 더 잘 쫓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면서 자기 존재를 주장했다. 최근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에 대해 마르크 퓌마롤리(Marc Fumaroli)가 발간한 책의 아름다운 제목을 빌려서 말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성의 세계mundus muliebris’의 여왕이 되었다.
이 ‘여성의 세계’라는 피난처에서는 형태와 스타일, 트리아농의 광기와 랑부이예 낙농장, 폭포와 동굴, 순수함, 우아함, 놀라움, 자연, 유적의 기억이 탄생했다. 이 모두가 여성의 욕망이었고, 당시 철학자와 독실한 신자를 비롯해 그 시절에 남성의 덕목을 주장하며 아테네보다 로마나 스파르타를 선호하던 이들의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모든 것이 깨지기 쉬운 거울에 반영된 행복 같았다. 1784년 스웨덴 왕 구스타브(Gustave) 3세를 위해 트리아농에서 열린 ‘그리스식’ 야간 축제, 랑부이예 낙농장의 에트루리아식 식사,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이 그린 ‘갈리아식’(슈미즈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라그르네(Lagrenée), 미크, 장 자크 테브냉(Jean-Jacques Thévenin)의 풍경과 유적들, 조르주 자코브(Georges Jacob)의 안락 의자와 장 앙리 리즈네르(Jean Henri Riesener)의 가구들이 모두 그것이다. 사치로 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단순해졌다. 극단적인 정제(精製)는 ‘극단적인 우아함’이 되었을 뿐이다.
역설적인 점은, 이 모든 것에서 ‘오스트리아 여인’이 어느 때보다 더 프랑스 여성답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베르몽 신부가 “그는 완전히 프랑스의 말투와 취향을 받아들였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식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1780년대에 프티 트리아농 궁을 조롱조로 ‘작은 비엔나’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P199~201)
마리 앙투아네트의 판사들은 정치적 차원에만 집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증거가 부족했다. 그들은 왕비를 고발했고, 여성을 모욕하고자 했다. 그들은 권력을 행사하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이한 주장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극단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환상은 버리기 어렵고,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종종 그렇듯이, 그에 대한 비판은 1770년대 초반부터 궁중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세자빈에서 왕비로 지위가 바뀌었지만, 그의 독립성과 자유, 모험심은 용서받지 못했고, 봉벨의 말대로 그에게 ‘젊음의 시끄러운 취향’의 대가를 물렸다. 왕비의 사회에는 턱시도를 입은 남성들이 출입했고, 내실에서 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곳의 여성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었고, 지나치게 춤추고 즐기며 살았다. 수많은 사람이 그것을 모욕으로 여겼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즐거운 순간도 있었다. 오로지 왕비와 함께라면 리뉴는 사랑의 신으로 변장할 수 있었다. “여기 기쁨이 있다!”라고 노래하는 전령을 앞세우고 양쪽에 긴 날개를 펼친 그가 따라갔다. (P223-224)
나는 이 모든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왕비의 추악한 성적 타락에 관한 소문은 이미 대중 사이에 너무 널리 퍼져 있어서,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에베르의 고발에 놀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왕비를 비난하는 ‘가차 없는 방탕 행위’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벌써 10년 넘게 언론에 떠돌던 표현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여인은 다른 일도 많이 저질렀다..... 자코뱅파는 이러한 국민적 정의의 행위가 도덕성을 높여줄 것이며, 덕이 더 크게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저녁, 생토노레 길의 클럽(자코뱅 클럽)에서 재판 내용을 보고하는 루이 뒤푸르니는 에베르가 이러한 ‘공포의 특징’을 드러낼 때 수치심을 억제하면서 예절 바르고 ‘수줍은’ 태도를 보여주었다고 칭찬했다. 로베스피에르 계열 신문사으 기자는 만약 피고인이 고소인을 보고 얼굴이 빨개졌다면, 그것은 수줍음이나 순진함 때문이 아니라 들킨 것이 불편해서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덕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말이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특히 혁명가들이 푹 빠졌던 로마 역사에서 크기를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덕성의 사례가 나왔을 때, 그것으로 모든 언행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또한 덕성을 사적인 영역과 엄격하게 분리한 후 공적 생활의 중재자로 삼고, 선악을 말하게 하면서 공적 생활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할 때도 마찬가지다. 도덕성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날씨에 따라 그 측정치가 무한히 변할 위험을 안고 있다 .
어쨌든 아돌프 티에르(Adolphe Thiers)가 말했듯이, 현실과 상상, 증오가 결국 이성을 누르고 국가의 소수 행동파의 인류애마저 간단히 압도해버렸다. 공화국의 존속을 위해 그 창립자들은 피와 가장 비열한 비방 속에서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 흔적은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P253-254)
[죽음의 기사]
형사 재판의 변호사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여러 명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매우 뛰어난 솜씨로 변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거의 모두 50대지만 젊어 보이며, 살짝 긴 머리, 소금과 후추 빛 머리카락, 독특한 음색과 목소리, 무대와 연극을 즐기는 듯한 모습이다. 그들은 의뢰인이 무죄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변론한다. 그러나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 그들은 의뢰인의 무죄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날카로운 아이러니, 도발의 취향과 이단적인 행동, 일종의 냉소적 태도가 그들을 세상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악에 너무 자주 가까이 다가가는 모든 사람처럼 그들도 그럴 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게다가 짓궂은 면과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려는 강한 욕망도 보여준다. 형사 재판 변호사는 타고난 유혹자이며, 끊임없이 정복을 추구하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바람둥이 같은 인물이다. 오늘날의 변호사는 목숨이 아니라 명예를 걸었으며, 이것이 과거의 변호사와 다른 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변호사를 직접 선택하지 않았으며 10월 12일에 법원의 직권으로 두 명을 배정받았다. (P261)
푸키에 탱빌이 마지못해 선택한 변호사들도 혁명법원이 창설되었을 때부터 배속된 사람들로서, 변론할 때 마주하는 판사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었다. 1789년의 이상을 지지하는 것은 어느 특정 지역이나 계층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또한 제3신분인지 특권 계층인지 하는 사회적 성격에 따라 결정된 문제도 아니었다. 혁명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부터 가장 높은 계급까지, 모든 사회 계층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으며, 심지어 가족 내부에서도 그러했다. 이러한 현상은 1815년, 1940년, 1945년의 대위기에서도 반복되었다. (P262~263)
쇼보 라가르드의 변론 중 남아 있는 단편들을 읽어보면, 뛰어난 형사 변호사인 그가 기소인 측의 증거가 몹시 부실하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포문을 열었다. “기소가 분명히 엄중하게 보입니다만, 증거의 효력이 몹시 의심스럽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는 모든 절차를 정상적이었다고 믿은 것처럼 시작했지만, 곧 그 절차를 완전히 뛰어넘어 정치적 차원으로 재판을 옮겨놓았다. “피고인의 불행은 왕비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공화주의자들은 그가 정당할 수 없다고 예단할 가능성이 있으며, 여러분도 신성한 공평성에서 벗어나 편파적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었다. 쇼보는 그것을 알았다. 그는 배심원들에게 부디 편견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기소장을 하나하나 검토하자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여성과 어머니를 변호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가장 구체적인 혐의에 초점을 맞추고, 법과 권리 뒤에 숨었을 것이다. 법원이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P266~267)
몰락한 왕비는 오랫동안 바로 이 많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기억에 떠올랐을 것이며, 아마도 변호인들이 그를 위해 변론하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놓치지 않게 만드는 힘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재판이 있기 몇 달 전부터, 그는 너무 많은 열정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를 감옥에서 끌어내기 위해 실제로 꾸몄거나 단지 꿈을 꾸거나 발명한 음모란 없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위대한 포로이자 무고한 피해자로 생각했다. 그가 탕플과 콩시에르주리에 갇혔다는 사실만으로도 혁명가들의 민낯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혁명가들의 천박함과 비열함을 생생히 증명하는 존재였다.
그의 재판 과정에서는 이 모든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P275)
마리 앙투아네트가 알고 있던 것과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의 변호인들이 변론을 마친 순간, 푸키에의 뒤를 이어 재판장 에르만이 배심원단에게 두 번째 기소장을 전달하며 선고를 내릴 준비를 하는 동안, 아직도 그를 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럽 곳곳에서 그를 생각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외교관이나 정부가 이러한 시도를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왕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버렸다. 유럽의 군주들과 공화국의 이해관계가 결합되어 그를 숨막히게 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다행히도 이 이야기 속에는 마음의 자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 자리는 친구이며 애인인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다. 만약 그를 위해, 그의 상징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남성들이 없었다면, 익명으로 조용하게 너그러웠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P285)
페르센은 왕비의 친구 중 유일하게 풍자문서의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연인이었지만, 적어도 1791년까지 왕비와 엮인 사람들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혁명기에 주목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열정과 에너지, 정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코르프(Korff) 남작부인은 ‘얼음 아래서 타오르는 영혼’이라고 적었다. 그가 발랑시엔에 없을 때는 베르사유에 머물며 왕비의 모임에 교류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씩 혼자 말을 타고 트리아농으로 왕비를 만나러 갔다. 또한 1787년 4월부터는 왕비의 침실 위층에 있는 작은 방 두 개를 썼다. 이와 관련해 베르사유의 역사가들은 당시 왕비의 작은 방들에 설치된 ‘스웨덴 난로’에 대해 언급했다. 최근에 전기작가들은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견해서 분석했는데, 거기서 그는 작은 방을 ‘위층 숙소(longer en haut)'라고 불렀다. 루이 16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몰랐을 것이며, 적어도 혁명 이전에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서 두 가지 놀라운 결과를 초래했다. 우선, 혁명은 그로 하여금 아무런 장식과 거울 없이 자신과 마주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사람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그때까지 왕비와 페르센 사이에는 열정이라는 명백한 감정이 존재했고, 연인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서 성격도 닮아갔다. 그 결과, 스탈 부인이 ‘감정의 예민함(susceptibilités d'emotions)'이라 부른 것을 완화해주었다. 두 연인의 닮은 점은 어느 정도 냉정한 기질, 비밀을 간직하는 능력, 기사도를 닮은 로맨티시즘, 타고난 충성과 명예에 대한 감각이었다. (P296-298)
우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답변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최종 선고를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수년 전부터 죽음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는 죽음에 맞서 도전했으며, 감옥에 갇히기 전에 쓴 편지에서 이를 끊임없이 언급했다. 그는 이미 1789년 10월에 이렇게 썼다. “나는 파리 사람들이 내 목을 요구하러 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머니한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배웠다.”
혈통의 자부심과 자존심, 교육, 강인한 성격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를 버티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다시 ‘자유의 법정’으로 들어설 때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희망, 소녀 같은 희망.” 이 치욕스러운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가 아직 이 빛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지만, 쥘리엥 소렐(Julien Sorel)[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젊고 야심 찬 주인공]이 죽기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 (P304-305)
<주르날 위니베르셀>의 기사에 나왔듯이, 오스트리아 여인에게 ‘오랫동안 죽음을 마시게’ 할 필요가 있었다. 공개 처형은 핵심 의식이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숨을 끊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왕인 국민에게 모든 힘을 되찾아주고, 그 광경을 온전히 즐길 권리를 허용하는 행위였다. 그의 지지자들에게 이번 여행은 명백히 산책이 아니라 새로운 십자가의 길이자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풀이하는 여정이었다.
기마 헌병대가 수레를 둘러싸고 있었다. 혁명군 분견대가 행진을 시작했다. 베르사유의 몽탕시에(Montansier) 극장 배우였던 기욤 앙투안 누라(Guillaume Antoine Nourry), 일명 그라몽이 그들을 지휘했다. 혁명 전 왕비는 개인적으로 그를 후원했다고 한다. 그라몽은 이제 아들과 함께 혁명군 사령관 롱생 장군의 참모진에 속해 있었다. 그는 확고한 에베르파로서 민중의 기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수레의 승객에게 모욕을 퍼붓고 목청껏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저기 왕비가 있다. 치욕적인 앙투아네트! 친구들이여, 왕비는 끝장났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수많은 사람이 그 길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끝까지 수레를 따라가며 기마 헌병들의 사이를 뚫고 수레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려고 달려들었다. (P327-328)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레 위에서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코뱅파 의원들도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보란 듯이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또 어떤 이는 “그는 자존심, 기품, 오만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성난 에베르는 “게다가 그년은 끝까지 대담하고 오만했다.”라고 썼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부심, 명예, 교육, 기질, 용기로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수레에는 다른 사람도 함께 타고 있었다. 상송과 그의 보조가 뒤에서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가 감방에서 성사를 거절했던 지라르 신부는 처형장까지 그를 호위할 공식 임무를 받았고, 민간인 복장을 한 채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부를 보지 않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곧게 앉아 있었으며, 손이 등 뒤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거의 뒤쪽으로 젖혀 있는 것 같았다. 흰 머리카락은 모자 선을 따라 짧게 잘렸으며, 창백한 얼굴에 뺨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볼이 약간 붉었으며, 눈은 마치 피를 부은 것처럼 충혈되었고,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군중의 움직임이나 고함에 무관심한 듯했다. “인간의 얼굴로 빽빽이 벽을 쌓고 포장한 길이 되었다.” 다시 한 번 빅토르 위고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피고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떠올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내 머릿속에서 마치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문이었다.” (P329-331)
거의 정오가 되었다. 우리는 혁명 길의 모퉁이를 돌아 옛 루이 15세 광장에 이른다. 예전에는 조각가 에듬 부샤르동(Edme Bouchardon)에게 의뢰한 ‘사랑받는 자’(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있었짐나, 이제는 손에 창을 들고 프리기아 모자를 쓴 자유의 석고상이 그 자리에 서 있다. 몇주 후 롤랑 부인은 자유의 상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오, 자유여, 그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는가!”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사람은 20만 명이 모였다고 말했다. 오전 10시부터 기다리던 민중은 처형을 빨리 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고, 아무런 폭동도 없었다. 한 수사관은 “그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 1월 이후 이 광장에서 잇따라 벌어진 정치적 처형은 혁명 정신으로 볼 때 민중의 축제인 동시에 공화국에 가한 범죄의 본보기식 처벌이었고, 적들에 맞서 끊임없이 국민 주권을 재확인하는 행위였다. 그곳에 도착하는 순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오직 두려움과 죽음만 남아 있었다. (P334)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번도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많은 아바타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대신해서 아바타를 소유하려고 했다. 모두가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어떤 이는 그를 군주제의 성인으로 만들었고, 또 다른 이는 그를 오랫동안 공화국의 지옥 속에 가두었다. 먼저 미슐레는 이렇게 말했다. “왕비는 유죄였으며, 외국인을 불러들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증명할 수 있다.” 심지어 라마르틴조차 그가 “아마도 무죄일지도 모른다”라고 믿었다. 그런데 7월 왕정 시기에 정통주의자들은 이 ‘아마도’라는 말에 수없이 항의했다.
그리고 마치 [강력한 마녀] 키츠케(Circé)의 희생자들처럼 프랑스 국민이 그를 중심으로 공화국 지지자와 적으로 갈라지고 프랑스가 점차 둘로 쪼개지자 사람들은 그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했다. 이미 나폴레옹은 그의 무분별함과 경박함, 능력 부족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는 멍청한 소녀이거나 자신의 운명을 이해하지 못한 응석받이 소녀로 취급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모리스 데코브라(Maurice Dekobra)]의 <침대칸의 마돈나(La Madone des sleepings)>[처럼 자유분방하고 파산한 여성], 패션 잡지의 코팅된 종이 인형 같은 [획일적] 모습으로 취급했다.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 감독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신발을 신은 자기 모습에 반한 모습을 꼭 보아야 한다. 그는 현대판 공주였고, 젠더 연구의 대상이었으며, 규범을 거부하면서도 규범의 희생자인 게이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는 오슨 웰스(Orson Welles)의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마지막 장면처럼 무한히 반사하는 거울의 미로에 갇힌 모습으로 등장할지 모른다. (P346-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