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185. 지금여기

by 노용헌

사진은 항상 지금 여기를 말하고 있지만 보는 사람들에겐 그때 거기를 본다. 사진가는 항상 그 현장에서 지금 여기에 서 있다.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느끼고, 항상 지금 여기에서 느꼈던 것을 사진에 담는다. 내가 사진을 찍었던 것들은 모두 지금 여기를 기록하고 있지만, 시간의 흔적은 과거가 된다. 어쩌면 주술사가 자작나무 가지와 독수리의 깃털로 우리의 이마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새로운 공간으로 여행하게 되는 낯선 공간으로 이동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억겹의 시간이 흐른뒤 다시 만난 사람들로 지금 여기에 서 있기도 하고.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거쳐간다.


글과 사진, 그리고 어떤 매체 그림이든 영화든 지금 여기의 현재를 이야기하진 않는다. 현재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도 사실 어찌 보면 과거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라는 틀안에서 보여줄 뿐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진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과거 속에서 노래는 확장되어 나가고, 사진은 멈춘다. 노래는 시간의 행복한 감정이며, 사진은 시간의 비극이다. 나는 종종 우리가 한평생을 노래와 사진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사진의 용도 p115,『노래 한두곡』)

나의 사진은 지금 여기를 얼마나 잘 알 수 있을까. 내가 서 있는 자리의 한계는 국소[局所]적이고 지엽[枝葉]적인 지금여기를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충실할려고 노력할 뿐이다. 사진가는 전체중에서 부분을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본다. 그것이 어쩌면 개인의 한계일수 있겠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지금여기를 말한다. 사진가는 사진이 될 만한 곳을 찾아 기웃거린다. 의미없는 곳도 사진이라는 허울로 의미를 해석하기도 한다. 진실은 그렇게 포장되기도 하고, 잘못 오역을 하기도 한다. 무엇을 이야기할려는 것인지 도통 알수 없는 개똥철학으로 자기 주장만 하다 끝난다. 무엇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연인 마크 마리가 글을 쓴 『사진의 용도』는 그들의 개인적인 여운과 기억에 관한 용도로, 유방암 투병중인 작가에게 어르티즘과 죽음이란 극단의 기억들을 붙잡기 위한 용도로 사진이 사용된다. 사진은 개인적인 기록이다. 이런 개인적인 기록들이 SNS로 더욱 많아졌다. 유튜브,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에 사적인 기록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사진은 누군가의 기록이고, 그 기억들은 지금여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여기에 어느곳은 살인현장이, 어느 곳은 화재현장이, 어느 곳은 수해현장이고, 어느 곳은 전쟁현장이다. 우울하고 암울한 현실이다.


누군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연습을 하듯,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이 어떻게 만들 것인가 고민을 하듯, 사진가는 지금 여기에 서서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하고 생각을 한다. 생각은 손가락으로 셔터를 누르는 순간,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의 손가락 끝으로 건반을 누르고 음악이 완성되는 것처럼, 사진은 지금 여기 사진가의 감성이 담겨진다. 사진가는 항상 지금 여기를 말하고 있다.

18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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