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사유(思惟)와 인식(認識)
사람들의 사유란 부정확하다. 사람들 중에는 이해 부족으로 판단을 잘못하기도 하고, 뒤떨어진 편견에 의한 사고를 하기도 하고, 아집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사고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사고가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처럼 말이다. 이런 가치판단은 과거에 보았던 기억들과 현재는 항상 변화해가고, 본질은 주체의 사유가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청와대 하명수사,선거개입 의혹’사건의 공소장 공개와 비공개 논란에서처럼, 또한 자신이 썼던 페이스북에 앞서 한 말이 다시 자신에게 역풍으로 다가올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예술행위를 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창작활동이 예전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선 조심하고 신중해야 할 것이다.
“사유는 무엇일까?(Was heißt Denken)” 하이데거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사유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배운다는 것은 인간은 자신에게 그때마다 본질에서부터 말건 네고 있는 그것에 자신의 작위(作爲, Tun)와 무위(無爲, Lassen)를 응대(應對)시키는 한 배우게 된다. 우리는 사려되어야 할 것은 돌봄으로써 사유하는 법을 배운다.”1) 돌봄이란 타자에 대한 관찰입니다. 내가 나무를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나무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 사유를 하게 됩니다. 왜why, 어떻게How 무엇What인지 질문은 관찰의 기본적인 출발입니다. 사려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은 사유하게끔 한다는 것을 발견할수 있을 겁니다. 사유는 깊은 관찰과 성찰에서 나올 것입니다.
1) 하이데거 『사유란 무엇인가』 (길) p51
M.S.까간도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의 천재성이나 일반적으로 재능이라고 불리는 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 하여금 바로 사회적 삶 깊숙이 파고 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유는 그만큼 관념적 모상들에서 실체적 본질로 이르는 길이다. 사진가는 화면에 프레임하면서, 사진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통해 감상자에게 사유하게 만든다. 작가가 사유한 형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작가의 사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진부한 예술이라는 것은 알수 없고 느낄수 없는 그런 사진일 것이다. 더군다나 사진평론가들의 지멋대로의 사진해석은, 어줍지않은 문예사조나 끌어다 붙이는 사진해석이라는 것이 오히려 덕지덕지 사진공해를 낳는데 한몫 한다. 더 어렵게 이해 불가능하게 만든다. 감상자들을 우롱하면서 예술인양 치켜세운다. 존재나 자아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못하는 작품이란 뭔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르는 지들만의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그것이 사유를 관념속으로 몰아세운다.
사진은 사실성에서 출발한다. 기록은 사실성에 근간을 둔다. 사실성에서 진실을 사유하고, 상황을 인식한다. 그 다음이 표현이다. 사실성을 위배한 사진은 사진의 기본을 저버린 애초부터 사진이 아니다. C.P.스콧은 “해석은 자유지만 사실은 존중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해석의 수단으로 애초부터 다른 출발은 사진의 본질인 사실성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사진이 사실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사유와 인식의 단계이다. 플라톤이 말한 사유로써 알려지는 세계(즉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관념적인 생각들(주체)과, 눈에 보이는 세계(즉 감각 세계)를 카메라로 촬영하게 된다(피사체, 대상). 사진가는 사진을 통해서 사유와 인식을 하게 되고, 이것의 결과물로서 사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