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41. 예술작품은 언제나 의미를 갖고 있는가?

by 노용헌

예술작품은 언제나 의미를 갖고 있는가? 예술작품에는 어떤 메시지와 어떤 정보가 담겨있는 것일까? 20세기 최고의 미술작품중의 하나인 마르셀 뒤샹의 ‘샘’은 변기를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옮겨놓고 예술이라고 말한다. 뒤샹은 ‘샘’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기존 미술계의 고정관념을 깨고자 이러한 엄청난 해프닝을 했고, 그가 도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예술가는 창조자이기도 하지만 기존에 이미 만들어진 ‘선택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추함을 전달하고 있다. 아니 더러운 변기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샘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와 예술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그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과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과잉 장식과 수다스러운 문학이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거 그 풍부함이 짐작만 될 뿐인 온갖 경험의 암시로 인하여 풍요로운 작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작가수첩1’ 中-


예술작품의 의미는 1)예술작품의 가진 속성(體, text), 2)예술작품의 쓰임(用), 3)예술작품의 해석(解, context)에 따라 이해될 것이다.


1. 예술작품의 속성

예술작품에 대해 평가하는 비평가들의 1차적 관심사는 ‘작품자체의 예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의 속성과 특질은 비평가들에게 작품을 검토하게 되는 첫 번째 기준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가가 예술작품의 근원이 되는 것은 예술작품이 예술가의 근원이 되는 것과는 비록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두 사실 모두 필연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예술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도 이들 사실만큼이나 확실한 것이다.”라는 말처럼, 예술작품의 속성은 예술가의 속성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관찰할 때에 비로소 예술가의 의도(표현)를 만나게 된다. 예술작품의 사물성은 예술가의 창작정신과 교합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의 문자 텍스트는 조형예술작품에서도 이미지란 텍스트로 존재한다. 그것이 음악이든 작품자체가 가지는 텍스트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포스트모던 한 시대의 텍스트는 ‘탈장르화’ 혹은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e)’으로 뒤섞이면서 공존하고 있다. 텍스트는 외연적인 의미와 내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텍스트의 속성을 잘 이해할 때만이 그 의미작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레싱(G. E. Lessing)의 저작 <라오콘(Laocoon)>에서 문학과 조형예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기호가 표현된 것과 이의의 여지가 없는 적절한 관계를 갖기 위해 회화와 문학이 전적으로 다른 수단 혹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회화는 공간 속에 있는 형태들과 색채를, 문학은 시간 속에서 표현되는 소리를 사용한다.” 문학의 텍스트와 회화의 텍스트는 문자와 이미지란 속성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학과 조형예술이 가지는 질료적인 속성은 다르지만, 예술작품이 가지는 예술적 속성은 예술가의 정신에서 나온다. 예술가는 감추어진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어떤 것을 표상하기 위해서 작품을 선택한다. 작품이란 질료를 통해서 예술가는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호소한다.


2. 예술작품의 쓰임

예술작품은 유형적 입장에 따라 자유 예술과 응용예술로 구분될 수 있다. 기술(실용적 기술)과 예술(미적 기술)로 구분한다면 예술작품이 실생활에 사용되어지고 어떻게 쓰여지느냐에 따라 예술작품이 가지는 예술의 미적가치와 효용가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미적가치는 예술가의 정신(혼)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효용가치는 예술작품과의 관계에서 설정될 것이다. 그 작품이 어디에 놓여지고, 어떤 용도로 사용되어질 때 그 효용가치는 발생한다. 쓰레기가 어떻게 재활용되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전달되어지냐에 따라 그 효용가치는 달라진다. “예술이란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작품을 감상하며, 그 미적가치를 평가할 것인가?”, “이 작품의 효용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예술작품의 미적가치와 효용가치에 대해 그 쓰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가 어떤 예술작품을 본다는 행위는 보는 대상, 예술작품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려는 의지, 능동, 수동적 의미와 함께 보는 이의 주관과 일반인의 보편적 사고의 틀이 동시에 모두 적용되고 있다. 또한 작품을 ‘본다’라는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작가의 예술정신’을 공감하고자 하는 것이며, 보이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작품에 투영하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란 예술가와 세계와 관람자를 매개하는 하나의 다리인 것이고, 예술가의 정신을 훌륭하게 전달하는 매체인 것이다.

예술작품은 하나의 정보와 기호(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예술작품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할지, 의미론적으로 분석할지에 상관없이 예술작품은 의미정보와 미적정보를 담고 있다. 은유나 상징을 통해서 표현된 예술작품을 우리는 감상을 한다. 예술가가 예술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지,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판단하게 된다. 의미정보는 무엇이며, 미적정보는 어떤 것이 있는지. 예술작품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술가의 의도(예술적 경험)가 감염된다. 감염의 정도가 강하면 할수록 그 예술은 예술로서 더욱 큰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는 예술의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경험했던 감정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것, 그렇게 자신 안에서 감정을 불러낸 후에는 움직임, 선, 색채, 소리, 또는 언어로 표현된 형식을 통해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자신과 동일한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술 활동이다.” “예술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이다. 한 사람이 의식적으로 어떤 외적인 기호를 통해 자신이 살면서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거기에 감염된 사람들은 같은 감정을 체험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Trans, Aylmer Maude, Oxford, 1930, p.123>


3. 예술작품의 해석

"모든 사물이나 사상은 안과 밖이 있고, 이 안팎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치환될 수도 있기 때문에 안과 밖은 상대적인 양면인 동시에 하나이다."1)라고 하였듯이, 예술작품은 내적정보와 외적정보를 가진다. 내적정보는 예술가의 사상(내용)이라면, 외적정보는 예술가가 표현한 작품의 형식이다. 형식이라는 그릇에 담긴 내용을 맛볼 때, 진정한 작품에 대한 음미를 하게 될 것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 그것을 해석하는 관점, 작가의 대(對) 세계 태도 등, 우리는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내용과 형식은 상대적인 양면인 동시에 하나이다. 형식이 내용을 우선하는지, 내용이 형식을 우선하는지가 아니라 이 둘의 경계는 사실상 메비우스의 띠처럼, 양면인 것이다. 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품의 외적 이미지와 내적 이미지, 이 둘을 본다는 것이다. 작가의 경험적 산물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선험적으로, 비판적으로, 그리고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경험적으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1) 선험적 와유사상


이렇듯 무엇(작품-대상)을 본다는 것은 보는 이의 객관과 주관이 개입된 것으로 '해석적' 차원의 방법으로 안과 밖이 조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작품을 접하기 전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이들이 평론가들이다. 우리는 평론가들의 해석이 종종 자신의 경험과는 다른 이론적 경험을 체험하게 된다. 영화관에 가기 전에 평론가들의 해석은 명확하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감상에서 평론가들의 말은 말 그대로 참조일 뿐이다. 평론가들의 별 다섯 개는 평론가 자신의 자의적인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는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니체는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각자의 다른 해석은 존재한다. 그것은 각자의 객관적, 주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손탁은 해석의 충동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순수하고 관능적인 직접성이 존대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감상자에게 형식과 내용의 이분법적인 해석이 아니라, ‘사물의 반짝임’ 그 자체의 직접성을 경험하길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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