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Feb 06. 2023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

영화 <노예 12년> 2013년

솔로몬 노섭(Solomon Northup)은 1808년 노예 제도가 폐지된 뉴욕 주 미네르바에서 태어났다. 세 아이의 아버지이며, 바이올린 연주자로 살아가던 노섭은 1841년 일자리 찾으러 워싱턴에 갔다가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 노예생활 12년을 보냈고, 구조되어 그해 발표한 <노예 12년>(1853)는 저자가 직접 겪은 노예생활 이야기이다. 한해 먼저 출간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과 함께 노예 해방의 도화선이 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워싱턴 D.C.의 법에 따르면 흑인이 백인에게 반하는 증언을 할 수 없었고, 솔로몬의 증언 없이는 민사상 고소가 불가능했다. 나중에 뉴욕 주에서 두 상인은 납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2년 후 기소가 중지되었다. 노섭은 강연과 연설을 통해 노예 제도의 야만성을 알리는 데 열중했다. 틈틈이 탈주 노예를 캐나다로 도피시키는 비밀 조직 ‘지하철도’에서 활동했다는 증언도 있다. 1857년 이후 노섭의 행방은 묘연하다. 일설에는 노예 상인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1984년에는 <솔로몬 노섭의 오디세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고, 2014년에는 스티브 맥퀸 감독이 <노예 12년>이란 동명의 영화를 만들어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수상했다. 노섭이 자유인의 삶을 누렸던 뉴욕 주 사라토가에서는 매년 7월 셋째 주 토요일을 ‘솔로몬 노섭의 날’로 지정해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자유인으로 태어난 나는 30년 넘게 자유로운 주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납치되어 팔려 가, 12년 동안 노예 생활 후 1853년 1월, 간신히 구출되었다. 사람들은 내 삶의 우여곡절을 들려주기만 하면 누구든지 흥미로워할 거라고들 했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오고 나서 보니, 북부에서는 노예 제도에 대한 관심이 들끓고 있었다. 노예 제도의 저열함을 고발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노예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노예 제도를 주제로 한 평론과 토론이 열풍이었다. 

나는, 내가 겪고 관찰한 노예 생활을 오직 내 관점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P13)     

내가 알 수 있는 한, 친가 쪽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의 조상은 로드아일랜드에서 살던 노예였다. 노섭 집안의 노예여서, 주인의 성을 따랐다. 노섭 집안사람 한 명이 뉴욕 주로 이주하면서 우리 아버지 민터스 노섭도 데리고 갔다. 렌셀러 카운티의 후식이라는 곳에 자리 잡았던 그 신사가 죽자 아버지는 그분의 유언에 따라 자유인이 되었다. 50년쯤 전의 일이다.  (P13-14)     

아버지 생전에 나는 주로 아버지가 일하는 농장에서 같이 일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책을 읽거나 바이올린을 켰다. 바이올린만이 청춘의 열정을 쏟아부을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인간이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자, 고통스러운 운명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진통제로써 무척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P15)     

이 농장에서 우리는 1834년까지 머물렀다. 농한기인 겨울이 오면 바이올린을 연주하러 이곳저곳 불려 다녔다. 젊은이들이 춤추러 모이는 곳이면 항상 내가 있었다. 인근 마을에서 내 연주 솜씨는 유명했다. 앤도 오랫동안 독수리 선술집 여관에 살면서 익힌 요리 솜씨로 약간의 유명세를 누렸다. 법원의 개정기간과 공식 행사 시즌이면 앤은 높은 일당을 받고 ‘셰릴네 커피 하우스’주방에서 일했다.

우리 부부는 늘 일당을 한몫 챙겨서 집으로 왔다. 바이올린 연주와 요리, 농장일 덕분에 집안 형편을 금세 나아졌고, 이대로라면 분명,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우리가 킹스베레 농장에 계속 머물렀다면 아마 그렇게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잔인한 운명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딛고 있었다.  (P18)     

  

유나이티드스테이츠 호텔에 머무는 동안 종종 주인을 따라 남쪽에서 온 노예들을 만났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겉보기에는 곤란한 일 하나 없이 아주 쉽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주 여러 번 그들과 노예 제도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럴 때면 거의 어김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불타는 자유를 향한 비밀스러운 욕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개중에 어떤 이들은 탈출하고 싶은 열망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며 조언을 구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잡히면 받을 처벌이 두려워 다들 탈출은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북부의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며 살았고, 백인이 느끼는 감정과 내 감정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어떤 사람이든 피부색에 관계없이 동등한 지성을 가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세상물정을 모르거나 너무 독립적인 인간이라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한 인간이 노예라는 지극히 비참한 상태로 그냥 살아갈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결코 노예 제도를 인정할 수 없었고 노예 제도를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종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맹세컨대, 나는 한 번도 내게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을 내친 적이 없다. 그 사람이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함께 고민하며 찾으려 애썼고 그 사람의 투쟁을 지지해 주었다.  (P19-20)    

 

저녁 식사 후 그들은 나를 방으로 불러서 그동안의 임금을 계산해 주었다. 총 43달러를 받았는데, 지금까지의 임금 치고는 꽤 큰돈이었다. 그들이 설명하길, 이렇게 넉넉하게 지불하는 이유는 처음에 사라토가에서 제안했던 것만큼 오는 길에 공연을 자주 열지 못해서 내가 기대한 만큼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 서커스단은 내일 아침에 워싱턴을 떠날 예정이었는데, 장례식 때문에 하루 미루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날부터 내게 무척 친절한 모습만 보여줬다. 내게 승낙을 구하는 걸 잊지 않았기에, 나는 둘의 그런 태도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아무런 의심 없이 두 사람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자유증서를 발부받자는 제안에서부터 수백 가지 소소한 행동들과 상냥한 말투를 보면 나를 세심히 배려하는 친구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둘은 사려 깊은 친구가 아니라 크나큰 악을 품은 채 웃는 얼굴로 나를 속인 범죄자들이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돈의 유혹에 사로잡혀 나를 가족과 집으로부터 꾀어내어 자유를 앗아 갔다.  (P26)    

 

더욱 기이한 것은 이 집을 평온하게 내려다보는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라는 점이었다. 애국심 깊은 국회의원들이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목소리와 불쌍한 노예들이 족쇄를 끌며 걷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국회의사당 바로 근처에 노예수용소가 존재하는 현실이라니!

1841년 워싱턴의 윌리엄스 노예 수용소는 정확히 그러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 감방에 갇혀 있었다.

“어이, 자네, 좀 어때?”

버치가 문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나는 여전히 아프다고 하면서 내가 왜 여기 갇혀 있냐고 따져 물었다. 제임스가 나를 샀는데 곧 뉴올리언스로 보낼 거라면서 나더러 자기 노예라고 했다. 큰 목소리로 나는 자유인이라고 항변했다. 엄연한 사라토가의 자유민이며 아내와 아이들도 있고, 성은 ‘노섭’이라고 말이다. 나를 부당하게 대하는 걸 비난하며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버치는 내게 조지아 출신 노예가 어디서 거짓말을 하느냐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나는 계속 난 노예가 아니라고, 당장 이 족쇄를 풀라고 소리를 질렀다. 버치는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싶어서인지 내 입을 막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팔아먹은 빌어먹을 악당이 누구냐고 고래고래 외쳤다.   (P33)     

이 생각이 종종 떠올랐지만 진의가 잘못 전달되어 오해를 살까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포드의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서 안전하지 못한 방법이 되어버리긴 했다. 후에 윌리엄 포드와는 전혀 다른 주인들을 만나면서부터 나의 정확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노예 제도의 더 깊은 본질을 확실히 깨닫게 된 셈이다. 나는 너무나 비싼 노예여서 잃어버리면 큰일 날 자신이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자유인이라는 소리를 조그맣게 속삭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도둑의 장물처럼 나를 저 멀리 한갓진 곳으로 데려가서 텍사스 국경 너머로 팔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마음속에 비밀로 남겨두기로 결심했다. 신의 섭리를 믿는 한편, 자유를 찾으려면 빈틈없이 준비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다.   (P77)     

외출 허가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백인이라도 자유롭게 나를 생포해서 가둬둘 수 있었다. 원래 주인이 나타나서 ‘자기 소유임을 입증하고 돈을 치른 뒤 나를 데리고 갈 때까지’ 말이다. 나는 길 잃은 가축이나 매한가지였다. 운 나쁘게 준법정신이 투철한 루이지애나 주민이라도 만난다면 그 자리에서 당장 우리에 갇힐 운명이었다. 정말이지 이제는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뭔지 우열을 가릴 수가 없게 되었다. 개 떼인지, 악어인지, 사람인지!  (P120)     

엘리자는 완전히 기력이 다해서 몇 주 동안이나 낡아빠진 오두막 바닥에 드러누운 채 동료 노예들이 간간이 몰래 조금씩 가져다주는 음식과 물로 연명했다고 한다. 하물며 고통스러워하는 동물에게도 ‘한 방’에 고통을 끝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기도 하는데, 엘리자의 주인은 그냥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내버려 두기만 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 자연히 말라 죽도록 말이다. 어느 날 밤 노예들이 밭에서 돌아와 보니, 엘리자가 죽어 있었다고 했다. 그날, ‘주의 천사’가 땅으로 내여와 영혼을 거둬 가는 중에 조용히 엘리자의 오두막에까지 들어와 힘들어하는 그녀를 데려간 것이리라. 엘리자는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P137)     

1인당 베이컨 1.5킬로그램과 옥수숫 가루 8리터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옥수수를 받았다. 식량은 이게 전부였다. 커피도, 차도, 설탕도, 소금도 없었다. 엡스의 농장에서 살았던 10년 동안 통풍으로 고생하는 노예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자고로 통풍이란 너무 풍족하게 살면 걸리는 병이었다. 엡스는 돼지 사료로 옥수수를 사용했는데, 그 사료를 ‘검둥이들’에게도 던져준 셈이었다. 돼지에게는 살을 금방 찌우기 위해서 껍질 벗긴 옥수수를 물에 푹 불려 먹였다. 하지만 노예들은 같은 방식으로 먹이면 너무 빨리 살쪄서 일을 못하게 될 거라는 계산에 가루로 갈아 먹게 했다.   (P144)     

노예 제도의 존재가 인간의 잔인한 본성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았다. 날마다 인간이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하면 잔인하고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노예들이 괴로워 내지르는 비명을 듣고,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죽어 관도 없이 묻히는 모습을 보는데, 어떻게 인간의 목숨을 중히 여길 수 있겠는가. 물론 어보이엘르 교구에도 윌리엄 포드처럼 선하고 착한 사람은 많았다. 전지전능한 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떤 생명의 고통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 여리고 착한 타지인처럼 이들도 노예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고 아파했다. 노예 상인의 잔인함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제도의 잘못이다.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관습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노예의 등을 채찍으로 내리치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어릴 때 고착된 인식은 좀처럼 바꾸기 힘든 법이다.   (P172-173)     

내가 처음으로 허프 파워에 있는 엡스의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로버츠의 노예인 톰이 감시인이었다. 건장한 톰은 굉장히 엄격한 감시인이었다. 엡스가 바이유 뵈프로 농장을 옮기고 나서부터는 내가 그 영광스러운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후로 나는 농장을 떠날 때까지 줄곧 목에 채찍을 두른 채 밭일을 나가야 했다. 엡스가 밭에 함께 있을 때는 감히 동료들을 조금이라도 봐줄 엄두가 안 났다. 저 유명한 소설 속 독실한 톰 아저씨처럼 꿋꿋하게 감시인 노릇을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톰 아저씨의 순교자적인 길을 따라갈 순 없었지만 그저 동료들의 고통을 약간이나마 덜어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엡스는 밭에 없을 때에도 언제나 우리를 향한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P190)     

“오, 그래? 본때를 보여주지. 감히 쇼한테 들락거려? 이번에야말로 저 뻔뻔한 년 기를 꺾어놔야지, 안 되겠어.”

엡스가 이를 악문 채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뚝 네 개를 가져오라며, 부츠 끝으로 말뚝을 놓을 지점을 이리저리 가리켰다. 말뚝이 세워지자 엡스는 팻시에게 옷을 몽땅 벗으라고 명령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팻시가 땅에 엎드리자, 팻시의 손목과 발목에 밧줄을 감아 각각의 말뚝에 매달았다. 엡스는 무거운 채찍을 내리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채찍을 내 손에 쥐여주며 팻시를 치라고 명령했다. 당연히 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이 땅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날 그 자리였을 것이다. 

안주인은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 서서 몹시 만족스러운 듯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무심히 지켜보았다. 노예들은 약간 떨저진 곳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다들 고통스럽고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가엾은 팻시는 간절히 기도를 중얼거렸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엡스는 이를 갈고 발을 구르면서 미치광이처럼 ‘더 세게’를 외쳐댔다. 

“더 세게, 더 세게 치란 말이야, 못하면 다음은 플랫, 네놈 차례인 줄 알라고.”

“주인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P216-217)    

 

한순간에 그가 왜 왔는지 알 수 있었고, 해방의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당장 달려가려고 했지만 보안관이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플랫 말고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솔로몬 노섭이 진짜 제 이름입니다.”

“가족은 어떻게 되죠?”

“아내와 세 아이가 있습죠.”

“아이들의 이름은요?”

“엘리자베스, 마가레트, 알론조입니다.”

“아내의 결혼 전 이름은요?”

“앤 햄프턴이오.”

“주례는 누구였죠?”

“포트 에드워드의 티머시 에디 판사님이오.”

“저 남자는 어디에 살고 있죠?”

다시 노섭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섭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저분은 뉴욕 카운티의 샌디힐에 살고 계십니다.”

보안관은 질문을 더 할 기세였지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를 밀치고 나가서 오랜 지인을 양손으로 잡았다. 나는 울컥해서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P256)  

   

아직도 나처럼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수백 명의 자유 시민들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가 지금 이 순간에도 텍사스와 루이지애나의 농장에서 목숨을 줄여가며 고된 노동을 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모든 걸 참고 용서하고자 한다. 나는 그동안 겪었던 고통 덕분에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었고, 여러 좋은 사람들 덕분에 이렇게 다시 행복과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내게 남은 소원은 소박한 삶이나마 당당하고 꿋꿋하게 누리다가 아버지가 잠든 교회 안마당에 같이 묻히는 것뿐이다.   (P272)     


이전 08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