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3가지 물음('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쓰는가' '누구를 위해 쓰는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사진으로 말하자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찍는가’ ‘누구를 위해 찍는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사진가가 자신의 사진을 찍는 이유와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고자 하는 고민은 오랜 숙제일 듯 싶다.
1.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의 언어는 앞에서 살펴본 '사물'에 가깝다는 이유에서다.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를 사르트르는 어떻게 구분했을까. 두 언어를 비교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유리를 예로 든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 밖을 볼 때 우리는 유리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이때 유리는 도구(바깥쪽을 보게 해주면서 안쪽을 보호하는)로 기능한다. 하지만 유리에 무언가가 묻거나 유리가 빛을 반사하는 순간 우리는 유리에 주목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리는 하나의 사물로써 인식된다. 사르트르는 언어를 도구 이상으로 보는 태도에 반대했다. 언어 자체에 천착하는 태도는 참여문학의 강령 곧 언어라는 수단으로 사회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변화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투명한 유리처럼 도구(의미를 전달하는)로 사용하면 충분하다. 시의 언어는 언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유로운 해석을 기다린다는 점에서 불투명한 유리와 같다.
사르트르는 "말은 행동의 어떤 특수한 계기이며, 행동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작가의 사명은 '쓰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드러내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내밀어 사회를 변화시키도록 행동의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만일 글쓰기가 단순히 선전이나 오락으로 전락하게 된다면, 사회는 무매개적인 것의 소굴 속으로, 다시 말해서 날파리나 연체동물과 같은 기억 없는 삶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진은 카메라를 통해서 기록되고, 렌즈를 통해서 대상을 사유한다. 사르트르의 비유에서처럼, 유리라는 도구에 의해 사진을 찍게 된다. 렌즈는 도구이자 창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서 해석을 하게 된다. 결국 사진을 찍는 행위는 ‘쓰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행동이 수반되고, 또한 작가의 해석이 들어간다.
2.왜 찍는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자에게 부당한 세상을 함께 바꾸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곧 '참여'를 요청하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물컵이 놓여있다. 물컵의 '물을 담는 도구'라는 존재의미를 갖는다. 물컵을 만들 때부터 이 존재의미는 정해져 있었다. 다시 말해 물컵을 만든(실존) 뒤에 물을 담는 기능(본질)을 발견한 게 아니다. 이처럼 사물은 본질이 실존을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정반대다. 사르트르(무신론자)는 인간이 아무런 존재의미를 갖지 않고 세상에 던져졌으며 의미의 부재 혹은 결여 상태를 해소하고자 고뇌한다고 말한다. 또 인간이 존재의미를 발견하고 실존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 명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숨 쉬며 시시각각 변하는 존재인 인간은 자기 안에서 존재의미를 완전히 확보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인간은 고뇌하지 않는, 의식을 갖지 못한 한낱 사물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모순을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 비유한다. 당나귀 앞에 당근이 있다. 하지만 당근은 수레에 매달려 있다. 당근을 먹기 위해 나아가는 순간, 당근도 똑같이 나아간다. 따라서 당나귀는 결코 당근을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당근을 좇는 당나귀처럼 존재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하지만 작가는 늘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존재이유'가 된다. 또한 그는 독자의 존재를 요청한다. 독자가 읽는 행위를 통해 작품에 객체성을 불어넣음으로써 모순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자의 평가라는 시각 속에서 내가 나의 책을 다시 읽을 때 나는 그 책 속에서 어떤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 깊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 책 속에 절대로 불어넣을 수 없었던 그런 깊이다."
사르트르는 향유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또한 본질적이라는 비정립적 의식을 수반한다고 말한다. 정립적 의식이란 존재를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하는 의식이고, 반대로 비정립적 의식은 자신을 존재하는 것으로 대상화하지 않을 때 의식이다. 따라서 전자는 내가 파악하고 있는 물체를 존재하는 대상으로써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의 실존은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왜 찍는가? 그 출발점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고, 두 번째는 인식에 대한 물음이다. 자신의 존재는 결국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고, 그것은 대상과의 관계(Rapport)에서 비롯된다. 사진을 찍게 된 동기는 본인에게서 나오지만 그것을 이야기하고, 전달하고, 말하고자 했던 것들은 모두 관계에서 연결되어 있다. 찍는 행위는 본인의 결정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매듭은 모두 관계이다.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주제(subject)는 결국 피사체인 대상(object)과의 관계에서 연결되어진다.
3.누구를 위해 찍는가?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는 읽기의 결과물을 통해 제시된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독자들의 자유에 호소하기 위해 쓰고, 자신의 작품을 존립시켜 주기를 그들의 자유에 요청한다." 사르트르의 '독자에 의한 문학'은 독자의 읽기 행위를 통해 객체성을 확보한 문학을 의미하며, 작가는 이를 통해 '존재의미의 발견'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작품에 객체성을 불어넣어줄, 즉 작품을 '사물'로 만들어줄 독자의 존재를 필요로 하게 된다.
“작가는 자기가 쓴 것을 스스로는 읽을 수 없다. 반면에 읽는 사람은 읽으면서 예측하고 기대한다. 독자는 한 문장의 끝을, 다음에 올 문장을, 다음에 계속될 페이지를 예측한다. 다음에 올 그런 글들이 자기의 예측에 들어맞거나 혹은 어긋나는 것을 기대한다. 책 읽기는 숱한 가정, 꿈과 그 뒤에 오는 각성, 그리고 희망과 실망으로 이루어진다.”-문학이란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찍기도 한다. 자신의 은밀한 일기일수도 있다. 또한 선전을 위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띌수도 있다. 과연 나의 사진은 누구를 대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가. 작가는 대상과의 소통(communicate)을 나누고, 그것을 전시장이나, 책을 통해서 또는 웹을 통해서 전달한다. 특정한 독자들이나 무작위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생각없이 찍는 사진이 아닌 무언가 목적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존재의미의 발견’이든, 사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란 무엇일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