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86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 메를로 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라캉(Jacques Lacan)은 자신의 열한 번째 세미나,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에서 ‘눈(eye)’과 ‘응시(gaze)’를 구분하였다.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선이고, 응시는 주관성의 가시적 영역을 넘어서는 이질적인 타자의 시선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상보(相補)적인 오브제 투르베(objet trouvé)라는 용어로 이용하는 수제 투르베(sujet troué)(구멍으로 가득 찬 대상)를 언급한다. 눈은 주체인 사진가가 바라보는 시선이고, 응시는 그 시선을 넘어서 이질적인 타자의 시선이다. 카메라는 기계는 기본적으로 구멍을 통해서 바라본다. 물론 렌즈를 통하기 이전 핀홀 카메라(Camera Obscura)는 어두운 상자에 뚫린 구멍으로 빛을 기록한다.
“응시는 문구멍으로 안을 몰래 들여다볼 때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처럼 늘 타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이른다.”(사르트르)
“그 타자의 눈을 통해 스스로를 대상으로 보는 ‘응시’가 가능해진다.주체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은 이미 늘 주체를 그 뒤에서 주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라캉)
사르트르가 '응시'와 '보는 행위'를 뒤섞었다면 라캉은 둘을 구별하고 떼어놓았다. 누군가를 보는 것(look)은 응시(gaze)와 어떻게 다른가. 시선과 응시 사이의 분열은 곧 시각의 영역에서 표현된 주체의 분열 그 자체에 해당한다. 사진을 찍는 주체자로서 사진가는 대상을 바라봄과 동시에 응시를 한다. 또한 방관자로서 관조(觀照)하기도 한다. 구멍을 통해서 관음적 욕망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거울의 반향적 성격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며, 창문을 통해서 멍하니 관조하기도 한다. 시선과 응시로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런지는 모르겠다.
라캉의 응시는 욕망의 꿈의 뒤틀린 왜곡된 상이다. 마치 장자가 나비 꿈을 꾸고 깨었을 때 그는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가 반문했다. 라캉은 이 꿈을 응시로 풀어낸다(S11: 76). 나비는 장자가 되고 싶고 갖고 싶은 오브제 아이다. 장자와 나비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이다. 사진가가 바라본 응시는 최종적으로 프린트되어 전시장에 걸린다. 전시작품으로서 사진은 수많은 응시(관람자의 시선)를 낳는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관람자들은 이 광대한 구조물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들은 관람자가 없을 때 이 방에서 곰곰이 바라보는 예술작품의 응시를 볼 것이다. 그림 뒤에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응시이다. 우리는 뒤에 항상 ‘많은 응시(lots of gazes)’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메를로-퐁티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 우리가 규정해야 할 것은 응시가 시선에 앞서 존재한다는 점이다. 나는 한 곳만을 바라보지만 나는 모든 방향에서 보여진다.”
“메를로-퐁티도 지적했다시피 세계속에서 우리는 보여지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의식은 '세계의 광경'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를 규정하고 무엇보다도 그런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우리를 보여지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 아래 우리가 놓이게 되면, 우리는 아무런 만족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시선과 응시의 행위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보는 행위이다. 보는 행위는 주체가 가지는 행위일 것이다. 주체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서 시선을 주고 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진가와 대상과의 교감이다. 교감하지 않은 시선은 공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