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85
나의 사진 철학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소요유(逍遙遊)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유자적 산책하며 사유하는 장자의 1편 <소요유>는 물고기 곤(鯤)이 기화(氣化)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鹏)이 되는 이야기를 전한다. 아마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변화된 장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대학시절 나는 사진학과 전공필수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철학 수업을 듣는데 시간을 할애했었다. 어려운 철학 수업은 대부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칸트와 헤겔로 끝나곤 했던 것 같다. 칸트와 헤겔 이후의 수업은 내 스스로 찾아 다녔다. 미학이 철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 궁금증을 해결해야 했었고, 루카치와 아도르노의 늪에서 허우적 댔던 것 같았다. 마치 들뢰즈의 유목민처럼 여러 사상과 철학자들의 공허한지도 모를, 말장난일지도 모를 지식을 찾아서 미로속을 헤매고 다녔던 것이 20대인 듯 싶다. 지금도 사실 잘 모르겠다. 철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질문만 던진 셈이다.
이과였던 나는 수학이 오히려 쉬웠다. 수학은 공식만 알고 있으면 문제를 푸는 것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공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문이 없다면 새로운 공식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공식들을 만들어내는 철학가, 예술가, 사진가들의 역사들을 공부하는 것은 새로운 공식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사 수업을 듣다보면, 사진의 발명 초기, 다게르와 탈보트, 나다르와 카메론,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과 로버트 프랭크까지였다. 모든 예술가들의 사상과 형식은 1910년 다다이즘(dadaism)에 다 나온 듯 싶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리얼리즘의 형태는 조금씩 살을 붙인 것뿐 새로운 것은 이 시기에 다 나왔다. 이전의 예술가들의 고민들, 현실과 이상의 애매한 경계에서, 비참한 현실 속에서 수많은 꿈을 꾸었던 그들은, 현실을 변혁하고자 또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현실을 관조하는 그들은 때론 허무주의로, 때론 신비주의로 이상과 현실은 항상 예술가의 몫이었다.
요즘 나는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학의 장르도 다양하지만, 장르를 떠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보려고 하고 있다. 카뮈의 <이방인>이나 사르트르의 <구토>,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같은 소설 되는대로 다 읽고 있는데, 그 중 나에게 맞는 소설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이었다. <데미안>이란 소설은 어렸을 때 단지 별 느낌 없이 보았던, 대학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의 시선으로 보았던 소설인데 30년이 훌쩍 넘어 다시 보니 그 느낌이 새롭다. 그의 소설을 다 읽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의 책들을 다 읽게 되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유리알 유희>, <요양객>, <청춘은 아름다워>를 찾아보게 되었다. 이중에서 <유리알 유희>는 그의 철학의 완결편이 아닐까 여겨진다. 우리는 무언가 쓸모를 찾아서, 무언가 자신에 대한 질문에 그 답을 찾고자 인생의 미로에서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죽을 때까지 그 답을 찾지 못하겠지만.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쓸모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이냐고. 실용 혹은 유능이라는 이름하에 우리 모두는 전부 개성 없이 무의미한 길을 걷고만 있는 건 아니냐고. 쓸모없는 나무는 그 쓸모없음 덕분에 천 리를 덮을 넓은 그늘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 나무가 쓸모있는 나무였다면 고작 장작이 되거나 날붙이의 자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자기가 이미 설정한 ‘쓸모’라는 관념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서 ‘쓸모’를 찾아내야 한다.”
사진가는 쓸모가 있는 것인지, 쓸모가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기억을 찾아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서, 자신의 이미지를 찾아서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사진에 담는다. 이 과정은 장자가 말하는 소요유의 과정이 아닐까. 사진가는 소요유를 통해서, 목적지 없는 여행을 통해서, 자유롭게 세상을 노니는 사람이 된다. 좋게 말하면 지극한 경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지인(至人)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량(閑良)인 셈이다. 정릉천에 오리들을 보면 편안해 진다. 오리들이 계곡의 물위에서 노니는 모습은 장자가 말한 소요유를 보는 듯 하다.
소요유(逍遙遊)는 거닐 소(逍)에 멀 요(遙) 또는 아득할 요(遙) 놀 유(遊) 또는 즐겁게 지낼 유(遊)다. 이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北冥有魚(북명유어) 其名爲鯤(기명위곤) 鯤之大(곤지대) 不知其幾千里也(부지기기천리야)
化而爲鳥(화이위조) 其名爲鵬(기명위붕) 鵬之背(붕지배) 不知其幾千里也(부지기기천리야).
怒而飛(노이비) 其翼若垂天之雲(기익약수천지운) 是鳥也(시조야) 海運則將徙於南冥
(해운즉장사어남명) 南冥者(남명자) 天池也(천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