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과 허상사이(플라톤의 동굴)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83

by 노용헌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동굴 안 개구리라는 말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굴 속에서 본 개구리의 시선은 실상을 본 것인지, 허상을 본 것인지. 동굴 안에 비친 모습으로 상상속의 것인지. 우리는 허상을 보고 실상이라고 여기고, 실상을 보고도 허상이라 여긴다. 허상의 허상은 실상이던가. 플라톤의 동굴은 이데아로서의 실상을 보려고 한다.


플라톤은 진정한 이데아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데아계로의 지향을 이끌며 동굴의 비유(동굴의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불림)를 이야기하였다. 이는 <국가 Republic>에서 실려 있으며 이데아계를 태양의 세계라고 한다면 가시계는 지하에 있는 동굴의 세계로 비유할 수 있다. 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풀려났다고 하자. 그리고 갑자기 일어나서 고개를 돌려 걸어 나와 불빛 쪽을 쳐다보도록 강요되었다고 하자. 이러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림자만 보는 데 익숙해져 있던 그는 아무리 실물을 보려고 해도 너무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때 만약 누군가가 그에게 “이전에 네가 보았던 것은 의미 없는 환영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너는 실재에 접근하고 실물을 향하고 있으므로 사물에 대한 더욱 참된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가? 그는 무척 혼란스러워 하는 동시에 이전에 보았던 것이 오히려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것보다 더 진실하다고 믿지 않겠는가?


사진은 과연 실상을 찍고 있는 것인지, 허상을 찍고 있는 것인지. 우리는 사물의 표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은 동굴안에서의 상상, 그 표면(사진)을 통해서 사물을 재인식하게 된다. 수잔 손택은 사진의 표면성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수잔 손택은 궁극적으로, 사진은 표면 아래의, 복잡한 관계가 아니라 표면만을 보여준다는, 브레히트Brecht의 주장을 제안한다:

만일 우리가 카메라가 기록하는 대로 받아들인다면 사진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보이는 대로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출발하는, 이해의 반대이다... 스틸 사진을 통해 얻은 지식은 냉소적이든 휴머니스트적이든, 항상 일종의 감상주의일 것이다. 그것은 싸구려의 가치의 지식이 될 것이다-지식의 겉모습, 지혜의 겉모습; 사진을 찍는 행위는 차용(借用, appropriation)의 외관이고, 강탈rape의 외관이기 때문이다.(플라톤의 동굴)


실상의 표면을 찍은 사진의 복제성은 디지털 시대에 더욱 무엇이 진짜인지, 무엇이 복사본인지 판단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복제의 복제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 실상과 허상의 구분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플라톤과 시뮬라크르》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주의의 타파는 다음을 의미한다. 시뮬라크르들을 기어오르게 하라.

그리고 도상들이나 복사물들 사이에서의 그들의 권리를 긍정하라.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다. 이러한 구분은 표상의 세계 내에서 작동한다, 문제는 이 세계 내에서 전복을 시도하는 것, ‘우상들의 황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는 퇴락한 복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 적어도 시뮬라크르 속에 내면화된 발산하는 두 계열들 중, 그 어느 것도 원본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복사본이 될 수 없다. 타자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소용없다. 왜냐하면 어떤 모델도 시뮬라크르가 야기하는 어지러움에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관점에 공통적인 대상과 관련해서만 특권적인 관점이 존재할 수 있다. 플라톤주의의 타파에서 그것은 단지 모의하는 것 즉 시뮬라크르의 작용을 표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 보드리야르의 이론적 영역과 시뮬라크룸(simulacrum)의 영역에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대신, 마음이 경험하는 것은 복사본과, 유사성으로 가득 찬 세계이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현실의 유사성, 리얼리티의 효과에 둘러싸여 있다고, 크라우스는 관찰한다. 비록 그 사진은 바깥세상(world-out-there)의 흔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세계의 기계적인 표현이고, 복사본이고, 유사한 대상이고,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크라우스가 사진에 적합한 담론이라고 믿는 것은 이 점에 있다; 그것은 심미적인 담론이 아니라 "예술이 그자체로부터 멀어지고 분리되는 것에서의 탈(脫)구축"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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