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81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본다(見指忘月). 사진은 가리키는 대상을 찍는다. 사진가가 가리키는 것을 보게 되고, 사진가가 보게 된 것을 본다. 사진은 지시하는 것, 지시하는 대상을 찍게 되고, 지시대상물(referent)을 통해서 의미를 전달하고, 이해하게 된다. 예술작품들이 모방에서 시작하여 대상을 재현하는데에서 출발한다면, 사진은 대상을 완벽하게 모방,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사진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믿음 또한 사진의 놀라운 유사한 대상 재현력에 있을지 모른다. 예술작품은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을 통해 어떤 대상을 재현(representation)한다. 이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또한 그 이전의 플라톤에서) 그 연원을 가지는 미메시스는 어떤 예술작품이 대상을 재현하는 토대가 된다. 사진의 완벽한 재현성으로부터 회화는 비재현적 특성을 취하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재현의 위기는 회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게 되었고, 예술작품은 어떤 대상을 지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시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자각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이 모더니즘 회화가 더 이상 대상지시성(Objektreferentialität)을 상실하여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Selbstreferentialität)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대상을 촬영하게 되고, 그 대상은 사진 안에서 유사하고, 닮음으로써 그 대상을 지시하게 된다. A는 A’를 통해서 완벽한 지시대상물을 가지고, 사진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게 있어서 사진은 항상 순응된 이미지와 이념적 기호, 외연(外延, denoted)과 내연(connoted)의 메시지에서 진동한다.
바르트가 제안하는 첫 번째 "본질적인" 요소는 사진이 그 지시대상물referent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특징이며, 자주적인 우연성Contingency, 흐릿하게 하고 어쨌든 무감각하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이 사진을 찍는 것과 사진이 아닌)은, 라캉이 투케Tuché라고 말하는 것은, 지칠 줄 모르는 표현에서, 유인(誘因, Occasion), 우연한 만남, 실재Real"이다.
바르트는 "시각에 어떤 것을 부여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사진은 항상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게 한다. 사실상 바르트는 "지시대상물의 완고함"이 사진의 본질(이후 사진 이론가들에 의해 단호히 공격받을 개념)의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그 반대도 주장한다:
우선, 나는 역설로부터 모면하려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진의 본질에 이름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사진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 eidetic)의 과학을 진술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진이 본질적으로 우연성, 특이성, 위험성만(용어의 모순)을 의미한다는 다루기 힘든 느낌이다: 리오타르(Lyotard)의 말처럼, 내 사진은 항상 "뭔가"에 관여하곤 했다: 우리가 진부하다고 부르는 것에 존재하고 있는 이 어려움은, 바로 사진의 약점이 아닌가?
기호학자들 또한, 인간은 문자를 포함한 상징(symbol)과 도상(icon), 지표(index)로써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서로 의사를 소통한다. 여기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어 내는 행위를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하고, 의미 작용과 기호를 통해 서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행위를 커뮤니케이션이라 하며, 이 둘을 합하여 기호 작용(semiosis)이라 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는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 그리고 기호 자체로 구성된다. 또한 퍼스는 기호와 그 기호가 지시하는 의미와의 관계를 세가지 종류, 도상(圖像/icon), 지표(指標/index), 상징(象徵/symbol)으로 구분하였다.
사진이 지시하는 것, 사진은 세상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 존재했었던 것을 찍게 된다. 그 존재에 대한 의미는 각자의 시각으로 해석하게 된다. 사진가가 해석하든, 사진을 보는 관객이 해석을 하든, 그 해석의 의미는 다를지 모른다.
바르트의 "존재했었던 것(that-has-been)"의 다루기 힘든 요소는 "그것that"인가 아니면 "존재했었던 것has-been"인가? “사이존재(Interfuit): 내가 본 것은 여기에 있었고, 이 장소는 무한성과 주제 사이에 확장된다; 그것은 여기에 있었고 아직 바로 분리되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반박할 수 없이 존재했었고 아직 이미 지연되었다. 이것은 모두 동사verb의 사이에 존재하다intersum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하듯이, 모든 사진이 유사물analogue 또는 과거의 존재 증명서certificate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중에 해설가들은 바르트가 말했던 것처럼, 세상에 대해 일 대 일, 왜곡되지 않은(지수적인) 관계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바르트는 "어떤 것도 사진이 유사하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바르트는 "사진의 노에마noeme는 유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결론짓는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 현실의 발산: 예술이 아닌, 주술"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는 바르트의 원시주의적 상상으로 돌아간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롤랑 바르트의 주장을 인용하여, 에덴동산의Edenic, 순수하게 유사한 상태에서의 사진은 "코드 없는 메시지"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기본적으로, 사진은 공허한 기호이다. 그녀는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 "시프터(shifters)"라고 부르는 것("이것", "나", "너"와 같은 단어들)에 비유했고, 이는 외관의 지시대상물인, 보충 담론과 병치할 때만 의미를 충족시킨다. 크라우스는 궁극적으로 담론, 맥락, 보충적 의미가 사진의 공허한 지표성(indexicality)을 의미와 함께 제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의 지시성referentiality(그리고 그것의 기본적인 무의미성)은 그녀의 분석의 핵심으로 남아있다. 지표성과 대체된 의미는 이 이론적 틀에서 서로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Photography Theory-James Elki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