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77
보통 산책을 한다면, 공원이나 한적한 숲속이나 강가를 따라 걷는 것이다. 그러나 도심에서 살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휴식이나, 쉼, 적어도 멍 때릴수 있는 그런 곳이 사실 많지는 않다. 도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인파와 거리의 소음으로 혼잡스러워 보인다. 숲이 주는 냄새도 사실 없다. 그럼에도 도시산책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유할까.
거리산책은 관조와 관찰을 세분화하고 시점화함으로써 축소된 대상에 대한 지각을 심화하는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사라져가는 파리의 구석구석을 담은 으젠 앗제(Eugene Atget) 사진은 카메라의 시선과 산책자의 사유를 성공적으로 결합한 예다. 앗제 사진은 인간들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터전인 도시의 원래 주인공들 대신에 낯선 사물세계의 이미지들을 펼쳐 보인다. 낯익은 것이 붕괴된 자리에 지금까지 인간의 눈과 의식이 미치지 않던 세부 세계가 드러나면서, 카메라는 우리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의 장을 펼쳐준다. 벤야민이 지향한 비평과 역사인식의 방법론도 이와 유사하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11>
앗제의 파리 풍경에서는 거의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른 새벽 시간 거리의 모습은 건물과 비어있는 공허감뿐이다. 내가 광화문광장을 찍는 것에서는 온통 집회시위 사진들이 많다. 광화문광장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공간으로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많은 외침들을 구호나, 집단행위들로 보여지는 장(場)이다.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광장의 선 개인은 군중들의 모습 속에서 어떻게 서 있을까. 공감과 연대로서, 아니면 전혀 낯선 풍경으로서 마주할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느낄까.
처음 접한 풍경은 우리에게 멂과 가까움이 희한하게 결합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이미지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선집2, 50p)이라는 아우라의 정의를 환기시킨다. 여행객이 풍경에 익숙해지면 아우라적 이미지는 다시 재생할 수 없다. 즉 ‘유실물’이 된다. 여행자는 도시의 아우라적 이미지를 잃어버리는 대신 거리산책자가 된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17>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거리산책중에 만나고, 또 잊혀진다. 기억을 하기도 하지만, 그 기억은 파편적이다. 광화문광장에 명박산성이 놓여져 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역사속 한 책의 사진으로 남아 있을지 모른다. 사진가는 그 과거에 지나간 흔적으로 남겨진다.
새로운 사실의 전달을 내세우는 기록사진 앞에서도 관찰자는 종종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환기하는 데 그칠 뿐 “사진의 진실 재현 가능성에 들어 있는 지침들”을 놓치게 된다. 이러한 지침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기계적인 연상작용을 정지시키고 무의식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감정이입을 배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그러한 지침들이 지닌 의미를 해독할 수 있다.
사진은 종종 사진의 맥락 속에서 포착되는 의미가 아니라, 그 효과는 분명하나 그것을 가리키는 기호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강력한 시선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한 경험은 사진에서 어떤 세부요소가 끈질기게 던지는 물음의 형태로 주어진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178-179>
내가 찍은 사진의 프레임에는 많은 정보가 있겠지만, 그것들 중에서 문자들이 많다. 문자는 시위자들의 구호이고, 일인 피켓팅을 하든, 집단이 한 목소리를 프린트한 프린트물에서도, 그리고, 깃발에 쓰여진 글자들, 플랭카드들, 건물의 간판들 모두 문자로 쓰여져 있다.
오늘날 대소시인들이 정신이라고 믿었던 태양은 문자의 메뚜기떼에 가려졌고 이 무리는 해가 바뀔수록 더욱 빽빽해질 것이다. (선집1, 95p)
대도시 거리에 문자가 범람한다. 광고판, 네온사인, 포스터 등 자본주의적 소비경제가 대도시를 지배하면서, 거리에는 이미지뿐 아니라 문자가 넘쳐난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34>
사진가는 산책을 통해서 관찰하고, 사유한다. “거리산책자는 시각적이고 수집가는 촉각적이다” 도심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풍경들을 마주한다. 갑자기 지나가는 119 소방차나 구급대의 요란한 소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 건물의 벽면을 청소하는 인부, 광화문 광장의 공사현장들, 전경버스와 교통경찰들, 광신도나, 노숙자들. 거리산책자는 이 모든 풍경들을 눈으로 마주치고, 기억한다. 이 모든 풍경들이 이미지로 수집되고 기억된다.
거리의 사물세계는 산책하는 비평가의 사유를 촉발시키는 우연적 계기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23>
사유는 끈기 있게 항상 새로이 시작하며, 사태 자체로 집요하게 돌아간다. 이러한 부단한 숨고르기가 정관(靜觀, Kontemplation)의 가장 고유한 존재형태다. 왜냐하면 정관은 어떤 동일한 대상을 관찰할 때, 여러 상이한 의미층을 쫓는 가운데 항상 새로운 자신의 출발을 위한 추진력을 얻고, 자신의 단속적인 리듬의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사유 파편들이 지나는 가치는 그 파편들이 근본구상에 견주어 측정될 능력이 없으면 없을수록 더 결정적인 것이 된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27>
거리산책자는 스쳐지나가는 미지의 것,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것에 완전히 몰입해 자아를 잊어버리고 타자로 자리바꿈하고자 한다. <발터 벤야민과 도시산책자의 사유, 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