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아우라(Aura)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276

by 노용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유일하고 아주 먼 것이 아주 가까운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회적 현상'이라고 아우라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일회적 현상은 환상인가, 욕망인가. 우리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 그 당시의 분위기와 나의 상태에 따라 그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환상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만들어졌든, 아니든, 아우라는 그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우라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일회적 현상일까?.

뒤를 돌아보니, 성상들의 머리 위 찬란한 광배(光背)에서 비추는 빛에 눈이 멀 지경이구나.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초점 없이 열린 그녀의 눈망울이 느껴져. 맑고 촉촉하며 거의 흰자위와 구분되지 않는 누르스름하고 거대한 각막 때문에 동공의 검은 점만이 잃어버린 색의 대비를 아스라이 되살려. 자신을 보호하기라도 하듯이 두텁게 주름진 눈꺼풀 속으로 몇 분 전까지 들어가 있던 눈동자는 자신의 메마른 동굴 속에 다시 숨어 버리네.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P18>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의 등장으로 인한 복제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무한히 복제되는 기술적 복제시대에서,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가지만은 빠져 있는데, 그것은 ‘복제할 수 없는 것’의 존재. 그것이 진품성이다. 복제된 작품에는 진정성(authenticity)도 없고, 진품성도 없다. ‘진품성’의 권위란 곧 사물의 권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권위는 바로 ‘아우라’를 뜻한다. 기술 복제(디지털 복제)에 의해서 아우라는 파괴되었다고 벤야민은 보고 있지만, 현대 예술은 끊임없는 진통을 겪고 난 뒤, 하나뿐인 예술작품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로 진화하고 있다. 과연 벤야민의 아우라는 NFT로 다시 되살아날까.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존재, 그 진품성과 연관되면서, 그러한 일회성과 진품성에 상응하는 전승의 형식에도 결부된다. 이 아우라의 마법적 요인을 벤야민은 이제 예술의 원초적 기능인 제의적 기능으로 소급한다.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예술작품은 수용자에게서 제의적 숭배의 특성들을 띠는 수용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나 대량복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진 시대에 그 일회적 가치가 상실되면서 예술작품은 그러한 수용 맥락에서 해방되기 시작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그로써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발터 벤야민 선집 2, 2019 p21>


아우라를 존재하게 하는 사회적, 정치적 바탕들은, 특히 광고 선전물과 정치 홍보물에 보여진다. 정치인과 연예인들은 철저히 계산된 아우라를 형성하고, 대중들에게 전달되어진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대상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대상을 고정(anchor)하려는 편견은 수많은 아우라를 고정한다. 고정(fix)하는 수단으로 카메라는 이용된다.


“모든 사진은 예술이기 전에 그저 ‘사진’일뿐이고, 그것을 예술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진은 인간이 가지고 싶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을 고스란히 기록해 우리를 안도하게 한다. 예술사진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사진이 예술 작품의 자격을 갖게 된다는 것은 그 사진을 예술로서 소비하고 싶은, 그리고 소비시키고 싶은 욕망이 동시에 작동했음을 말한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면 ‘말하는-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촉하면 ‘먹는-기계’가 되며, 생식기와 접속하면 ‘섹스-기계’가 된다. 사진도 이처럼 서로 다른 욕망에 따라 수많은 목적에 봉사하는 기계가 아닐까?”

<장정민, 사진이란 이름의 욕망기계>


우리는 허상을 실상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은 인물의 가장 그럴듯한 장면을 포착하고 그의 페르소나(persona)를 통해서 그를 인식한다. 마치 배우들이 일종의 역할극을 연기하는 가면으로서 자신의 분신을 설정한다. 자신의 본성위에 덧씌우진 페르소나(가면)는 허상으로서의 아우라를 만들어 간다. 자신의 독창성, 개인성은 오로지 사회적 요구에 만들어진 허상으로 보여진다. 만들어진 아우라는 과연 허상일까, 환상일까.

‘독창성’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탄생을 새로운, 언제나 새로운, 그 무엇으로 보고자 하는 근대의 병이다. 또한 근대성이란 오직 죽음에게만 말을 건네는, 유행하는 허상이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P71>


그렇다면 이러한 결합의 매개자인 아우라는 누구인가? 아우라는 실제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엘로가 만든 환영이자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이다. 아우라의 실체적 존재를 부인하는 서술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아우라가 부엌에서 새끼 양의 목을 쳐서 피를 뿌리는 순간에 콘수엘로가 방에서 같은 동작을 한다든지, 두 인물이 식사할 때 똑같이 움직인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젊음과 재생의 욕망이 빚어낸 인물이다. 아우라와 콘수엘로는 부분과 전체라는 환유적 관계이다. 아우라(aura)라는 이름은 성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원환이자, 비교(秘敎)적 전통에서 마녀들이 요술을 부리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 속 아우라는 콘수엘로가 만든 강력한 흑마술의 결과이자 욕망의 투영체이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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