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보려는 욕망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크 라캉-
폭력의 이미지, 고통의 이미지, 손탁은 <타인의 고통>이라는 사진의 욕망을 설명한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구경꾼, 관음증 환자일지 모르겠다. 그 고통에 분노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내면에 이미지의 충격은 이제 더 큰 것을 원하고 있고, 중독되어 수치심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토록 보려고 하는 것일까?’ 여자들의 몸과 사생활을 몰카에 찍힌 사진을 보며 관음증 환자처럼 대리만족하는 것이 아닐까?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난집이나 남 싸움하는 것이 가장 재밌다고 말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위안을 가지려는 사람들, 좀 더 섹시하고, 좀 더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옐로우 페이퍼들,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가십기사에 웃고 떠드는 사람들, 남의 일기장 보듯 페이스북등 SNS 눈팅을 하며, 우리는 ‘도대체 왜 보려고 하는 것일까?’
수없이 쏟아지는 이미지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비판없이 수용하는 이미지의 노예가 되었다. 하루에도 70여장의 AP와 70여장의 연합사진들이 제공되고 3일 정도가 지나면 신문사 AP 수신 컴퓨터도 한 장씩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단지 빠른 소식의 전달, 효과적인 다국적 논리에 따른 미국의 이미지 양상, 성적인 호기심등 시각적인 이미지에 따라 판단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이렇게 까지 만드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TV이고, 그 다음은 신문등 인쇄매체, SNS등 일 것이다.
"산업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의 중독자로 만든다."라는 수잔 손탁의 말처럼 산업화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는 이미지의 체험에 있어서도 엄청난 양으로 공급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시간 마다 갖가지 종류의 이미지들의 폭격을 받고 있는데, 그 중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성적인 이미지를 찬양하고 있다.
존 버거는 미술에서 남성의 존재는 그 자체로 권력을 나타내며, 여성은 타인의 눈, 다름 아닌 권력의 눈에 보여지고 평가되는 존재로 그려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회화에 나타난 여성이미지의 핵심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보여지는 대상으로 그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부응하고 외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잘 관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여성의 이미지가 잔상으로 여성 자신의 눈에 남을 경우 스스로 거울을 볼 때조차 남성의 시선을 다시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여성 스스로 존재하기보다는 남성의 시선이나 그 통념과 더불어, 아니면 적어도 그것들을 관통하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전에 어느 일간신문 사회면에는 세 여성의 삶이 수직방향으로 편집돼있었다. 편집부가 의도했던 바는 아닌지 모르지만, 그 편집은 아주 흥미로웠다. 맨 위쪽에는 마더 데레사가 가운데는 다이애너가 그리고 맨 아래에는 훈 할머니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각각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세 여성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여성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이다. 매스컴은 여성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있다. 가장 현실적인 여성 훈 할머니조차도 광고 이미지인양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거북하게 느껴진다. 훈 할머니의 이미지 뒤에서 어린 나이에 이국까지 끌려가 죽어간 무수한 어린 소녀들의 육체가 신문기사 5단에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조작은 특히 여성의 육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이미지의 추상성이 가려버리는 것이다. 여성의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노골적으로 전시된다. 그러나 지금 여성의 육체는 어느 때보다도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적의미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주인을 떠나 시체처럼 세계를 떠돈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는, 머리가 따로 떨어져 나간 채, 혼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죽은 여자들의 육체가 나온다. 그것은 외적이미지에 매달려 스스로 자연이 되기를 거부한, 주체와 따로 노는, 대상적 존재로 전락한 여성 육체의 끔직한 알레고리이다. 또한 신문과 방송, 매스컴은 노골적으로 sex를 상품화하여 전달하기도 한다. 노랑나비 이승희와 미스 유니버스의 여성을 호기심 어린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 떠들썩하게 지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소란의 배후에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탐닉이 도사리고 있다. 한 걸음 나아가 미국은 다국적 기업인 playboy를 통해 만들어진 여성 이미지를 소비하게끔 강요하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잘 팔린다는 것이 국가의 핑계이다. 여기다가 최근 유행처럼 퍼진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여성들이 주 고객인 화장품, 여성 의류, 텔레비전 CF에서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다. 이처럼 광고뿐만 아니라 사진을 시각화하는 매체에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장면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의 반복은 무의식중에도 관념을 형성하고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매체에서 보여지는 영상 이미지는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을 상품화하여 이미지를 재생산해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요부, 스핑크스, 모나리자)와 현대생활의 상품기능을 폭로하는 맑시즘적, 물질주의적 관심을 혼합한 양면성, 성의 정치학, 물신화된 상품소비의 정치학 그리고 여배우가 물신화된 상품의 형상이 되고 또한 성에 대한 복잡한 사회적 담론에서 기표로 기능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스타 시스템의 정점을 대표하는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와 같이, 특권화된 어떤 이미지는 여성의 화려함을 하나의 환상공간으로서 대변한다. 앤디 워홀이 마릴린 시리즈를 제작하여 미국인들에게 대량으로 생산되고 무한히 반복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었듯이 미국은 이러한 이미지를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