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후설의 '사물과 공간'을 읽고
<사물과 공간>은 현상학의 창시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사물과 공간에 대한 구성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사물은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가, 인식에 의해 창조되는가? 현상학은 사물이 인식과 (지향적)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고 대답함으로써, 이 까다로운 물음이 야기한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넘어서고자 한다. <사물과 공간>은 이러한 물음을 사변적으로 고찰하고 이러한 대답을 독단적으로 선언하기보다는, 온갖 이론적·일상적 선입견을 괄호 안에 넣고(판단중지) 가장 기초를 이루는 ‘사태 그 자체’로 돌아가(환원) 마치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이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한다. 현상학자 후설이 바라본 공간은 주관 의식의 체험된 시간이며, 체험된 시간은 '현재의 폭'을 가진다.
1) 후설의 물음
ㄱ) 우리가 익히 아는 성질들을 지닌 삼차원 공간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ㄴ) 동일성을 지닌 사물 몸체를 구성하는 것, 이 몸체의 다양하게 가능한 운동을 구성하는 것, 자아 중심에 대한 이 몸체의 위치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ㄷ) 시각 공간과 촉각 공간이 도대체 서로 독립적으로 구성된다면, 각각 어떻게 구성되는가?
ㄹ) 공간이 때로는 시각적으로, 때로는 촉각적으로 질료화된다면, 그리고 이러한 이중 질료화에서도 하나의 동일한 공간이라면, 이 공간의 동일성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
2)후설의 키네스테제(kinästhetische)
후설은 키네스테제란 용어로 사물과 공간의 현상학적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키네스테제의 어원은 운동(희랍어, kinesis) + 감각(희랍어, aisthesis) = 운동감각(Kinästhese, Bewegungsempfindung)이다. 현상학적 환원에 의거하여 모든 초재적 가정들을 차단하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순수현상으로서의 키네스테제에 주목하며 이것이 사물과 공간을 구성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기술하고 있다.
공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정체성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공간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과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간에서 살고, 인간 사회와 역사는 공간이라는 곳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신체(인간)는 다른 사물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사물이고, 다른 사물들 사이에서 그 위치(Lage)가 변하고, 다른 사물들처럼 멈추거나 움직인다.
사진의 프레임도 하나의 공간이다. 전시장에 걸려 있는 액자도, 전시장 공간도. 인간은 공간을 구성하고자 한다. 광화문 광장의 공간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빌딩들이 있다. 공간을 최소한으로 디자인을 하든, 뒤죽박죽 구성되든, 공간은 사진가에게 중요한 요소이다. 그 공간에 사진가(존재)는 서 있고, 시간이 지나감을 담는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존재하고, 사고하며, 테이블, 의자, 그리고 실제로 공간과 시간의 전체 구조와 같은 확장된 것(extended things)으로서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현존재로서 근원적 의미에서 공간적이라고 한다. 그에게서 공간은 실존범주로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이다. 이 공간은 무엇보다도 실존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삶과 존재론적 관심에 의해 공간이 열리고 동시에 발견된다. 현존재는 "거리-제거"와 "방향열기"의 방식으로, 즉 "방향을 제시하는 거리-제거함"으로서 공간적이다. 공간은 인간과 독립되어 있는 단순히 외적인 대상도 아니고, 주관 안에 있는 내적인 체험의 대상도 아니다. 인간은 우선적으로 자신의 주변적 세계와 교섭하는 관계적 행동 및 실천을 통해 소통하면서 그 소통공간 속에서 실존한다. "우선 대개 현존재는 주변세계적으로 만나는 것과 둘러보면서 배려되는 것에 입각해서 자기를 이해한다.“
<하이데거, 존재와 공간>(한길사)
[우리가 어떤 사물을 상상한다면] 상상현출이 사물을 현시할 때, 앞면은 본래적으로 현시하고 뒷면은 비본래적으로 현시한다. 그렇다면 이 뒷면은 어떻게 현시되는 것인가? 또다시 [상상 속의] 상상을 통해서 현시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면 [앞면과 뒷면 모두 상상에서 현시되므로] 차이는 사라질 것이다. 사실 상상에서도 [지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의 앞면과 뒷면을 하꺼번에 표상할 수 없다. 우리 눈앞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은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상상에서도 본래적 현출과 비본래적 현출의 차이가 있고, 이와 더불어 현시에 내재한 파악요소(Auffassungskomponente)들도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집을 지각할 때 비본래적으로 현출하는 면을 설명하기 위해 상상 표상에 호소하는 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가? 집의 앞면은 직각 현시이고, 다른 면들은 이미지 현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앞면과 다른 면들의] 통일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면은 뒷면을 지시하고, 뒷면은 앞면을 지시한다. 다시 말해, 앞면의 직각 현시는 이것을 넘어 뒷면을 지시하는 파악요소들과 결합되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뒷면의] 이미지 현시도 앞면을 지시하는 파악요소들을 지닌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다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뒷면의] 이미지화(Imagination)는 모두 온전한 상상이다. 이는 한갓된 상상으로서 [직각 없이] 따로 있을 수도 있으며, 현시에 [현시를] 초과지시(hinausweisen)하는 요소들을 결합한다. 또한 직각도 상상 없이도, (초과지시 요소들을 지닌 앞면을 현시함으로써) 온전한 표상을 내어준다. 만일 이제 (종종 일어나듯이) 정말로 어떤 뒷면의 모양에 대한 상상 표상이 직각과 더불어 주어진다면, 바로 이 두 표상, 즉 직각 표상과 상상 표상은 서로 ‘합치’한다. 이들은 동일화 종합을 이룬다. 이 동일화 종합은, 정확히 말하면, 여기[직각 표상]에 등장하는 파악의 빈 단편(Leerstuck)들과 저기[상상 표상]에 등장하는 파악의 빈 단편들을 충족한다는 성격을 지닌다. (P128-129)
시간적 연장은 공간적 연장의 자매이다. 이제 공간적 연장에 대해서도 살펴볼 차례이다. 시간성과 같이 공간성도 현출하는 사물성의 본질에 속한다. 현출하는 사물은 불변하든 변화하든 간에, 지속한다. 이 사물은 하나의 시간을 채우고, 또한 하나의 공간을, 자신의 공간을 채운다. 서로 다른 시간점마다 서로 다른 공간을 채울 수도 있지만, 우리가 시간을 사상하여 사물의 지속의 한 점을 뽑아내면, 시간을 채우는 사물내용에는 사물의 공간적 신장이 속한다. 여기에는 다시 하나의 공간형식(Raumform)과 하나의 공간채움(raumlicheFulle)이 있다. 공간을 채우는 것은 질료(Materie)인데, 여기에서는 이 단어를 아주 소박한 의미에서 취해야 한다. 즉 지각이 지정하는 의미에서 취해야 하는데, 이것은 지각에 있어서 공간을 채우는 것으로 있다는 것이다.
분명 공간형식과 질료(공간채움)라는 두 명칭이 (지각의 의미에서 사물에 배당되는) 시간채움(Zeitfulle)의 모든 규정을 포괄하지는 않는다. (P147)
소리는 (가령 강당 같은) 어떤 공간에서 어디에서나 들린다면, 이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음이라는 질이 채우는 공간은 (듣기에서나 지각 일반에서나) 지각되지 않고 지각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강당의 공간은 시각적으로 이러저러하게 규정되고 이것의 경계몸체들과 경계면들에 의하여 현출한다. 바닥, 벽, 천정은 시각적 질들로 덮여 있다. 그렇게 이들은 현출한다. 그러나 음의 덮음이나 여타 음의 채움은 어디에서도 현출하지 않는다. 음이 퍼진다거나 공간을 채운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일 뿐이다. 그것은 가령 유체(流體)에의 비유(Bild)이다. 이는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이미지(Bild), 어떤 흐르는 것의 이미지이다. 이 흐르는 것은 공간을 정말로 채우는 방식으로 표상되는데, 이제 음의 작용이 공간에서 전파된다는 유비에 활용된다. 현출의 사물적 대상성과 관련된 이러한 명증은 다시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것은 이 서로 다른 대상 규정들이, 이 구성하는 공간적 규정들과 수반하는 규정들이 현상학적으로 어떻게 구성되는가이다. (P150-151)
나는 종이를 보면서, 종이에 손을 얹어 종이의 저항 감각이나 촉각적 지각을 느낀다. 보이는 부분들에 속하는 감각들이 파악되면, 종이의 시각적 속성들에 의거하여 종이가 구성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시각적 속성들이 공간을 완전하게 채운다. 앞면 중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들도, 그중에서 종이 위에 얹은 손으로 덮인 부분들도 역시 시각적으로 채워진다. 이 채움은 다만 본래적으로 현출하지 않는 시각적 채움일 뿐이다. (P164)
(매 순간 시각장 절편인) 유사운동하는 내용 자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현시이고, 사물은 이러한 현시들의 연속적 변화 중에도 동일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운동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장은 그 자체가 공간이 아니라, 모든 공간적인 것과 (이를 통해) 모든 사물적인 것을 위한 현시장(Darstellungsfeld)이다. (P232-233)
공간은 가능한 위치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다양체이고, 따라서 무한히 큰 운동 가능성을 제공한다. 선험적으로 각 사물은 충족된 공간몸체(Raumkorper)이며 운동할 수 있고 그것도 무한히 그러하다. 그러니까 운동이 주어진다는 점, 즉 운동이 현시된다는 점은 선험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P237)
이제 우리의 과제는 한낱 운동적 변화라는 탁월하면서 비교적 단순한 사례에서, 현출에 대한 분석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커다란 과제는 삼차원 공간성의 현상학적 ‘창조(Schopfung)'로 최대한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또한 사물 몸체의 현출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물 몸체가 동일한 것으로 현상학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으로 최대한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현출들은 운동현출이다. 여기에서 모든 공간성은 대상 자체와 ’자아‘의 운동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 주어지는 정위(Orientierung) 교체에서 구성되고 주어진다. 물론 공간적인 것은 개별적인 ’홑겹‘ 지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사물의 공간 몸체도 그럴 뿐 아니라, (요컨대 포괄적인 ’전체지각‘안으로 이 지각이 배속됨에 의거하는) 다른 사물들에 대한 이 사물의 위치도 그렇다. 그러면 다수의 홑겹지각에서 몸체는 때로는(동일화라는 결합하는 종합에서는) 여러 면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몸체는 이렇게는 스스로 중시하며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P289-290)
시각적 감각, 그리고 촉각적 감각의 연장적 계기는 물론 공간성을 음영시키지만, 공간성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질적 계기도 공간을 채우는 객관적 특성들을 구성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여기에는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운동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물론 생기화 ‘파악’에서 지위와 기능이 현시내용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그 자체는 현시하지 않으면서 현시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이러한 용법에 있어서 운동감각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무용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물의 운동을 감각한다는 뜻도 아니고, 사물의 운동이 이것에서 현시된다는 뜻도 아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단어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와 관계하여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심리학적 의미를 배제하기 위해 키네스테제 감각(kinasthetische Empfindu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데, 이 단어는 외래어이므로 혼란을 덜 주기 때문이다. 물론 눈 운동, 머리 운동, 손 운동 등은 연속적 감각 진행인데, 이런 진행은 임의로 중단할 수 있으며, 이런 진행에서 각 위상은 (불변 내용이 지속하는 가운데) 펼쳐질 수 있다. (P299)
시각장에서 동시에 현시되는 두 대상의 간격으로서 현시되는 것, 또는 대상장을 확충한다면 (통일적 지각 이행에 의해) 차례로 현시되는 두 대상의 간격으로서 현시되는 것과는 분명 아주 다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이미지 장의 견고한 질서에 의해, 이미지들의 간격에 의해, 이와 대응하는 규정적 키네스테제 정황의 규정적 변양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정적으로 거리와 간격을 구별한다. 거리가 어떻게 간격이라는 의미를 얻는지,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상상적 자아점과의 간격이라는 의미를 얻는지는 나중에야 드러날 것이다. 단안 시각에서는, 거리 현시에 관련해 이미지의 어떤 팽창과 수축만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변양흐름에서는 불변의 동일 사물이 계속 현시하되, 다만 ‘거리’가 그때그때 다르게 현시될 뿐이다. 양안 시각에서는 여기 더해서 양각 혹은 ‘깊이(Tiefe)' 변화가 고려될 것이다. 이들은 현상학적으로 다르다. 즉 (거리 변화에 대응하여 일어나는) 양장의 ’이미지들‘의 변향과 (거리 또는 깊이가 다른 것으로 해석되는) 이미지의 몇몇 부분들의 변양은 [팽창 및 수축과는] 아주 다른 변양이고, 팽창 및 수축과 더불어 생기더라도 이들과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깊이라는 말에서는 (물론 객관적으로는 다시 상상적 자아점에의 거리로 해석되더라도) 양각 현시가 떠오를 것이다. 이 밖에도 우리는 애초부터 양각 현시의 특전을 알아차린다. 그것은 (양장이 서로 경합하지 않을 때) 개별 이미지의 ’양각‘은 이 이미지의 특유한 규정이고, 따라서 이 개별 이미지는 ’깊이 차이들‘의 체계를 가진다는 데 있다. 이에 비해 단안 시각의 단순한 장에서는, 개별 이미지에 형상과 크기를 비롯한 여타 규정들만 있을 뿐, ’거리‘ 규정은 현시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현출흐름에서 이미지들의 어떤 (연속적 위치체계인 시각 단장의 본성에 따라 가능성으로 밑그림 그려지는) 변양만이 유일하게 등장한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는 이동뿐만 아니라 팽창과 수축도 가능하며, 그것도 모양의 유사성은 보존하는 가운데 가능하다. (P402-403)
기하학에서는 우리는 먼저 공간을 가지고, 공간 안에서 평면을 평행하게 이동시키면서 공간을 ‘산출’한다. 평면이 놓이는 두 위치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데, 이 간격은 평면 안에서의 같은 간격과 완전히 동질적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두 시각장 사이에는 간격이 없고, 이와 마찬가지로 두 안구운동장 사이에도 (안구운동장 안의 두 점 사이의 간격과 동일하게 놓는 것이 의미를 지니는) 간격이 없다. 그리고 안구운동장도 완전한 공간에서도 표면으로 등장할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P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