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소유적 실존 양식은 ‘내가 소유한 것’을 삶의 기반으로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고,
존재적 실존 양식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더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소유냐 존재냐의 양자택일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눈에는 소유한다는 것이 삶에 포함된 극히 정상적인 행위이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물을 당연히 소유한다. 그뿐이랴, 사물을 즐기기 위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하는 것을, 점점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하는 사회,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소유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어찌 양자택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존재의 본질이 바로 소유하는 것에 있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는 실정이다. (P33)
사진가에게서 카메라는 소유이다. 카메라라는 도구에 집착하는 것이 사진가의 첫 번째 욕망일 것이다. 사진이 흡족하지 않으면 언제나 카메라라는 연장을 탓하게 마련이다. 사진이 잘 안나온건 카메라 탓이지 내 실력이 아니라면서. 나 또한 대학시절 처음 아르바이트 해서 샀던 카메라가 캐논 T-90이었다. 지금은 그 카메라는 후배에게 주어서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진가의 카메라의 욕심은 많은 것 같다. 비싼 라이카는 항상 선망의 대상이었으니깐. 그러나 일차적인 욕망은 카메라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컨텐츠, 카메라 프레임에 담겨진 대상 또한 소유냐 존재냐에 따라서 달리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는 전적으로 소유지향과 이윤추구로 처방된 사회이다. 따라서 존재적 실존양식의 실례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다수 사람들은 소유를 겨냥하는 실존을 당연한 것으로, 그야말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방식으로 여긴다. 이 모든 현상은 특히, 존재라는 실존양식의 특성을 이해하고 결국 가능한 유일한 인간의 성향이 소유라는 사실마저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개념은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다. (P51)
소유양식으로 누군가의 얼굴이나 풍경을 기억하는 방식은 대개의 사람들이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사진이 사람들의 기억을 도와주는 범위는 어떤 인물이나 풍경을 확인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에 그친다. 사진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그래, 그 사람이야!”라든가 “그래, 거기 내가 갔었지!”라는 식이다. 그러니까 사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외된 기억이 된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놓는 것도 또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행위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을 종이 위에 옮겨놓음으로써 나는 그 정보를 소유하기에 이르며 --그것을 머릿속에 새겨놓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기록한 것을, 그러니까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나는 그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기록형태에 담긴 기억이 외화(外化)된 나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렸으므로, 나 스스로의 기억능력은 나를 떠난 셈이다. (P56)
사진의 프레임에 구성하는 것을 사진에 담는다라고 말한다. 사진에 담겨진 것은 사진가의 치밀한 예술적 구도에서 나온 결과물이자 소유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대상의 이미지를 취한 것일뿐, 소유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가들은 소유의 과욕은 작품이 자신의 소유물처럼, 비뚤어진 욕망은 아마도 소나무를 찍고, 베어버린 어느 작가나, 어미새의 육추(育雛)를 찍기 위해 아기새의 둥지를 뽄드로 붙인 장면 또한 과도한 욕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대상의 그 자체 존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 욕망에 의해 소유는 이러한 비뚤어진 세계관을 가지게 할 것이다. 사진은 과연 실상을 찍는 것인가, 허상을 찍는 것인가, 이미지는 복제의 복제를 하게 된다. 사진에 담겨진 피사체, 대상, 사물(Object)은 과연 실상인가, 허상인가.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소유하는 여러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용품, 재산, 의식(儀式), 선행, 지식, 그리고 사상 등등. 이 모든 사상(事象)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P100)
인간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야 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행하느냐보다는 선하게 존재하는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를 받치고 있는 근본이다. 우리의 존재는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요,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격이다. 반면, 각종 행위와 확신은 우리의 역동적 핵심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실재가 아니다. (P101)
소유적 존재양식의 인간은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우월하다는 데에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에서, 그리고 결국 정복하고 약탈하고 죽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존재적 실존양식에서의 행복은 사랑하고 나누며 베푸는 것에 놓여 있다. (P120)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사물이란 구체적이며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는 체험과 관계하며, 체험이란 원칙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물(persona), 우리 모두가 쓰고 있는 탈, 우리가 내세우는 자아이다. 인물 자체도 실상 한낱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은 죽은 물상(物像)이 아니므로 사물처럼 묘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인간 자체를 결코 묘사할 수 없다. 물론 나에 대해서, 나의 성격, 인생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통찰이 나 자신이나 타인의 심리구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총체적인 나,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든 개성, 지문(指紋)처럼 나에게만 뿌리박힌 일회적인 나의 실체(suchness, So-sein)는 결코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이입의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완전히 일치하는 두 사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무도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너와 나는 서로 살아 있는 관계의 과정 속에서만 우리를 갈라놓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로간의 완전한 일치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P128-129)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소유지향성을 포기하기는 심히 어렵다. 그런 시도부터가 그들을 심한 불안에 몰아넣는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데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듯한, 일체의 안전대를 끊어버린 듯한 느낌을 가진다. 재산이라는 목발을 던져버리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써서 혼자 힘으로 걷기 시작할 수 있다는 진리를 그들은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자기는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으리라는, 만약 재산이라는 목발이 지탱해주지 않으면 쓰러져버릴 것이라는 그릇된 환상이다. (P131)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도둑을 겁내고, 경제적 변동을, 혁명을, 질병을, 죽음을 두려워할뿐더러, 사랑하는 행위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유, 성장, 변화, 미지의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진다. 그리하여 나는 신체상의 질병뿐만 아니라 내게 닥칠 수도 있는 온갖 손실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에 싸여 살며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이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다. 입센은 <페르 귄트(Peer Gynt)>에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인물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페르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꽉 차 있는 인물이다. 극단적인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 있어서 “욕망 덩어리”인 자기를 바탕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기실존의 소유적 구조로 인해서 그 자신이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것, 즉 알맹이 없는 양파처럼 한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는 미완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존재적 실존양식에는 없다. 존재하는 자아=나일 뿐 소유하고 있는 것=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앗아가거나 나의 안정과 나의 주체적 느낌을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고 --존재하면서 나의 고유의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로서 나에게 달려 있다. (P159-160)
존재는 반드시 시간의 외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차원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과 캔버스와 붓을 가지고 씨름하며, 조각가는 돌과 끌을 가지고 씨름한다. 그러나 창조적 행위, 즉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 비전은 한순간 또는 수많은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그 비전 안에서 “시간”이 체험되지는 않는다. 사상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상을 기록해두는 일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지만, 그들의 착상은 시간 바깥에서의 창조적 사건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점을 우리는 존재의 모든 발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랑의 체험, 기쁨의 체험, 어떤 진리를 발견하는 체험은 시간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지금, 여기는 영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초시간적인 것이다. 영원이란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듯이, 무한으로 연장된 시간이 아닌 것이다. (P185)
우리는 신발보다 더 자주 나라를 바꾸어가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를 모르는 현실에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터를 누비며 걸어왔다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알게 되었네.
비천함에 대한 증오 역시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증오 역시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인간성의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거늘
우리 스스로가 인간적일 수 없었다네.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에서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