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21.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by 노용헌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Being-in-the-world)


존재(있음)의 의미를 질문하는 존재자(있는 것)는 인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존재 의미를 질문하는 존재자,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간 속에 개별자로서 '거기 있는' 기분(Stimmung)에 사로잡히는 존재자다. 이를 '현존재(Dasein)'이라고 한다.


인간도 물질적인 현전성을 가진 존재자임에 틀림없다. 여기 이 책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도 손으로 만지거나 눈으로 불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성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현실 속에 「있음」은 책상이 현실 속에 「있음」과 결코 동일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따로 떼어, 구체적으로 「거기(Da) 있는(Sein)자」, 즉 Dasein이라고 명명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프랑스어로 tre-l 라고 번역했으며, 우리는 현존재(現存在)로 번역한다. 「인간」이라고 하면 책이나 집, 또는 고양이 등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의 하나일 뿐인데 왜 유독 인간만을 현존재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인간만이 유일하게 존재이해의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상이라는 존재자의 「있음」(존재)을 이해하고 있다. 책상은 결코 자기 옆에 있는 의자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재를 이해하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현존재(인간)에게만 귀속되는 특징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스스로 존재하면서 언제나 자기의 존재를 문제삼는 특별한 존재자이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방식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자이다. 나무나 책 같은 다른 존재자는 결코 자신의 존재방식을 문제 삼는 법이 없다. 처음에 한번 성질이 주어졌으면, 물질적인 마모로 존재가 없어질 때까지, 그것은 시종일관 같은 성질을 유지한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하기는 하되,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스스로 결정해 가는 존재자이다. 이렇게 자기의 존재를 문제 삼고, 거기에 관심을 쏟는 존재를 하이데거는 실존(Existenz)이라고 부른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라는 똑같은 실재(實在)에 현존재(現存在, Dasein, tre-l)와 실존(實存, Existenz, existence)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붙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두가지 명칭 외에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In-der-Welt-Sein, tre-dans-le-monde)라는 또 하나의 명칭을 추가시킨다. 「거기있음」(Da Sein, tre-l)이라는 조어(造語)가 보여주듯이 현존재는 애초부터 「세계 속에 있는」 존재방식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개념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철학적인 의미의 세계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의미, 즉 세계정세니, 세계일주니 하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가장 단순화시켜 말해본다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 그러니까 주체성인 「나」의 밖에 있는 일체의 외부적 환경이 세계이다. 그러나 이때 「나」와 「세계」의 관계는 결코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다. 가령 옷장 속에 옷이 걸려있듯이, 또는 서랍 속에 편지가 들어있듯이 그런 방식으로 내가 세계 속에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옷장과 옷, 서랍과 편지의 관계는 단순히 공간속에서의 위치관계일 뿐이다. 옷이 없어도 옷장은 애초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옷장이 없어도 옷은 그냥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세계 속에 있는 것은 이처럼 독립적, 중립적인 방식이 아니다. 인간은 무대 장치 속의 배우가 아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는 달팽이와 달팽이집의 관계와 같다. 세계는 인간의 일부이고, 세계가 변하면 그에 따라 인간의 존재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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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내-존재라는 개념어에서 보듯이 사진가란 존재는 세계-내-사진가일 것이다. 또는 대상-내-사진가. 사진가는 카메라를 매개로, 사진 프레임을 통해서, 또는 사진 속에서, 세계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또한, 예술가-작품-관객의 고리에서처럼 연결되어진다. 하이데거의 개념이 존재에 대한 고찰이고, 상당히 어려운 개념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현존재의 깨달음은 결국 사진가의 몫인 셈이다.


현존재의 ‘본질’은 그것의 실존에 있다. 따라서 이 존재자에게서 이끌어낼 수 있는 성격은, 이러저러한 ‘형상’을 띠는 객체적 존재의 객체적 ‘속성’ 같은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현존재에게 있을 수 있는 존재 방법이며 또한 그것뿐이다. 이 존재자에 관하여 ‘이러저러하다’고 일컬어지는 말은 모든 존재와 일차적, 직접적으로 관계한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이 존재자를 나타내기 위해 이용하는 ‘현존재’라는 명칭은 책상이나 집, 나무와 같이 그 사물이 무엇인지를 표현하지 않고 실재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 (P60-61)


현존재란 스스로 존재하면서 스스로 존재에 대해 이해하려는 존재자이다. 이렇게 실존의 형식적 개념이 알려졌다. 바로 현존재는 실존한다는 존재이다. 현존재란 이렇게 언제나 자기 자신인 존재자이다. (P73)


내-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일단 이 표현을 더욱 보완하여 ‘세계 안에서’의 내-존재로 받아들이고 이 내-존재를 ‘......속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이 어법이 가리키는 것은 컵 ‘안’의 물이라든가 장롱 ‘안’의 옷처럼, 다른 어떤 것의 ‘안’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양식이다. 이 ‘안’이라는 말로 생각되는 뜻은, 공간의 ‘안’에서 어떤 넓이를 지닌 두 존재자가 이 공간에서 그들의 장소에 관련된 상호간의 존재관계이다. 물이나 컵, 옷이나 옷장은, 함께 공간 ‘안’의 어떤 ‘위치’에 ‘있어서’ 같은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P74)


세계-내-존재(세계 안의 존재)란, 도구 전체의 도구적 존재에 있어서 그 구성적인 기능을 지시하는 여러 가지 지시 관계 속으로 비주제적으로,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행위에 의해 몰입하는 존재이다. 배려가 그때그때마다 배려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내(內) 세계적으로 만나는 존재들과 관계하면서이며 그 존재들을 통해 이해된다. (P102)


모든 지시는 일종의 관계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일종의 지시라 할 수 없다. 또 모든 ‘표시’는 일종의 지시라 할 수 있지만, 모든 지시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표시’는 일종의 관계로 볼 수 있지만, 모든 관계는 일종의 표시라고 할 수 없다. [지시=관계, 표시=지시, 표시=관계, 관계≠표시, 따라서 표시=관계] 이 표시(기호)로 관계라는 것의 형식적 보편성이 확연해진다. 단, 우리가 지시나 기호, 의의처럼 사물의 현상, 즉 사물의 형상적 표시를 탐구할 때, 그 사물들이 나타내는 표시를 관계로서 성격 짓는 일만으로는 아무런 이득이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관계’ 자체가 그 형식적 보편성으로 인해 그 존재론적 근원을 지시하고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P103-104)


세계 내부에 있는 존재자는, 또한 공간 속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존재자의 공간성은 존재론적으로 세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계가 세계-내-존재(세계-안에-있음)의 구조계기로서 성격 지어진 것을 염두에 두면서 공간이 어떠한 의미에서 세계의 구성계기인가를 규정해야만 한다. (P131)


불안의 대상, ‘그것은 무(無)로서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불안의 대상은 세계내부적으로는 무(無)여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도 이 불안의 대상이 저항해옴이 느껴진다는 것은, ‘불안의 대상은 세계 자체’라는 것을 현상적으로 의미한다. 무(無)이면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일 속에 표명되어 있는 이 완전한 무의의성은 ‘세계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내부적인 존재자는 그 자체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의 이러한 무의의성을 근거로 하여, 세계 자체가 그 세계성에 있어서 홀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가슴 답답하게 하는 것이란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니며, 눈 앞의 것 전부를 합친 총계도 아니며, 손안에 있는 것의 가능성, 즉 세계 자체이다. 불안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흔히 ‘애당초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실제로 정확하다. 그 불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존재적으로 정확히 말한 것이다. 일상적인 이야기는 손안의 존재자에 대한 배려나 논의에 몰입해 있다. 불안이 불안해 하는 대상은, 세계내부적인 손안의 존재자의 ‘그 어느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이고 주변을 둘러보는 이야기만이 이해하고 있는 손안의 존재자는 무(無)(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결코 전부가 무(無)일 수는 없다. 손안의 존재자의 무(無)란, 그 근거를 가장 근원적인 ‘어떤 사물’ 즉 ‘세계’ 속에 두고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는, 세계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에 본질상 속해 있다. 따라서 아무런 불안의 낌새도 보이지 않는 무(無)의 세계 그 자체가 불안의 대상임이 명백하게 인식된다면, 이것은 불안이 불안해하는 대상은 세계내존재 자체임을 의미한다. (P239)


칸트는 ‘현존재’라는 술어를 우리의 근본적 탐구에 있어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일컫는 존재양식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것이다. ‘나의 현실적 존재라는 의식’이란, 칸트에 있어서는 데카르트의 의미에 있어서의 ‘나의 눈 앞의 존재에 대한 의식’ 바로 그것을 뜻했다. ‘현실적 존재’라는 술어는 의식되는 눈 앞의 존재, 눈 앞의 사물적 존재마저 가리키는 셈이 된다.

‘나의 외부에 있는 사물의 현실적 존재’를 위한 증명에는 시간에 따른 사물의 변화가 개입된다. 즉, 시간의 본질에는 변이(變移)와 지속(持續)이 똑같이 근원적으로 속해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다. 나의 눈 앞의 존재, 바꾸어 말하면 내적 감관(感官)에 의해 주어진 모든 표상의 다양성을 지닌 눈앞의 존재는, 눈앞의 존재적인 변이이다. 그러나 시간규정에서 전제로서 삼는 사물은 어떤 지속적인 ‘눈앞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물은 ‘나의 내부에서’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나의 현존재야말로 이 지속적인 (눈앞의) 것에 의해 맨 먼저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규정된 존재의 변이, ’나의 내부‘에 경험적으로 설정된 ’눈 앞의 존재적‘ 변이와 함께, ’나의 외부‘에 사물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속적인 것이 필연적·경험적으로 함께 설정되어 있다. 이 지속적인 것이 바로 ’나의 내부‘ 변이, 즉 눈앞 존재의 (변이) 가능성의 그 전제조건이다. 여러 표상(表象)이 시간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경험에 의해, ’나의 내부‘의 변이라는 것과 ’나의 외부‘의 지속적인 것이 똑같이 근원적으로 규정된다. (P259-260)


'시간성‘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대상은, 우리가 평소 ’공간과 시간‘이라고 둘을 합쳐서 말할 때 이해되고 있는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공간성도 시간성과 마찬가지로 현존재의 근본적 성격을 이루는 듯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 온 실존론적·시간적 해석도, 이 현존재의 ’공간성‘으로 인해 일종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존재라고 부르는 이 존재자는, ’시간적인 동시에‘ 공간적이기도 하다고 병렬적으로 간주해야 될 것 같다. (P469)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식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언제나 자신의 ‘바깥’, 세계의 안, 존재자의 아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실존(existenz)이라는 말은 어원을 거슬러 오르면 라틴어의 ‘밖에 서다(ek-sisto)’라는 말에 다다른다. 세계-내-존재란 이러한 밖에 있는 현존재의 모습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주관이 객관을 인식한다는 모습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 하나의 모습, 세계-내-존재라는 모습이 가장 희박해진 모습이지만, 어디까지나 세계-내-존재의 하나의 변모된 모습일 뿐이다. (P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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