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키에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읽고
사람은 누구나 선택에 놓여 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에 끊임없는 선택(Choice)을 하며 살아간다. 사진가는 프레임에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이렇게도 잘라보고(cropping), 세로로도 찍어보면서 말이다. 프레임의 넣을지 말지, 수많은 선택 앞에서 사진가는 놓여져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쇠얀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저술로서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실존주의 철학의 거대한 첫걸음을 알리는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1부는 심미적인 인생관을 대표하는 A라는 사람이 쓴 일곱 개의 논문과 A가 우연히 입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 「유혹자의 일기」를 가상의 편집자가 편집해 수록한 것이며, 제2부는 B라는 사람이 쓴 편지의 형식으로 된 두 개의 논문과 B의 친구인 어떤 목사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선택의 문제]
10장 「인격형성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것과 심미적인 것의 균형」에 있어서 B는, ‘선택’의 문제를 거론하며 그 일반적인 의미를 논하고, 윤리적인 결정과 심미적인 무차별한 선택을 관찰하고 선택의 현실성으로 이끌어간다. 이어서 B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 심미적인 인생관을 개관하고, 심미적인 인생관을 ‘절망’이라고 단정한다.
사진가에게 선택은 중요한 문제이다. 사진가는 심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미적으로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과연 나는 아름답게만 보이기 위해 대상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있는 그대로를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윤리적인 태도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상을 내 소유물로 사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과연 초상권은 나에게 무엇인지. 저널리즘에서 윤리적인 면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를 사진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가나, 911테러로 빌딩에서 떨어지는 사람의 모습을 찍은 사진가나, 베트남에서 즉결 처형을 하는 사진을 찍은 사진가나, 과연 뉴스라는 명목하에 사진가는 윤리적인 것과 팩트(fact, 또는 진실)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된다. 사진가의 선택은 심미적인 것인가, 윤리적인 것인가, 이 두 가지 면에서 갈등과 선택을 하게 된다.
내가 그렇게도 자주 그대에게 한 말을 나는 이제 다시 한 번 더 말하련다. 아니 오히려 외치고 싶다. ‘이것이냐 저것이냐(aut/aut)’라고, 수정을 위하여 덧붙인 한쪽(aut)만 갖고서는 상황을 분명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가 하도 중요해서 사람들은 그 한 부분만을 갖고서는 여타의 것에 만족할 수가 없고, 또 문제가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그중 한쪽만을 소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생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적용하게 되면 우스꽝스러워지거나 미친 것으로 간주될 그런 상황이 많다. 그렇지만 또 영혼이 너무 방종하여(이 말의 어원학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이런 딜레마에 내포된 바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인격이 파토스를 다하여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말할 수 있는 에너지를 결여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나에게는 이 말이 항상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특히 지금처럼 절대적으로,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과는 아무런 관련도 짓지 않고 말할 때는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이 말의 사용은 가장 무서운 대립을 행동으로 몰아붙이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실제로 나에게 주문(呪文)과도 같은 영향을 끼쳐서 나의 영혼은 극도로 엄숙해지고, 때로는 무서운 충격을 주기까지 한다.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 보아도, 당시 나는 인생에서 선택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신뢰하고 어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선택을 할 경우에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따랐을 뿐이었지만, 선택의 순간은 엄숙하고 신성하였다. 그 후 내가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의 영혼은 결정적인 시간에 성숙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만 결코 나와 무관한 것도 아니었던 여러 가지 사건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그때 역사도 선택하는 일이 중요하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말이 절대적인 의의를 갖는 상황은 단 하나, 즉 한쪽에는 참됨과 의로움과 거룩함이 늘어서고, 다른 한쪽에는 쾌락과 천한 성질과 어두운 정열과 타락이 늘어서 있는 그런 상황뿐이지만,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한 일들 중에서 한쪽을 선택할 경우에도 옳게 선택한다는 것은 항상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P277-278)
남을 비웃는 자는 자신을 비웃는 자다. 그리고 그대의 답변은 그대 자신에 대한 심각한 조소에 그치지 않고, 그대의 영혼이 얼마나 줏대가 없으며, 그대의 인생철학 전부가 “나는 단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하는 단 한마디로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슬픈 증거이기도 하다. (P281)
우리가 순간을 오래 응시하면 할수록 더욱더 순간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선택되어야만 할 것은 선택자와 가장 깊은 관계 속에 있다. 선택해야 할 대상이 인생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일 경우에는, 선택을 감행하기까지의 시간 동안에도 물론 개인은 살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가 선택을 연기하면 할수록 비록 심사숙고를 거듭하여 양자택일할 양쪽을 분명히 식별하였다고 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더 쉽게 선택의 성격은 변화되기가 일쑤다. 인생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이런 식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희롱할 생각이 내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의 내적인 충동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는 사실과, 내적인 충동은 항상 전진하고 있고, 어떤 방법으로든 이런 혹은 저런 양자택일을 하고 있으므로, 다음 순간에는 선택을 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는(왜냐하면 그렇게 택한 것을 철회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을 알게 된다.
바야흐로 배의 방향을 돌려야만 하는 순간에 처한 선장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그는, “나는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아주 서툰 선장이 아니라면, 그런 생각과 동시에 그러는 동안에도 배는 여전히 평상시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때는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속도를 계산에 넣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끝내 더 이상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문제가 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그가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선택을 게을리 하였기 때문이다. 바꿔 말한다면, 남들이 그를 위해 선택을 해주었기 때문이고, 또 그는 자기 자신을 잃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89-290)
이리하여 나는 이제 먼 곳으로 떠난다.
나의 모자 위에는 별들만이 있을 분이다.
이렇게 그대는 선택하였다. 물론 그대가 인정하고 있듯이 그렇게 훌륭한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대는 전혀 선택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말의 비본래적인 의미에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대의 선택은 하나의 심미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심미적인 선택이란 선택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선택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것의 고유하고 절박한 표현이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문제가 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윤리적인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우리는 언제라도 확신할 수 있다. 유일하게 절대적인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선과 악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선택이지만, 이것 역시 절대적으로 윤리적이다. 심미적인 선택은 전적으로 직접적이어서 그런 한에 있어서 선택이 아니거나, 혹은 그 선택이 다양성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젊은 처녀가 그녀의 마음의 선택에 따를 경우에는, 이 선택은 그것이 제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지라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는 선택이라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P295)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택을 하는 일이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항상 딜레마의 어느 한쪽에 매달려 있고,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선택을 하려고 하면 그 일이 꼭 필요하고, 따라서 또 선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P301)
어떤 의미에서는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은, 양자택일할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심미적인 것이거나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도 그대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선택이 문제가 되고, 그렇다, 절대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선택함으로써만 우리는 윤리적인 것을 선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윤리적인 것이 정립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로부터는 결코 심미적인 것이 배제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윤리적인 것 안에서 인격은 자기 자신으로 집중되고, 그래서 심미적인 것은 절대적으로는 배제되거나 혹은 절대적인 것으로서 배제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는 심미적인 것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 인격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윤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하고, 절대적으로 심미적인 것을 배제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였다고 해서 그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에, 심미적인 것의 전체는 그것에 깃든 상대성을 지니고 다시 되돌아온다. (P315-316)
심미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떤 인간 속에 깃든 심미적인 것은 어떤 것이며 윤리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서 나는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심미적인 것은 그로 하여금 그것에 의해서 직접 그가 현재 있는 그대로 그를 있게끔 하는 것이고, 윤리적인 것은 그것에 의해서 그가 되게끔 되어 있는 상태로 그를 되게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자신 속에 있는 심미적인 것 속에서 그것을 위해서 그것을 먹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P316-317)
나는 내가 선택하는 것을 정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미 정립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였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내가 그것을 정립할 수 없다면, 그때는 나는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선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그것은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의 선택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 것 혹은 저런 것일까? 천만에, 왜냐하면 나는 절대적으로 선택하고, 나의 선택의 절대성은 내가 이런 혹은 저런 것을 선택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사실로서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적인 것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영원한 타당성 속에 있는 나 자신이다. 나는 나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서 결코 선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다른 어떤 것을 선택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떤 유한한 것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P379-380)
선택은 동시에 두 개의 변증법적인 운동을 수행한다. 선택되는 것은 현존하지 않고 선택과 더불어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한편 선택되는 것은 현존이고, 그렇지 않다면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선택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고 한다면, 나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무(無)에서 창조되고, 또 직접적인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도 무로부터 창조되는 반면에,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나는 모순율(矛盾律)의 소산이고, 혹은 내가 나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태어난다. (P383)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우연적인 인간이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을 완전한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보편적인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예컨대 어떤 인간이 심미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우연적인 것이 엄청난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한 것처럼 그런 뉘앙스를 갖고 사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된다.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면, 그는 보편적인 것을 실현한다. 그러므로 그는 구체적인 것을 증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 속에서 보편적인 인류의 구현을 봄으로써 모든 심미적인 표현보다 더 심오한 하나의 구체적인 표현을 갖는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자신의 과제로 갖는다. 그의 자기는 그것이 지닌 직접성 속에서는 우연적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그의 과제는 우연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서로 작용시켜서 침투시키는 일이다. (P455-456)
윤리적인 견해는, 심미적인 견해보다 두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것은 현실과 일치되고 있고, 현실에 깃들어 있는 보편적인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반대로 심미적인 견해는 우연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둘째, 전자는 인간은 완전성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인간을 파악하고, 인간이 지닌 참다운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을 본다. (P511-512)
“일거리가 없으면 인생이란 결국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거리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이어서는 안 되고, 항상 쾌락으로서 규정될 수 있는 일거리여야만 한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 속에서 어떤 귀족적인 재능이라고나 할까, 하여간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대중으로부터 구별해주는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육성해야만 하지만, 경솔하게 육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인간은 곧 그것에 싫증을 느끼게 마련이니까. 그러지를 말고 되도록 심미적으로 진지하게 육성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일거리를 갖게 되고, 그야말로 자기 자신의 쾌락이 되는 일거리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 자주독립하는 재능, 우리는 생활의 궁핍 따위는 개의치 않고 그것이 울창하게 번식할 수 있도록 이 재능을 잘 키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재능을 인생이 난파할 때 자신을 구해주는 널빤지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 위로 솟아오를 수 있는 도구인 날개로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이 재능을 마구 부려먹은 몹쓸 말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의기양양한 준마로 취급해야 한다.” (P515-516)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어두운 일면이다. 인간은 매일 일곱 시간씩 잠을 잔다. 그것은 낭비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하루에 다섯 시간씩 일을 한다. 이것 역시도 낭비되는 시간이다.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섯 시간을 일해서 인간은 일용할 양식을 번다. 인간은 그것을 벌었을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 한에 있어서, 우리의 노동은 가능한 한 따분하고 무의미한 것일수록 더 좋다. 만약 우리가 각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그런 죄를 절대 범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우리의 재능이란 것은 고이 가꾸어야만 하는 것이고, 재능이란 우리가 그 자체를 위해 소유하는 것이고, 우리는 자식의 재능으로 인해서 부모가 자식에게서 기쁨을 느끼듯이 기쁨을 느끼고, 우리는 하루에 열두 시간씩 재능을 가꾸고 발전시키고, 일곱 시간은 잠을 자고, 다섯 시간 동안은 인간을 폐업하고....... 그래야만 인생은 결국 그나마도 참을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고, 그렇다. 어쩌면 아름다운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섯 시간쯤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 두려울 것도 없기 때문이고, 일을 하는 동안은 우리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동안 우리는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취미를 위해서 힘을 저축할 수가 있다.” (P517-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