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318.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을 읽고

by 노용헌

1.'형상(形象)'의 이론 및 행동주의적 지각론과

2.의식=지속의 관점에서 베르그송이 독자적으로 이해한 '기억'에 관한 이론


심리현상에 대해서는 불가분·불가결한, 그리고 그 자체가 물적 대상인 뇌수의 기능을 해명하고 확정하는 것이었다. 뇌수는 표상을 산출하는 기관도 기억의 저장소도 아니고 행동의 전달기관이며, 또한 순수지각은 어떠한 표상작용도 아닌 대상과의 관계에서 행동의 전달이며, 지각에 의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우리들의 외부에 실재하는 형상이다 ―― 이것이 하나의 결론이다.


물질과 기억.jpg

“우리가 생활한다는 것은 행동의 연속이다. 행동이 일어나는 동기는 ‘요구와 욕망’ 때문이다. 행등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시간이 들어간다.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가져와서 사물을 배열하고,배치한다. (기억할 때) 배열은 지성이 행동의 윤곽을 잡아준다. 지성이란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 체계를 말한다.”


'정신---<순수기억>---기억---<지각,이미지>---신체---<행동>----물질'


원뿔 SAB로 나의 기억 속에 축적된 기억들 전체를 나타낸다고 하면, 밑면 AB는 과거 속에 자리잡아 부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반면, 꼭지점 S는 매 순간 나의 현재를 그리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서, 또한 끊임없이 우주에 대한 나의 현실적 표상의 움직이는 평면인 P에 접하고 있다. 신체의 이미지는 S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평면 P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평면을 구성하는 모든 이미지들로부터 나오는 작용들을 받고 되돌려 보내는 데 머문다.

베르그송의 기억.jpg

우리는 세계를 이미지로 지각한다. 그리고 이미지를 통해서 기억하고, 기록한다. 프랑스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Regis Debray)는 그의 ‘매개학(Mediology) 이론’에서 “기록된 것만이 역사가 될 수 있으며, 그 기록은 기록의 매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시간의 지속성을 견딜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라고 주장한다. 드브레의 책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이미지라는 것이 어떻게 발생해서 실재가 재현되며, 그러한 이미지가 점점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결국 실체를 대체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오늘날 세상의 메커니즘을 밝힌다.


[제1장 표상을 위한 이미지들의 선택]

[이러한] 모든 외양들이 기만적이 아니라면 정념적 상태가 도달하는 작용은, 한 운동이 다른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도출되듯이, 이전의 현상들로부터 엄밀하게 도출될 수 있는 현상들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념의] 작용은 우주와 우주의 역사에 진정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덧붙이는 것이다. 외양들에 멈추어서, 나는 내가 느낀 것 그리고 내가 본 것을 아주 단순하게 이렇게 공식화하겠다. 모든 일이 진행되는 모습을 볼 때 내가 우주라고 부르는 이 이미지들의 총체 속에서, 그 유형이 내 신체에 의해 제공되는 어떤 특별한 이미지들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산출될 수 없는 것 같다. (P39)


물질에 대한 <나의 지각>이다. 거기서부터 잠정적으로 다음의 두 정의가 도출된다. 나는 이미지들의 전체를 물질이라고 부르고, 나의 신체라는 어떤 결정된 이미지의 가능적 행동에 관련된 이 같은 이미지들을 물질에 대한 지각이라고 부른다. (P45)


모든 이미지는 어떤 이미지들에는 내적이고, 또 어떤 이미지들에는 외적이다. 그러나 이미지들의 전체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내적이라고 말할 수도, 외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재성과 외재성은 단지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가 우리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는지, 아니면 우리 사유 밖에 존재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용어들로 진술하는 것이다. 이 용어들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그러하다. 그것은 사유, 존재(existence), 우주라는 용어들이 양쪽에서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보람 없는 논쟁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쟁점이 관련된 공통의 영역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한쪽에 대해서든 다른 쪽에 대해서든 우리는 사물을 단지 이미지들의 형태 아래서만 포착하기 때문에, 문제를 이미지들과 관련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미지들과 관련해서만 제기해야 한다. (P51-52)


유일한 문제는, 무한수의 다른 이미지들은 배제된 채로 있는데, 왜 그리고 어떻게 이 이미지가 나의 지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선택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P77)


우선 기억(memoire), 즉 과거의 이미지들의 존속을 전제하면, 이 이미지들은 항상 우리의 현재 지각과 혼합되며, 심지어는 그것을 대치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해 두자. 왜냐하면 그것들이 보존되는 것은 단지 유용하게 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매순간 현재의 경험을 획득된 경험으로 풍부하게 하면서, 그것을 보충한다. 그리고 획득된 경험은 끊임없이 증대되면서 나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마침내 현재의 경험을 덮어버리고, 그것을 침몰시켜 버릴 것이다. 외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그 위에서 생겨나는 실재적 직관, 말하자면 순간적인 직관의 기초가 우리의 기억이 거기에 덧붙이는 것 전부에 비교하면 보잘 것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P116)


만일 순수 지각이, 우리에게 물질의 본성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함으로써, 우리에게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에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면, 순수 기억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어떤 관점을 열어줌으로써, 그 측면에서 유물론과 유심론이라는 두 다른 교설들에 관해 결정적인 판결을 내리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P125)


Ⅰ. 과거는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존속한다. 그것은 1ᐤ 운동기제들(mecanismes moteurs) 속에, 2ᐤ 독립적인 기억들(souvenirs independants) 속에 존재한다.

Ⅱ. 현재적 대상의 식별은 대상으로부터 나올 때는 운동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주체로부터 나올 때는 표상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Ⅲ. 사람들은 시간을 따라 배열된 기억들로부터, 미세한 단계들을 통해, 공간 속에서 그것의 시발적이거나 가능적인 행동을 그리는 운동들로 이행한다. 뇌의 상해는 이 운동들에 해를 입힐 수 있지만, 이 기억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제2장 이미지들의 식별에 관하여]

이 이미지-기억들은 어디에 사용되는 것인가? 기억 속에 보존되고 의식 속에서 재생되면서, 그것들은 실재와 꿈을 혼합하고, 따라서 삶의 실용적 성격을 변질시키는 것이 아닌가? (P147)


<이미 본 것(le deja-vu)>의 감정을 설명하는 일상적인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현재적 지각을 식별하는 것은 그것을 사유에 의해 과거의 환경 속에 삽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P157)


[제3장 이미지들의 존속에 대하여]

IMG_6057.JPG

우리는 순수 기억, 이미지-기억, 지각이라는 세 항들을 구별했는데, 이 항들 중 어느 것도 사실상 단독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지각은 결코 현재적 대상과 정신의 단순한 접촉이 아니다. 지각에는 항상 그것을 해석하면서 완결시키는 이미지-기억들이 배어 있다. 이미지-기억 쪽에서 보면, 그것은 자신이 구체화하기 시작하는 <순수 기억>과 자신을 구체화하는 지각에 [동시에] 참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미지-기억은 시발적인 지각으로 정의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수 기억은, 아마 권리적으로는 독립적이라 하더라도, 보통은 그것을 드러내는 생생한 이미지 속에서만 나타난다. 이 세 항들을 한 동일한 직선 AD의 잇따르는 선분들 AB, BC, CD라는 상징으로 나타내면, 우리의 사유는 이 선을 A에서 D로 가는 연속적 운동으로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항들 중의 하나가 어디서 끝나고, 어디서 다른 항이 시작하는지를 정확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P230)


상상하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하나의 기억은, 그것이 현실화됨에 따라, 이미지 속에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은 사실이 아니다. 순수하고 단순한 이미지는, 단지 내가 그것을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이르게 한 연속적 과정을 따르면서 그것을 과거 속으로 찾으러 갈 때에만, 나에게 과거를 떠올려 줄 것이다. (P233-234)


우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기억(memoire)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나는 유기체 속에 고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능한 다양한 질문들에 적합한 대응을 보장하는 명민하게 만들어진 운동기제 전체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현재적 상황에 적응하게 하고, 우리가 겪는 작용들을 때로는 완성되고, 때로는 단순히 시발적인 반응으로, 그러나 항상 다소간 적응된 반응들로 이어지게 한다. 기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이므로, 그것은 우리의 과거 경험을 작동시키는 것이지, 그것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기억(memoire)이다. 그것은 의식과 동연적이어서 우리의 모든 상태들이 생겨남에 따라 차례로 보존하고 정렬하며, 각 사실에 그것의 위치를 남기고, 그것의 날짜를 표시하며, 첫 번째 종류의 기억처럼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과거 속으로 매우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 두 형태의 기억들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면서도 우리는 그것들의 연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지나간 행동들의 축적된 노력을 상징하는 신체의 운동기제와 더불어 있는 신체 위에는, 상상하고 반복하는 기억이 허공에 매달린 채로 떠다닌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직접 과거만을 지각한다면, 만일 현재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이미 기억이라면, 우리가 처음에 분리했던 두 항은 전체가 내밀하게 접합될 것이다. (P258-259)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꽃에서 열매가 생겨나듯이 행동은 선행에서 진보하기 때문에, 거기에 절대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첨가한다고 우리는 믿었다. 따라서 자유는, 사람들이 말했듯이, 결코 감성적 자발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심리적 삶이 무엇보다도 정념적인(affective) [것에 한정된] 동물에 있어서나 그러하다. 그러나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자유로운 행위는 감정들과 관념들의 종합이라 불릴 만하고, 거기로 인도한 진화는 합리적인 진화라고 불릴 만하다. 이 방법의 기교는 요컨대 단순히 일상적 인식이나 유용한 인식의 관점 그리고 진정한 인식의 관점을 구별하는 데 있다. 우리가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바라볼 수 있고, 또 이러한 바라봄을 유용하게 해 주는 지속은 그것의 요소들이 분리되고 병렬되는 지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는 지속은 우리의 상태들이 서로의 안으로 용해되는 지속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동의 내밀한 본성에 관해 사색하는 예외적이고 유일한 경우에, 즉 자유에 관한 이론 속에서 우리가 사유에 의해서 다시 위치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곳은 바로 거기다. (P310-311)


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 --기억 없는 정신-- 일지도 모르는 순수 지각은 정말로 우리가 이해하는 바와 같은 물질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더 멀리 나가보자. 기억은, 물질이 전혀 예감할 수 없을, 그리고 물질이 미리 자신의 방식으로 모방하지 못할, 어떤 기능처럼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며, [또한] 필연성에 종속되어 각각이 선행하는 것과 등가적이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일련의 순간들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의 과거는 진실로 그것의 현재 속에 주어진다. 그러나 다소간 자유롭게 전개되는 존재는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한다. 따라서 만일 과거가 기억의 상태로 그 존재 안에 놓여지지 않는다면, 그 존재의 현재 속에서 그 존재의 과거를 읽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이미 여러 번 사용했던 은유를 다시 사용하면, 유사한 이유들로 인해 과거는 물질에 의해 작동되고(joue), 정신에 의해 표상됨에(imagine) 틀림없다. (P370-371)

20150923.jpg


이전 08화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