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알랭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을 읽고
상황(狀況):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이나 형편
사태(事態): 일이 되어 가는 형편이나 상황. 또는 벌어진 일의 상태
여기서 나는 상황과 사태를 이렇게 구분하고자 한다. 상황은 공간적 의미에서이고, 사태는 시간적 의미에서이다. 사진가에게 상황은 어떠한 공간,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고, 사태는 그 공간속에서 벌어지는 상태,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태이다. 사진가는 특정 공간에서 사진을 찍다보면 돌발 사태도 보게 되고 예정된 사태도 보게 된다. 그 상황에 깊숙이 들어가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방관하게도 된다. 사진기자들이 말하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는 말이 있다. 상황을 지켜보는 존재라로서, 사진가는 그만큼 사건에 촉각을 세운다.
바디우의 저술을 통해서,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된 개념은 존재(있음), 진리, 사건, 주체이다. 존재로서의 존재, 다시 말해 있음 그 자체의 학(學, 지식)이 존재론이고, 사건은 존재의 파열 내지 두절이다. 주체는 바로 이 두 테마를 통해 인식을 하고, 진리와 화해한다. 존재의 이런 상황과, 사건의 특징인 파열은, 집합 이론, 구체적으로는 선택 공리로 무장한 체르멜로-프랭켈 집합 이론의 차원에서 사유가 전개된다. 간단히 말해, 사건은 존재 안에서 부상하는 은폐된 '(부분) 요소' 내지 집합이 야기하는 진리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요소는 언어와 기지의 존재를 벗어난다. 그러므로 존재 그 자체는 사건을 온전히 진행시키는 조건과 자원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투적 지식과 상황을 깨트릴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일자(一者)가 유아론적 주체와 데카르트적 자아('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벗어나 다자(多者)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뜻에서 진리와 만나는 사건과 유사하다.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담론은 어떤 형태를 취게 될까?
상황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론은 만약 존재한다면 하나의 상황이다. 우리는 즉각 이중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한편으로 상황은 현시이다. 따라서 존재의 하나의 현시가 그 자체로 존재해야만 할까? 오히려 ‘존재’는 모든 현시가 현시하는 것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존재가 어떻게 존재로 현시될 수 있는지를 알길이 없는 셈이다.
다른 한편 만약 (존재로서의 존재에 관한 담론으로서의) 존재론이 상황이라면 일자로 셈하기, 즉 구조의 양식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존재의 일자로 셈하기는 즉각 우리를 일자와 존재는 상호적이라는 궤변이 난무하는 아포리아들로 되돌아가게 하지는 않을까? 만약 셈하기의 조작일 뿐인 한 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는 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경우 존재는 모든 셈으로부터 제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존재는 일자/다수라는 대립에 이질적인 것이라고 선언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P59-60)
무는 현시의 이러한 결정 불가능성을 명명하는데, 그것이 이 현시의 현시 불가능한 것으로 다수의 영역의 순수한 관성과 일자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작의 순수한 투명성 사이에 나뉘어 있다. 무는 구조, 따라서 정합성의 무인만큼이나 순수 다수, 따라서 비정합성의 무이기도 하다. 현시로부터는 아무것도 공제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무가 무일 수 있는 것은 현시가 가진 이중임 힘, 즉 법칙과 다수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의의 상황에 대해 플라톤이 -우주적 현시의 거의 카니발적 은유인- <티마이오스>의 장대한 우주론적 구성과 관련해 ‘방황하는 원인’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 상응하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을 사유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시 불가능하지만 필수적인 형상, 즉 현시의 일자-결과와 현시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자 사이의, 모든 전체성의 비-항과 모든 일자로 셈하기의 비일자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는 형상이다. 또한 상황에 고유한 무, 상황이 존재에 봉합되며 현시되는 것은 셈하기로부터의 공제라는 형태로 현시 속에서 방황한다는 것이 입증되는 텅 빈, 하지만 상황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점이 그것이다. 이 무를 점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그것은 국소적인 것도 또 대역적인 것도 아니며 모든 곳에, 즉 어떤 곳에도 흩어져 있지 않은 동시에 또한 모든 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마주침도 그것이 현시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존재에의 이러한 봉합을 공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구조화된 현시는 ‘자신의’ 공백을, 단지 셈하기의 공제적 측면일 뿐인 이러한 비일자의 방식으로는 공백을 현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P106-107)
상황은 내재적으로 상황의 본래 구조와 분리된 구조임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초과점 정리에 따르면 이 구조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상태의 일자-결과에는 속하는 부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결과는 최초의 구조의 다른 모든 결과와 절대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보통의 상황에서는 상태에 고유하며, 상황의 일자로 셈하기로부터 공제되는 부분들의 일자가 나타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특수한 조작자들이 요구될 것이다.
다른 한편 상태는 항상 상황의 상태이다. 상태가 일자라는 기호 아래 정합적 다수들로 현시하는 것은 역으로 상황이 현시시키는 것만으로 구성된다. 포함되는 것은 속하는 일자-다수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의 상태는 한편으로는 상황 그리고 상황의 태생적 구조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따라서 초월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접속되어 있다고(따라서 내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리되어 있는 것과 접속되어 있는 것 사이의 이러한 결합이 상태를 메타구조, 셈하기의 셈하기로 또는 일자의 일자로 특징짓는다. 상태를 통해 구조화된 현시는 허구적 존재를 부여받는데, 이것이 공백의 위험을 제거하고 완전성이 셈해지기 때문에 일자의 보편적 안정이 지배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P171)
인간들이 존재하는 이 2가지 상황은 구조적으로(즉 상태라는 관점에서) 동일하다. “Ordo et connexio idearum idem est, ac ordo et connexio rerum(관념의 질서와 접속은 사물의 질서 및 접속과 똑같으며)”, 여기서 사물은 ‘외연’이라는 상황이 존재하는 모습-양태-을 그리고 관념은 ‘사유’라는 상황이 존재하는 모습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P196)
사건적 자리에 대한 규정의 부정적 측면 -제한되지 않는 것-이 자리 ‘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한다. 다수는 그것이 현시되는(일자로 셈해지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자리이다. 다수는 오직 상황 속에서만 자리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항을 정규화하는 자연적 상황은 내재적으로 규정 가능하며, 좀 더 큰 현시 속에서 하위-상황(하위-다수)이 될 수 있지만 특징은 보존한다.
따라서 사건적 자리에 대한 규정은 국소적인 반면 자연적 상황에 대한 규정은 대역적임을 기억하는 것이 핵심적이다. 상황 내부에는 일부 다수들(하지만 다른 다수는 그렇지 않다)이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자리-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대역적인 자연적 상황들이 존재한다.
<주체론>에서 나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도입한 바 있다. 거기서는 역사의 의미라는 통속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논리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책을 각인하고 있는 것과 같은 추상적 틀 내에서는 아래와 같은 형태로 동일한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상황 속에는 사건적 자리가 존재하지만 사건적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부 다수들의 역사성은 사유할 수 있지만 하나의 역사는 사유할 수 없다. 이러한 견해의 실천적-정치적-결과는 주목할 만한데, 그것은 행위의 미분적 위상 기하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복 -이것의 기원은 총체성의 상태일 것이다- 이라는 생각은 상상적인 것이다. 모든 급진적 변형 행위는 점 속에서 기원하는데, 그것이 바로 상황 내부에서 사건적 자리이다. (P294-295)
우리는 두 가지 가능한 가설의 가능한 결과만 검토할 수 있을 텐데, 이 두 가설은 실제로는 해석적 개입의 즉, 절단의 전체적 규모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사건이 상황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그것이다.
--- 첫 번째 가설. 사건은 상황에 속한다. 상황의 관점에서 볼 때 현시되는 한 그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특징은 아주 특수하다. 무엇보다 먼저 사건은 특이한 다수(우리가 그것이 속한다고 가정하는 상황 속에서)임을 주목하라. 만약 그것이 실제로도 정규적이며, 따라서 재현될 수 있다면 사건은 상황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의 자리의 원소들이 그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소들 -자리는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다- 은 자체가 현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건(게다가 직관적으로 쉽게 파악할 수 있듯이)은 상태의 항들 속에서는, 상황의 부분들이라는 관점에서는 사유될 수 없다. 상태는 어떠한 사건도 셈하지 않는다. (....)
사건이 상황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공백과 자신 사이에 끼워 넣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사건적 자리와 개념적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기 자신에게 속하기에 묶여 있는 이러한 끼워 넣기가 초일자이다. 그것은 동일한 것을 일자로 두 번 셈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현시된 다수로,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의 현시 속에 현시된 다수로.
--- 두 번째 가설. 사건은 상황에 속하지 않는다. 그 결과 ‘장소말고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건은 자신 말고는 오직 상황 속에서는 현시되지 않는 자신의 자리의 원소만 현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거기서도 현시되지 않는다면 상황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에 의해 아무것도 현시되지 않는다. 그것으로부터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
따라서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사건이 상황 속에 존재하고 자신을 공백과 자신 사이에 끼워 넣음으로써 자리가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을 깨버리거나 아니면 상황 속에 있지 않으며, 명명 능력은 만약 ‘어떤 것’에 보내질 수 있다면 오직 공백 자체에만 보내질 수 있다.
사건이 상황에 속하는지의 결정 불가능성은 이중적인 기능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으로 사건은 공백을 환기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공백과 자신 사이에 끼워 넣을 것이다. 그것은 공백의 이름이자 동시에 현시적인 구조의 초일자일 것이다. 역사적 상황의 내부-외부 속에서, 질서의 비틀림 속에서 비존재의 존재, 즉 존재하는 것을 전개하게 될 것은 이 공백을-명명하는-초일자이다. (P302-304)
다수의 사건성과 관련해 결정과 일치하는 조정되고 필연적인 절차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특히 나는 상황의 상태는 이러한 종류의 순서를 위한 어떠한 규칙도 보장하지 않음을 보여준 바 있는데, 사건은 어떤 자리에서, 공백의 가장자리에 있는 다수에서 일어나는 만큼 결코 그러한 상태에 의해 부분으로 재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이 속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기 위해 사건이 포함된다는 가정에 기댈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수가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주는 모든 절차를 개입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서 ‘인식’은 두 가지 것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그것들은 개입적 몸짓의 유일성 속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먼저, 다수의 형태는 사건적인 것으로, 즉 사건의 수학소와 일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다수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리의 재현된 원소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으로 구성되는, 그것들로 일자를 형성하는 속성을 가진다. 두 번째로 형태와 관련해 그런 식으로 형성되는 이 다수와 관련해 그것은 상황의 한 항이라고, 상황에 속한다고 결정된다. 개입은 어떤 결정 불가능성이 존재했음을 확인하고, 그것이 상황에 속한다고 결정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P332-333)
만약 사건-개입-충실성의 조작자라는 복합체가 존재한다면, 그리하여 충실성의 무한한 긍정적 결과가 (규정이라는 의미에서) 유적이라면, 따라서 진리가 존재한다면 이 충실성의 다수-지시대상(일자-진리)은 상황의 부분이다. 사건의 이름과 긍정적으로 접속된 모든 항을 하나의 무리로 만드는 부분이 그것이다. 이 절차의 최소한 하나의 조사(유한한 상태들 중의 하나)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모든 x(+)들이 그것이다. 이 절차가 유적이라는 사실은 이 부분이 백과사전적 규정요소에 의해 분류된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P543)
주체는 상황을, 상황의 다수와 언어를 자원으로 삼아 전미래 속에 지시대상을 가진 이름들을 생성한다. 바로 이것이 믿음을 지탱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름들은 -오직 재현(또는 포함)될 수 있을 뿐인- 식별 불가능한 것이 마침내 첫 번째 상황의 진리로 현시되는 것 속에서 나타나게 될 때 지시대상을, 또는 의미화를 할당‘받게 될 것이다.’
상황의 표면에서 유적 절차는 특히 상황의 유한한 배치들 -말하자면 주체-을 둘러싼 이름의 아우라를 통해 드러난다. 절차의 유한한 도정의 확장에 포함되지 않는 주체 -사건과의 접속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조사되지 않은 모든 주체-는 일반적으로 이 이름들이 텅 비어 있다고 간주한다. 물론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그러한 이름들을 인식한다. (P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