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존재 양상: 즉자와 대자
*즉자: 그 자체,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는 존재 (être en-soi)
*대자: 즉자를 의식하는 존재, (être pour-soi)
그것이 있지 않은 것으로 있고, 그것이 있는 것으로 있지 않은 존재
의식은 대자존재인 동시에 대타존재(對他存在) (être pour autrui)
즉자적 존재(卽自的 存在, Being in-itself)와 대자적 존재(對自的 存在, Being for-itself)
사르트르에 의하면 ‘즉자 존재’란 곧 사물들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이러한 ‘즉자 존재’의 성향이 들어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자 존재’는 다른 것으로 지향하고 바깥으로 나아가서 그 무엇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 자체 불충족, 불완전,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자 존재’는 결여태(缺如態)이다. 이러한 ‘대자 존재’로서 인간은 부단히 자기 자신 바깥으로 자기를 내던져 미래로 향하여 자기를 딛고 넘어서려는 기획을 시도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본질을 만들고 자기를 새롭게 창출하고 자기 앞에 열린 무한한 가능성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한다. 하나의 선택, 하나의 결단은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무를 분비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타자에게 대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car c’est comme object que j’apparais a autrui
인간이 자기의 자유를 의식하는 것은 불안에 있어서이다. 또 말하자면, 불안은 존재의식으로서의 자유의 존재방식이다. 불안 속에서야말로 자유는 그 존재 속에 그 자신을 위한 문제가 된다. (P87)
두려움은 세계의 존재들에 관한 두려움이고, 불안은 자기 앞에서의 불안이다. 현기증이 불안인 것은, 내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절벽에서 몸을 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은 그것이 밖에서 나의 생명과 나의 존재를 변경할 우려가 있는 한, 두려움을 일으키지만, 내가 이 상황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한, 이 상황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공격에 앞선 준비 사격은 포격을 받는 병사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불안이 시작되는 것은 그가 포격에 대항하여 취해야 하는 행동을 예상하려고 할 때이며, 그가 이 포격에 ‘버티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때이다. 마찬가지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부대를 찾아가는 징집된 군인은 어떤 경우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기 자신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P87)
나는 조약돌 위에서 미끄러져 절벽 아래의 심연 속에 떨어질지도 모른다. 오솔길의 무른 흙이 발밑에서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예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하나의 사물로서 주어진다. 나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수동적이다. 나 또한 만유인력에 끌리고 있는 이 세계의 하나의 사물인 한, 그 가능성들은 밖에서 나에게 온다. 이것은 ‘나의’ 가능성은 아니다. 이 순간에 ‘두려움’이 나타난다. 두려움은 상황에서 출발하여 나 자신에 관해 파악된다. (P88)
소설가와 시인들이 강조한 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이 분리적 효력에 관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적 동태에 속하는 비슷비슷한 관념, 즉 ‘모든 “지금”은 곧 “지난날”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에 대한 것이다. 시간은 갉아먹고 구멍을 뚫는다. 시간은 분리한다. 시간은 달아난다. 또 시간은 분리하는 자로서, 인간을 그의 괴로움에서 또는 괴로움의 대상에서 분리함으로써 치유해 준다. (P240)
세계는 인간적이다. 우리는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매우 특수한 위치를 안다. 존재는 나를 거역하며 내 주위 곳곳에 있다. 존재는 내 위로 무겁게 덮쳐 온다. 존재는 나를 에워싼다. 나는 끊임없이 존재에서 존재로 지향된다. 거기 있는 이 탁자는 존재이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바위, 이 나무, 이 경치는 존재이며,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존재를 파악하기를 원하면서도 이제 ‘나’밖에 발견하지 못한다. (P373)
인간존재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거기에-있는(être-là)’ 일이다. 다시 말하면 ‘거기 그 의자 위에’ 존재하는 일이고, ‘거기 그 탁자 앞에’ 존재하는 일이며, ‘거기에, 이 산꼭대기에, 이러이러한 크기로, 이러이러한 방향 따위로’ 존재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필연성이다. (P509)
거리(距離)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는’ 계단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나를 향해 전개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내가 사소한 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또는 뭔가가 삐걱거릴 때마다 그것이 나에게 하나의 시선을 고지하는 것은, 내가 이미 ‘시선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의 기분 탓이었음을 알았을 때, 도대체 무엇이 거짓으로 나타났고 무엇이 스스로 사라져 버린 것인가? 그것은 ‘주관-타자’가 아니다. 또, ‘주관-타자’의 나에 대한 현전도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사실성(facticité)’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자와, ‘나의’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존재의 우연적인 결합이다. 그러므로 의심스러운 것은 타자 자신이 아니라, 타자가 ‘거기에-있는 것(être-là)’이다. 다시 말해, ‘이 방 안에 누군가가 있다’고 하는 말로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이런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다.
그 밖에도 타인들과 나의 직업적이고 기술적인 관계들이, 나를 또한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서 알려 준다. 카페 종업원에게는 나는 손님이고, 개찰원에게는 나는 지하철 이용자이다. 끝으로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테라스 앞 거리에서 갑자기 일어난 사소한 사건 또한, 나를 이름 없는 목격자로서, 또 ‘이 사건을 하나의 외부로서 “존재하게 하는” 시선’으로서 지시한다. 내가 구경하고 있는 연극, 또는 내가 참관하고 있는 미술전람회가 지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이름 없는 관객이다. 또 분명히 내가 구두를 신어 볼 때, 내가 병마개를 딸 때,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내가 극장에서 웃을 때, 나는 나를 ‘누구든 상관없는 누구’로 만든다. (P688)
그들의 불행은 그들에게 ‘습관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불행은 “존재한다.” 불행은 노동자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불행은 부각되어 있지 않다. 그들의 불행은 밝은 빛 속에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불행은 노동자들에 의해 그 존재 속에 통합되어 있다. 노동자들은 괴로워하지만, 그 괴로움에 주의를 집중하지도 않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는 ‘괴로워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일인 것이다. (P704)
우리의 존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선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고귀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 또는 ‘비열한 자’, ‘비굴한 자’로서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P760)
인간은 이미 인간적인 것밖에 만날 수가 없다. 더 이상 인생의 ‘저 너머’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하나의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인생의 최종 현상이기는 하지만 또한 인생이다. 이런 것으로서 죽음은 거꾸로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은 인생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 인생은 아인슈타인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한하기는 하지만, 한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된다. 죽음은 종결화음이 멜로디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의미가 된다. 거기에는 기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은 해당 계열의 하나의 항(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어떤 계열의 각각의 항은 그 계열의 모든 항에 대해 언제나 앞서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렇게 회복된 죽음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것’이 된다. 내면화됨으로써 죽음은 개별화된다. 그것은 이미 인간적인 것에 한계를 지니도록 하는, 위대한 불가지(不可知)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인생 현상이며, 이 현상이 이 인생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뿐인 인생, 즉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인생, 결코 다시 새로 수정할 수 없는 인생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가 된다. (P850)
[사진에 찍혀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진가는 프레임을 통해서 타자의 시선을 느끼기도 하고, 즉자이면서 대자를 보기도, 또한 무수히 많은 타자들을 만나기도 한다. 타자로서의 대상,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 그리고 사진에 담기지 않는 그 너머의 것들이 있다. 시각을 제외한 촉각이나, 후각. 그날의 분위기(Aura)들. 바람, 냄새들, 사진에 담겨져 있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