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샴의 <사라진 배심원>

영화 <런어웨이> 2003년

by 노용헌

존 그리샴(John Ray Grisham Jr.)은 1989년 <타임 투 킬>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두 번째 소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가 1991년 전미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등 인기를 얻어 <야망의 함정>으로 영화화되었다. 이후 첫 작품을 포함하여 <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레인메이커>, <사라진 배심원The Runaway Jury> 등 무려 10여 편의 작품이 영화로 제작될 만큼 법정 소설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003년 영화 <런어웨이>는, 존 쿠삭, 레이첼 바이스 주연으로, 원작과 달리 담배회사가 아닌 무기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한다. 그리샴의 소설 중 <불법의 제왕>은 <사라진 배심원>에서처럼 마약 중독자의 살인사건을 통해 제약회사의 대기업측과 집단소송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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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월요일에 배심원 선정과 더불어 시작될 예정이었다. 피치는 원고측 변호사들 역시 이름과 얼굴 사진을 갖고 진땀을 흘리며 니콜라스 이스터가 누군지,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라몬 카로와 루커스 밀러와 앤드루 램과 바바라 퍼로와 딜로어스 드보는?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 오직 미시시피 같은 촌구석에서만 이런 구닥다리 이름을 가진 배심원 후보 명단을 볼 수 있었다.

피치는 이 사건을 맡기 전에도 여덟 개의 주에서 여덟 번의 재판에 참석하여 피고측을 진두지휘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명단을 정리했기 때문에, 서기에게 배심원 후보들의 명단을 받자마자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람인지 몰라 골머리를 썩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피치는 멍한 표정으로 불빛들을 올려다보며, 저 탐욕스러운 상어들이 이길 경우 돈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까를 생각해 보았다. 아주 궁금했다. 그들이 이길 경우 약탈품을 놓고 벌이게 될 살벌한 싸움에 비하면, 재판 자체는 가벼운 말다툼에 불과하리라. (P18-19)


유족들은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열여섯 건의 재판을 치렀고 다행히도 담배회사들이 줄곧 재판에서 이겨왔다. 그러나 압력은 가중되고 있었다. 어떤 재판에서 어떤 배심원이 미망인에게 몇백만 달러를 주라고 판결하게 되면, 그것으로 지옥행 문이 열릴 판이었다. 법정 변호사들은 늘 그래왔듯이, 쉬지 않고 미친 듯이 광고를 해댈 터였다. 흡연자들과 흡연 사망자의 유족들은 지금 서명을 하십시오. 소송이 효과가 있을 동안에 얼른 소송을 겁시다! (P23)


설문지에는 이런 질문들이 들어 있었다. 당신은 현재 담배를 피웁니까? 만일 피운다면, 하루에 몇 갑이나 피웁니까? 만일 피운다면, 담배를 끊고 싶습니까?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운 적이 있습니까? 당신 가족 가운데 누군가, 또는 당신이 잘 아는 누군가가 흡연과 직접 관련된 질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누구입니까? (아래 빈칸에 그 사람의 이름과 병명을 적고, 그 사람이 치료에 성공했는지 아닌지도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은 흡연이 다음 중 어떤 병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폐암 ⓑ심장병 ⓒ고혈압 ⓓ해당 사항 없음 ⓔ 세 가지 병 모두.

3페이지에서는 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흡연과 관계된 건강 문제를 치료하기 위해 세금이 쓰이는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금이 담배 재배자를 위한 지원금으로 이용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모든 공공 건물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흡연자들이 어떤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질문 아래에는 답변을 위해 커다란 빈칸들이 있었다. (P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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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진술을 시작하겠습니다.”

웬덜 로가 말했다.

“이 진술에서 나는 배심원 여러분께 우리의 핵심적인 입장을 말할 것입니다.”

법정은 아주 조용했다.

“우리는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훌륭한 신사 제이콥 우드 씨가 거의 30년 동안 브리스틀을 피운 뒤 폐암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담배가 그분을 죽인 것입니다.” (P89)


피고측의 작전은 간단하고도 교활했다. 그들의 의사들은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예정이었다. 또다른 인상적인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담배를 피울지 말지를 선택하며, 만일 담배가 위험한 것이라고 해도 흡연자 자신이 그런 위험을 감수한다고 주장할 작정이었다.

피치는 전에도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었다. 증언을 다 암기할 정도였다. 변호사들이 주장을 펼치는 동안 고통을 겪고, 배심원들이 토의를 하는 동안 식은땀을 흘리고 나서 후에 조용히 평결들을 축하해 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평결을 돈으로 살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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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래드는 8시 2분에 마리의 첫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피치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메시지만 남기고 싶다고 했다. 배심원들이 다시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하킨이 직접 시에스타 모텔로 와서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는 법정에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는 소식이었다. 콘래드는 피치의 방으로 가서 그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P263)


피치가 9년 전 4인방에게 처음 고용되었을 때, 그가 맡은 임무 중 하나가 바로 메모의 모든 사본을 추적하여 하나하나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었다.

피치가 고용한 어떤 변호사도 지금까지 그 메모를 보지 못했다.

법정에서 메모의 존재가 인정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작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증거 채택의 규칙에 따르면, 보통 사라진 문서를 말로 묘사하는 그런 짓은 미리 막아야 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가장 좋은 증거는 문서 자체였다. 그러나 법의 모든 영역이 그렇듯이, 예외란 것이 있었고, 예외에 대한 예외가 있었다. 로 일당은 하킨 판사를 설득하여, 실질적으로 크리글러가 배심원들에게 사라진 문서를 묘사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대단한 일이었다. (P286-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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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담배회사들이오. 그들은 FDA(미국의 식품의약국)를 무서워하고 정부 규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공화당 후보자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쏟아붓고 있소. 그들은 자유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오. 호피, 당신과 똑같소.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지. 그래서 그들을 파산시키려는 정부와 법정 변호사들을 싫어하오.”

“정치적이군요.”

호피는 그렇게 대꾸를 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멕시코 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로지 정치적일 뿐이오. 만일 큰 담배회사가 이 재판에서 지면, 이나라 사상 유례가 없는 소송 사태가 벌어질 거요. 담배회사들은 수십억을 잃게 될 것이고, 우리는 워싱턴에서 수백만 달러를 잃게 될 거요.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소, 호피?”

호피는 깜짝 놀라며 현실로 돌아왔다.

“뭐라고 했죠?”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했소.”

“그럼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돕나요?”

“부인한테 이야기를 해서, 이 사건이 얼마나 몰지각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부인이 이해하도록 만드시오. 그러고 나서 부인이 배심원들을 책임지고 설득할 필요가 있소. 원고측에 유리한 평결을 받아내고 싶어하는 자유주의자 배심원들에게 당신 부인이 대항하고 맞서야 한단 말이오. 그렇게 해줄 수 있겠소?” (P362)


로는 점심 시간에 클리브와 함께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야 할 더러운 일을 하는 중이었다. 다른 변호사들도 대부분 클리브와 같은 몰이꾼을 이용하여 돈을 뿌리고, 사건들을 쫓아다니고, 법대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음침한 작은 일들을 처리했다. 그러나 자신의 비윤리적인 활동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정 변호사들은 몰이꾼들에 대해서는 자기들만 알고 있었다. (P487)


“자, 우리는 이렇게 할 걸세. 그에게 지금 1만 5천을 주고, 평결 뒤에 나머지 1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말을 녹음해 놓는 거네. 지폐 몇 장에는 표시를 해놓아 나중에 그를 함정에 넣을 때 쓰고, 다른 표 하나에도 2만 5천을 약속해. 그리고 우리한테 유리한 평결이 나오면, 그가 나머지를 요구할 때 괴롭히는 거야. 도청을 해서 녹음을 해두었다가, 시끄럽게 굴면 FBI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협박하는 거지.”

“마음에 드는데요, 그는 돈을 받고, 우리는 평결을 얻고, 그는 골탕을 먹는다. 그게 정의인 것 같군요.”

“돈과 함께 도청 장치를 가지고 나가. 오늘 오후에 해야 돼.”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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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열두 명, 열한 명의 제자와 그들의 주님.

피치는 천천히 일어나 두 손으로 싸구려 도자기 램프를 집어들었다. 콘래드는 전부터 그것을 치우고 싶어했다. 엄청난 혼란과 폭력의 장소인 피치의 책상에 그것이 놓여져 있는 것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콘래드와 방은 복도에서 어슬렁거리며 명령을 기다렸다. 그들도 뭔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순간 램프가 벽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피치는 소리를 질렀다. 베니어판으로 만든 벽이 덜그럭거렸다. 다시 무슨 물건이 벽에 부딪히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기인 것도 같았다. 피치는 “돈!”이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이어 책상이 큰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뒤로 물러났다. 문이 열렸을 때 근처에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쾅! 쾅! 쾅! 마치 수동 착암기 소리 같았다. 피치가 주먹으로 벽을 치는 소리였다.

“여자를 찾아!”

피치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쾅! 쾅!

“여자를 찾으란 말이야!” (P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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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죠?”

로린이 물었다.

“변화를 위해서죠. 우리는 담배회사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책임을 지게 만드는 과정의 첫발을 내딛는 겁니다. 잊지 마세요. 담배회사들은 이런 재판에서 진 적이 없어요. 그들은 자기들이 무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른 원고들이 담배 산업에 달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이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담배회사들을 파산시키자는 거로군.”

로니가 말했다.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파이넥스는 12억 달러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요. 그 이윤 가운데 거의 모두가 그 제품을 사용하지만 끊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거고요. 그래요, 생각해 보니, 파이넥스가 없으면 세상은 더 좋아지겠군요. 파이넥스가 망한다한들 누가 울겠어요?”

“거기 직원들이 그럴 수도 있지.”

로니가 말했다.

“좋은 지적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제품에 중독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동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P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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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는 곧 떠날 것처럼 장갑을 끼었다.

“그냥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일을 했는지 당신이 알고 있나 확인하고 싶었고요.”

“이제 우리와는 볼일이 끝난 거요?”

“아뇨, 항소심을 잘 지켜볼 거예요. 당신네 변호사들을 통해 평결을 지나치게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면, 나한테 송금 확인서 사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조심하세요, 피치. 우리는 그 평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늘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마리는 탁자 가장자리에 섰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피치. 다음에 당신들이 재판에 회부될 때, 우리도 가서 지켜볼 거라는 사실을.” (P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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