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2001년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의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집필한 소설이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 그 이후 8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여자의 심정에서 소설을 쓰고(Rosso), 아쿠다가와상 수상작가 츠지 히토나리는 남자의 심정에서 이야기를 썼다(Blu).
마치 편지를 주고받는 듯한 연재였다. 나는 에쿠니 씨가 원고를 보내오기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렸다. 멋진 글이 오면 나도 투지를 불태웠다. 아오이의 흔들리는 감정을 묘사한 글을 받아보고, 쥰세이에게 열정을 기울였다. 혼자서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에 고민도 하고, 고통도 받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공동 작업은 자극적이고 의미가 있었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연재를 하고 싶었다. -츠지 히토나리
나는 일어나, 잠든 마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단단한 턱, 짧게 돋아 있는 수염, 긴 속눈썹,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마빈, 지금, 내 눈앞에 있고, 나를 꼭 껴안아주는 마빈. 잠자는 마빈의 몸에 다리를 휘감고, 움푹한 어깨에 얼굴을 부빈다. 마빈의 체온, 마빈의 냄새. 마빈은 사람의 마음속까지 파헤치고 들어오거나 모든 것을 알려 들지 않는다. 혼자서 점점 상처받아 흥분한 두더지처럼 몸을 사리지도 않는다. 이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슬픈 얼굴로 내게 말없는 비난을 하지도 않는다.
비는 내게 도쿄를 생각나게 한다. (P32~33)
“아오이 씨는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아, 물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는 하지만 경력이 될 만한 일은 아니지. 논다고 해봐야 다니엘라만 만나는 정도잖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데도 미국인 모임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과 사귀는 것 같지도 않고. 늘 책과 목욕뿐.”
이라고 말했다. 목욕뿐, 이란 말에서 슬쩍 웃었다.
게을러서 그래요, 라고 대답했지만, 안젤라는 승복할 수 없다는 투였다.
“결혼은 안 해?”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한다.
“결혼요?”
“그래. 사랑하고 있잖아? 마빈을.”
나는 안젤라의 얼굴을 보았다. 갈색 머리를 돼지 꼬리처럼 묶고, 여전히 부실부실 튀어나와 있는 잔머리에 화장기는 없다. 군청색 레인코트에는 온통 빗방울이 맺혀 있다. (P66)
“저녁때 마빈과 만나기로 했어. 그때까지 도서관에 가 있지, 뭐.”
가로수 한 그루 한 그루의 풍성한 녹음이 구름진 하늘을 배경으로 똑바로 서 있다. 퇴색한 회색 벽이 이어진다.
“쥰세이하고는 그때 헤어지고 끝이야?”
앞을 향한 채 다카시가 물었다.
“그때라니?”
고개를 숙이고 되묻는다. 나는 나의 갈색 가죽 구두와, 전혀 닦지 않은 듯한 다카시의 검정 부츠 코를 본다. 그때라니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다카시는 대체 어떤 ‘그때’를 알고 있는 것일까. (P89)
나는 쥰세이의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강변길에서, 기념 강당 앞 돌계단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도중에 있는 찻집에서, 우리들의 방에서. 쥰세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누구에게든, 당황하리만큼 열정을 기울여 얘기했다. 항상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했고, 그 이상으로 이해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얘기를 너무 많이 했다 싶으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다는 듯, 그리고 느닷없이 나를 꼭 껴안곤 했다.
나는 쥰세이를, 헤어진 쌍둥이를 사랑하듯 사랑했다. 아무런 분별 없이. (P93)
색깔 없는 욕실 창문으로, 역시 색깔 없는 거리가 보인다. 욕조 안은 따뜻하고, 나는 따뜻한 물속에서 손발을 흔들흔들 움직인다. 물도, 공기도, 창밖도, 모두 같은 색과 질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저녁때이기 때문일까.
저녁에 하는 목욕은 정말 나른다. 나른하고 무위하다.
쥰세이는 무위를 싫어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
마치 엄마가 잠시 한눈을 팔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다섯 살 꼬맹이처럼, 쥰세이는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쥰세이의 그 열정. 한결같음, 그리고 행동력.
쥰세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웃는다. 떠든다, 걷는다, 생각한다, 먹는다, 그린다, 찾는다, 쳐다본다, 달린다, 노래한다, 그린다, 배운다.
쥰세이는 동사의 보고였다. 만진다, 사랑한다, 가르친다, 외출한다, 본다, 사랑한다, 느낀다, 슬퍼한다, 사랑한다, 화를 낸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더욱 사랑한다, 운다, 상처 입는다, 상처 입힌다.
나는 욕조 테두리에 머리를 얹고 하얀 벽과 하얀 천장을 바라본다. (P101-102)
“제발 어디 멀리 가지 말아줘.”
우람한 팔에 더욱 힘을 주고 그렇게 말하는 마빈의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감정적이고 몹시 불안하게 들렸다. 어디 멀리, 란 말이 안젤라와의 여행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빈이나 나나.
“놔요.”
가능한 한 가볍게 말했다. 마빈은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그런 마빈이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안심시켜줄 수가 없다. 아무 데도 안 가니까 안심하라고, 늘 당신 곁에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나는 마빈에게 말해줄 수가 없다. (P109~110)
물건을 껴안고 밖으로 나간다. 날씨가 좋은 탓인가, 거리가 온통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버스와 자동차의 배기가스, 지나가는 사람들, 트램의 경적. 두오모 광장에는 알록달록한 가판대가 나와 있다. 마빈이 ‘Huge and lovely(거대하고 아름다운)’하다고 하는 밀라노 두오모의 옥상에서는, 술에 취한 사람들이 살을 태우고 있으리라.
--피렌체의 두오모는 따뜻해.
그렇게 말한 사람은 페데리카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같이 올라갔거든. 밀라노의 두오모 같은 장엄함은 없지만, 부드러운 색상에 사랑스럽고 따뜻했어.
페데리카는 피렌체의 두오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라고 했다. 그녀의 사랑의 기억인 두오모, 초등학생 시절, 그녀의 집 거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언젠가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르리라고.
--피렌체의 두오모? 왜 하필이면?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돼?
쥰세이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페데리카 이야기를 했고 쥰세이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또 페데리카야?
쥰세이는 피식 웃었다. 스무 살이었다. 우리는 대학의 뒤뜰에 있었고, 밀라노도, 피렌체도, 페데리카도, 가공의 존재인 듯 멀었다.
--약속해줄래?
그때 나는, 평소에 없는 용기를 그러모아 말했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하는 사랑의 고백이었으므로.
피렌체의 두오모에는 꼭 이 사람과 같이 오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쥰세이는, 너무도 쥰세이답게 주저없이 약속해주었다.
--좋아, 십 년 후, 5월이란 말이지. 그때는 21세기네. (P141-142)
아오이, 너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때문에 이런 편지를 쓰고 있는 거야. 이미 지나간 일이고, 지금 새삼스럽게 이런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겠지. 난 모르고 있었어. 이 방에 아버지가 찾아 왔었다는 것도, 아버지가 네게 했다는 끔찍한 말도.
정말 미안해.
젊음과 부족함 탓으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나. 계류유산이었다면서, 결국 아이는 살 수 없었다는 것, 오늘에서야 알았어. 네가 수술했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내 감정대로 너를 비난하고 몰아세웠지, 부끄럽다.
장황하게 쓰고 말았군. 일본을 떠나, 태어나고 자란 밀라노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아오이에게, 과거의 불쾌한 일을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
--여전히 제멋대로군.
옛날처럼,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한숨을 쉬겠지. 그러고는 소리 없이 미소도 지을까. 용서해달라는 말은 못 하겠어. 사과하고 싶지만, 다만, 왜 모든 것을 얘기해부지 않았는지, 그 한 가지만은 섭섭하군.
잘 있어. 나이스 가이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나는 아오이만큼 식물에 박식하지는 않지만, 지금 하네기 공원은 녹음과 꽃으로 한창이야, 어린이 광장 쪽에는 들장미가 -아마 들장미겠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쥰세이 (P164-165)
한편으로 나는 줄곧 마빈을 그리워하고 있다. 밤이 올 때마다, 혼자 자는 침대의 한없음에 소름이 끼친다. 마빈의 살과 냄새와, 체온과 잠든 숨소리를 애타게 그린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 누군가가 항상 곁에 있어준다는 것, 쥰세이와는 서로의 집에 곧잘 묵었지만, 같이 산 적은 없었다. 누군가와 생활을 함께하는 데서 오는 안심도, 온도도, 번거로움도, 나는 마빈에게서 배웠다.
--난 포기하지 않아. 그 집에서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런 밤에는 낮고 침착한 마빈의 목소리만 되새긴다.
아마레토란 술은 크리스털 잔으로 마시는 편이 훨씬 맛있다.
돌아갈 장소.
사람은 대체 언제, 어떤 식으로 그런 장소를 발견하는 것일까.
잠 못 드는 밤, 나는 사람을 그리워함과 애정을 혼동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매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P194)
“아오이.”
페데리카의 방은 기묘하다. 방 전체가 페데리카 같다.
“네?”
담배를 낀 손가락에, 오늘도 남편에게 선물 받은 묘안석 반지를 끼고 있다.
“사람의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속밖에 없는 것이란다.”
페데리카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거의 혼자 중얼거리듯. (P196~197)
-- 피렌체의 두오모? 왜 하필이면? 밀라노의 두오모는 안 돼?
쥰세이는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내내,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은 다른 곳에서 시작됐지만, 반드시 같은 장소에서 끝날 것이라고.
만나고 말았다, 고 생각했다. 교외의 조그만 대학에서, 도쿄란 불가사의한 도시에서.
영원히, 쥰세이와 함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질 수 없다고.
-- 아오이.
쥰세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그만큼 행복으로 충만할 수 있었다.
-- 사랑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젊고 진지한 눈길로, 조용히 그렇게 말한 쥰세이. (P210~211)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그때 이미 마음이 정해져 있었다. 알베르토의 공방에서, 아침 햇살 속에서, 나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피렌체에 간다는 것을. 두오모에 오른다는 것을. 쥰세이와 나눈 약속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발차 벨이 울리고, 문이 닫혔다. 몹시 흥분해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담담했다. 나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감정이, 해방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 시간 후, 기차는 피렌체에 도착했다. 약간 희미해진 햇살이, 그 때문에 한층 더 초여름 눈부신 빛으로 사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역 앞 광장으로 나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와본 후로 처음인 도시의 공기를 마셨다. 피렌체.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인,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 그래서 관광업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걸머진 도시.
밀라노에서 불과 세 시간 거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만큼, 전혀 분위기가 다른 도시다.
-- 오고 말았어. (P222)
우리는 마냥 우뚝 서 있었다. 십 대들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떨리는 환희와 절망적인 불안 사이에서, 장밋빛과 파란색이 뒤섞인 하늘 아래서.
십 년. 그 시간이 한줌 보잘것없는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옆으로 비켜놓으면, 없었던 것처럼 될 것 같았다. 십 년, 하지만 동시에, 현기증이 일 만큼 긴 세월이란 생각도 들었다.
--내내, 내내,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아무 말 하지 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 말 하지 마, 라고. 빨려 들어가듯 몇 걸음 다가가, 쥰세이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살며시, 깨져버리면 어쩌나 겁을 내면서, 아니면,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부서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겁을 내면서. (P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