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부영사>

영화 <인디아 송> 1975년

by 노용헌

<부영사>는 전통적 소설 기법과 결별하고 누보로망에서도 비켜 나와 자신만의 독자적 글쓰기를 해온 뒤라스가 오십줄에 접어들어 작가적 개성이 무르익은 시기에 집필한 소설이다. 뒤라스적 특성, 즉 심리묘사 배제, 언어의 간결성, 반복, 암시, 맥락 없는 대화, 모호성, 감각적 분위기, 끝내 폭발되지 않는 욕망 등이 집약돼 있다. 프랑스에서는 뒤라스의 작품세계를 연구할 때 끊임없이 거론되는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다.

<부영사>에는 일견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된다. 어린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했다는 이유로 어머니한테 쫓겨나 캄보디아의 톤레사프에서부터 무작정 10년을 걸어 인도의 캘커타에 이른 여자걸인의 이야기가 그 하나고, 계절풍이 부는 인도의 무더위와 권태에 짓눌린 캘커타 주재 프랑스 대사의 부인 안 마리 스트레테르와 라호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캘커타로 좌천돼 당국의 처분을 기다리는 중에 안 마리 스트레테르를 사랑하게 된 라호르 주재 부영사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P24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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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라스가 영화로 만든 <인디아 송> 이야기를 잠깐 덧붙이고 싶다. 아무리 이야기를 빌렸더라도 원작 소설과 영화는 별개의 것임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지만, <인디아 송>은 뒤라스가 카메라로 다시 쓴 <부영사>에 가깝고, 소설과 영화가 상호보완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령같이 대사관을 떠도는 인물들과 인물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경들, 취하도록 흐르는 음악, 아련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완벽해 보이는 100% 보이스 오프 기법은 소설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면서도 또 다른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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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걷는다, 라고 피터 모르간은 쓴다.

어떻게 하면 되돌아오지 않을까? 길을 잃어야 해, 모르겠어. 알게 되겠지. 길을 잃으려면 지표가 있어야겠는데, 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더는 알아보지 않겠다는 자세가 되어야 해. 수천의 비탈이 사방으로 나 있는 광활한 늪지대라 할 법한, 영문 모를 가장 험난한 지평선 끝을 향해 나아가야 해.

그녀는 그렇게 한다. 그녀는 몇 날 며칠을 걷는다. 비탈을 따라 걷다가 비탈을 떠나 개울을 건너고, 곧장 걷다가 멀리 떨어진 다른 늪 쪽으로 돌아가 늪을 건너고, 다시 여기를 떠나 또 다른 늪을 찾아가는 식이다. (P7)


피터 모르간, 그는 글쓰기를 멈춘다.

그는 침실에서 나와 대사관저의 정원을 가로질러 갠지스 강을 따라 난 대로로 간다.

거기에 그녀가 있다. 라호르 주재 전 프랑스 부영사의 관저 앞에, 그녀는 아지 축축한 보퉁이를 낀 채 모래 위 움푹 팬 덤불숲 그늘에 민머리를 누이고 자고 있다. 피터 모르간은 그녀가 밤에 갠지스 강에서 생선을 잡고 헤엄을 치는가 하면 산책객들에게 접근하기도 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밤 시간을 보낸다. 피터 모르간은 캘커타에서 그녀를 미행했다. 이것이 그가 아는 것이다.

잠든 그녀의 몸뚱이 바로 옆에는 문둥이들이 있다.

문둥이들이 깨어난다.

피터 모르간은 캘커타의 고통을 받아들여 그속에 뛰어들기를 원하고, 이렇게 고통을 받아들인 이상 이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무지가 멈추기를 바라는 젊은이다.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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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는 불현 듯 내일 금요일 저녁에 프랑스 대사관에서 열리는, 자신도 마지막 순간에 초대된 연회와 관련된 무언가를 떠올린다. 엊저녁, 대사 부인이 한 마디 던졌다. 오세요.

그는 일어나 인도인 하녀에게 가서 턱시도를 손질하라고 이른 뒤, 다시 소파로 돌아와 앉는다. 말제르브에 사는 이모의 편지는 다 읽었다. 그는 열린 덧창과 라일락에 관한 대목을 다시 읽으며 찬찬히 살핀다. 이미 다 읽은 것을,

그는 편지를 손에 든 채 업무 시간을 기다린다. 이때 그의 머릿속에 거실 하나가 떠오른다. 질서정연한 거실에 커다란 검은색 피아노 한 대가 있다. 덮개가 닫혀 있고 보면대에 놓인 악보 또한 덮여 있는 채다. 재목은 읽기 힘들지만 <인디아나 송>이라고 쓰여 있다. 철책의 자물쇠는 이중으로 잠겨 있기 때문에 정원으로 침입하거나 접근할 수 없고 악보의 제목을 읽을 수도 없다. 피아노 위에는 전등으로 변신한 중국 화병이 놓였고 전등갓은 초록색 비단으로 제작되었다. (P33)


부영사는 휘파람으로 <인디아나 송>을 부르며 걷는다. 그는 오솔길에서 나타난 샤를르 로제트와 마주친다. 샤를르 로제트는 마주친 거리가 너무 가까워 이번엔 그를 피하지 못한다. 두 남자는 몇 마디를 주고받는다. 부영사가 다음날 저녁에 대사관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받았노라고 알리자 샤를르 로제트는 서툴게 놀람을 감춘다. 아마 그가 캘커타에서 참석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회가 될 것이라고 부영사가 말하자 샤를르 로제트는 급한 일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뜬다. 그는 대사관 집무실 쪽으로 가던 길을 재촉한다.

장 마르크 드 H.가 이곳 갠지스 강변의 도시, 캘커타라 불리는 인도의 수도에 온지 5주째다. 인구수 500만이 아사자들 수 만큼이나 베일에 싸인 채 늘 똑같은 이 도시는 현재 여름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잠겨 있다.

그는 라호르에서 1년 반 동안 부영사로 재직하던 중, 캘커타 외교당국이 불미스럽다고 판단한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이곳으로 좌천된 터였다.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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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한다.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우린 이 이상 서로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요. 착각하지 말아요.”

“착각한 적 없소.”

“난 인생을 가볍게 살아요. -그녀는 손을 빼내려고 애쓴다- 난 그런 여자예요. 나한텐 모두가 옳죠, 모두가 완전히, 철저하게 옳아요.”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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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착각한 것 같아요. 말도 안 되지, 인도차이나에서 여기까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졌는데, 그 여자가 그 길을 어떻게 걸어왔겠어요?”

조지 크라운이 말한다.

“아시오? 피터가 그 사반나케트의 노래를 모티브로 소설을 쓰는 중인 거?”

피터 모르간이 결국 웃음을 보인다.

“인도의 고통에 여간 자극을 받아야 말이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가 안전하게 숨을 쉴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죠. 난 그 여자에 대해 상상한 것들을 메모해요.”

“왜 하필 그 여자죠?”

“그 여자한텐 더 이상 닥칠 일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문둥병조차.”

샤를르 로제트가 말한다.

“내가 보는 인도, 당신들이 보는 인도, 이런 인도, 저런 인도가 다 있죠. -그가 빙긋 미소 짓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하는 일은, 잘은 몰라도, 아시겠지만 나는 당신을 모르니까요, 이 모든 각자의 인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일 같군요.”

“부영사의 인도는 고통 받는 인도일까요?”

“아니, 당치 않아요.” (P176-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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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사가 샤를르 로제트에게서 시선을 뗀다. 발코니의 난간을 움켜쥔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그가 말한다.

"당신은 행운아요. 그녀를 울게 하다니."

"뭐라고요?"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의 하늘, 그건 바로 눈물이오."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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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로제트가 문손잡이를 잡으며, 갠지스 강에서 헤엄치는 미친 여자에 대해 던진 어색한 몇 마디로 뜨문뜨문 침묵이 끊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샤를르 로제트가 묻는다.

호기심이 이는 여자예요, 본 적 있으세요?

아니, 없소,

밤에 들리는 노래가 그 여자가 부르는 거라는 걸 아셨습니까?

아니, 모르오.

그 여자가 대부분의 시간을 이 부근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갠지스 강가에서 보낸다는 걸, 본능처럼 늘 백인들이 있는 곳으로 가되 바짝 다가가지는 않는다는 걸........ 아셨습니까?

마침내 부영사가 말한다.

“현재 삶 속의 죽음, 허나 결코 삶을 앗아가지 않는 죽음 말이오? 바로 그거요?”

바로 그거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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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모르간이 집필중인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말한다.

“그녀는 계속 걸어요, 난 특히 이 점에 중점을 둘 거예요. 그녀는 동일한 흔들림 -그녀 발걸음의 흔들림-의 탄성을 받아 계속되는, 무수한 다른 걸음들로 점철된 아주 기나긴 보행 그 자체죠. 그녀는 걸어요. 문장을 주워섬기며 걷고, 철로와 도로를 따라 걷고, 만달레이며 프롬이며 바세인 같은 지명들이 새겨져 땅에 꽂힌 마을 경계석들을 뒤로 휙휙 지나치며 걷죠. 그녀는 지는 해를 향해 돌면서 이 빛에 의지해 십년 동안 시암과 캄보디아와 비르마니를 지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마침내 캘커타에 이르러 멈추는 거지요.”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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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애 가끔씩 섬에도 와요, 안 마리를 쫓아온 것처럼, 백인들을 쫓아온 것처럼 말이오, 참 묘해요. 캘커타에 완전히 적응을 한 것 같다니까요, 내가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는데, 더러 밤에 갠지스 강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해요. 그 애가 부르는 그 노래, 그건 대체 무슨 노래요, 안 마리?”

잠들어 있는 안 마리 스트레테르는 대답할 수 없다.

조지 크라운이 말한다.

“그 애는 항상 노래하고 주절거려요. 정적 속에서 쓸모없는 말들을 늘어놓죠, 아마 그게 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봐야 할지도 몰라요. 그 애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도 즐거워하더라고요. 개 한 마리가 지나가도 깔깔거리죠. 밤에는 산책을 해요, 나라면, 만일 내가 책을 썼다면, 그 애한테 죄다 거꾸로 하게 했을 것 같아요. 나무 그늘이나 갠지스 강가의 이쪽저쪽에서 낮에 잠을 자게 하는 거죠. 그 애가 결정적으로 길을 잃는 곳은, 어떻게 길을 잃을지 알게 되는 곳은, 갠지스 강물 속이 될 거요. 자신이 누군지 잊고, X의 딸이었는지 Y의 딸이었는지도 더 이상 모르고, 더 이상 권태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곳 말이오. -조지 크라운이 웃는다- 하긴 우리도 원칙적으로는 바로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것 아니겠소? 절대, 절대로, 조금이라도 권태롭지 않으려고 말이오.”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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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 없이 웁니다. 그저 고통이 나를 관통하는 것 같다고 할까요. 누군가 울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바로 나인 것처럼요.

그녀는 그들, 캘커타의 남자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울었다면, 아니다. 그녀는 이제, 아직도 울기에는 너무 오래된 고통의 포로가 된 느낌을 준다.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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