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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13. 2024

파트릭 모디아노의 <한밤의 사고>

영화 <여행 잘 하세요Bon voyage>  2003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나치의 프랑스 파리 점령이 시작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한밤의 사고>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인공 '나'의 30년 전 교통사고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날 밤 사고 직후 가해자인 여자 운전자와 함께 병원으로 실려간 주인공은 그녀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지만, 마취제에 취해 정신을 잃고 만다. 마취에서 깨어난 그는 과도하게 많이 받은 사고 위로금을 돌려주기 위해 그녀를 찾아 나선다. 소설은 기억의 상실, '망각'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기억의 어긋남, '분절'에 관한 이야기다.     

오래 전 내가 막 성년이 될 무렵의 어느 날인가, 밤늦게 피라미드 광장을 가로질러 콩코르드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자동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처음에는 차에 가볍게 스친 줄 알았는데 뒤이어 발목에서 무릎까지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보도 바닥에 쓰러졌다. 그래도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차는 도로를 벗어나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광장에 있던 아케이드 중 하나에 부딪혔다. 차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나왔다. 호텔 입구 아케이드 아래에 있던 어떤 사람이 우리를 로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자와 내가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는 호텔 프런트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움푹 들어간 뺨과 광대뼈 그리고 이마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주 짧게 자른 갈색머리를 한 덩치 한 명이 홀로 들어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P9-10)    

 

다리를 건넌 차는 어떤 입구를 지나더니 시립병원 응급실 앞뜰에 멈춰 섰다. 우리는 여전히 그 남자와 대기실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의 정확한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우리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경찰인가? 왜? 그걸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기실의 강한 불빛 아래에서 억양 없는 목소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와 나는 접수실 앞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접수실 안에 있는 여자들 중 한 명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자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녀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가 다시 돌아와 우리에게서 좀 떨어져 앉았다. 맨발에 가죽조끼와 파자마 같은 바지를 입은 적갈색 머리칼의 남자가 끊임없이 대기실 안을 서성거리며 접수실 여자들을 큰 소리로 불러댔다.          (P12-13)    

 

몇 번 눈을 떠보려 했지만 다시금 몽롱한 상태로 빠져버렸다. 어렴풋이 사고가 기억났고, 그녀가 여전히 내 옆 침대에 누워 있는지 돌아보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힘이 하나도 없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상태는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투박하고 검은 부리망도 기억해냈다. 내가 그런 상태에 빠진 것은 에테르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배영 자세를 취하고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커다란 용의자 사진처럼 그녀의 얼굴이 세세하게 떠올랐다. 반듯한 아치형 눈썹, 맑은 눈, 금발 머리, 이마, 광대뼈 그리고 움푹 팬 볼에 난 상처들, 비몽사몽 헤매는 와중에 갈색 덩치는 사진을 내밀며 내게 ‘혹시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는 말하는 시계처럼 금속성을 띤 목소리로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나는 그렇다, 그 사람을 안다고 대답했다. 아니면 그와 닮은 사람을 마주친 적이 있다고, 이제 왼발에 통증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고무창을 댄 질긴 가죽으로 된 낡은 단화를 신고 있었다. 발을 집어넣는 입구가 너무 좁고 발목이 아파서 끌로 윗부분을 찢어놓은 신발이었다. 난 내가 잃어버린 신발, 보도 한가운데에 놓고 온 그 신발을 생각했다.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오래 전 차에 치인 개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고, 집 앞 비탈진 거리도 눈앞에 다시 보였다. 개는 종종 집에서 도망쳐 거리 아래쪽에 있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갔다. 나는 개가 길을 잃을까 걱정되어 내 방 창문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저녁때가 되면 자주 그랬고, 그럴 때마다 개는 느릿느릿 거리를 다시 걸어 올라왔다. 그런데 왜 그 여자가 내 어린 시절 잠시 살던 그 집과 결부되어 떠오른 것이었을까?          (P15-16)   

  

나는 그에게 어젯밤의 그 여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보고서’를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도 그 사고는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신이 보기에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며 나에게도 그랬으면 하고 진정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는 차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걷기가 너무 힘든지, 또 어디에 ‘내려주기’를 바라는지 차갑게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타더니, 차 문을 쾅 닫았고, 차는 제방도로로 향했다.            (P24-25)     

나는 한순간 시간이 사라져버려 내가 다시 엘렌 나바신과 나란히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자 엄청난 상실감이 나를 엄습했다.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자 나는 이 지하철이 대로와 줄지어 늘어선 건물들이 내려다보이는 길을 지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노선이 다시 지하로 들어가자 어지럼증과 결핍감을 느끼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질서로, 매일 계속되어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단조로움으로 되돌아오리라. 그날 저녁 지하철 객차 안 우리 두 사람 주위에는 거의 아무도 없었다. 러시아워를 막 넘긴 시각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왜 부비에르의 모임에 참석하는지 물었다. 그를 알지는 못하지만 인도 음악에 관련된 글 하나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지평을 열어주었노라고. 그렇지만 사람 자체는 조금 실망스러웠고 그의 ‘가르침’도 그 글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그 글을 읽게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대체 어떻게 해서 당페르 로슈로의 그룹에 끼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죠. 부비에르 박사라는 사람에게 호기심이 있어서요. 그 사람에 대해 좀더 알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부비에르 박사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식으로 사는 거죠?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스스로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는 결혼한 적이 없고, 몇몇 여학생들에게 관심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정말 관심을 품고 있을까? 그들은 다 똑같이 생기지 않았는가, 창백하고, 금발이며, 기독교를 믿는 집안의 딸들처럼 신비주의 신앙심이 느껴지는 근엄한 분위기 하며, 처음에는 그게 거북했단다. 회합중에 몇몇 여학생은 종종 그녀를 위아래로 홅어보는데, 그녀들 부류에는 속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은 서로 이야기가 잘 통하는군요.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나 역시 그 어떤 부류와도 어울린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녀도 나처럼 일가붙이 하나없이 삶의 방향을 잡아줄 축을 찾으려 애쓰며 때때로 부비에르 박사 같은 사람들과 접하는, 파리에서 그렇게 길을 잃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부비에르에 관한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 둘 다 무척 놀란 적이 있었다.                  (P49-50)     

내가 차에 치였던 그날 밤 혹시 엘렌 나바신이 기차를 타는 파리 북역까지 그녀를 데려다주고 오는 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망각은 결국 우리 생애의 중요한 부분들 전체를 잠식하고 때로는 그 사이에 낀 아주 작은 시퀀스들까지도 잠식한다. 그리하여 낡은 영화에서는 필름에 낀 곰팡이들이 시간을 건너뛰게 하기도 하고, 여러 달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던 두 사건이 같은 날 심지어 동시에 일어난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커먼 구멍 한가운데서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급박하게 연속되거나, 기억 속에서 혼돈스럽게 뒤엉키는 토막 난 이미지들이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최소한의 시간대라도 설정할 수 있겠는가? 결국은 현기증이 난다.           (P80)     


카운터 뒤에서 지배인이 여전히 약간의 질책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실례를 한 모양입니다. 혹시 그분 이름을 아시나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마지못한 듯 “솔리에르요.” 하고 털어놓았다. 솔리에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그리 나쁘게 반응하지 않은 걸 보니 내가 운이 좋았다고도 했다. 대체 어떤 태도요? 요전 날 밤 내가 차에 치였는데 그래서 그 운전자가 누군지 확인해서 찾아내려고 했을 뿐이에요.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 아닌가요? 내 말이 그에게 먹혀든 것 같았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대체 솔리에르란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의 미소가 더 활짝 피어났다. 내 질문이 재미있게 들린 듯 싶었다. “성가대 소년은 아니죠. 그럼요. 성가대 소년은 절대 아니죠.....” 꽁무니를 빼는 그의 어조에서 나는 더는 알아낼 수 없으리라 느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인가요?” “예전에는 살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 같은데......” “결혼은 했나요?” “그거야 제가 말씀드릴 수 없지요.”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P104)     

클로즈리 드 파시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여름 어느 날 저녁 드레세르 대로에서 택시를 탈 때 보니 그 자리에 은행이 들어선 것 같았다. 하지만 앵무새들은 매우 오래 산다. 어쩌면 삼십년도 더 흐른 지금도 그 앵무새는 파리 시내의 다른 구역에 살고 있을지 모르며, 왁자지껄한 또다른 어느 카페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진정 귀 기울여주지도 않는데도 내가 말했던 문장을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충실한 것은 앵무새들밖에 없다.          (P112)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긴장을 풀었다. 예전 어느 날 밤 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합니다. 지금까지도 그 운전자가 살아있다는 어떤 기별도 준 적이 없어서 직접 그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전자는 여자예요. 맞아요, 알보니 스퀘어. 물빛 푸른색 피아트였죠. 그 여자도 확실히 얼굴을 다쳤어요. 그리고 피아트 차도 약간 부서졌고요.               (P114)     

비가 오던 어느 날 오후 라탱 구역에서 회색 개버딘 코트에 얼굴 가장자리에만 수염이 난 사내가 나누어 주던 전단지가 생각났다. 그것은 젊음에 관한 설문지였다. 그런데 그 문항들이 내겐 기이하게 보였다. 당신이 알고 있는 가족 구조를 말해주시겠습니까?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뚜렷한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습니까? 나는 희미하다고 대답했다. 당신이 좋은 아들(혹은 딸)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한 번도 아들 구실을 한 적이 없었다. 이제껏 받은 학업을 통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고 또 사회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합니까? 학력 없음. 부모 없음. 사회 환경 없음. 혁명을 하는 것과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합니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것. 심오한 고통과 가벼운 행복 중, 당신은 어느 것을 선호합니까? 가벼운 행복.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습니까 아니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기를 바랍니까?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고 싶다. 그 두 단어가 나를 몽상에 잠기게 했다. 대관절 잃어버린 조화란 무엇이란 말인가? 프르미에 호텔 방에서 내 존재의 근원 없음과 유년 시절의 무질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정점, 무언가 마음이 놓이는 것, 나로 하여금 다시 발을 디딜 수 있게 도와줄 어떤 풍경, 바로 그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생의 온전한 한 부분, 유사(流砂) 아래에는 단단한 바탕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난 물빛 푸른색 피아트와 그 여자 운전자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P120-121)          

개가 앞장서서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잘 쫓아오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고 하더니, 이제는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개는 내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개와 보조를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침묵을 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의 포석 사이로 풀이 자라고 있는 듯했다. 이제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도 부비에르가 ‘영원한 회귀’라고 말한 것이 그것인 모양이었다. 건물들의 벽면, 나무들, 가로등의 깜빡거리는 불빛은 내가 한 번도 알지 못했던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트로카데로의 전망대로 접어들자 개는 잠시 망설였다. 계속 곧장 가고 싶은 듯했다. 그러더니 마침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래의 공원들과 인광처럼 물이 반짝이는 거대한 분수대와, 센 강 건너편의 강변을 따라 서 있는, 샹 드 마르스 주변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는 저 아래 어느 방에 혹은, 막 문을 닫기 전의 어느 카페에 네온 불빛을 받으며 홀로 앉아 서류들을 들추고 있을 아버지를 상상했다. 어쩌면 운 좋게 아버지를 다시 한번 만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시간은 소멸된 후였다. 그 독퇴르 퀴르젠 거리에서부터 개가 과거 밑바닥에서 솟아나왔기 때문이었다. 개가 더는 나와 함께할 수 없다는 듯, 그러다간 약속 시간에 늦겠다는 듯 내게 뒷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개의 뒤를 쫓았다. 개는 인류박물관 정면을 따라 걸어서 비뇌즈 가로 접어들었다. 나는 한 번도 그 길로 가본 적이 없었다. 개가 나를 그곳으로 이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침내 목적지에 이르러 잘 알고 있는 어딘가로 되돌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창문들은 캄캄했고 나는 어둑어둑한 곳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놓칠까봐 나는 개에게 바싹 붙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내 발소리가 들렸다. 길은 거의 직각으로 꺾여서 나는 그 길이 다시 클로즈리 드 파시와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클로즈리 드 파시에는 이 시각쯤 노란 새장 속의 앵무새가 별 소용도 없이 ‘물빛 푸른색 피아트, 물빛 푸른색 피아트’라는 말을 반복할 것이고 여주인과 친구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을 것이다. 길모퉁이를 돌자 불 꺼진 간판이 나타났다. 레스토랑 아니, 어쩌면 바일지도 모르는 곳인데 닫혀 있었다. 일요일이었다.                (P125-126)     

바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고, 그녀는 짙은 갈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키나 머리 모양새가 기수 같은 젊은 남자가 테이블을 치우고 있었다. 그가 나를 훑어보며 물었다. 

“무얼 드릴까요?”

설명하자면 너무 길었다. 나는 바로 걸어가 조그만 간의의자에 앉는 대신 그녀 뒤에 가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썹 바로 위로 커다랗게 긁힌 상처가 이마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자클린 보제르장 씨죠?”

질문을 던질 때의 무심한 목소리에 나도 놀랐다. 심지어 누군가 나 대신 질문을 던진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내 반코트의 얼룩에서 머뭇거리던 시선은 좀더 아래로 내려가 붕대가 밖으로 삐져나온 구두로 떨어졌다. 

“우리는 이미 피라미드 광장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내 목소리는 더 또렷해지고 무심하게 들렸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그래요. 그래...... 잘 기억해요....... 피라미드 광장........”                 (P134)     

“예전 그날 밤, 솔리에르 씨와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레지나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었어요..... 그런데 내가 도착할 무렵에....... 우리의........ 사고가 난 거예요.........”   

그녀는 사고라는 말을 할 때 머뭇거렸다. 그녀는 내 왼손을 보고 있었다. 차에 치였을 때 난 왼 손등에 찰과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그 상처는 거의 아물고 있었다. 손에는 아예 붕대를 감지도 않았다.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라면, 솔리에르 씨가 때맞추어 도착한 거군요?”

그날 밤 그는 어두운 색의 외투를 걸친 채 느린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가 입가에 담배를 물고 있지나 않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이 아가씨는 그와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 역시 모두 비스비슷하게 생기고 대리석이나 조명, 목제 가구와 긴 의자들이 모조품인 호텔들의 로비에서 아버지와 만날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열차가 떠나고 다른 열차가 오기까지의 역 대합실이나, 심문이 있기 전의 경찰서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 사람, 성가대 소년처럼 순진하진 않던데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누가요?”

“솔리에르요.”                       (P140-141)     

나는 그녀에게 일상생활을 할 때 솔리에르라고 불리우는 그 모로스키라는 자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었다. 

“나는 더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한 데요.”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갑작스럽게 말했다. 

“천만에, 아무것도 숨기는 건 없어...... 삶이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해.....”

그녀는 처음으로 내게 말을 놓았다. 그녀는 내 팔짱을 꼈고 우리는 해양박물관 건물을 따라 걸었다. 대기는 여전히 차갑고 호흡하기에 가벼웠다. 거리를 가로지르기 전에 나는 보도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건물 앞에 세워진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 내가 혼자 이곳에 왔을 때, 그 건물은 버려진 건물처럼 보였고 거리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처럼 황량해 보였다. 

그녀가 또다시 자신이 사는 건물에는 널따란 테라스가 있고 파리 전체가 내려다보인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놓였고 그녀는 내 귀에 대고 한마디 말을 속삭였다. 자동 점등 램프가 꺼지고 이제 우리 위로는 야등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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