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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19. 2024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2004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2004년 브라질의 감독 월터 살레스가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가 쓴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르네스트 게바라)과 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알베르토 그라나도)가 출연했다. 구스타보 산타올라야가 음악을 맡은 이 영화는 2005년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체 게바라의 드라마틱한 삶이 있기 전 평범한 청년이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제 한 학기만 졸업하면 의사가 되는 체 게바라는 엉뚱한 생화학도이자 마음이 맞는 친구인 알베르토와 함께 남미대륙을 횡단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것도 모터싸이클 한 대에 몸을 싣고. 때문에 영화는 남미 대륙의 아름다운 풍광을 구석구석 놓치지 않는다. 혁명전사의 이미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호기심 많은 두 청년의 버디 무비이자 로드 무비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유혹도 뿌리치고 떠난 여행. 젊은 패기 하나만으로 드넓은 남미 대륙을 향해 나아간다.


두 눈을 뜨고 죽은 체의 모습.

체는 영혼의 순례자였다. 사랑이 담긴 희망을 내보였고,

투쟁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체가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단언했을 대 이것은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했다.

그는 바로 휴머니즘의 전도자였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다”고 엘뤼아르는 말했다.

별이 있는 꿈은 깨어 있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었다.....

이 책이 씌어지고 난 뒤 1997년 10월 17일, 죽은 지 30년 만에 

체 게바라는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P27) 

    

한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폭넓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이 책에서 내가 특히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의 온화한 인간성이었다. 사실 이 책을 탈고하기까지는 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지난 시절의 좌파들은 --‘체 게바라’에 대한 생각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아르헨티나의 전사들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곤— 이 인물이 자기들로부터 이탈되는 걸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한 일이었다....

-작가(장 코르미에 에이에라가기벨) 서문 중                (P37)

     

1928년 6월 14일,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에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일 ‘체’라고 불리게 될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태어났다. 골드러시 무렵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났던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와 바스크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바스크와 아일랜드라는 유난히 고집 세고 개성 강한 혈통이 이 유서 깊은 집안 출신의 아이에게 흐르고 있었다. 토목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던 아버지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는 태곳적의 신비를 간직한 원시림 지대로 파과과이와 인접한 알토파라냐 개발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테테’라고 불렸던 에르네스토의 천식 때문에 게바라 부부는 결국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되돌아갔다. 에르네스토는 길거리에서 사귄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 에르네스토는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그렇단다. 가난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 대항하여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이렇듯 ‘어린 체’는 일찌감치 인디오 친구들과 나누며 사는 법을 배우며 자라고 있었다.             (P49) 

    

“그런데 저 십자가는 뭐죠?” 그러자 그 사내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인디오들을 현혹시키려고 가톨릭 신부가 꽂아둔 거죠. 아파체타와 십자가를 종교적으로 혼합시킨 것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저 십자가를 꽂아놓은 신부는 일단 아파체타의 힘을 인정한 뒤 자신의 신자들에게 아파체타도 가톨릭에 복종한다고 믿게 할 심산이었던 거였겠죠. 이렇게 하면 그 신부도 자신의 교구가 넓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거고 말입니다! 하지만 인디오들은 잉카의 신들인 파차마마와 비라코차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선한 신의 대리인이라는 사제가 행하는 이런 식의 기만적인 수법에 에르네스토는 큰 충격을 받았다.                (P93)     


알베르토는 에르네스토가 희생자들의 방에서 했던 얘기를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열심히 입장을 설명하자 겨우 열다섯 살밖에 안 되었던 에르네스토가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더러 경찰들한테 얻어맞으러 거리로 뛰쳐나가란 말이지? 무기가 있다면 모를까, 나는 빈손으로는 행진하지 않을 거야.’ 에르네스토는 훨씬 나중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다시 한 적이 있었다. “반동적인 폭력에는 혁명의 힘으로 맞서는 수밖에 없다!”라고.          (P106)     


정치라는 장기판에서 에르네스토의 말들이 아직은 제자리를 찾고 있지 못했다. 다만 그는 차츰 이론가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에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싸울 태세가 되어 있는 혁명가로서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P139)     


머지않아 에르네스코는 첫 번째 부인이 될 일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만나게 된다. 페루의 리마에서 1925년 3월 21일에 태어난 일다는 인디오의 핏줄을 이어받은 탓에 눈두덩이 두툼했다. 이것을 보고 친구들은 ‘치나’라고 부르기도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일찌감치 아프리스타 청년동맹에 가입했다. 두뇌가 뛰어난데다 빼어난 연설가였던 그녀는 CCN(국민행정위원회)의 가장 젊은 멤버로서 지도위원으로 일했다.               (P145)   

  

두 사람이 모두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고리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좋아했다. 에르네스토는 일다가 빌려 준 크로포트킨의 <어느 혁명가의 추억>이라는 작품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들의 토론은 거창한 질문들, 이를테면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류를 위한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자본주의의 종말은 언제쯤일까?’ 등으로 모아졌다. 소유의 기원이라든가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빠트릴 수 없는 논쟁 주제였다. 에르네스토는 자신이 닥치는 대로 포식하듯 읽었던 책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얘기했다. 그는 자기가 읽었던 살가리, 쥘 베른, 스티븐슨 등에 대한 소감들을 기억나는 대로 들려주곤 했다. 한편 일다는 그에게 마오쩌둥의 <새로운 중국>을 빌려주는 등 그의 정치학습을 도왔다. <새로운 중국>에 자극받은 에르네스트는 일다에게 그들만의 대장정에 동참하자고 제의한다.            (P146)


멕시코의 아르헨티나인들 사이에서 ‘체’라는 이름이 앞질러 알려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에르네스토라는 이름보다는 엘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 우선 떠올려졌다. ‘e’모음에 강세를 둔 이 음절은 원래 아르헨티나에서는 말을 시작할 때나 강조할 때 쓰는 일종의 감탄사였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che)’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P148)     


“우리들은 인간의 사고가 진보한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죠”라고 일다는 당시의 분위기를 얘기했다. “우리는 유물론과, 개인을 사회의 한 요소로 파악하는 사회주의적 관점에 동의하고 있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를 위한 사회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포기해야 된다는 데도 생각이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승리자가 될 개인에게 모든 게 영향을 미칠테니까요.”                        (P156)   

  

의사이며 고고학자, 작가, 언론인, 사진사, 시인, 체스 선수였고, 거기에 운동까지 열심히 했던 그는 머지않아 게릴라, 국립은행의 총재, 장관, 그리고 대사직까지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체가 다면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의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나’는 집요하고 어김없이 바로 ‘우리’로 향하고 있었다. 즉, 그는 각각의 면이 다른 쪽을 보고 있다가도 결국은 한데로 모이게 되는 만화경 같은 인물이었다.               (P171)


감옥 안에서 단식 투쟁을 전개할 무렵, 에르네스토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저는 예수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닿는 한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싸울 겁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대로도 하지 않을 겁니다.’                (P196) 

    

(에르네스토와 상봉한 후) 일다는 딸과 함께 페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M7-26 지지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한 후, 1959년 1월에야 쿠바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일다에게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에르네스토의 재혼이라는..... 그녀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그러나 혁명과 딸아이가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결국 두 사람은 1959년 5월 22일, 정식으로 이혼한 뒤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았다. 일다는 나중에 쿠바 출신의 화가인 미겔닌 차콘과 재혼했고, 1974년 2월 11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P206)    

 

에르네스코 게바라도 두 번의 (쿠바 정부군) 포탄 세례 속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날의 경험을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 상자 두 개를 한꺼번에 옮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나는 그 앞에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약품인가, 아니면 탄약인가? 나는 과연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결국 나는 탄약상자를 선택했다.’           (P215)     

그러나 체는 쿠바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며 무력에 목말라하지도 않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왔지만 그는 자신을 세계의 시민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런 만큼 범세계주의자로서 싸우고 다른 인간들의 투쟁을 격려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 여겼다. 그는 나름대로 게릴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게릴라란 흔히 여겨지듯 소규모 전투를 벌이는, 강력한 군대에 대항하는 소수 과격파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게릴라전이란 압제자에 대항하는 전체 민중의 싸움이다. 게릴라는 민중 군대의 전위에 지나지 않는다. 작게는 어느 한 지역, 크게는 어느 한 나라에 사는 모든 주민들이 형성한 군대의 주력이 게릴라이다. 아무리 심한 탄압 아래서도 소멸되지 않고 언젠가는 이기게 되어 있는 게릴라의 힘도 여기서 나온다. 일반 민중이야말로 게릴라전의 바탕이자 본질이다.”                  (P316)     


체가 직접 지휘했던 미나스델프리오와 히바코아 전투 역시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체는 ‘생각하는 인간으로 행동하되 행동하는 인간으로 생각하라’는 베르그송의 멋진 말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P341)     

1월 3일, 땅거미가 질 무렵, 마침내 아바나에 입성한 체는 카밀로와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그들은 승리한 것읻. 아바나 입성 몇 시간 후 체는 총 한 방도 쏘지 않고 카바나 병영을 항복시켰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던, 그란마호로부터의 상륙을 감행한 지 25개월 만인 1959년 1월 2일부터 쿠바 섬은 축제에 빠져들었다. 체로서는 과테말라 시절, 혁명의 견습생이었을 무렵부터 부단히 들어왔던 희망의 도시 아바나에 발을 디딘 뜻 깊은 순간이었다.        (P425)    

 

“우리 시대가 당면한 문제는, 기층 민중을 헐벗게 만드는 자본주의와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할지 몰라도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 중에서 택일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제물로 삼는다. 한편 공산국가는 자유에 관한 한 전체주의적인 개념 때문에 인간의 권리를 회생시킨다. 우리가 그 어느 것도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혁명은 쿠바만의 주체적인 혁명이어야 한다”라고 카스트로는 썼다.            (P441)        


체와 열정적인 대화를 나눈 후 사르트르

“파리에서 나는 쿠바혁명의 목표가 사회주의의 건설인지 아닌지 명확히 대답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쿠바인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했다. 이제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 혁명의 근원은 바로 국민에게 결핍된 것을 메우려는 데 있었지, 선험적인 이데올로기를 빌려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P469)      


‘여러분은 사탕수수가 쿠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것입니다. 멕시코의 면화, 베네수엘라의 석유, 볼리비아의 주석, 그리고 칠레의 구리, 아르헨티나의 목축과 밀, 그리고 브라질의 커피,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단일생산을 하는 나라이며 우리 모두는 단일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내가 여러분에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외부의 제국주의의 압박과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꼭두각시들의 압력에 처한 쿠바의 현 상황에서 우리 민중은 총을 통한 목소리 외에 어떤 다른 출구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자본은 자신의 권리를 깨닫고 있는 무장한 민중들입니다. 우리는 이 자본으로 우리의 토지개혁을 실행할 것이며, 그 힘을 강화할 추진력으로 산업화의 길에 진입할 것입니다.’                       (P484)     

그는 쿠바혁명의 시대적 이념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마르크스의 가치는 그가 사회사상가에 급격한 질적 변혁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해석하였고 그 역동성을 이해했으며 미래를 내다보았다. 그가 탁월하였다는 것은, 학문적 의무가 정지할 수 있었을 그 지점에서 다만 예측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혁명적 개념을 세웠다는 점에서이다. “자연을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변형시켜야 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노예나 도구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의도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켜 재조직해야 한다. 그 순간부터 마르크스는 과거를 고정시키려는 특별한 의도를 갖는 일체의 것을 적대시하는 입장 속에 자신을 규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아테네 귀족계층의 노예제 지지자들인 플라톤과 그 제자들에 의해 저서가 불태워진 데모스테네스의 경우와 견줄 만하다.’.... ‘우리, 혁명의 전사들은 학자로서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법칙들을 존중하며, 낡은 권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민중에 기대고 민중의 행복을 우리 투쟁의 바탕으로 삼으면서 과학자 마르크스의 예지를 실현시키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법칙이 쿠바혁명의 과정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P492)     

라반데이라의 부연 설명이다. “놀라운 것은 체의 발언 —비관론자의 색채가 너무도 짙게 배어나오는— 이 끝없이 낙관적인 피델과는 무척 대조가 된다는 것이다. 체는 전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 야욕을 피압박자들이 저지하지 못할 때에 발생할 사태를 심히 어둡게 내다보고 있었다. 체는 ‘사회주의’ 진영의 열세를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미약한 경제력 뿐만은 아니었다. 소련과 동부유럽 정권들의 부패를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사상의 순수성에서 볼 때도 소련은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난날의 광채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는 한때 번성했던 그 열린 체계를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들의 사상은 경직되어 갔으며, 모스크바의 늙은 정치가들에게 이끌려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체는 고사 상태에 있는 혁명사상이 또 다른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봉기는 한시가 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536)  

   

체와 피델은 꼬박 이틀 낮 이틀 밤 동안 상대의 입장을 알아보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우정만큼이나 두 사람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었던 ‘혁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열정이 체를 끈질기게 붙들어 매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두 사람은 혁명을 대륙 전체의 차원에서 보았으며, 남아메리카 전체를 하나로 묶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는 쿠바에 머물 수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쿠바에 머물 수 없었던 것은 이미 쿠바의 최대 우방인 모스크바의 심기를 건드린 마당에 자신의 존재가 피델에게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쿠바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사이에 맺어졌던 도의적인 계약 중 다른 하늘 아래에서 투쟁하기 위해 다시 떠날 수 있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친구가 저개발에 대해 새로운 지정학적 시작을 갖게 되었으며 차츰 제3세계권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체로서는 카스트로에게 통보도 없이 일방적으로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켜버린 러시아인들의 행위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하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날 때가 왔다는 판단이 들었다.                     (P545)   

  

‘우스꽝스럽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이 얘기만은 하고 싶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 이 특질이 결여된 진정한 혁명가를 상상할 수는 없다. 정치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점들 중 하나도 이것이다. 냉정한 정신과 열정적인 정신을 조화시킬 줄 알아야 하며, 눈 하나 꿈쩍 않고 고통스런 결정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전위 혁명가들은 민중에 대한 이런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혁명, 혁명정당의 이념적 동인인 혁명은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중단시킬 수 없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전 세계에 걸쳐 혁명이 구축되기까지는...’                   (P547)    

 

1965년 볼리비아로 가기 전 썼던 편지들....

부모님께,

사랑하는 두 분

다시 한번 나의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해야 할 때가 왔음을 느낍니다. 칼과 방패를 챙겨 들고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부모님께 작별의 편지를 썼던 것이 어느 덧 십 년이 지났군요. 혹시 기억하고 계시다면 제가 훌륭한 군인이자 좋은 의사가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그러나 이제 훌륭한 의사는 더는 저의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썩 형편없는 군인은 아니기 때문이죠.

본질적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의 마르크스 주의가 더욱 깊어졌고 정제되었다는 점을 저보다 더욱 자각하고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곤 말입니다. 저는 해방되고자 하는 민중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바로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믿으며 이 신념을 일관되게 따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모한 모험가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물론 저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태의 모험가지요. 바로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모험가 말입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길 기대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두 분에게 마지막으로 포옹을 보내는 셈이지요. 

생각해보면 두 분을 너무너무 사랑하면서도 저는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질 못했습니다. 저는 제 행동에 지나치게 완강했고 더러는 그런 저를 이해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사실 저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만은 절 믿어주십시오.

이제 예술가의 희열로서 연마한 제 의지가 무뎌진 다리와 지친 폐를 지탱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까지 나아가겠습니다.

가끔은 이 20세기의 난폭한 모험가인 이 못난 아들을 기억해 주시겠지요. 셀리아와 로베르토, 후안 마르틴과 파토틴, 그리고 베이트리스 이모에게 키스를 보냅니다. 모두를 사랑합니다.

-방자하고 고집 센 아들, 에르네스토-                     (P553)  

    

다음은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사랑하는 일디타, 알레이티타, 카밀로, 셀리아 그리고 에르네스토에게. 

너희들이 이 편지를 읽게 될 즈음엔 나는 더 너희들과 함께 있지 못할 게다. 

너희들은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어린 꼬마들은 이내 나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희들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단다.

아빠는 너희들이 훌륭한 혁명가로 자라기를 바란단다.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술을 정복하기 위해 많이 공부하여라. 그리고 혁명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려 주기 바란다.

특히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늘 너희들을 다시 보길 바라고 있으마, 아주 커다랗고 힘찬 키스를 보낸다.

-아빠가-                  (P558)      


사랑하는 일디타에게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너는 아주 나중에야 편지를 받아보게 되겠구나. 어쨌든 나는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네가 알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네 생일, 즐겁게 보내길 바란다. 너도 어느덧 숙녀가 다 되었구나.

그러니 어린아이에게 하듯 우스갯소리나 하고 거짓말이나 하는 편지는 쓸 수 없겠지. 아빠가 아주 멀리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네게서 떨어져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앞으로도 내 모든 힘을 바쳐서 적들과 싸울 거라는 사실을 너도 이젠 알아야 한단다. 이곳에서 내가 아주아주 하찮은 일을 맡았다고 해도 그건 아주 소중한 거야. 네가 항상 아빠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너를 자랑스러워하듯이 말이야.

우리 앞에는 끝없는 투쟁이 있음을 기억하여라.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너 역시 투쟁의 대열에 끼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될 때까지 가장 혁명적인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여라. 이 말은 네 나이에는 많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단다. 가능하다면 정의를 지지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라. 나는 네 나이에 그러지를 못했단다. 그 시대에는 인간의 적이 인간이었다. 그러니 시대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동생들이 바르게 자라고 있는지 잘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고 그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엄마를 꼭 안아주렴. 그러면 엄마도 너를 더 꼭 끌어안고 키스를 해줄 거다. 엄마의 키스가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시간들을 채워줄 거야.

-아빠가-                     (P574)      

군인들이 일제 사격을 시작하고, 체는 오른쪽 장딴지 아래에 총을 맞는다. 응사를 하지만 그의 M-1 소총에 총알이 관통하면서 고장이 난다. 체는 얼른 연발 권총을 빼들지만 총알이 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거라고는 단검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고원까지 간다. 그때 정찰 중인 군인들 셋은 아래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 하나가 흔들리고 절뚝거리며 다른 그림자에 의존하고 있다. 총을 지팡이 삼아 땅을 짚으며 기어오르고 있다. 그림자는 여전히 흐릿하다. 체 게바라 대장이 다가온다. 하지만 군인들은 아지 끄가 게바라라는 것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쿠바인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게릴라 영웅,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혁명가인 그가 곧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P678)  

    

체의 순수성,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꿈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코르다의 사진을 통해 널리 알려진 그의 매력은 무기력해진 유럽의 젊은이들을 일깨웠고, 1968년 5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바다와 대지 위에 체라는 혁명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씌어진 깃발이 펄럭였다.          (P706)   

  

사람들은 더러 체를 자유분방한 무정부주의자라고도 하지만 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영혼의 순례자였다. 사랑이 담긴 희망을 내보였고, 타인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격렬한 의미를 가지고 타인의 삶에 관련된 것들에 무한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기위해 그는 투쟁을 선택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가 ”모든 진실된 인간은 다른 사람의 뺨이 자신의 뺨에 닿는 것을 느껴야 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체는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함께 했다.... 별이 있는 꿈은 깨어있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체는 한 번도 눈을 감아본 적이 없었다....                 (P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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