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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15. 2024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영화 <리틀 부다>  1993년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1877~1962)의 1922년 작품 ‘싯다르타’(Siddhartha)는 불교를 소재로 한 종교적 성장소설이며 실존 인물 부처를 모티브로 했다. 싯다르타는 ‘목적을 달성한 자’를 뜻하는 부처의 어릴 적 이름이다. 소설 속 싯다르타는 카스트 계급에서 최고층인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출중한 인물로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로 자란다. 그러나 그는 늘 내면의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느낀다. 진정한 업을 씻으면 ‘아트만’, 즉 진정한 불변의 자아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지만, 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출가를 결심하고 더 큰 가르침을 얻기 위해 길을 나선다. 

    

영화 <리틀 부다>는 1993년에 개봉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합작 영화로 1명의 미국 백인 아이와 2명의 부탄 아이로 모두 환생한 승려를 다룬 영화. 싯탈다 역은 키아누 리브스가 맡았고 감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이다.     

 

집의 응달에서, 가까이에 나룻배들이 떠 있는 강가 양지 바른 곳에서, 사리수의 그늘에서 무화과나무의 그늘에서, 바라문의 아름다운 아들이자 젊은 눈매인 싯다르타는 역시 바라문의 아들인 친구 고빈다와 함께 자라났다..... 이미 오래전부터 싯다르타는 현인들의 대화에 참여하였고, 고빈다와 더불어 논쟁술을 익혔으며, 고빈다와 함께 깊이 숙고하는 기술과 침잠하는 자세를 익혔다...... 벌써 그는 자기 존재의 내면 속에 삼라만상과 하나이자 불멸의 존재인 아트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P11-12)  

   

하지만 누구보다 더 그를 사랑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였다. 그는 싯다르타의 눈매와 고운 목소리를 사랑하였으며, 그는 싯다르타의 걸음걸이와 완벽하게 예의를 갖춘 행동거지를 사랑하였으며, 그는 싯다르카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가 가장 많이 사랑한 것은 무엇보다고 싯다르타의 정신, 고매하고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상, 불타는 듯한 의지, 그리고 드높은 소명감이었다.              (P13)      


하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딱 한가지 중요한 것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          (P16)    

 

그러면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과연 행복하게 살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던가, 아니면 아버지도 단지 구도자이자 목말라하는 자에 지나지 않은가?        (P17)   

  

무엇 때문에,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아버지가 날이면 날마다 죄업을 씻어 내어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시키려고 애써야만 하며,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그 일을 새삼스럽게 반복하여야만 하였을까? 아버지의 내면에는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근원적인 샘물이 흐르지 않는가? 그것을, 그러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근원적인 샘물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바로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것은 탐색하는 것이요, 우회하는 길이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데 불과하다. 싯다르타의 생각들은 이러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그의 목마름이었고, 이것이 그의 고뇌였다.                (P20)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고, 소원으로부터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벗어나고, 기쁨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는 일이었다.            (P28)     


친구, 나는 그것을 아마 창녀들이 모여 사는 거리의 술집에서나, 마부들과 주사위 도박꾼들한테서도 배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P31)     


싯다르타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이 나지막하게 말하였다. “침잠이란 것이 무엇인가?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식이란 무엇인가? 호흡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 상태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이야...... 그러니까 비아(非我)의 상태에 잠시 머무르는 경지와 똑같은 그런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이야기야, 고빈다. 그게 그렇다구.”        (P32)   

  

사문들과 함께 지내면서 싯다르타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많은 길들을 가는 법을 배웠다. 그는 고통을 통하여, 자발적으로 고뇌를 감내함으로써, 그리고 고통과 굶주림과 갈증과 피로와 권태를 극복함으로써 자기 초탈의 길을 갔다. 그는 명상을 함으로써, 그리고 온갖 사념들로부터 생기는 감각적인 사고를 마음으로부터 비움으로써 자기 초탈의 길을 갔다. 그리고 그 밖의 이런저런 길들을 가는 법들을 배웠다. 수천 번이나 그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떠났으며,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비아(非我)의 경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러한 길들은 비록 자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통하기는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자아로 되돌아오는 그런 길들이었다.               (P32)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였던 우리가, 혹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중략) 우리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거야. 그 바퀴는 둥근 원이 아니라 나선형이고, 우리는 이미 많은 단계들을 거쳐온거야.          (P33)     


고타마라고 불리는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세존, 부처라는 것이었다. 그는 소유물도, 고향도, 아내도 없이, 고행자들이 입는 누런 적삼을 걸쳤지만 밝게 빛나는 이마에다 기쁨에 넘치는 복된자의 모습으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제자들이 에워싼 가운데, 설법을 행한다는 것이었다.           (P36)  

   

잊지 말게나, 고빈다. 자네가 이제 그 부처님의 사문에 속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자네는 고향과 부모를 포기하였음을, 자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였음을, 우정을 포기하였음을 선포한거야. 그 가르침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며, 그 세존께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네. 자네 스스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였고, 고빈다. 내일 나는 자네를 떠날 거야.            (P50-51)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은,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던 도중에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침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중략)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각하고 깨달았던 점입니다.                (P55)      


<한 인간을> 싯다르타는 생각하였다. <그 사람 앞에 서면 시선을 떨구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을 보았어. 앞으로는 다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나의 시선을 떨구지 않아야지, 다른 어느 누구 앞에서도 말이야. 그의 가르침도 나를 유혹하지 못하였으므로, 어떤 가르침도 나를 유혹하지는 못할거야.>                 (P57)    

 

젊은 시절 내내 자신을 따라다녔으며 자신의 일부를 이루었던 한 가지, 즉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듣겠다던 소망이 이제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P60)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 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P61)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P72)     


이러한 사유의 세계도 역시 여전히 차안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며, 설령 감각이라는 우연한 비본질적인 자기를 죽이고 그 대신에 사고와 학식이라는 또 다른 우연한 비본질적인 자기를 제아무리 살찌운다 하더라도, 결국 어떠한 목표에도 다다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각과 사유 두 가지 다 상당히 좋은 것이었다. 그 두 가지의 배후에는 궁극적인 참뜻이 숨어 있었다. (중략) 그는 내면의 소리에 따랐었다. 이처럼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오로지 그 내면의 그 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이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일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P75)  

    

물론입니다.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온다!> 이것도 강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P77)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지요?”

“나는 사색할 줄을 아오, 나는 기다릴 줄을 아오, 나는 단식할 줄을 아오.”

“그밖에 할줄 아는 일은 아무것도 없나요?”

“아무 것도 없소. 아니오, 나는 시를 지을 줄도 아오. 내가 시를 한 수 지을터이니 그 대가로 나에게 입맞춤을 한번 해주겠소?”

.....

녹음이 우거진 정원에 아름다운 카말라가 들어섰고,

그 정원 입구에 갈색으로 그을린 사문이 서 있었네.

연꽃 같은 그녀를 보았을 때, 그가 꾸벅

몸을 숙여 절하자, 미소 지으며 카말라 답례하였네.

신들에게 자신을 바치느니, 그 젊은이 생각하였지, 차라리,

아름다운 카말라에게 자신을 바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으리.               (P87-88)  

   

“누구나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주지요. 전사는 힘을 주고, 상인은 상품을 주고, 선생을 가르침을, 농부는 쌀을 그리고 어부는 물고기를 주지요.”

“아주 지당한 말이오. 그런데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요? 당신이 배운 것,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저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P97)     

오랫동안 싯다르타는 속세의 삶, 쾌락의 삶을 살았으나, 그런 삶에 완전히 빠져들어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격렬한 사문 시절에 억눌렸던 관능이 다시금 눈을 뜨고 깨어났으며, 그는 부유함을 맛보았으며, 환락을 맛보았으며, 권력을 맛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오랫동안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문으로 머물러 있었으니, 이러한 사실을 그 영리한 여자 카말라가 제대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향은 여전히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의 기술에 의하여 정하여지고 있었으며, 어린애 같은 속세의 사람들은, 그가 그들에게 낯선 존재였듯이, 그에게는 여전히 낯선 존재로 남아있었다.               (P111)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데 그들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할 줄 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쁨도 불안도 열렬하게 드러낼 줄 알았으며, 영원한 열애의 불안하지만 달콤한 행복을 맛볼 줄 알았다.           (P114) 

    

그는 도박으로 돈을 잃기도 하고 귀중품을 잃기도 하고 시골의 별장을 잃기도 하였으며 그것들을 다시 땄다가 또다시 잃기도 하였다. 그는 불안감. 그러니까 주사위 노름을 하는 동안 그리고 막대한 판돈 때문에 걱정하는 동안 가슴을 죄는 듯한 두려운 불안감, 바로 그 불안감을 사랑하였으며, 그는 언제나 그 불안감을 새롭게 살려 내려고 하였으며, 언제나 그 불안감을 고조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불안감이 주는 자극을 점점 더 높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물려 버린 미지근하고 맥빠진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감정 속에서라도 빠져야만 그나마 자신이 행복 같은 어떤 것, 도취같은 어떤 것, 고양된 삶 같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P116)     

싯다르타는 이 유희가 끝났다는 것을, 자기가 이 유희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죽어버리고 없다는 것을 느꼈다.                   (P124)     


이미 그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자신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으며,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위해 온 생활이 이제는 다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가 되었으며, 구역질이 날 정도로 그 생활을 실컷 맛보고 남김없이 빨아마셨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을 알 수 있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P126)     


그것은 모든 바라문들이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자 마치는 말로서,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성스러운 <옴>이었다. 그리고 그 <옴>이라는 소리가 싯다르타의 귓전을 울리는 바로 그 순간, 깊이 잠들어 있던 그의 정신이 갑자기 눈을 뜨고 자신의 행위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중략) 이처럼 길을 잃고서, 이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헤매며 자기한테서 모든 지식을 다 떠나보내 버린 결과 죽음을 찾아 헤맬 수도 있는 그런 지경까지,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얻고 싶어하는 욕망이, 이 어린아이 같은 욕망이 자기의 내면에서 크게 자라나게 될 수도 있는 지경까지 와 있단 말인가!             (P130)   

   

그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자신이 자신의 예전의 삶<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찾은 맨 처음 순간 이 예전의 삶이라는 것이 마치 멀리 떨어져 있는 옛날에 살았던 삶인 것처럼, 마치 현재의 자아의 전생인 것처럼 생각되었다>을, 자신이 자신의 그 예전의 삶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 자신이 온통 구토감과 비참한 심정으로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마저 미련없이 내던져 버리려고 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어느 강가의 야자나무 밑에서 다시 제정신이 들었으며, 성스러운 말인 옴을 입에 올리자, 깊은 잠에 골아떨어졌다가 이제 새로운 인간으로 깨어나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P131-132)   

  

이제 돌이켜보니, 예전에는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 있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이건 사물이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137-138)   

  

무슨 놈의 길이 그렇게도 험난하였을까! 결국 내가 단지 또다시 어린애가 되고 또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짓, 얼마나 많은 악덕, 얼마나 많은 오류, 얼마나 많은 구토증과 환멸과 비참함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난 길이었어, 나의 마음은 그 점에 대하여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의 두 눈은 그 점에 대하여 웃음을 짓고 있어.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P141)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순간마다 새롭다!

오, 과연 그 누가 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리!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예감이, 먼 기억이, 신의 음성들이 활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P147)     


“나를 건네주시겠소?” 싯다르타가 물었다.

뱃사공은, 그렇게 신분이 높은 사람이 혼자서 걸어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그를 나룻배에 태우고 노를 저어 나갔다.   

“당신은 멋진 인생을 택하셨습니다.” 승객인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매일매일 이 강가에서 생활한다는 것, 그리고 배를 타고 그 강 위를 다닌다는 것은 멋진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뱃사공은 미소를 지으며 노를 저었다. “그건 멋진 일이지요, 나리, 나리가 말씀하신 그대롭니다. 하지만 모든 생활, 모든 일이라는 게 다 제 나름대로 멋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그리고 당신이 하는 일이 부럽습니다.”

               (P148)     

이야기를 하고 있는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가 하는 말을 고요하게, 마음을 툭 터놓고, 느긋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바주데바가 자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법도 없이, 자기가 말하는 중에는 칭찬의 말도 꾸중의 말도 하지 않고서, 다만 가만히 귀기울여 듣고만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 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P153)     


“당신이 그걸 배우게 될 터이긴 하지만” 바주데바가 말하였다. “그러나 나한테서는 아니에요.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준 것은 강이었어요. 당신도 강으로부터 그것을 배우게 될 거예요. 그 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는 강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지요. 보세요, 당신도 이미 강물로부터, 아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 가라앉는 것,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배웠어요. 부유하고 고귀한 신분의 싯다르타가 노젓는 천한 사람이 되리라, 학식 높은 바라문인 싯다르타가 뱃사공이 되리라, 이러한 것도 강이 당신에게 들려준 말이지요. 당신은 다른 것도 강으로부터 배우게 될 거예요.”           (P155)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前生)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梵天)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P155)     


그리고 강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P157)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번뇌와 고통과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줄 수는 없을 겁니다.           (P177)   

  

모두가 스스로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모두가 고통당하고 있었다. 강은 고통에 찬 소리로 노래부르고 있었으며, 강은 그리움에 사무쳐 노래부르고 있었으며, 강은 그리움에 사무친채 목표를 향하여 흘러갔으며, 강은 비탄에 젖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P196)   

   

“내가 스님에게 들려드릴 말씀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P202)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이란 이런거야.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P206)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빈다가 말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것을 그분 세존께서는 미망(迷妄)으로 인식하셨지. 그분께서 우리에게 지니라고 명하고 계시는 것은 호의와 관대한 용서, 자비심과 인내심이지, 사랑은 아냐.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랑에 얽매이는 것을 금하셨어.”               (P214)            

나에게는 말보다는 사물이 더 마음에 들며, 그 분의 행위와 삶이 그 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며, 그 분의 손짓이 그 분의 사상들보다 더 중요해. 나는 그 분의 위대성이 그 분의 말씀, 그 분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분의 행위, 그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해.            (P215) 

          

그것들 모두는 단지 모습을 바꾸고 있었을 뿐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으며, 그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얼굴과 다른 얼굴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가로놓여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모든 형상들과 얼굴들은 멈추어 서기도 하고, 흘러가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떠내려가기도 하다가 마침내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되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P219) 

     

고빈다는 허리를 굽혀 큰 절을 올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늙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그의 가슴 속에서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 가장 겸허한 존경의 감정이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었던 그 모든 것,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치 있고 신성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주었다.               (P221)

      

싯다르타란 범어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리라”는 의미다. 작품에 나온 모든 것을 이루는, 즉 완성에 이르는 길로는 바수데바의 길, 고타마 붓다의 길, 싯다르타의 길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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