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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0. 2024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영화 <레베카>  2020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1940), 히치콕 감독의 <레베카>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을 비롯한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작품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레베카>(1979)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의 철문 앞에 섰지만 굳게 닫힌 탓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철문에는 쇠사슬이 가로걸리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문지기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녹슨 철문 틈새로 들여다보니 문지기 집은 오랫동안 버려졌던 듯한 모습이었다. 굴뚝에서 연기도 나오지 않았고 작은 격자창은 깨어져 쓸쓸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순간, 꿈에서 흔히 그랬듯 신비로운 힘을 발휘해 철문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길은 본래 그랬듯 구불거리며 내 앞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면서 무언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그 길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낮게 뻗어 내린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였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연이 서서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 길고 집요한 손가락이 슬금슬금 길 안까지 파고들어와 있었다. 과거에도 위협적이었던 숲이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검은 숲은 거침없이 길을 침범했다. 너도밤나무의 헐벗은 흰 가지들이 내 머리 위에서 뒤엉켜 기묘한 무늬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교회의 아치 지붕 같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나무들도 있었다. 너도밤나무와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앉은뱅이 떡갈나무와 비틀린 느릅나무들이 무질서하게 솟아올랐고 괴상하기 짝이 없는 덤불과 풀도 무성했다.                 (P5-6)


달빛은 환상을 묘하게 부채질한다. 꿈속의 환상이라 해도 말이다. 거기 잠자코 서 있자니 저택은 빈껍질이 아니라 전과 똑같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여겨졌다.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커튼은 밤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서재 출입문은 우리가 떠날 때처럼 반쯤 열려 있을 것이고 가을 장미가 꽂힌 테이블의 화병 옆에는 내 손수건이 놓여 있을 것이었다.

그 방은 우리 존재의 증거를 품고 있으리라. 책장에서 뽑혀 나와 쌓인 책 더미, 버려진 신문지, 담배꽁초가 담긴 재떨이, 우리 머리에 눌렸던 곳이 움푹 들어간 채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쿠션들, 다 타서 숯이 되었지만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벽난로의 장작……. 아, 재스퍼, 우리 재스퍼도 있지. 진실한 눈과 강인한 턱을 가진 그 녀석은 바닥에 길게 몸을 뻗고 누워 있다가 주인의 발소리를 들으면 꼬리를 흔들어 바닥을 탁탁 치곤 했다.

갑자기 구름이 달을 가렸다. 검은 손이 얼굴을 덮어버린 것처럼. 그와 함께 환상도 사라졌고 창문의 불빛도 꺼졌다. 마침내 눈앞에 황폐하게 버려진 빈집이, 과거의 속삭임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공간이 나타났다.

집은 무덤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나 고통은 모두 폐허 아래 묻혀버렸다. 부활은 없을 것이다.             (P8~9)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과거는 아직도 너무나 가깝다. 뒤로 밀쳐놓고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두려움, 근거 없는 공포를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쓰면서 느끼는 (이제는 다행히도 진정되었지만) 내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전에도 그랬듯이 말이다.

그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인내심이 강하다. 기억이 떠오를 때조차도 불평하는 법이 없다. 나는 그가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자주 기억을 떠올릴 것이라 생각한다.

갑자기 길을 잃고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여줄 때, 보이지 않는 손이 깨끗이 거둬 가기라도 한 듯 표정이 다 사라지고 여전히 아름답긴 해도 차갑고 공식적이며 생명력 없는 얼굴이 나타날 때가 바로 그렇다. 그는 줄담배를 피워댄다. 불붙은 채 땅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담배꽁초들은 꽃잎 같다. 그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을 급하게 열심히 내뱉는다. 나는 고통을 겪은 인간이 더 강하고 좋아진다고, 그리하여 세상에서 살아 남으려면 불의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고 믿는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우리도 바로 그 불의 시련을 최대한 겪어낸 셈이었다. 우리는 공포와 고독, 그리고 대단히 큰 좌절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면서 고난의 순간을 맞게 된다. 자기를 괴롭히는 악마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는 승리했다. 아니 최소한 그렇게 믿고 싶다.

악마는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우리는 위기를 극복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상처조차 남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앙에 대한 그의 예감은 처음부터 정확했다. 수준 낮은 연극에 등장하여 과장되게 소리를 질러대는 여배우처럼 우리는 자유를 위해 크나큰 대가를 치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의 멜로드라마는 이미 충분했고 그래서 현재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오감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작정이다. 행복은 획득하는 소유물이 아닌, 생각의 문제였고 마음의 상태이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도 절망의 순간은 찾아온다. 하지만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이 영원으로 치달을 때 나는 그의 미소를 보면서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함께 걸어간다는 것, 어떤 의견 차이도 우리 사이의 장벽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P10-11)     


댄버스 부인이라.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파벨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제일 처음 불안감을 느끼게 돈 것은 댄버스 부인의 얼굴 표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난 본능적으로 레베카와 비교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림자가 우리 사이에 드리워졌지........             (P16)       

나는 말하지도, 듣지도 않은 채 계속 그렇게 앉아 있고 싶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린다고는 해도 완벽하고 나른하고 편안한 그 순간을 지키고 싶었다. 조금만 지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내일이 오고 모레가 오고 또 해가 바뀌겠지. 우리도 변할 것이고 이렇게 고요한 시간은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몰라. 멀리 떠나거나 병들거나 죽을지도 모르지. 알 수 없는 미래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의 바람이나 계획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미래가.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안전하다. 맥심과 함께 손을 잡고 함께 앉은 이 순간만큼은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 짧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 소중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저택까지 이어지는 길의 관목을 베어내야 한다고 말했고 비어트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름의 제안을 내놓은 뒤 자일스에게 풀 줄기를 집어 던졌다. 그들에게 이 시간은 여느 때, 여느 날과 다름없는 오후 3시 15분일 뿐이다. 나처럼 절실하게 이 시간을 붙잡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P159)    

“프랭크, 얘기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솔직하게 대답하겠다고 약속해줘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건 별로 공평하지 않군요. 부인께서는 제가 대답할 수 없는 걸 질문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아니, 그런 질문은 아니에요. 대답하기 곤란한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약속하지요.”

어느덧 저택 앞이었다. 늘 나를 감탄하게 만드는 완벽한 대칭미와 우아함, 단순함이 그날도 여전했다.

수많은 창문이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끼가 붙은 돌벽은 부드럽게 빛났다. 서재 굴뚝에서 가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를 곁눈질하면서 엄지손톱을 물어뜯었다.

“저, 레베카는 아주 아름다웠나요?”

프랭크가 뜸을 들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시선을 멀리 보냈다. “그렇습니다.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             (P206~207)     


하찮은 작은 일들, 하나씩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지만 내게 있어 레베카는 보고 듣고 느낄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난 정말이지 레베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맥심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며 함께 살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마음속에는 그것 말고 아무런 바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늘 머릿속에, 꿈속에 레베카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 스스로가 맨덜리의 손님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레베카가 다니던 곳을 걷고 쉬던 곳에 몸을 누이는 손님. 안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손님, 말 한마디 한마디, 물건 하나하나가 끊임없이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P211)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부인은 냉정하고 잔인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인의 말이 옳았다. 모든 면에서 옳았다. 작별 인사를 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게 던진 말, ‘설마 그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빈 저택의 공허함이 괴로운 나머지 그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까지 온 거야’라는 그 말은 밴 호퍼 부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이성적이고 진실한 말이었다. 맥심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사랑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신혼여행도, 이곳 맨덜리에서의 생활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의미도 없다. 내가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는 남자고 나는 그의 어린 아내라고 그리고 그는 외로웠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내게 조금도 속해 있지 않다. 온전히 레베카의 것이다. 아직도 레베카 생각을 한다. 레베카가 있으므로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댄버스 부인 말대로 레베카는 아직도 이 집 안에 있다. 서쪽의 침실에, 서재에, 거실에, 홀 위쪽 발코니에. 정원 곁방에도 아직 레베카의 비옷이 걸려 있지 않은가. 정원에, 숲에, 해변의 돌집에도. 레베카의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그 향수 냄새가 계단에 어려 있다. 하인들은 여전히 그 명령에 복종하고 우리는 레베카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는다. 레베카가 좋아했던 꽃들이 방에 놓인다. 그 침실 옷장에 걸린 옷들, 화장대 위의 머리빗, 의자 아래의 슬리퍼, 침대 위의 가운……. 레베카는 아직도 맨덜리의 안주인이다. 여전히 드윈터 부인이다. 나는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다 보존되어 있는 이곳을 비틀거리며 헤매는 불쌍한 바보에 불과하다. 맥심의 할머니는 울부짖었지. ‘레베카는 어디 있는 게야? 레베카를 보고 싶어. 레베카를 대체 어떻게 한 게야?’ 할머니는 나를 모르고 관심도 없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니까. 난 맥심에게도, 맨덜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비어트리스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직설적으로 말했지. ‘당신은 레베카와 너무도 다르군.’ 늘 예의 바른 프랭크는 내가 레베카 이야기를 꺼내자 당황했고 내 질문들을 싫어했어. 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던진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지. ‘그렇습니다. 제 평생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습니다.’라고.

레베카, 레베카, 늘 레베카가 있다. 집 안을 걸을 때나, 어딘가에 앉을 때나,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꿈꿀 때조차도 레베카를 만나게 된다. 레베카의 겉모습까지 알게 되었다. 길고 가는 다리, 작고 좁은 발, 나보다 넓은 어깨, 능숙하게 움직이는 두 손. 레베카는 그 손으로 꽃꽂이를 하고 모형 배를 만들고 시집 속표지에 ‘맥스에게 레베카가’라고 썼다. 달걀형의 작은 얼굴에 피부는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워졌다고 했지. 좋아하는 향수 냄새도 안다. 그 웃음소리와 미소도 짐작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있어도 그 목소리는 구별해낼 것 같다. 레베카, 레베카. 어느 한 순간도 레베카를 벗어날 수 없다.                (P359~361) 

    

댄버스 부인은 창문을 열고 나를 그쪽으로 밀었다. 흰 안개 때문에 형체가 희미해진 테라스가 내려다보였다. “저 아래를 봐요. 정말 쉽지 않겠어요?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목이 부러진다 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거예요. 아주 빠르고 편한 방법이죠. 물에 빠져 죽는 것과는 달라요. 왜 당장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안개가 창밖을 가득 채웠다. 끈적거리고 습한 공기가 내 눈에, 콧구멍 안에 밀려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창틀을 꼭 잡았다. 

“두려워 마세요. 밀어버리지는 않을 테니. 당신 옆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혼자서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으니까. 대체 당신이 여기 맨덜리에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요. 드윈터 씨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요. 그러니 살아갈 이유가 별로 없는 거죠? 지금 당장 뛰어내려 끝장을 내버리는 게 어때요? 그러면 더 이상 불행하지 않을 텐데요.”

테라스의 꽃봉오리들이 보였다. 수국이 잔뜩 무리 지어 있었다. 돌바닥은 부드러운 회색이었다. 푹신할 듯했다. 안개 때문에 아주 먼 곳처럼 느껴졌다. 실제로는 창문이 그리 높지 않고 바닥까지도 멀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째서 뛰어내리지 않는 거죠? 어째서 시도하지 않죠?” 댄버스 부인이 속삭였다.

안개가 전보다 더 짙어지면서 테라스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꽃봉오리도, 돌로 포장된 바닥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온통 해초 냄새를 풍기는 서늘하고 하얀 안개뿐이었다. 유일한 현실은 창틀을 잡은 내 손과 내 팔을 움켜쥔 댄버스 부인의 손이었다. 뛰어내린다 해도 돌바닥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은 보이지 않으리라. 부인의 말대로 고통은 짧을 것이었다. 떨어지면서 바로 목이 부러질 테니까. 물에 빠져 죽는 것처럼 서서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순식간에 모든 것이 끝나겠지. 맥심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맥심은 레베카와 함께 홀로 남고 싶어 한다고 했다.

“자, 어서.” 댄버스 부인이 속삭였다. “어서, 두려워하지 마요.”

나는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났다. 창틀을 쥔 손가락에 쥐가 났다. 콧구멍과 입술에 닿은 안개가 시큼하고 고약했다. 담요를 뒤집어쓴 것처럼, 마취가 된 것처럼 답답했다. 불행하다는 생각도, 맥심을 사랑한다는 생각도 사라질 것이었다. 레베카 생각까지도. 더 이상 레베카를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P382-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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