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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4. 2024

조셉 콘래드의 <로드 짐>

영화 <로드 짐Lord Jim>  1965년

사람들이 이리저리 그를 밀쳤다. “커터선에 인원을 배치해!” 소년들이 그의 곁을 지나 달려갔다. 강풍을 피해 항구로 서둘러 오던 연안 항해선 한 척이 정박 중이던 스쿠너선과 충돌한 것이었다. 훈련선의 교사 한 명이 그 사고를 목격했다. 한 무리의 소년이 갑판의 난간을 타 넘더니 커터선을 매단 기둥 주위로 모여들었다. “충돌이야. 바로 요 앞에서, 시먼스 선생님이 보셨어.” 누군가에게 밀린 그는 비틀거리며 뒤 돛대에 부딪혔고, 밧줄을 붙잡았다. 쇠사슬로 계류되어 있던 낡은 훈련선은 마구 흔들리며 바람을 향해 부드럽게 뱃머리를 숙였고, 보잘것없는 삭구는 바다에서 보냈던 그 배의 젊은 시절을 깊은 저음으로 흥얼거렸다. “보트를 내려!” 그는 사람들이 탄 보트가 난간 아래로 재빨리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보트 쪽으로 달려갔다. 첨벙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풀어, 도르래 밧줄을 치워!” 그는 난간 너머로 몸을 내밀었다. 배 옆으로 흐르는 강물은 줄무늬 거품을 일으키며 파도쳤다. 짙어 가는 어둠 속에서 조수와 바람의 마법에 걸린 커터선이 보였다. 그 마법 때문에 커터선은 한동안 꼼짝도 못 한 채 모선과 나란히 서서 이리저리 요동만 쳤다. 커터선에서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노를 저어, 이 풋내기들아. 사람을 구해야지! 노를 저어!” 그리고 갑자기 커터선은 뱃머리를 높이 들더니 치켜든 여러 개의 노와 함께 파도를 타 넘으며 바람과 조수가 건 마법을 깼다.                (P16-17)     

“배가 난파선 잔해 같은 부유물과 충돌했다는 결론을 내린 뒤, 피고는 앞으로 가서 배의 피해를 확인해 보라는 선장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충돌 때문에 배에 피해가 있을 듯하다고 생각한 겁니까?” 왼쪽의 판사보가 물었다. 말발굽 모양의 성긴 턱수염을 기르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그는 양쪽 팔꿈치를 탁자에 괴고 거친 두 손을 얼굴 앞에서 깍지 낀 채 생각에 잠긴 파란 눈으로 짐을 바라보았다. 다른 판사보는 멸시하는 듯한 표정으로 무거운 몸을 뒤로 젖히고 앉아 왼팔을 길게 펼치고는 손가락 끝으로 압지첩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판사는 두 사람 사이에서 널찍한 안락의자에 꼿꼿이 앉아 머리를 한쪽 어깨 위로 약간 기울인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판사의 잉크스탠드 옆 유리 꽃병에는 꽃이 몇 송이 꽂혀 있었다. 

“아닙니다.” 짐이 말했다. “선장은 사람들이 공황에 빠질 수도 잇으니 아무도 부르지 말고 시끄럽게 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조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천막 밑에 걸린 램프 하나를 내려서 들고 앞쪽으로 갔습니다. 선수창 뚜껑 문을 열자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램프를 밧줄에 묶은 다음 밧줄을 최대한 내려 보니 선수창에는 이미 물이 반 넘게 차 있었습니다. 홀수선 아래 쪽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짐은 말을 멈추었다. 

“그렇군요.” 육중한 몸집의 판사보가 압지첩을 향해 멍하니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소리 없이 압지첩을 가볍게 치며 끊임없이 꼼지락거렸다. 

“그때는 위험하단 생각을 못 했습니다. 약간 놀라긴 했겠지만요. 모든 일이 너무나 조용히, 그리고 너무나 갑자기 일어났거든요. 저는 그 배에 선수창과 앞쪽 선창을 분리하는 충돌 대비용 칸막이벽 말고 다른 칸막이벽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장에게 보고하러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선교 사다리 밑에서 2등 기관사와 마주쳤습니다. 2등 기관사는 막 일어서던 참이었는데 넋이 나간 듯했고, 자기 왼팔이 부러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제가 앞쪽에 가 있는 동안 사다리를 내려오다 사다리 맨 위 칸에서 미끄러졌다더군요. 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맙소사! 그 썩어 빠진 칸막이벽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거고, 그러면 이 빌어먹을 놈의 배는 납덩이처럼 가라앉을 거야.> 2등 기관사는 오른팔로 저를 밀어 내고 저보다 앞서 사다리를 기어오르며 소리 질렀습니다. 왼팔을 몸 옆에 축 늘어뜨린 채로요. 곧바로 따라 올라가던 저는 선장이 2등 기관사에게 달려들어 바닥에 때려눕히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선장은 2등 기관사를 다시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선장은 허리를 숙여 그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성난, 하지만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마도 선장은 왜 밑에서 엔진을 멈추는 대신 위에서 소란을 벌이느냐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선장이 <일어나! 뛰어가, 어서!>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욕하는 소리도 들렸죠. 2등 기관사는 우현 쪽 사다리를 미끄러지듯 내려가더니 천창을 돌아 좌현 쪽 기관실 출입구로 달려갔습니다. 기관사는 달려가면서 신음을 토했고......”

짐은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기억을 빠르게, 그리고 극도로 생생하게 되살리는 중이었다. 사실을 원하는 재판관들에게 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기관사의 신음까지도 재생할 수 있었다.                 (P44-46)     


그래도 그 녀석은 신사야, 그러니 이해할 거야. 이해해야만 해! 이 사건이 일반인의 지독한 관심을 끌게 된 건 너무 충격적이야. 녀석이 재판정에 앉아 잇는 동안, 괘씸한 원주민들, 선장들, 인도인 선원들, 키잡이들이 그 녀석을 수치심으로 활활 태워 재만 남길 정도의 증거들을 들이대고 있거든. 이건 끔찍해. 말로, 자네는 이제 끔찍하다고 느끼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야? 바다의 사나이로서 솔직히 말해 봐. 만약 녀석이 도망친다면 이 모든 일도 당장 끝날 거야.> 브라이얼리는 평소와 아주 달리 흥분해서 그 말을 하더니 당장에라도 지갑을 꺼낼 듯이 손을 뻗었어. 나는 그 친구를 말리면서 내가 보기에 그 네 명의 비겁함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냉정하게 말했어. <그러고도 자네가 바다의 사나이라 할 수 있어?> 브라이얼 리가 화를 내며 말하더군. 나는 내가 바다의 사나이라고 자처할 것이며 실제로도 그렇길 바란다고 했어. 브라이얼리는 내 말을 듣더니 그 큰 팔로 내 개별적인 인격을 박탈하고 나를 군중과 한 무리로 취급하겠다는 듯한 몸짓을 했어. 브라이얼리는 <최악의 문제는 자네들 모두 존엄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거야. 자네들은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에 대해 별로 생각이 없어>라고 말했어.

우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걷다가 항만 사무실 건너편에서 걸음을 멈추었어. 그곳에선 파트나호의 거대한 선장이 마치 허리케인에 휘말린 조그만 깃털처럼 완전히 사라져 버리던 바로 그 장소가 보였어. 나는 웃음을 지었지. 브라이얼리는 계속 말했어. <이건 망신이야. 우리 중에는 온갖 종류의 인간이 있고, 그중 몇은 성유를 바른 악당이지. 하지만 젠장, 우리는 직업적 존엄성을 지켜야 해. 그렇지 않으면 여기저기 떠도는 땜장이보다 나을 게 없잖아. 우리는 신뢰를 받고 있어. 내 말 알아듣겠어? 신뢰를 받는다고! 솔직히, 나는 아시아에서 온 그 모든 순례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어. 하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낡은 넝마 짐짝을 싣고 간다하더라도 그렇게 하지는 않아. 우리는 조직화된 집단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그런 인간다움이라는 명분뿐이지.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기면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는 거야. 강인함을 보일 기회가 전혀 없이 바다 생활을 거의 마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기회가 왔을 때는..... 아! 만약 내가......>              (P96-97)  

   

<저는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짐이 입을 열었어. <선장은 도망쳤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잘된 일이죠. 하지만 저는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요. 모두 이래저래 빠져나갔지만,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집중해서 들었어. 나는 알고 싶었어.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모르겠고, 오직 짐작만 할 뿐이야. 짐은 자신만만한 동시에 의기소침했고, 마치 자신은 선천적으로 결백하다는 확신이 그 친구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진실을 중요한 순간마다 억누르는 듯했어. 짐은 20피트나 되는 담을 자기 힘으로는 타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사람 같은 어조로, 이제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어. 이 말을 듣자 <에식스에 있는 그 늙은 교구 목사가 선원이 된 아들을 각별히 사랑하는 듯>하다던 브라이얼리의 말이 생각났어.                     (P111-112)     


사람에겐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이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고, 그 마음속 정체성을 비난에서 구해 내려 끙끙거리는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장엄해 보이는 동시에 또한 살짝 우스꽝스럽기도 하지. 한 인습에 대한 이런 소중한 관념은 단지 게임의 법칙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무시무시하게 효과적이야. 이것이 무한한 힘으로 타고 난 본능을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과 , 실패할 경우 받게 되는 끔찍한 벌 때문이지. 짐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어, 바다의 부드러운 황혼 속에서 구명정을 타고 표류하던 네 사람은 데일 선박 회사 소속 증기선을 만나 구조받고 그 배에 탔지만, 하루가 지나자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어. 다른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그 뚱뚱한 선장이 이야기를 둘러댔고,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먹혀들었지, 비참하게 죽기 직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잔혹한 고통에 시달리던 조난자들을 천운으로 이제 막 구해 냈는데,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난파 경위를 엄하게 문초할 사람은 없잖아. 나중에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볼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애번데일호의 간부 선원들은 그 일이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을 했을 거야. 하지만 물론 그 사람들은 그 의혹을 가슴속에만 품고 있었지. 그 사람들은 바다에 가라앉은 파트나호의 선장, 항해사와 기관사 둘을 구조했고, 선원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은 그 정도로 충분했거든. 짐이 그 배에서 보낸 열흘 동안 어떤 느낌이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어. 짐이 그 부분을 말할 때 어조를 근거로 맘대로 추측해 보건대, 짐은 자신이 찾아낸 사실, 즉 자신에 대한 발견으로 인해 어느 정도 크게 놀랐고, 그 발견의 엄청난 가치를 알아줄 유일한 이에게 그것을 해명하려 열심히 애쓰고 있었어. 짐이 그 중대성을 축소하려 들지 않았단 걸 꼭 알아줘. 나는 그 점을 확신해. 그리고 그 부분이 짐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야. 상륙한 뒤, 자신이 불행히도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그 사건의 예측하지 못했던 결말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짐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로선 그 부분을 상상조차 하기 버거워. 아마도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아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하지만 짐은 새로이 디딜 곳을 곧바로 찾은 게 분명해. 짐은 상륙한 뒤 선원 숙소에서 대기하며 두 주를 보냈고, 나는 당시 그곳에 머물던 예닐곱 명의 다른 선원에게서 짐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었어.         (P115-116)   

  

<제길! 벽이 불거졌다고요. 아래쪽 갑판에서 앵글을 따라 램프를 비춰 보는데 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녹 덩어리가 철판에서 떨어졌어요. 저절로요.> 짐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어. <그걸 살펴보고 있는데 그 덩어리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찔하더니 펄쩍 튕겼어요.> <그걸 보고 꽤 불안했겠군.> 나는 담담하게 말했어. 그러자 짐은 〈선장님은 제 등 뒤로 뱃머리 아래쪽 갑판에서만 160명이 곤히 잠들어 있고, 고물 쪽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잠든 상황에서 제가 저 자신만 생각했을 거라고 여기십니까? 그리고 위쪽 갑판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었습니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구명정에 태울 수 있는 사람 수보다 세 배는 더 많은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장 제 눈앞에서 철판이 갈라지고 그 사람들이 누워 있는 곳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뭘 말입니까?〉

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그 어둡고 동굴 같은 곳에서 대양의 물이 가하는 무게를 버티는 칸막이벽과, 벽 일부를 비추는 공 모양 램프 불빛 아래 아무런 의식도 없이 잠든 승객들의 숨소리를 듣는 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떨어져 나온 녹 덩어리를 보고 깜짝 놀라며 절박한 죽음의 예감에 짓눌린 짐이 철판을 응시하는 모습도 눈앞에 그려지고.        (P119-120)     


짐은 자기부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어. 짐의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피어오르다 사라지고 다시 피어오르던 생각은 오로지 하나, <승객은 8백 명인데 구명정은 일곱 척뿐이야. 승객은 8백 명인데 구명정은 일곱 척뿐이야> 였다더군.

<누군가가 제 머릿속에서 요란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짐은 살짝 거칠어진 어조로 말했어. <승객은 8백 명인데 구명정은 일곱 척, 그리고 시간도 없어! 생각을 해보세요.> 짐은 작은 탁자 저편에서 내 쪽으로 몸을 내밀었고, 나는 짐의 시선을 피하려 애썼어. <제가 죽음을 두려워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짐이 격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물었어. 짐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고, 그 때문에 커피잔들이 춤을 췄지. <맹세컨대, 저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렵지 않았다고요..... 젠장, 두렵지 않았단 말입니다!> 짐은 벌떡 일어나 팔짱을 꼈고, 턱을 가슴께로 떨어뜨리더군.                   (P122-123)     

판에 의지해 침몰을 간신히 면한 채 뱃머리를 숙이고 있는 배를 선장님은 지켜보신 적 있나요? 네? 배를 버틴다! 저는 그 부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칸막이벽에 5분 안에 버팀목을 댈 수 있겠습니까? 아니, 50분이 있다고 해도 가능하겠습니까? 배 아래로 내려갈 사람은 어디서 구하고요? 그리고 버팀목은요? 버팀목을 어디서 구한단 말입니까! 그 칸막이벽을 본다면 그 누구도 감히 버팀목을 세우기 위해 한 번이라도 메질할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겁니다. 선장님은 했을 거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선장님은 직접 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 누구도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제길, 그런 일을 하려면 적어도 가망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천에 하나라도 가망이 있어야 한다고요. 실오라기 같은 가망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벽을 보셨다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없으셨을 겁니다. 그 누구도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을 겁니다. 선장님은 제가 그곳에 그냥 서 있기만 했다고 저를 망나니 놈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선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떻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지요. 상황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장님이라면 제게 무슨 일을 시키셨겠습니까? 저 혼자 힘으로는 구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승객 모두를 겁에 질려 미치게 만드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보세요! 지금 제가 선장님 앞에서 이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건 확실한 사실이었어요…….                (P129~130)     

나한텐 그렇게 이상한 일이지 않았어. 현실은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빚어진 공포만큼 나쁘거나 고통스럽거나 무섭거나 복수심으로 가득하진 않을 거라고. 짐은 분명 그렇게 무의식중에 확신하고 있었던 거야. 그 첫 순간에, 짐의 심장은 고통받을 모든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쥐어짜듯 아팠을거고, 짐의 영혼은 한밤중에 갑자기 폭력적인 죽음의 습격을 받은 8백 명의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과 절망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짐이 <저는 그 저주받을 구명정에서 뛰어내려 침몰 현장까지 반 마일 혹은 그 이상이라도 헤엄쳐 가서 직접 봐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라고 말했을 리가 없지. 왜 그런 충동이 들었을까? 너희는 그 의미를 알겠어? 왜 그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만약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이었다면 그냥 따라 죽으면 되는데, 왜 그 현장으로 가서 눈으로 보고 싶었던 걸까? 마치 죽음으로 안식을 얻기 전에 먼저 모든 게 끝났음을 확인해서 자신의 상상력부터 달래야만 한다는 듯이 말이야. 누구든 다른 설명이 가능하면 말 좀 해줘 봐. 그건 안개 속으로 문득 보이는 기이하고도 기막힌 광경 중 하나였어. 아주 놀랍고 비밀스러운 장면이었지. 짐은 그게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란 듯이 털어놓았어. 가서 보겠다는 충동을 일단 억누르고 나자 짐은 침묵을 의식하게 되었지. 짐은 그 부분에 대해 내게 말했어. 바다와 하늘의 정적이 하나로 합쳐져 끝없이 거대한 정적이 되었고, 죽음을 면하고 팔딱이는 이 생명들의 주위를 죽음처럼 고요히 둘러싸고 있었다는 거야. <구명정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이 조용했습니다.> 짐은 마치 지극히 감동적인 사실을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는 사람처럼 입술을 이상하게 오므리고 말했어. 정적! 그 친구가 마음속으로 그 정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는 짐을 지금의 짐으로 만드신 하느님만이 알겠지.               (P159-160)  

   

〈증기선의 빛이 사라진 뒤, 그 구명정에서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절대 그 일을 알 수 없을 거고요. 저는 그걸 느꼈고,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충분히 어둡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널찍한 무덤에 갇힌 산 사람들 같았습니다. 세상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의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화를 시작한 뒤 세 번째로 짐은 거칠게 웃어 댔지만, 주위엔 짐이 그냥 술 취해서 그런다고 생각할 사람조차 없었어. 〈두려움도 없었고, 법도 없었고, 소리도 없었고, 눈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해가 뜰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눈조차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짐의 말이 의미하는 진실에 충격을 받았어. 넓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보트에는 무언가 특이한 데가 있지. 구명정의 지탱을 받아 죽음의 그림자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간신히 버티는 사람들에게는 그 위로 광기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탄 배가 우리를 배반하면 온 세상이 우리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여. 우리를 만들어 내고, 통제하고, 돌봐 온 세상이 말이야. (……) 하지만 특히 이 조난 사고에는 그자들을 더욱 철저히 고립시키는 비참한 뭔가가 더 있었어. 상황의 극악함이 그자들을 나머지 세상 사람들, 즉 그토록 사악하고 무시무시한 농담에 본인의 이상적 행동 규범을 시험당해 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철저하게 격리시켰어.                        (P168~170)    

 

침몰해 죽거나 헤엄을 쳐서 살아나야 할 운명을 이미 직업으로 선택한 이들은 이제 막 배에 발을 내딛는, 빛나는 눈으로 광대한 바다의 반짝임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에게 마음이 쏠려. 사실 그 반짝임은 자신들 눈 속에 이글거리는 불길이 수면에 반사된 것일 뿐이라는 걸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말이야. 그리고 이런 심정이 되는 걸로 따지면, 이 세상 어떤 직업의 사람들보다 선원들이 가장 대단하지. 우린 다들 각자 기대하는 게 있어서 바다로 왔고, 엄청나게 막연한 기대감, 가슴이 두근거리는 불확실성, 모험에 대한 찬란한 욕구, 그런 각자의 고유하면서 유일한 자기만족 때문에 바다로 왔어!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얻는 것은…… 뭐, 그 이야기는 하지 말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환상과 현실 간 괴리가 선원만큼 큰 경우는 없어. 선원의 삶처럼 온통 환상으로 시작해서 재빨리 현실에 눈을 뜨고, 게다가 그보다 더 빠르게 현실에 철저히 복종하는 경우는 다른 직종의 삶에서 찾아볼 수가 없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시작했다가 똑같은 것을 알며 선원 생활을 끝내게 되고, 야비하고 저주받은 날들을 거치면서도 똑같이 소중히 여긴 황홀한 매력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          (P180~181)     


나는 그 사람의 다친 손 중에서 가운뎃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가 뻣뻣해서 따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어. 그래서 그 사람은 텀블러를 그렇게 꼴사납게 잡고 있었던 거야. <사람은 늘 두려워하지요. 말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요, 하지만.....> 그 사람은 어색하게 유리잔을 내려놓았어. <공포, 공포, 그건 늘 있지요.> ..... 그 사람은 놋단추 근처의 가슴에 손을 댔어. 짐이 자기 심장에는 아무 문제 없다고 주장하며 손으로 쿵쿵 치던 바로 그 부위였지. 내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색을 했나 봐.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래요! 그렇다고요! 말은 잘하지요. 말은 잘해요. 그건 좋습니다. 하지만 따져 보면 결국 사람들은 누가 더 영리할 것 없이 다 똑같습니다. 더 용감하지도 않고요. 용감하다니요! 언제나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저는 roule ma bosse(제 살덩이를 굴려 봤지요).> 그 사람은 차분하고도 진지한 목소리로 그런 상스러운 표현을 쓰더군. <저는 용감한 사람들을 만나 봤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을요! Allez(진짭니다)!> .... 그 사람은 위태위태해 보이는 동작으로 음료를 마셨어..... <아시겠지만, 배를 타는 사람들은 용감해야 합니다. Le metier veut ca(직무상 그래야만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내게 합리적으로 호소했어. <Eh bein(거참)! 승무원이라면 누구나, 제 말은, 하나하나가 모두 정직한 인물이라면, bien entendu(당연히) 고백할 겁니다. 우리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결국 vois lachez tout(모든 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그런 지점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진실을 품고 살아야만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몇 가지 특정한 상황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 두려움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Un trac epouvantable(무시무시한 두려움이요). 그리고 이 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어쨌든 두려움은 있습니다.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지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말을 믿으세요.           (P205-206)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가장 깊숙한 필요를 파악하려 애쓸 때, 바로 그때 우리는 깨닫게 돼. 우리와 함께 별을 보고 함께 태양의 온기를 쬐는 사람들이 실은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고, 쉽게 흔들리고, 모호한지 말이야. 마치 존재하려면 외로움이라는 가혹한 절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 것만 같지. 우리는 피와 살로 된 육신을 똑바로 바라보지만, 그 육신은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녹아 버리고, 어떤 눈으로도 좇을 수 없고 어떤 손으로도 잡을 수 없는, 변덕스럽고 위로할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유령만이 남아.           (P250)  

   

짐은 내게 웃어 보였어. 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꼭 하고 넘어가야겠어.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짐이 자기 직무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았지. 짐은 다영의 가게에서 편히 지냈으니까. 그런데도 짐이 말하자마자, 나는 그 일이 무척 고달플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어. 나는 짐을 보지도 않았어. <이 지역과 완전히 다른 곳에서 살아 보고 싶어? 캘리포니아나 서부 해안으로 가보겠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볼게.....> 짐은 살짝 조롱하는 듯이 내 말을 가로챘어. <그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습니까?> .....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걸 곧바로 깨달았어. 그런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건 짐이 원하는 구원이 아니었어. 나는 짐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애매하게나마 감지했어. 짐이 원하는 건, 짐이 기다리는 건, 딱 잘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뭔가 기회 비슷한 거였어. 나는 짐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은 모두 밥벌이 수단에 불과했어. 하지만 누군들 뭘 더 해줄 수 있었겠어? 그 처지가 내게는 절망적으로 느껴졌고, 가엾은 브라이얼 리가 <그 녀석을 땅속으로 20피트쯤 기어들어 가서 살게 하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 땅 위에서 불가능한 일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쪽이 낫겠다 싶었지. 하지만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어. 그때 그 자리에서, 짐의 보트가 부두를 떠나 노 세 개 길이만큼도 가지 않았을 때, 나는 저녁에 스타인을 찾아가 상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P279-280)     

스타인은 그 연약한 날개의 청동에 광채, 하얀 선, 화려한 무늬에서 마치 다른 무언가를 보는 듯 했는데, 그건 죽어서도 손상 없이 화려함을 유지하고 있는 이 섬세하고 생명 없는 세포들만큼이나 쉽게 손상될 수 있으면서도 파괴를 거부하는 무엇인가의 이미지였어.

<경이롭군!> 스타인이 나를 바라보며 되풀이해서 말했어. <보라고! 이 아름다움을,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이 정확함을, 조화로움을 봐, 얼마나 연약한지도! 얼마나 강한지도! 그리고 얼마나 정밀한지도! 이게 자연이야. 거대한 힘들의 균형, 모든 별이 그렇고, 모든 풀잎이 그렇게 서 있지. 그리고 완벽한 균형 상태의 강력한 우주가 이것을 만들어내. 이 경이로움을, 자연이 만들어 낸 이 걸작품을 봐. 자연은 위대한 예술가야.>

<곤충학자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은 없는데.> 내가 기분 좋게 말했어. <걸작이지! 그러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놀라운 존재이긴 하지만 걸작은 아니야.> 스타인은 유리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어. <아마도, 인간을 만들 때 그 예술가는 살짝 미쳐 있었을 거야. 안 그래? 자네 생각은 어때? 아무도 원하지 않고 인간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도 인간이 나타난 것처럼 보일 때가 가끔 있어.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인간이 모든 곳을 갖고 싶어 하겠어? 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주위에 큰 소동을 벌이고, 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풀잎을 어지럽히겠어?>

<나비들도 잡고.> 나는 장단을 맞춰 주었어.

스타인은 웃으며 몸을 의자에 기대더니 다리를 쭉 폈어. <앉아.> 스타인이 말했어. <어느 아주 맑은 날 아침에 이 희귀한 표본을 잡았어. 그때의 기분은 아주 날아갈 듯했어. 수집가가 이런 희귀한 표본을 잡았을 때 어떤 기분인지 자네는 모를 거야. 알 수가 없지.>           (P288-289) 

    

스타인은 기다란 집게손가락을 들어 올렸어.

<치료법은 단 하나뿐이야! 한 가지만이 우리의 모습에서 우리를 치료해 줄 수 있어.> 손가락이 책상으로 내려갔고, 빠르게 톡 소리를 냈어. 앞서 스타인이 그토록 단순해 보이게 했던 짐의 경우가 이제는 더욱더 단순해 보였고, 완전히 가망 없어 보이기도 했어. 정적이 흘렀어. <그래.> 내가 말했어. <엄밀하게 말해, 문제는 어떻게 치료받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야.>

스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는데, 살짝 슬픈 듯이 보였어. <Ja, ja(맞아, 맞아)! 일반적으로, 자네 나라의 그 위대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이 문제로다>>인 거지......> 스타인은 공감하며 고개를 계속 끄덕였어.... <어떻게 사느냐! 아! 어떻게 사느냐.>

스타인은 책상에 손가락을 끝을 댄 채 일어났어.

<우리는 온갖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해.> 스타인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어. <이 화려한 나비는 작은 흙더미를 발견하면 그 위에 가만히 앉아 있지. 하지만 인간은 결코 자신의 진흙 더미 위에 가만히 있지 않아. 인간은 이렇게 있고 싶어 하다가 또 저렇게 있고 싶어 하지.> .... 스타인은 손을 위로 들었다가 이윽고 다시 내렸어..... <인간은 성자가 되고 싶어 하다 악마가 되고 싶어 하고, 매번 눈을 감을 때마다 자신이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 너무나 훌륭해 자신이 결코 될 수 없는 그런 사람.... 꿈에서나.....>                (P294-295)     

<그리고 인간은 늘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진짜 괴로움, 그러니까 마음의 고통, 염세주의적 세계관 같은 걸 겪게 되지. 이보게, 친구, 자신이 충분히 강하지 못해서, 혹은 충분히 영리하지 못해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유쾌하지 않잖아, 그래!..... 그렇지만 그 역시 훌륭한 사람이야! Wie? Was? Gott im Himmel(어떻게? 무엇을? 맙소사)!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 하! 하!>

나비들의 무덤 사이를 배회하던 그림자가 시끄럽게 웃어 댔어.

<그래! 이 사실은 끔찍하지만 너무 우습기도 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은 마치 바다에 빠지는 사람처럼 꿈속에 빠져들지. 만약 그가 경험 없는 사람들처럼 공기 속으로 기어 나오려 하면 익사하고 말아, nicht wahr(그렇지 않아)?...... 그러면 안 돼! 이봐! 살고 싶다면, 그 파괴적 원소에 자신을 맡기고 물 속에서 손발을 열심히 움직여 깊은 바다가 몸을 받치게 해야해. 그래서 만약 자네가 내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P296)    

 

내 가슴을 가리키던 손이 내려갔고, 이윽고 한걸음 더 다가온 스타인은 부드럽게 내 어깨에 손을 올렸어. 그리고 쓸쓸한 어조로, 세상에는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지만, 자신은 너무나 외로이 살아왔기에 이따금 잊는 다고 했어. 잊는다고. 멀찍이 그늘 속에 서 있을 땐 영감을 주었던 확신이, 밝은 곳에 들어오자 빛에 파괴되어 버린 거야. 스타인은 의자에 앉더니 책상에 두 팔꿈치를 괴고 이마를 문질렀어. <그래도 그게 진실이야. 진실, 그 파괴적 원소에 잠겨야 해.>...... 스타인은 나를 보지 않은 채, 두 손을 양쪽 뺨에 대고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어. <그게 방법이야, 꿈을 쫓고 다시 꿈을 쫓고, 그리고 그렇게 --ewig(영원히)-- usque ad finem(끝까지).....> 신념에 차서 속삭이는 스타인의 소리를 듣자, 내 앞에 광대하고 불확실한 공간이 펼쳐지는 듯했어. 그건 새벽 평원의 어슴푸레하고 광활한 지평선이었어.            (P297)  

   

파투산은 원주민이 다스리는 나라의 벽지였고, 그곳의 가장 큰 정착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어. 바다에서 강을 따라 40마일 정도 들어가면 처음으로 가옥들이 보이고, 거기서 서로 아주 가까이 붙어 솟은 가파른 언덕 두 개가 숲 위로 보이는데, 그 언덕들 사이에는 깊은 틈 같은 것이, 무언가 강력한 힘에 의한 균열 같은 것이 있어. 사실 그 계곡은 단지 좁은 협곡에 불과해. 정착촌에서 보면 대충 원추형으로 생긴 언덕 하나가 반으로 쪼개진 뒤 살짝 밖으로 기울어진 듯한 모습이야. 보름달이 뜨고 사흘째 되는 날 밤에 짐의 집 앞 공터에서 보면, 달은 정확히 이 두 언덕 뒤에서 떴어(내가 짐을 방문했을 때, 짐은 토착 형식의 아주 멋진 집을 가지고 있었어). 처음에 달빛이 먼저 위로 퍼지면서 두 덩어리의 언덕은 아주 진한 검은색 돋을새김으로 보였고, 이윽고 거의 완벽한 원형의 달이 불그레하게 이글거리며 모습을 드러냈어. 달은 언덕들 사이 깊은 틈에서 미끄러지듯 솟아올라 언덕 꼭대기들 위로 떠올랐고, 그 모습이 마치 벌어진 무덤에서 점잖고 의기양양하게 빠져나오는 듯했어.               (P305)     

그 반지는 도라민이라는 노인에게 짐을 소개하는 목적이라더군. 도라민은 그곳 원주민 우두머리 가운데 한 명인데, 그 나라에서 스타인 씨가 온갖 모험을 할 때 사귄 거물이라고 했어. 짐은 스타인 씨가 그 사람을 <전우>라고 불렀다면서, 전우는 좋은 거 아니냐고 하더군. 그리고 스타인 씨는 영어를 아주 잘한다면서 하고 많은 곳 중 슬라웨시에서 영어를 배웠다니, 정말 웃긴다고 했어. 그리고 스타인 씨에게는 특이한 악센트가 있다면서 나도 그걸 알아차렸냐고 물었어. 도라민이라는 사람이 스타인 씨에게 반지를 주었대.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날 교환한 선물이었다지. 영원한 우정을 약속하는 징표랄까.               (P323-324)    

 

짐은 자기 집 앞에서 내게 그렇게 말했어. 언덕들 사이 틈으로 마치 무덤에서 나와 승천하는 영혼처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뒤였어. 달빛은 죽은 햇빛의 유령처럼 싸늘하고 창백했어. 그 달빛에는 어딘지 유령의 기운이 돌았어. 해체된 영혼의 무심함과 불가사의한 신비를 품고 있었어. 뭐니 뭐니 해도, 사람은 햇빛에 의지해서 살아야 해. 햇빛과 달빛의 관계는, 소리와 메아리의 관계와 비슷하거든. 소리의 분위기가 조롱하는 것이든 슬픈 것이든, 메아리는 사람을 오도하고 혼란에 빠뜨리잖아. 무엇보다, 달빛은 결국 우리 인간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물질에서 그 실체를 빼앗고, 그림자들에게만 불길한 박진성을 안겨 주지. 그래서 우리 주위의 그림자들은 아주 실감 났지만, 내 옆의 짐은 아주 굳세 보였어. 마치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심지어 달빛의 신비로운 힘마저 내 눈앞에서 그 친구의 실체감을 빼앗을 수는 없을 듯했어. 아마도 짐이 암흑의 힘의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았기 때0문에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친구를 건드릴 수 없었나 봐. 모든 것이 고요했고, 모든 것이 잠잠했어. 심지어 강물 위에서조차 달빛은 웅덩이 위에 있는 듯 잠들어 있었어.                (P341)     

패배한 샤리프 알리는 더는 버티지 않고 그 나라에서 도망쳤고, 그동안 비참하게 쫓겨 다니던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기어 나와 무너져 가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어. 그때 데인 워리스와 상의해 촌장들을 임명한 이가 짐이었어. 그렇게 해서 짐은 그 땅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어.                   (P377) 

    

우리 인간의 공통적인 운명은 여자들에게 특히 잔인하게 달라붙어 있어. 운명은 주인이 노예를 처벌하듯 처벌하진 않지만, 달랠 수 없는 은밀한 원한을 갚으려는 듯 꾸준히 고통을 줘. 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뽑힌 운명이, 세속적 조심성이라는 속박을 끊고 일어서는 데 거의 성공한 사람들에게 복수하려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해. 왜냐하면 이따금 자기 사랑 속에 뭔가, 즉 공포나 초현세적 느낌을 줄 정도로 뚜렷한 요소를 집어넣을 수 있는 건 여자들뿐이거든. 이 세계가 여자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여자들이 보는 세계에도 우리 남자들이 아는 형상과 내용과 우리 남자들이 숨 쉬는 공기가 있는지 궁금해!                 (P382)  

    

말로가 살짝 놀라서 말했다.“짐은 그 아가씨에게 이미 말했고, 그게 전부야. 그 아가씨는 짐의 말을 믿지 않았어. 더는 믿지 않았어. 나로 말하자면, 즐거워해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하고 올바르고 품위 있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어. 난 뭘 믿었을까. 지금도 모르겠고 아마 평생 모를 거야, 하지만 그 가엾은 친구는 무얼 믿었을까? 진리가 승리한다는 말이 있잖아. Magna est veritas et(진실은 위대하고)..... 맞는 말이지, 하지만 진리도 기회를 얻어야 이기는 법이야. 모든 일에는 규칙이라는 게 있어. 마찬가지로 주사위를 던질 때는 어떤 법칙이 우리의 운명을 규정하지. 하지만 고르고 세심한 균형을 유지해 주는 것은 인간의 종복인 정의가 아니라, 우연과 운명과 행운 같은, 참을성 많은 시간의 동지들이야. 우리 둘은 똑같은 말을 했어. 그런데 우리 둘 다 진실을 말한 걸까, 아니면 우리 가운데 한 명만 진실을 말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진실을 말하지 않은 걸까?          (P441-442)     

쉼 없이 들리는 그 구슬픈 소리는 내 명상에 어울리는 반주였어. 그 여자는 짐이 꿈에 휩쓸려 자기를 떠났다고 말했지만, 그 말에 대해 그 누구도 뭐라고 답할 수 없었어. 그런 탈선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보였거든.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원래가, 지나친 잔인함과 지나친 헌신이라는 어두운 오솔길에서 자신의 위대함과 힘이라는 꿈에 휩쓸려 맹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 아닐까? 그리고 결국, 진실의 추구하는 게 뭐란 말이야?             (P483)     


“말했듯이, 이야기는 브라운이라는 사람과 함께 시작해.” 말로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서태평양 부근을 돌아다녀 본 사람치고 그 사람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거야. 그자는 호주 해안 지방의 대표적인 악당이었어. 그자가 그곳에 자주 나타나서가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고국에서 온 방문객들에게 들려주는 무법자들 이야기 속에 그자가 늘 등장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케이프요크에서 이든베이에 이르는 지역에 나돌던 그자의 비행에 관한 이야기들은, 가장 경미한 것도 제대로 법이 선 곳에서였다면 교수형을 당하기 충분할 정도였어. 그리고 이야기마다 그자가 준남작의 아들로 여겨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자가 초기 금광 채굴 시절 고국에서 온 배에서 직무를 이탈한 건 분명했고, 몇 년 뒤에는 폴리네시아의 이런저런 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어. 그자는 원주민들을 납치했고, 홀로 있는 백인 상인을 입고 있던 파자마만 남기고 몽땅 털었으며, 강도질을 마치면 십중팔구 바닷가에서 엽총 결투를 하자는 제안을 하곤 했는데, 이 무렵 상대방이 이미 공포로 초주검 상태가 되지만 않았더라면 그 결투가 그런대로 공정하다고 할 수 있었을 거야. 브라운은 현대의 해적이지만, 그자의 원형이 되었던 더 악명 높은 해적들과 마찬가지로 비열한 자였어.                      (P487-488)     

<이곳 해안을 떠난다고 약속하겠나?> 짐이 물었어.

브라운은 손을 들었다가 떨어뜨렸는데, 말하자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가피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몸짓이었어. <그리고 무기도 버릴 거고?> 짐이 말을 이었어. 브라운은 벌떡 일어나 앉더니 지류 너머를 쏘아보았어. <무기를 버리라니! 와서 우리 굳센 손에서 빼앗아 가보든가. 내가 지금 공포로 맛이 간 것 같나 보지? 천만에! 배에 두고 온 후장총 몇 정을 제외하면, 내가 가진 것이라곤 지금 걸친 이 누더기와 총이 전부야. 그리고 배를 만날 때마다 식량을 구걸하면서 혹시 마다가스카르까지 갈 수 있다면 그곳에서 이 무기를 팔 생각이라고.>           (P535-536)    

 

브라운이 마침내 복수를 단행한 것은 바로 그때였어. 20년 동안이나 경멸과 겁 없는 협박으로 살아온 브라운에게 강도로서의 평범한 성공이란 공물을 내놓길 거부한 세계에 대한 복수였어. 냉혹하고 포악한 복수였지. 브라운은 임종을 앞둔 순간에도 이 순간을 마치 끝내 굽히지 않고 저항했던 일을 기억하듯 떠올리며 즐거워했어. 브라운은 부기스족이 야영 중인 섬의 다른 쪽 끝에 부하들을 몰래 상륙시킨 뒤, 부하들을 이끌고 섬을 가로질렀어. 상륙하는 순간 몰래 빠져나가려던 코닐리어스는 잠시 소리 없이 드잡이하다 포기하고 덤불이 가장 성긴 길을 안내했어, 브라운은 큼직한 손으로 코닐리어스의 깡마른 두 손을 등 뒤로 그러잡았고, 가끔씩 사납게 코닐리어스를 밀어 냈어. 코닐리어스는 물고기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비열했지만 자기 목적에 충실했고, 이제 그 목적을 이룰 순간이 거의 눈앞에 다가왔어. 숲 가장 자리에서 브라운의 부하들은 흩어져 몸을 숨기고 기다렸어. 그곳에선 야영지가 환히 보였지만, 야영지에서 브라운 일당 쪽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어. 심지어 그 섬 뒤쪽에 좁은 수로가 있다는 걸 백인들이 알리라고는 그 누구도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수로 양쪽 입구는 둘 다 너무나 좁고 수풀이 무성해서 여기 원주민들이라도 카누를 타고 지나가며 일부러 아주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는 한 브라운 일당을 찾아낼 수 없었어.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고 판단한 브라운은 <따끔한 맛을 보여 줘라>라고 외쳤고, 열네 발의 총탄이 한꺼번에 발사되었어.            (P557)  

   

하지만 우리는 명성을 누리지만 모호한 정복자인 짐이 기고만장한 이기주의의 손짓과 부름을 받고 질투 많은 연인의 품에서 자신을 떼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짐은 명예로운 행동이라는 허깨비와의 무자비한 결혼을 위해 살아 있는 여자를 버리고 떠났어. 짐은 이제 아주 만족하고 있을까? 궁금해. 우리는 알아야 해. 짐은 우리 중 한 사람이야. 게다가 한때는 나 역시도, 소환된 유령처럼, 짐의 영원한 충실함을 책임지기 위해 애쓴 적이 있잖아. 결국 나는 그렇게나 잘못 판단했던 건가? 이제 짐은 이 세상에 없지만, 짐이 존재할 거라는 현실적인 느낌이 아주 엄청나고 압도적인 힘으로 내게 다가오는 때가 있어. 하지만 맹세컨대, 이 현세의 열정 속에서 헤매다가도 망령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세계가 부르면 기꺼이 굴복할 준비가 된, 실체 없는 영혼처럼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들도 있어.

누가 알겠어? 짐은 속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죽었고, 그 가엾은 아가씨는 스타인이 집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며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어. 최근 들어 스타인은 무척 늙었어. 스스로를 늙었다고 느끼는 스타인은 자신이 수집한 나비 쪽으로 슬프게 손을 저으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어. 떠날 준비를.....> 이라고 종종 말해.            (P57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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