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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n 23. 2024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의 <돈 끼호떼>

영화 <돈키호테 맨 오브 라만차>  2015년

영화 <소피아 로렌의 라만차 돈키호테>(1972), <돈키호테>(2019), <돈키호테>(1992), <돈키호테>(1957)     

1604년 처음 출판된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도 "돈키호테"라는 이름에는 익숙하다. 전편과 후편을 10년 간격을 두고 쓴 『돈키호테』는 작가의 폭 넓은 인생관을 볼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로, 당시 유럽문화의 선두에 있었던 스페인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기사도 시기가 끝날 무렵의 스페인의 삶과 사상, 감정의 단면도를 주인공이 벌리는 희한한 모험과 좌절의 이야기를 통해 제공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같은 시기의 유럽의 두 거물 작가로, 우연하게도 두 사람은 1616년 4월 23일 같은 날 죽었다.     

 

에스빠냐의 대문호 미겔 데 세르반떼스가 1605년 “기발한 이달고 돈 끼호떼 데 라 만차”(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1권을 펴내고, 1615년 “기발한 기사 돈 끼호떼 데 라 만차”(El ingenioso hidalgo Don Quijote de la Mancha)라는 제목으로 2권을 펴낸 이래, 『돈 끼호떼』는 “근대 유럽어로 쓰인 최초의 소설 가운데 하나” “에스빠냐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 “인류의 책”(알베르 띠보데)이라는 평을 받으며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전유럽어권 문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1]

“싼초,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란 다른 사람보다 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네.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폭풍우 또한 곧 날씨가 잠잠해지고 일들이 잘 풀릴 거라는 징후이기도 한 걸세. 행운도 불행도 마냥 오래 갈 수는 없어. 그래서 나온 결론이 재난이 오래간다는 것은 행운이 벌써 가까이 왔다는 말이라는 걸세. 그러니 나한테 일어난 불행 때문에 고민하지는 말게. 자네는 이런 일과는 상관없으니.....”      (P241)     


“말해보게.” 돈 끼호테가 말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는 짧게 하게. 이야기가 길면 듣기 좋은 말이 없어.”              (P286)     


사실 나는, 순진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 마음을 억지로 꾀거나 홀리는 마술은 세상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사람 마음이란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 마음을 억지로 바꾸어 놓을 마술도 마약도 없는 걸세.                     (P302)      


“아이구머니!” 싼초가 말했다. “그러니까 로렌소 꼬르추엘로의 딸이 바로 엘 또보소의 둘시네야 귀부인 아씨라구요? 그 원 이름이 알돈사 로렌소구요?”

“바로 그렇지.” 돈 끼호떼가 말했다. “그녀야말로 온 우주의 여왕이라도 되실 만한 분이지.”

“소인이 그 여자를 잘 알구만요.” 산초가 말했다. “그 여자는 온 동네 힘센 청년들보다 힘이 더 장사여서 무거운 쇠절구질도 혼자 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지만요. 그 여자야말로 정말 가슴에 털 난 장정보다도 더욱 용감하고 멋진 나무랄데 없는 처녀지요. 세상에 어떤 방랑기사, 혹은 미래의 기사라도 귀부인으로 모시고 있는 한, 그에게 닥친 모든 어려움을 다 해결해줄 거구만요! 우와, 정말이지 그 여자 목소리하며 뚝심 센 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불쌍한 몰골의 기사님, 그 여자라면 나리께서는 정말 미칠 지경이 되시거나, 아니면 누구든 미치게 할 만한 처녀입니다요. 그뿐만 아니라 나리께서는 진짜 정당하게 절망에 빠지거나 목을 매도 좋으실 거라 생각됩니다요. 누구든 그걸 알면 나리가 저 지경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제기랄, 세상이 두 조각이 나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P362)   

  

왜냐하면 싼초 이 사람아, 자네도 모른다면 알아둬야 할 게 여자에게서는 단 두가지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의 마음을 자극하는 요소인데, 그건 바로 아름다움과 좋은 평판일세. 그런데 이 둘을 둘시네아는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 아름다움에서 어떤 여자도 둘시네아를 따라가지 못하고, 또한 좋은 평판에서도 누가 이 여자를 따라가겠는가.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내가 말한 모든 것이 하나도 틀림없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니까, 그녀의 아름다움이며 지체 높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상상 속에 그리고 있지.          (P364-365)   

  

‘문’(文)이 필요한 장소와 목적은....... 신학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만, 그 목표가 영혼을 하늘로 모시고 인도하는 일이지요. 이렇게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끝없는 목표를 지향하는 일이지요. 법학을 비롯한 인문 과학에 대하여 말하면, 분배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게 하고, 사람 하나 하나에게 자기 것을 주며, 좋은 법들이 지켜지도록 지혜를 짜고 실천하게 해야지요. 물론 대단히 칭찬할 만한 높고 관대한 목표가 있지요. 그러나 무인들이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武)는 인간이 이승에서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인 평화를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가장 훌륭한 새 소식은 우리의 첫날이 된 밤에 천사들이 공중에서 ‘선량한 사람들에게 하늘에는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이라 노래할 때였지요. 그리고 하늘과 땅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 자기에게 깨달음을 배우러 온 애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이 어느 집에 들어갈 때나 ‘이 집에 평화를’이라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또 많은 경우 ‘나의 평화를 드립니다. 나의 평화를 남기고 갑니다, 부디 그대 평안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지요. 마치 손에 쥔 가장 큰 보석이나 물건을 주고 가듯이 말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평화없이는 행복이 있을 수 없으니 평화야말로 보물이지요. 바로 이 평화가 전쟁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전쟁이란 말은 ‘무’라는 말과 똑같지요. 전쟁의 목적이 평화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그리고 이 점이 ‘무’가 ‘문’보다 낫다고 할 때, 이젠 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육체적 노력이 더 많은지, 무기를 쓰는 직업이 육체적 노력이 더 많은지, 누가 더 고생을 많이 하는지 봅시다.                  (P583-584)  

   

비록 그런 이상한 책들의 주된 목표가 재미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허무맹랑한 수많은 잡소리로 가득 채워놓고 그걸로 어떻게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우리의 영혼에 와 닿는 즐거움이란 우리의 시선이나 상상력이 앞에 놓인 사건이나 사물을 보고 감지하는 조화와 아름다움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어야 하거든요. 일컫는 사물 자체가 흉하고 흐트러진 모든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만족감을 줄 수 없지요.           (P725)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런 책들은 작가들이 다 거짓말로 쓰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꼭 섬세하게 진실성을 따져서 읽을 이유가 없고 변명한다면, 거짓말도 진실스러울 때 더욱 멋있는 법이며 사실일까 아닐까 의심스러우리만큼 실감이 날 때 더욱 재미있는 법이라고 대답해 주리다. 거짓 이야기도 그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의 생각과 맞아 떨어질 때 좋은 법입니다. 불가능한 이야기도 쉽게 말하고 위대한 행동도 평범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써야 독자들이 놀라고 긴장을 느끼고 미치고 재미있어하는 법이고, 그런 글을 읽을 때 즐거움과 경탄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에 있어서 자연의 모방이나 사실성을 떠나서는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없지요. 이런 작가만이 글쓰기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기사소설 중에 한 이야기의 총체가 그 책의 부분부분들과 일치하는 소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중간 부분이 처음과 통하고 마지막 장이 중간이나 처음 부분과 통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P727)  

    

“이러한 모든 것을 온화한 문체로 재치있는 창조력으로, 될 수 있는 한 사실에 가깝도록 묘사한다면 틀림없이 여러 가지 아름다운 매듭으로 곱게 짜인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겠지요. 끝내고 난 뒤에 작품의 그런 아름다움과 완벽성이 보이면 글쓰기가 요구하는 가장 훌륭한 목적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글이란 이미 내가 말했듯이 재미와 가르침이 함께 해야 좋은 것이거든요. 왜냐하면 이들 책에 풀어놓은 글은 작가로 하여금 더러는 서사시적으로 서정적으로, 혹은 희극적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거든요. 그 안에 지극히 달콤하고 즐거운 시와 연설의 예술을 내포하는 그런 부분들이 다 필요하니까요. 서사시라는 것은 시로 써도 좋고 산문으로 쓸 수도 있는 거거든요.”                     (P729-730)

[2]

“얘기하자면 서민들은요, 나리를 정말 대단한 미치광이로, 그리고 소인도 그에 못지않은 바보 멍청이로 본다는 겁니다요. 양반들 말을 들으면, 나리께서는 양반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이름 앞에 함부로 ‘돈’자를 붙이고, 재산이라고는 포도밭 네 개, 64헥타르 정도밖에 안 되는 땅 말고는 없는 양반이 자칭 ‘기사’인지 ‘신사’인지 하면서 앞에 누더기 하나, 뒤에 누더기 하나 붙이고 다닌다고 말이 많지요. 한편 기사들은 양반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벗하려 드는 걸 바라지 않습죠. 특히 구두에 반짝반짝 약을 칠하고 까만 스타킹 끝을 파란 비단으로 묶는 하급 양반들은 더 말할 나위 없고요.”                (P56-57)


“그러니까 시인 입장에서 쓰는 방법이 있고, 역사가 입장에서 쓰는 방법이 있지요. 시인은 일어났던 것을 그대로 쓰지 않고 그렇게 일어났으리라 상상하는 방식으로 쓴다면, 역사가는 그렇게 일어났으리라는 추측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진실 그대로를 적지요.”         (P65)     


“자신이 설교대에 서면 별것도 아니면서, 설교하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나 과장을 지적하는 데는 정말 도사인 신학자들이 많거든요.”             (P70) 

     

더구나 소인이 들은 바로는, 아마 제 기억이 맞다면 바로 우리 주인 나리께 직접 들은 것 같습니다만, 비겁이냐 만용이냐 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진정한 중용의 용기가 필요한 법이라고 했지요. 만일 이치가 그렇다면, 소인이 바라는 건 도망칠 상황이 아닌데 도망가서는 안 되고, 지나치다가 다른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덤벼들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P78)    

 

내가 한 말 중에서 결론적으로 꼭 알아야할 건, 이 바보같은 여인들아, 이 가문을 따지다보면 많이 혼란스럽다는 거야. 따라서 그들 주인의 부와 덕, 관대함으로 품위를 보여주는 사람들만이 참으로 위대하고 빛나 보인다 이 말이야. 내가 부와 덕, 관대함이라 한건 정말 큰 사람이 부덕하면 큰 불량배가 될 테니 하는 말일세. 부를 가진 사람은 그걸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그냥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그 부를 어떻게 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돈을 쓰는 게 아니라 잘 쓸 줄 아는 게 중요하지.                    (P98-99)    

  

“세상사도 연극과 다를 바 없어. 세상사에서도 어떤 사람은 황제 역할을 하고, 다른 사람은 교황을 하잖나. 연극 하나에 나올 수 있는 모든 인물상이 있지. 그러나 종말에 가면,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죽음이 와서 그 사람들을 구분하던 의상을 벗기고 무덤 속에서 똑같이 눕게 하지.”                     (P156)     


“요즘 은자들은 이집트 사막에서 야자수 이파리로 옷을 만들어 입고 땅에서 풀뿌리를 캐 먹고 살던 은자들 방식으로 지내지 않지. 내 말은 전자를 욕하고 후자를 칭찬한다고 받아들이면 안 되고, 그보다는 요즘 은자들의 고행은 옛 사람들의 시련과 빈곤함에 못 따라간다는 뜻이지. 요즘 은자가 다 좋다는 것은 아니야. 적어도 난 그들을 좋게 보거든. 세상이 온통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는 공공연한 죄인보다는 착한 척하는 위선자가 그래도 죄를 덜 짓는 법이지.”          (P300)  

    

탐욕이 많으면 자루가 터지지요. 탐욕스러운 통치자는 통치가 아니라 통 돼먹지 않은 재판과 정치만 하지요.                (P441)    

 

관행의 법칙에 따라 절대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자기들은 예리한 판단을 한다고 으스대는 무지한 자들이 많이 따르고 받아들이는 법칙이지.                 (P498)     


아무도 내 말을 장난이라 생각하지 마요. 우리는 좋아하건 싫어하건 뭐든지 분명하거든요. 우리 다 함께 삽시다. 그리고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먹고 삽시다요. 하느님이 아침 동을 틔우면 우리 모두에게 아침이 오는 거 아닙니까. 난 법을 침범하지도, 뇌물을 받지도 않고 이 섬을 통치할 것이며, 모든 사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자기 일만 잘하게 하도록 하리다. 항상 어딘가 혼란은 있기 마련이지만 나에게 기회를 준다면 정말 놀랍고 훌륭한 일이 있을 겁니다.          (P575)    

 

우리 주인이신 돈 끼호떼 나리께서 내가 이 섬의 총독이 되어 떠나기 전날 밤 다른 많은 충고와 함께 이런 말을 하셨어. 정당한 판단이 의심스러우면 포기하고 자비로운 쪽을 받아들이라고.                   (P606)  

    

“인생에 있어서 세상사가 항상 같은 상태로 오래가리라 생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생은 둥그렇게, 말하자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과 같다. 봄에 이어 여름이 오고, 여름에 이어 한여름이 오고, 한여름에 이어 가을이 오고, 가을에 이어 겨울이 오고, 겨울에 이어 봄이 오고 이렇게 세월은 끊임없는 바퀴를 타고 돌고 돈다. 오직 인간의 삶만이 세월보다 빨리 가벼운 발걸음으로 종말을 향해 치닫고, 다른 생에서가 아니면 다시 새로 시작되기를 기다릴 수 없다. 다른 생은 이를 확실히 규정한 용어가 없다.” 이것은 마호메트교 철학자 시데 아메떼가 한 말이다. 모두가 기대하는 영원한 삶의 영속성에 비해 현세의 삶은 이렇게 불안정하며 빨리 간다고 이해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신앙의 빛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천성의 빛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P626-627)      


“이걸 알아두게나, 싼초. 사랑은 그 말 속에 존경도 모르고 이성의 한계도 지키지 못하는 법이라네. 사랑은 죽음과 똑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왕들의 높은 성에도 침범하고 목동의 초라한 움막에도 들어가지. 그리고 한 영혼을 온전히 점령했을 때 제일 먼저 없애는 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이야. 그래서 알띠시도라가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 소망을 밝힌 건데, 그 말이 내 가슴속에 싹틔운 건 안타까움보다 혼란뿐이었어.”                (P679)     

내가 자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운수나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는 걸세.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일도 있지만 특별히 하늘의 명이나 운명의 섭리로 오는 것들은 없다는 게야. 여기서 우리가 늘 하는 말의 진실이 나오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의 창조자라고, 내가 내 운명을 만드는 사람이지.                (P777)     

여기 그 용맹성이 아주 극단에 치닫던 강력한 시골 양반이 누웠노라

죽음도 그의 삶을 죽임으로써 승리하지 못한 듯 보이도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얕보았던 그는 온 세상의 허수아비이며 무서운 도깨비였다, 

좋은 기회를 맞았던 그의 운명의 평판,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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