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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오퍼스> 2023년

by 노용헌

류이치 사카모토. 임종 전, 그의 음악 인생을 아우르는 20곡의 연주가 피아노, 조명만으로 가득한 무대에서 흐르고, 힘겨운 숨결과 함께 거장이 건네는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가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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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고들 합니다. 시간은 직선 위에 작품의 시작점이 있고 종착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제게 시간은 오랫동안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그래도 제 몸이 건강할 때는 시간의 영원함이나 일방향성(一方向性)을 전제로 하는 면이 어딘가에 있었는데, 생의 유한함에 직면한 지금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단순한 철학적 접근에서 벗어나, 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면 시간이 쓰는 속임수에 그대로 넘어가 버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하이데거, 베르그송 그리고 현대 물리학자들의 책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글들을 몇 년에 걸쳐 다양하게 읽어왔습니다.

좀처럼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제 안에서 한 가지 확실해진 점은 뉴턴이 제창한 ‘절대 시간’의 개념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절대 시간이 어떤 관찰자와도 무관한 존재이며 어떤 장소에서도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말하자면 뇌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는 것이 지금의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P27)


저는 기존의 가치관을 깨는 음악을 만든다는 평가를 자주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기성의 음악 공식을 따르는 행위를 즐기지는 않는 편이고, 이왕 할 것이라면 뭐든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가치관을 깬다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1960년대 전위예술과 같은 느낌이 들어 거기에도 거부감이 있습니다. 전위가 새롭고 후위는 낡았으며, 지식인은 진보적이고 대중은 보수적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이니까요. (P33)


인간의 수명이 80세에서 90세까지 길어진 것은 기껏해야 최근 30~40년 사이의 일입니다. 20만 년으로 알려진 인류의 긴 역사와 의료 시스템이 없던 시대를 생각하면 과연 무리해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괴롭고 힘든 치료를 거부하고 최소한의 케어만으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가치관을 조금 더 허용하는 세상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위스나 네덜란드의 합법적 안락사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 방사선 치료와 외과 수술을 받고 화학 치료까지 병행하려는 스스로의 모습에 모순을 느낍니다. 신체보다 의식이 훨씬 보수적이라는 사실에 고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스럽게 살다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것이 동물 본래의 순리이자 생명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인간만이 거기에서 벗어나 있죠.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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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달에게도 음악과 같은 힘이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교토의 가쓰라 별궁을 방문했을 때 정원 안에 오직 달을 보기 위해 지어진 ‘월파루’(月波樓)라는 암자가 있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에도 시대의 귀족들은 분명 밤이 되면 이곳에서 달을 바라보며 차와 술을 즐겼을 테죠. 지금이야 오래된 시골 건물이지만, 당시의 그들은 연못과 마침하게 맞닿아 있는 툇마루에 앉아 수면에 비친 보름달을 감상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음악에 귀 기울일 때 느끼는 편안한 감각과 닮은 느낌을, 달로부터 받지 않았을까요. (P54)


인간의 언어 기능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어란 것은 실제로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까지 틀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안개’라는 말을 들으면 안개라는 존재가 보이기 시작하고, ‘하늘’이란 말을 들으면 마치 하늘이 라는 이름으로 구획된 영역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꽃을 그리는 것만 봐도 그렇죠. 아마 많은 아이가 꽃잎과 암술, 수술을 그릴 텐데, 이러한 선택 역시 다분히 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래의 자연계는 모든 것이 이어져 있는데 언어에 의해 선이 그어지는 것이죠. 물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만,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인간이 범하는 오류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LIFE-fluid, invisible, inaudible...〉에서는 점차 변해가는 물의 형태를 그 총체로서 표현해보고 싶었죠. (P72)


인간이 오랜 시간을 거쳐 묵묵히 쌓아 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너절한 잡동사니가 되어버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거기에 무언가 조금 보태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바람이 스쳐 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에도, 우리는 꾸준히 음악을 만들어왔습니다. ‘자연에는 대적할 수 없다’는 전제를 인정하지만, 한편으로 거기에 두어 개쯤 자신의 소리를 더해 즐길 권리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지진이라는 재해를 계기로 그동안 막연히 품어온 가치관에 더욱 마음이 기울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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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망가져버린 ‘쓰나미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며 귀를 기울여보니 완전히 흐트러진 조율의 현이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취 있는 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피아노라는 것은 원래 목재라는 물질을 자연에서 가져와 철로 연결해 우리가 선호하는 소리를 연주하도록 만든 인공물이잖아요. 그러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나미라는 자연의 힘에 의해 인간의 에고가 파괴되어, 비로소 자연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P110)


포레를 집중적으로 들으며 그에 대한 불호를 극복한 것은 나이가 들며 일본 음악을 받아들이게 된것과 거의 똑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나이를 먹은 것의 영향도 있을 테고, 병에 걸려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진 상태에서 어떤 면으로는 과하다 싶은 그의 달콤한 멜로디가 새삼 사무치게 와닿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러나 뭐가 어찌 됐든,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역시 옳지 않은 일이구나, 하고 반성했습니다. 고집이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가능성을 좁힐 수 있음을 통감했죠. 충분한 여유 시간을 갖게 되면서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이었습니다. (P198)


그토록 엄격했던 이냐리투 감독에게 끝까지 제 주장을 밀어붙였던 부분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중반부, 죽을 뻔했던 주인공이 움막 안에서 몸을 추스르다 꿈과 현실의 사이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아들과 재회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환상적이며 감동적인 이 장면에 어떤 음악을 쓰느냐를 두고 격론이 오갔고, 마감 직전까지 그 곡을 붙들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냐리투 감독은 결국 가이드로 사용한 음악을 선택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큰맘 먹고 이냐리투 감독에게 “Trust me!”(날 믿어줘요!)라고 말하고, 녹음까지 밀어붙여 최종적으로는 제 곡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비교적 반응이 좋아, 저는 영화가 완성된 후 가슴팍에 ‘Trust me’라는 대사를 적고 그 아래에 ‘THE REVENANT Music Team 2015’라는 문구를 넣은 티셔츠를 만들어 전 스태프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등 쪽에는 ‘6M23’이라는 그 장면과 곡의 번호도 넣었고요. 이 티셔츠는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P215)


아마도 인간의 뇌의 습성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는 밤 하늘의 별을 보면 무심코 반짝이는 점과 점을 이어 별자리를 그리곤 합니다. 실제로 그 별들은 몇 만 광년씩 떨어져 있을 텐데. 마치 같은 평면상에 있는 것처럼 인식해버리죠. 마찬가지로, 새하얀 캔버스에 하나의 점을 찍고, 두 번째 점을 찍으면 우리는 또 그 두 개의 점을 직선으로 이어냅니다. 거기에 세 번째 점을 찍으면 이번에는 삼각형을 만들어 버리고요. 이는 음악에도 똑같이 적용되는데 <레버넌트>의 메인 테마를 예로 든다면, 시작할 때 울리는 그 두 개의 음만으로도 우리는 의미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P223-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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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음악은 소리와 소리의 관계를 치밀하게 구축하는 방식으로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번 새 앨범을 만들 때만큼은 그와 정반대의 방법론에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제작을 시작했을 때에는 뉴욕 길거리에서 주운 돌을 툭툭 두드리고, 스윽스윽 문질러가며 그 소리들을 녹음해 그야말로 음악으로서의 ‘모노파’의 실현을 시도했습니다. 한여름에 교토에 가서 매미 소리가 가득한 산에서 필드 레코딩을 하기도 하고, 프랑스의 바셰트 브라더스의 음향 조각 소리를 녹음하기도 하고, 미국인 조각가 해리 베르토이아(Harry Bertoia)의 음향 조각의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맨해튼의 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P225)


〈설치음악전〉의 메인 회장에서는 제가 신뢰하는 독일의 오디오 브랜드, 무지크 일렉트로닉 가이타인에서 만든 스피커를 사용해 《async》의 전곡을 5.1ch 서라운드로 들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한 음, 한 음에 각기 다른 스피커를 할당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비록 환상일지라도 최대한 현실 세계의 소리에 근접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궁리를 했습니다. 봄이 되면 시골 논밭에 있는 수백 마리의 개구리들이 일제히 소리 내어 울지만, 사실 각각의 개체마다 우는 음정도, 리듬도 모두 다를 것입니다. 빗소리를 들을 때도 인간은 버릇처럼 일정한 규칙성을 발견 해내지만, 사실은 바람과 강우량 등에 따라 불규칙하게 내리는 ‘비동기’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앨범 전반에 걸쳐 ‘사물 그 자체의 소리’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 전시에서는 가능하면 그런 자연계의 소리 환경을 재현하고 싶었습니다. (P230)


아이들에게 병에 대해 고백한 뒤로는 마음이 깔끔하게 정리돼, 비교적 냉정하게 죽음을 내다보며 여러 가지 구체적인 검토를 해나갔습니다. 일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계속 호텔 생활만 할 수도 없었기에, 거주지를 어떻게 할지, 만약 금방 죽는다면 누구에게 부고를 전해야 할지, 장례식은 어떤 형식으로 치러야 할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제 의사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으니까요.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 이후의 활동을 돌아보며 살아 있는 동안 이 연재를 위한 구술 필기를 마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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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본 적 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은 더 이상 단순한 이국이 아닙니다. 저에게 일리야는 우크라이나와의 인연을 맺어준 소중한 사람이었고 아직 직접 만난 적조차 없지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이 없는 나라의 일은 모른 척해도 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지만요. 그러나 세계 어디든 그곳에 사는 누군가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순간, 뉴스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어느 시기부터인가 제 사회적 활동에 “이름을 판다”라는 야유를 듣는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중략)

일본에서는 아직도 예술가 등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대한 세간의 거부감이 존재합니다만, 저는 그날 이후 ‘만약 내가 정말 유명해 팔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습니다. 설령 위선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해도, 그로 인해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환경에 관한 운동도, 지진 재해 후 활동도 이런 신념의 힘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한번 연결되면 쉽게는 그만둘 수 없죠.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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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창밖에서 ‘부스럭부스럭’ 낯선 소리가 나길래 내다보니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잡아온 작은 새를 먹고 있더군요. 날개를 뜯어가며 먹어 치우는 모습이 섬뜩하기는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또한 자연의 섭리죠. 땅 위에 이리저리 떨어져 있던 작은 새의 뼈는 다음 날이 되자 깨끗이 사라져 있었는데, 아마도 근처의 고양이가 물어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도 절감했지만 본래 자연계의 주역은 동물과 곤충과 식물로, 우리 인간이 그 한 귀퉁이를 잠시 빌려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택가에 원숭이 출현’ 같은 뉴스 기사가 종종 나오는데, 그것은 거꾸로 된 이야기로, 원래 원숭이의 서식지였던 곳에 우리가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P343)


지금까지 발표해온 다른 오리지널 앨범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이 앨범은 어떤 확고한 콘셉트를 토대로 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싱겁게 연주했던 신시사이저와 피아노 음원을 한 장의 앨범에 담았을 뿐, 그 이상의 무엇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이처럼 어떠한 계획도 없이 만들어진 날 것 그대로의 음악이 더 만족스럽게 느껴집니다. 이것으로 저의 이야기는 일단 마칩니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P355)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모르니 우리는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은 무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극히 적은 횟수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어린 시절의 그 오후를, 앞으로 몇 번 떠올릴까? 그것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깊은 곳에서, 지금의 자신의 일부가 된 그 오후마저, 아마 앞으로 네 번, 혹은 다섯 번일 것이다. 아니, 더 적을지도 모른다. 보름달이 뜨는 것을 보는 일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아마 스무 번이려나. 그리고, 그럼에도, 무한한 횟수가 있다는 듯 생각한다. (P358-359)


2021년 1월의 보름달은 29일에 떴다. 수술 후였다. 기록을 보니 그날의 하늘은 맑았다. 그때부터 2023년 3월 7일까지 보름달이 떴던 모든 날, 도쿄의 하늘이 맑았다면 이론적으로, 사카모토 씨는 스물일곱 번의 보름달을 볼 기회가 있었다. 실제로는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아무튼 사카모토 씨가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보름달의 밤, 그다음 날에 나는 그가 있는 도심의 호텔을 찾았다. 약속은 오후 두 시 반이었다.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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