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라질에서 온 소년> 1978년
1976년 발간된 아이라 레빈(Ira Levin)의 소설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을 프랭크린 J. 샤프너 감독(1920~1989)이 영화화했다. 인간무성생식을 통해 제2의 히틀러, 즉 복제인간을 만들기 위한 남미의 나치 잔당조직의 음모에 맞선 유태인 학자의 활약을 그린 스릴러 드라마이다. 로런스 올리비에가 리베르만 역을, 그레고리 펙이 멩겔레 박사 역을 맡았다. <잔혹한 음모>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카데미상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상과 새턴상 등에도 후보로 올랐다.
1974년 9월 어느 이른 저녁, 브라질의 상파울루 콘고냐스 비행장 활주로로 작은 은빛 쌍발 제트기 한 대가 미끄러지듯 착륙했다. 기체는 곧 검은 리무진이 대기하고 있는 격납고 쪽으로 난 유도로를 따라 천천히 굴러갔다. 기체의 트랩에서 세 명의 사내가 내렸다. 가운데 선 한 사내는 발끝부터 머리에 쓴 모자까지가 온통 눈부신 흰색이었다. 그들을 태운 리무진은 곧 비행장을 빠져 나와 상파울루 중앙부에 위치한 하얀 마천루를 향해 질주했다. 약 20분 후 리무진은 이피랑가 거리에 있는 일본 식당 <사카이> 앞에 멈춰 섰다. (P11)
아스피아주는 서류를 보며 말했다.
“대상자는 서독에 16명, 스웨덴에 14명, 영국에 13명, 미국에 12명, 노르웨이에 10명, 오스트리아에 9명, 네덜란드에 8명, 그리고 덴마크와 캐나다에 각각 6명씩 있소. 모두 합치면 정확하게 94명이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사람은 금년 10월 16일이며, 가장 나중에 죽을 사람은 1977년 4월 23일이 되오. 물론 정해진 날에서 며칠 간의 오차는 허용될 수도 있소.”
그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눈앞의 사내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침묵이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왜 죽여야만합니까? 그리고 왜 특정한 날에 그들이 죽어 줘야만 합니까?”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오, 언젠가는 여러분도 알게 될 것이오. 다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은 나와 우리 조직의 지도자들이 지난 수년 간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서 추진해 온 작전의 마지막 단계라는 점이오. 여기에 우리 조직의 모든 운명이 걸려 있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중대한 일이오. <중대하다>는 말만으로는 오히려 모자랄 정도요. 슬라브족과 셈족, 흑인종과 황인종 모두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아리아족의 운명과 희망이 이 작전에 달려 있소. 조금도 과장이 아니오. 그러니 이 작전을 어찌 <중대하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있겠소? 맞았소. 여러분이 참가하는 이 작전은 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소.” (P24-25)
“듣지 않겠소. 당신은 버스 정류장에서 마틴 보만을 만난 모양이군?”
“보만이 아니라 멩겔레요. 내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의 목소리를 녹음기에 담았어요.”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우슈비츠에 있었던 그 멩겔레 박사 말이오? 죽음의 천사?”
“그렇습니다.”
배리가 얼른 말했다.
“나는 그를 정글로 쫓아 버렸는데..... 요제프 멩겔레라면 잘 알아요.”
“당신은 그를 너무 풀어 놓고 있었어요. 그는 정글에서 나왔답니다. 오늘밤 일본식 레스토랑에 나타났어요. 그가 아스피아주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지 않나요?”
“그는 꽤 많은 가명을 가지고 있지, 조지 피셔, 브라이턴 바하, 또 린돈.....”
“아스피아주란 가명은요?”
상대방은 잠시 조용해졌다.
“그렇소. 하지만 그런 본명을 가진 사람이 그곳에 나타났을 수도 있지.”
“그럴 리가 없어요! 거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절반은 에스에스 친위대 출신이었어요. 아스피아주라 불린 사내는 그들을 94명을 살해하는 음모에 내보내려고 하고 있었소. 헤센과 클라이스트가 거기에 있었고, 트라운슈타이너와 문트도 그들과 함께 있었어요.” (P52)
리베르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초점 없는 눈길을 베이논에게 돌렸다.
“몇 주 전 한밤중에 말이오. 일리노이 주 출신 청년 하나가 상파울루에서 전화를 걸어 왔었소. 멩겔레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거였소. 멩겔레가 누군지는 알고 있죠?”
“당신이 현상수배한 나치 전범 중의 하나가 아닌가요?”“나의 수배범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수배범이죠. 독일 정부는 아직도 그에게 6천 마르크를 걸어 놓고 있소. 그는 아우슈비츠의 우두머리 의사였죠. <죽음의 천사>라는 악명을 지니고 있지. 의학박사이며 철학박사이기도 했소. 우수한 아리아인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유전자의 화학적 처리를 통해 갈색 눈을 푸른색으로 만들려고 시도했소. 그는 그 실험을 위해서 수천 명의 쌍둥이 아이들을 죽였소.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이건 유대인이 아닌 간에 가리지 않고 수천 명의 쌍둥이를 실험용으로 사용한 거요. 박사학위를 두 개나 가진 인간이! 그런 기록들은 내 책에 모두 수록되어 있소.” (P63-64)
그는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단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뿐이었소.> 그는 두 번째 줄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의 부모와 누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 강제 수용소에서 보낸 비참한 시절에 대한 복수심이 동기가 되었소.> 그는 시선을 뒤쪽으로 옮기며 계속했다. <모든 죽음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비참한 시간에 대해서 복수를 하는 일에 내가 왜 인색해야 합니까?> 그는 잠시 청중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빈은 확실히 다른 구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몇 군데에서 조그마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는 약간 미소를 짓고는 오른쪽 뒷줄에 앉아 있는 갈색 머리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딘지 배리 쾰러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복수의 가장 곤란한 점은> 그는 배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들이 그 이유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리를 닮은 청년에게서 눈을 돌려 전체 청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해를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 소용도 없소. 그래서 나는 복수보다는 더 나은 것을 원합니다. 그것은 기억입니다.> 그는 이 말을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다녔다. <기억! 그러나 인생이란 것은 계속해서 흘러가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 또한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매년 우리 인간들은 새로운 위험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베트남 사태, 중동과 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 암살..... (65세 된 94명의 사람들도?) 그러나 이제 그런 공포마저도 우리들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과거를 잊어버린다면, 인간은 다시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할 운명에 처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히만과 멩겔레를 체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잠시 당황하며 더듬거렸다. (P83-84)
그는 또 누군가를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나치주의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그는 재빨리 대답했다.
“나치주의의 부활에는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1930년대 초기와 같은 사회적 여건의 악화와, 히틀러와 같은 지도자의 출현이 그것이죠. 이 두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다면 세계 곳곳의 신나치주의 단체들은 위험의 초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특별히 경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P87)
거울에 비쳐서 여러 명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 차림의 아이가 문을 닫고 열쇠를 채우는 모습이 보였다. 리베르만은 거울에 비친 영상이 아닌 진짜 소년을 돌아보며 물었다.
“되링 부인은 계시니?”
“지금 전화중이세요.”
소년은 리베르만의 모자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모자를 소년에게 맡기며 리베르만이 물었다.
“너는 그분의 손자냐?”
“아들이에요.”
소년은 그의 어리석은 질문을 비웃는 듯했다. 소년이 거울이 달린 옷장 문을 열었다.
리베르만은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으며 거실쪽을 돌아 보았다. 잘 정돈된 상점처럼 깨끗하고 조화있게 꾸며 놓은 거실이었다. 그가 웃으며 코트를 벗어 주자, 소년은 그것을 옷장 속에다 걸었다. 소년의 키는 리베르만의 가슴께 정도였는데, 행동이 의무감에서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옷장 안에는 몇 개의 코트가 걸려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표범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박제한 큰 까마귀 같은 새가 선반 위의 모자와 상자들 사이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저 뒤에 있는 게 새냐?”
“네, 아빠 것이에요.”
소년은 옷장 문을 닫으며 연한 파란색 눈으로 리베르만을 돌아보았다.
“아저씨는 나치들을 잡으면 다 죽이나요?”
“그렇지 않아.”
그는 약간 당황해서 대답했다.
“왜 안 죽여요?”
“그건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지. 그들을 재판대에 세우는 일이 더 좋은 일이란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알게 되지.”
“무엇을 알게 되는데요?”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P147-148)
여자는 치를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리베르만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부인.”
“그러면 왜 나치가 그를 죽였다고 생각하시죠?”
“그런 정보가 있었습니다.”
“거짓 정보예요. 제 말을 믿으세요. 나치는 에밀을 오히려 좋아했을 거예요. 그는 반유대주의자였고, 반가톨릭에다 반자유주의자였으며,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해서 반대했어요. 에밀 되링, 자기 자신만 빼고는 말이죠!”
“그는 나치였습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죠. 자기 말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난 그를 1952년도에 만났어요. 그러니까 장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아니었을 거예요.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결코 어떤 단체에도 가담하려 하지 않았어요.” (P153)
“호오, 대단한 두뇌로군. 자네에 관해서 얘기해 보게. 어떻게 그처럼 명석한 두뇌를 타고났나?”
“제 자신에 대해 말씀드리면 아마 놀라실걸요. 리베르만 선생님,”
리베르만은 그가 하는 얘기를 심각하게, 그리고 동정적으로 들었다.
클라우스의 부모는 나치였다. 그의 어머니는 히틀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그의 아버지는 나치스 공군 대령이었다.
리베르만에게 도움을 준 많은 청년들이 이전 나치의 자식이라는 사실은 그에게 신이 엄연히 존재하며 계속 역사하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다만 그 역사가 너무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P167)
소년은 에리히 되링의 엷은 푸른색 눈동자로 리베르만을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엇으로 그리 유명하세요?”
“그분은 나치를 잡는 일을 하고 계셔. 지난 주에 텔레비전에서 보지 않았니?”
커리 부인이 대신 대답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야!>
리베르만은 자신도 모르게 독일어로 소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영어로 소년에게 물었다.
“너는 자신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너와 똑같이 생긴 아이가 독일의 글라드벡이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단다.”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똑같아요?”
“똑같아! 이렇게 닮은 아이를 본 적이 없어. 쌍둥이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야!”
“잭, 침대로 돌아가거라. 주스는 엄마가 방으로 갖다 줄게.”
커리 부인이 냉장고 옆에서 주스 병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소년은 머뭇거렸다. (P180)
너무나 놀라웠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두 아이의 여윈 얼굴과 의아해하는 표정까지 똑같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아버지가 둘 다 65세의 공무원이었으며 한 달 간격으로 살해된 것까지가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들의 나이도 거의 같다. 마흔 한두 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운전대가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리베르만은 빠르게 움직이는 와이퍼 사이로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대를 바로 잡았다. <이거, 정신차려야지.>
우연의 일치로 돌리기에는 너무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죽은 남편의 너그러움을 칭찬한 레녹스의 커리 부인과 정숙의 표본은 아닌 것 같은 글라드벡의 되링 부인이 각각 그들의 아들이 태어나기 열 달 전에 얼굴이 야위고 코가 날카로운 남자와 정사를 가졌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이나 한 일인가? 설사 그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 에센과 보스턴 사이를 오가는 루프트 한자 항공사의 파일럿이라면! -- 그 아이들이 쌍둥이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데 두 아이는 거의 완벽하게 닮은 것이다.
“쌍둥이라.......”
그것은 멩겔레의 주요 관심사였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그의 실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P181-182)
22일 수요일 아침, 리베르만과 파슬러는 변호사의 은색 스포츠카를 타고 프리다 맬로니가 1973년 미국으로부터 인도된 이래 계속 감금되어 있는 뒤셀도르프 연방 형무소로 달려갔다. 파슬러는 건장하고 차림새가 단정한 50대 중반의 사나이로, 그의 뺨은 늘 불그스레하게 혈색이 좋았다. 그는 면회 절차를 밟을 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서명을 하면서, 평소의 그 거드름 피우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P199)
“..... 그들은 나에게 돈을 주며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나는 그들에게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도록 시켰죠. 절대로 아이에게 입양된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말이죠. 아기는 언제나 아들이었어요. 맹세가 끝나면 그들은 아기를 데려갔죠.”
리베르만이 물었다.
“그 아기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오?”
프리다 맬로니는 시선을 돌렸다.
“브라질에서 왔어요. 아이를 데려온 사람들이 모두 브라질인이었어요. 스튜어지스도 브라질 항공사 소속이었구요.”
그녀는 파슬러가 가져온 주전자를 받아 컵에다 물을 따랐다.
“브라질에서라구......”
프리다 맬로니는 물을 마시고 컵을 내려놓으며 입술을 핥았다.
“모든 일이 항상 시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되었어요. 딱 한 번, 부부가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죠. 전화를 했더니 그 사이에 마음이 변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아기를 집으로 안고 왔다가 다른 부부에게 주었죠. 물론 서류도 새로 작성했어요. 남편에게는 러시 개디스 사무실이 너무 혼잡해서 아기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고 설명했죠. 남편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지금까지도 모르고 있죠. 나는 약 20명의 아기를 입양시킨 것 같아요. 처음 몇 명은 간격이 비교적 좁았지만, 그 뒤로는 두어 달만에 한 명씩이었죠.” (P208)
1월 31일 금요일 저녁, 멩겔레는 멩겔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경호원 2명과 함께 비행기로 산타카타리나 섬 플로리아노폴리스로 날아갔다. 그곳은 상파울루와 포르투알레그레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었다. 거기에 있는 노브 함부르고 호텔 무도장은 이번 행사를 위해서 나치 휘장과 붉고 흰 종이 테이프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아들들>이란 단체가 한 사람당 1백 크루자이로씩 하는 만찬 무도회를 이곳에서 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장소에 멩겔레 자신이 모습을 나타내다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거물 나치이며 제3제국의 중추로서 세계적으로 그 명성이 높은 이런 인물은 보통 후배들을 하찮게 여기는 속물근성을 드러내며 건강이 안 좋다거나 혹은 그들의 지도자인 한스 스트루프를 은근히 비판하면서 -- 그들조차도 한스가 너무 히틀러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 초대에 응하기를 거절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멩겔레 박사 자신이 몸소 이런 장소에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볼에 키스를 하고, 환하게 미소지으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얼마나 영광일 것이냐! 게다가 그는 또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가!
실제로 또 그랬다. 안 그럴 이유라도 있는가? 오늘은 31일인 것이다. 내일이면 그는 차트에다 또 다른 네 개의 빨간 체크 표시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첫번째란의 절반인 18명을 채우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요즈음 거의 모든 무도회와 파티에 참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11월과 12월 초에 그 못된 유대인 놈 리베르만이 그의 모든 계획을 망쳐 버릴 것처럼 보였던 그 기간 동안 그가 겪었던 고뇌와 우울함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샴페인을 조금씩 마시며 멩겔레는 찬탄할 만한 아리아인들로 가득한 -- 개중에는 나치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들도 있었다. -- 무도장을 돌아보며 지난 두 달 동안 빠져 있었던 음울한 기분을 생각하며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 추진하고, 그리고 조직이 자신을 배신할 때에는 -- 그때 그들이 그러려고 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 재빨리 그에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리베르만은 문트를 프랑스로 끌고 갔고, 슈빔머를 영국의 엉뚱한 도시로 가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미국의 그 앞잡이 녀석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고맙게도 모근 것을 포기하고 그의 사무실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미국 녀석이 리베르만에게 테이프를 미처 들려주기 전에 녀석을 처치해 버린 것도 신에게 감사할 일이었다. 그 덕택에 우리는 지금 이렇게 샴페인을 마시며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참석한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정말 고마운 일이라구! 그러나 리베르만 녀석은, <뉴욕 타임즈>에 의하면 미국이란 황야에서 시시껄렁한 강연 따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뭐, 유대인에 의한 과대 선전이라는 걸 의식하고 읽어 보면 아주 별 것도 아닌 것이다. 게다가 거기는 지금 겨울이다! 눈이나 펑펑 쏟아져 버려라! 신이여, 눈이 펑펑 내리게 하소서! (P217-219)
뉘른베르거는 접는 의자에 앉아 깍지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몸을 편안하게 흔들며 말했다.
“죄송하오만, 나는 당신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뉘른베르거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핵 재생이란 개별적인 유기체를 유전적으로 똑같이 복제해서 증식시키는 것입니다. 생물학을 조금은 공부하셨겠죠?”
“아주 약간, 그것도 45년 전이오.”
뉘른베르거는 젊은이답게 웃었다.
“그때는 영국의 생물학자인 홀데인에 의해서 이런 가능성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던 때죠. 그는 이것을 <클로닝>이라고 불렀어요. 식물의 <꺾꽂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죠. 단핵 재생이란 말이 훨씬 더 명확한 용어죠. 왜 옛날 용어가 있는데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내느냐구요?”
“클로닝이란 단어가 더 짧은데요.”
클라우스가 말했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더 많은 음절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더 정확히 표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용어가 아닐까?”
리베르만이 말했다. (P238-239)
리베르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공무원이었소. 세관원이었지.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52새였소. 그의 어머니는 스물아홉이었고.”
그는 들고 있는 책이 무겁게 느껴지는지 놓을 자리를 찾고 있었다. 책을 스토브 위에다 놓고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문질렀다.
“그의 아버지는 65세에 죽었지. 히틀러가 열세 살, 거의 열네 살이 되어 갈 무렵에.”
그들은 식탁 위의 것들을 그대로 놓아 두고 옆방으로 가서 앉았다. 리베르만과 클라우스는 침대 겸용의 긴의자에 앉았고 뉘른베르거는 접는 의자에, 그리고 레나는 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들은 빈 유리잔과 당근과 아몬드를 담은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서로를 힐끗힐끗 돌아보기도 했다.
클라우스가 아몬드 몇 개를 집어올려 손바닥에 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퉁기며 장난을 했다.
“94명의 히틀러,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리베르만이 중얼거리고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P249-250)
멩겔레는 기침을 한 번 한 뒤 휠록에게 말했다.
“당신을 찾아오고 있는 나치는 멩겔레 박사입니다. 그 자는 아마 여기로......”
“박사라구요?”
휠록이 성냥불을 흔들어 껐다.
“그렇소, 휠록 씨, 멩겔레 박사요. 이 개들은 완벽하게 훈련되어 있군요. 저 상장이나 트로피를 보면 알 수 있죠. 그런데 사실 나는 8살 때 개한테 물린 적이 있습니다. 도베르만이 아닌 독인 셰퍼드였죠.”
그는 왼쪽 넓적다리를 만져 보이며 말을 계속했다.
“이쪽 다리 전체가 흉터투성이죠. 정신적인 충격도 컸습니다. 그래서 방안에 개가 한 마리만 있어도 불안한데, 이건 네 마리나 되니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휠록이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작 말씀을 하실 것이지.”
그는 일어나서 손가락을 탁 튕겼다. 개들이 벌떡 일어나서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개들을 소파 옆에 나 있는 문으로 몰아갔다. 개들을 문 밖으로 몰아 낸 그는 문을 닫고 손잡이를 돌렸다. (P292)
이층집에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무척 요란하게 들려왔다. 흰 셔터 문과 갈색 지붕의 건물이 비스듬한 각도로 리베르만의 눈에 들어왔다. 건물 뒷마당의 철조망 우리 속에서 개들이 길길이 날뛰며 짖어대고 있었다.
리베르만은 자갈이 깔린 보도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기어를 중간에다 놓았다. 키를 돌린 다음 사이드 브레이크를 바짝 당겨 놓았다. 개들은 계속 짖어대고 있었다. 건물 옆에 있는 차고에 발간 소형 트럭과 하얀 세단이 주차해 있었다.
리베르만은 차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잘 단장된 이층집을 살펴보았다. 갈색으로 칠을 한 건물에 하얀 테두리를 친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휠록을 보호하기는 쉬운 일로 여겨졌다. 저렇게 짖고 있는 개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경보장치가 아닌가. 게다가 휠록을 보호해 줄 사람들도 온다. 살인자는 마을 안에서나 아니면 노상에서 행동을 할 것이다. 휠록은 평소대로 행동해서 살인자가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한다. 너무 겁을 줘서 휠록이 집안에만 틀어박히게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가 단지 Y.J.D의 보호를 수락할 정도로만 겁을 줘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
리베르만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현관에 올라섰다. 문에는 개의 머리 모양인 문고리가 달려 있었고, 그 옆에는 까만 초인종이 달려 있었다. 리베르만은 문고리를 잡고 두 번 두드렸다. 오래되고 단단한 것이었으나 소리가 별로 크지 않았다. 리베르만은 잠시 기다렸다가 -- 집안에서도 개소리가 들려 왔다 -- 초인종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생각했던 것보다는 덩치가 작은 남자가 나타났다. 짧게 자른 회색 머리, 유쾌하고 활기에 찬 갈색 눈동자의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리베르만이오?”
“그렇습니다. 휠록 씨입니까?”
회색 머리가 끄덕이고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시오.”
집안으로 들어서니 개 냄새가 훅 풍겼다. (P300-301)
<이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치가 있소.> 리베르만은 서류가방을 다시 무릎 위로 올려놓으며 말했다. <예전에 친위대원이었던 자가 프리다 맬로니로부터 아이를 받은 아버지들을 살해하고 있소. 입양이 이루어진 순서대로 아이들의 아버지들을 죽이고 있단 말입니다.> 리베르만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당신의 차례요, 휠록 씨, 앞으로는 더 많은 살인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F.B.I에게 이 사건을 의뢰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당신을 보호하려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개들보다 더 안전하게 당신을 보호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리베르만은 소파 너머의 문 뒤쪽에서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들을 돌아보았다. (P305)
“모른다구요? 살인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 리유를 모른다구요?”
휠록이 아닌 나치가 묻고 있었다.
휠록은 다시 <리유>라고 발음했다. 살인자들은 대개 50대였는데, 이자는 거의 65세는 되어 보인다. 멩겔레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브라질이나 파라과이에 있을 것이다. 감히 북쪽으로 올 수가 없다. 펜실베이니아의 뉴프로비던스까지 올라왔을 리가 없다.
리베르만은 머리를 흔들었다. 멩겔레가 아니다. 그러나 쿠르트퀼러가 브라질에 있다가 워싱턴으로 왔다. 그의 이름은 배리의 여권이나 지갑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첩의 표지 뒤에서 권총이 불쑥 나와 그를 겨누었다. 총을 든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이유를 설명드려야겠군.”
리베르만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을 길고 더 진한 색으로 바꾸고, 콧수염을 붙인 다음 얼굴의 주름살을 폈다.... 멩겔레, 그렇다. 멩겔레가 분명했다! 이 가증스러운 놈! 그토록 오랜 세월을 추적했던 죽음의 천사, 어린 아이들의 살인마! 그놈이 여기에 앉아 있다니, 웃으며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그럼, 말도 안 되지, 네놈을 무지 속에 죽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는 일이지. 20년쯤 후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지. 그 얼어붙은 듯한 눈길은 이 총 때문인가, 아니면 나를 알아보았다는 뜻인가?”
멩겔레는 독일어로 말했다.
리베르만은 눈을 한 번 껌뻑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널 알아봤지.”
멩겔레는 빙그레 웃었다. (P306-307)
멩겔레는 빙그레 웃었다. <알겠어? 모든 것이 다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단 말이야. 신은 내 편이지. 오늘 새벽 1시에 내가 무엇을 봤는지 알아?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신 히틀러 총통을 뵈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했다. <내가 의기소침하며 거의 자살하고 싶은 그 순간에 말이야. 그것이 하늘의 계시가 아니라면, 이 세상에 계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 그러니까 창 밖을 보느라고 괜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게나. 눈을 똑바로 뜨고 내 말을 들어 봐. 그분은 살아 계시지. 이 사진첩 안에는,> 그는 리베르만과 총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다른 손으로 사진첩을 가리켰다. <그분의 사진들이 가득차 있지. 한 살 때부터 열세 살까지의 사진들로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겠어. 시간 낭비지. 자네가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가 어렵거든. 아무튼 내 말을 잘 들어 둬. 난 그것을 이루어 놓았단 말이야. 정확하게 유전적인 복제 인간을 말이지. 그들은 내 실험실에서 잉태되어 아우이티 종족의 건강한 여자들 몸에 옯겨져서 분만되었지. 그 소년들은 그 여자들을 전혀 닮지 않았어. 그들은 그분의 세포에서 나와서 길러진 수수한 히틀러야. 그분은 황공하옵게도 나에게 반 리터의 혈액과 갈비뼈 부분에서 약간의 피부를 채취하도록 허락하셨어.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얘기처럼 그분의 갈비뼈에서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그런 기분이었어.> (P308-309)
멩겔레는 파라과이인 라몬 아슈하임 네그린이란 가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휠록을 죽이고 리베르만에게 총상을 입힌 다음 휠록의 개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휠록의 열세 살 난 아들 보비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곧 경찰에 전화를 했다. 경찰이 도착한 직후에 찾아온 5명의 사내들은 자신들이 Y.J.D 단원들이라고 정체를 밝혔으며 리베르만의 친구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리베르만을 만나 워싱턴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슈하임 네그린이 나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그와 리베르만이 왜 휠록의 집에서 만났는지, 그리고 휠록이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경찰은 리베르만이 회복되면 이 사건에 대해서 분명한 설명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P333-334)
소년은 붓 끝을 뾰족하게 해서 가까이에 있어 크게 보이는 사람들의 입을 그렸다. 사람들은 이제 환호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 사람을 향해 환호하고 있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가! 그들은 모두가 그를 사랑한다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소년은 날카로운 코가 종이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앞부분의 작은 사람들에게도 점을 찍어 그들의 입을 그려 주었다. 그의 앞머리가 흘러내렸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으며, 파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변해 있었다.
점, 점, 점..... 소년이 점을 찍어 나감에 따라, 군중들의 환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그를 사랑하는 열광적인 군중들의 환호 소리가 그의 가슴을 천둥처럼 쿵쿨 울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쿵, 쿵, 쿵, 쿵.
그것은 마치 오래 된 히틀러의 영화를 볼 때의 그 기분과 흡사했다. (P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