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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Jul 24. 2024

제임스 매슈 배리의 <피터팬>

애니메이션 <피터팬: 후크 선장과 결투의 날>  2019년

실사 영화 <피터 팬>(2004), <피터팬 : 전설의 시작>(2014), 애니메이션 <피터 팬>(1957)  

   

소설 <피터와 웬디>는 주요 인물인 피터 팬 덕분에 유명해졌으나 오늘날까지도 원작으로는 잘 읽히지 않고 있다. 물론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피터 팬을 알고 있지만 그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바르 갈리엔, 진 아서, 메리 마틴과 같은 여배우들이 피터 팬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연극 무대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피터 팬을 접한다. 사실 어린이와 어른 대다수가 피터 팬과 그 주변 인물들을 알게 되는 건 디즈니 도서, 텔레비전 각색물, 피터 팬 관련 각종 상품, 피터 팬의 현지어 상연,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후크>를 통해서다. 따라서 J.M. 배리의 소설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과 <피터와 웬디>(1911), 희곡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1928년 최종본)을 원작으로 읽어본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J.M. 배리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터 팬을 창조해 낸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는 흥미로운 이력을 갖고 있으며, 이를 알면 자라길 거부하는 소년 피터 팬이 왜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P7-8)  

   

[피터와 웬디]

모든 아이들은 자란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아이들은 자기가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걸 금세 알게 된다. 웬디 역시 그랬다. 두 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정원에서 놀고 있던 웬디는 꽃 한송이를 꺾어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때 웬디는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나 보다. 그 모습을 본 달링 부인이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오, 이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남았으면 좋으련만!” 하고 외쳤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오간 말은 이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그 후로 웬디는 자기가 어른이 된다는 걸 알았다. 두 살이 지나면 누구든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살은 끝의 시작이니까.         (P41) 

    

달링 부인이 처음 피터에 대해 들은 건 아이들의 머릿속을 정리하던 때였다. 훌륭한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들이 잠든 밤이 되면 아이들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서 낮 동안 마루 어질러진 생각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고 다음 날 아침을 위해 머릿속을 정리한다. 만약 밤에 안 자고 깨어 있는다면(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여러분 역시 엄마가 이렇게 정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정말 재밌다.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은 서랍을 정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러분의 엄마는 우스꽝스럽게 무릎을 꿇고 앉아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주워 왔지?’하고 의아해하며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찬찬히 살펴 볼 것이다. 그러고는 착한 생각은 마치 귀여운 새끼 고양이인양 뺨에 갖다 대보고 나쁜 생각은 서둘러 안 보이는 곳으로 치워버릴 것이다. 아침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분이 꿈나라까지 갖고 갔던 심술궂은 장난과 못된 생각들은 조그맣게 접힌 채로 머릿속 맨 밑바닥에 놓이고 맨 위에는 그보다 예쁜 생각들이 펼쳐진 채로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다. 

사람의 머릿속을 그린 지도를 본 적이 있는지, 의사들은 가끔 다른 신체 부위를 지도로 그리는데 그것도 무척 재밌을 듯 싶다. 하지만 의사들은 알쏭달쏭 헷갈릴 뿐 아니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아이들의 머릿속 역시 지도로 그리려 애쓴다. 이 지도에는 카드에 기록된 체온처럼 지그재그의 선들이 마구잡이로 나 있는데 그 선들은 아마도 섬에 나 있는 길들일 것이다. 어쨌든 네버랜드는 언제나 섬이니까. 여기저기 오색찬란한 빛깔로 물든 네버랜드라는 섬에는 앞바다에 산호초와 날렵하게 생긴 배가 있다. 또 야만인들과 외딴 굴은 물론, 재봉사가 대다수인 늙은 난쟁이 요정들과 강이 흐르는 동굴도 있다. 그리고 여섯 명의 형을 둔 왕자들과 당장에 무너질 것 같은 오두막집과 키가 작은 매부리코 노파도 한 명 있다. 물론 이게 다라면 지도 그리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학교에 처음 간 날, 종교, 아빠, 둥근 연못, 바느질, 살인, 교수형, 여격을 취하는 동사, 초콜릿 푸딩 데이, 바지에 멜빵 하기, 99까지 세기, 혼자서 이 뽑고 받은 3펜스 등 별의별 것들이 넘쳐 난다. 이런 것들이 네버랜드의 일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지도인지는 영 헷갈린다. 특히나 아이들의 머릿속은 한시도 멈출 새가 없으므로.                    (P46-47)  

   

신나고 유쾌한 섬들 중에서 네버랜드는 가장 아늑하고 아담하다. 네버랜드는 한 모험에 이어 또 다른 모험을 하기 위해 지루하게 먼 길을 가야 할 만큼 넓거나 불규칙하게 뻗어 있지는 않지만, 오밀조밀 꽉 들어찬 느낌이 있다. 물론 낮에는 의자와 식탁보를 갖고 네버랜드 놀이를 해도 전혀 위험할 게 없지만 잠들기 바로 2분 전 네버랜드는 진짜와 다름없는 현실이 된다. 아이들 방에 취침등이 있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을 여행하던 달링 부인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발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알 수 없었던 건 피터라는 이름이었다. 달링 부인은 피터가 누구인지 금시초문이었지만, 그 이름은 존과 마이클의 머릿속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고 웬디의 머릿속은 어느새 피터라는 갈겨쓴 글씨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다른 말들보다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는데, 그걸 바라보던 달링 부인은 그 글씨가 웬지 모르게 건방져 보인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걘 좀 건방진 데가 있어요.” 웬디가 아쉽다는 투로 인정을 했다. 엄마가 피터에 대해 물어봤을 때였다. 

“그런데 걔는 도대체 누구니, 얘야?”

“걔는 피터 팬이에요. 알잖아요, 엄마도.”

처음에 달링 부인은 도통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요정들과 함께 산다는 피터 팬이 문득 떠올랐다. 그 시절에는 죽은 아이가 하늘나라로 갈 때 무섭지 않도록 피터 팬이 도중에 같이 가준다는 등 그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오갔다. 물론 그때엔 달링 부인도 그 이야기를 믿었다. 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온갖 상식으로 가득 찬 달링 부인은 도대체 그런 사람이 있기라도 한 건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근데 말이야.” 달링 부인이 웬디에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피터 팬은 어른이 되었을 거야.”

“오, 아녜요. 걔는 어른이 되지 않아요.” 웬디는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걔는 딱 나만 한걸요.” 그 말은 피터 팬이 덩치도 생각하는 수준도 딱 자기 정도라는 뜻이었다. 웬디는 자신이 그걸 어떻게 아는지 몰랐다. 그냥 하는 것이었다.                (P48-49)

그런데 방 안에는 또 다른 불빛이 있었다. 그 빛은 취침등보다 천배는 더 밝았다. 그 불빛은 피터의 그림자를 찾는답시고 아이들 방에 있는 온 서랍을 들쑤셨고 옷장을 샅샅이 뒤지면서 옷에 달린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뒤집어 놓았다. 사실 그건 불빛이 아니었다. 그건 하도 잽싸게 날아다녀서 불빛처럼 보이긴 했지만 단 1초라도 가만히 있는 걸 본다면 요정임을 금세 알 수 있다. 그 요정은 아이 손바닥만 했으나 계속 자라는 중이었다. 팅커 벨이라는 이 소녀 요정은 잎맥만 남은 나뭇잎을 작고 네모나게 잘라 만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덕분에 몸매가 한결 날씬해 보였다. 사실 팅커 벨은 좀 통통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팅커 벨에 이어 잠시 후, 작은 별들이 훅 불어 낸 바람에 창문이 열리더니 피터가 들어왔다. 도중에 팅커 벨을 손에 들고 왔던 피터는 손이 온통 요정가루투성이였다. 

“팅커 벨”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피터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팅크, 너 어디 있니?” 그때 물 항아리 안에 있던 팅커 벨은 그곳이 너무 좋아 헤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전에는 한 번도 그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어서 나와, 내 그림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니?”                  (P67-68)     


“난 엄마가 없다고 운 게 아냐.” 피터는 골이 난 듯 말했다. “난 그림자가 안 붙어서 운 거야. 사실 난 운 것도 아냐.”

“그림자가 떨어져 버렸니?”

“응.”

그제야 구질구질해진 채로 바닥에 놓여 있는 그림자를 본 웬디는 피터가 한없이 가여워졌다. “어쩜 이럴 수가!” 하지만 피터가 그림자를 비누로 붙이려 한 것을 보자 웬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사내아이들이 하는 짓이란!

다행스럽게도 웬디는 단번에 방법을 알아냈다. “그림자를 꿰매야겠어.” 웬디는 은근히 생색내는 투로 말했다. 

“꿰매는 게 뭐야?” 피터가 물었다. 

“넌 정말 무식하구나.”

“아냐. 그렇지 않아.”

하지만 웬디는 피터의 무식함에 기세등등해졌다. “꼬맹아, 내가 널 위해 그림자를 꿰매 줄게.” 웬디는 키가 자기만 한 피터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반짇고리를 꺼내 그림자를 발에 꿰매주었다.                 (P70)  

   

"난 몇 살인지 몰라.“ 피터가 거북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꽤 어려.“

피터는 나이 따윈 전혀 몰랐고 다만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되는대로 대충 말을 해버렸다. “웬디, 난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도망쳐 왔어.”

웬디는 꽤 놀랐지만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웬디는 품위 있는 응접실 매너에 맞게 자기 잠옷을 살짝 만지면서 피터가 좀 더 가까이 앉아도 괜찮다는 뜻을 내비쳤다. 

“내가 도망친 건 아빠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야.”

피터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빠 엄마는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떤 사람이 될지 이야기하고 계셨지.” 피터는 목소리가 유별나게 들떠 있었다. “난 어른이 되기는 죽어도 싫어.” 피터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난 평생 어린 소년으로 남아서 재밌게 놀고 싶단 말이야. 그래서 난 켄싱턴 공원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요정들과 오래오래 살게 된 거야.”             (P73) 

    

대체로 요정을 좋아하는 피터는 웬디에게 요정의 탄생에 대해 말해 주었다. 

“웬디,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으면 말이야. 그 웃음은 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서 통통 굴러다니는데, 그게 바로 요정이야.”

피터의 이야기는 뻔했지만 집에서만 살아온 소녀 웬디는 귀가 솔깃해졌다. 

피터는 친절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말이야, 소년 소녀들에게는 원래 요정이 한 명씩 있어야 해.”

“있어야 한다니? 그럼 없단 말이야?”

“아예 없는 건 아냐, 너도 알겠지만 요즘 애들은 아는 게 많잖아,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금세 요정을 믿지 않게 돼. 그래서 아이들이 ‘난 요정을 믿지 않아.’라고 말할 때마다 어딘가에서는 요정이 하나씩 죽고 말지.”                   (P73-74)    

 

“이제 알겠어, 웬디 누나.” 존은 소리쳤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세 남매는 단 1센티미터도 날지 못했다. 피터는 글자를 하나도 모르는 반면 마이클은 두 음절 단어쯤은 아는데도 말이다. 

물론 피터는 세 남매에게 장난을 친 것이었다. 요정가루가 몸에 묻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도, 아까 말했듯이 피터의 한 손에는 요정가루가 조금 묻어 있었다. 피터는 세 남매에게 요정가루를 조금씩 불어주었고 그 효과는 놀라웠다.

“이제 이렇게 어깨를 움직이면서 떠오르면 돼.”

세 남매는 모두 침대에 있었고, 씩씩한 마이클이 가장 먼저 날기로 했다. 마이클은 별 힘을 들이지 않았는데도 공중으로 붕 솟아올랐고 순식간에 방 안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날았어!” 공중에 붕 뜬 채로 마이클이 소리쳤다. 이어서 존 역시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욕실 근처에서 웬디와 마주쳤다.                  (P83)     


“두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간 다음 아침까지 쭉 가면 돼.” 

피터가 웬디에게 건넨 이 한마디는 바로 네버랜드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바람이 세게 부는 모퉁이마다 지도를 꺼내 길을 찾는 새들조차도 그 한마디로는 네버랜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짐작했겠지만, 피터는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했던 것이다. 

처음에 세 남매는 피터를 철석같이 믿었다. 세 남매는 훨훨 나는 것이 어찌나 재미나던지 교회의 뾰족탑이나 지나다가 맘에 드는 높은 곳이 있으면 그 주위를 빙빙 돌며 한참 시간을 보냈다.                      (P87)   

  

존은 이 섬에 지금 해적이 많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피터는 지금처럼 많은 적은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지금 대장은 누구야?”

“후크.” 이 혐오스러운 이름을 내뱉으며 피터는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제임스 후크?”

“맞아.”

그러자 마이클은 앙 울음을 터트렸고 존마저도 목이 메어 말을 잇기 힘들었다. 그들은 후크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수염의 갑판장이었어.” 존이 낮게 속삭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잔인했지, 그는 바비큐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자야.”

“맞아.” 피터가 말했다. 

“후크는 어떻게 생겼어? 덩치가 커?”

“옛날만큼 덩치가 크지는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후크의 몸을 좀 잘라냈거든.”

“네가?”

“그래, 내가 그랬어.” 피터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오, 괜찮아.”

“그런데 어딜 좀 잘라냈다는 거야?”

“오른손.”

“그럼 지금은 못 싸워?”

“오, 못 싸우긴!”

“그럼 왼손잡이야?”

“그는 오른손 대신에 쇠갈고리가 있어. 그걸 마구 휘두르지.”

“휘두르기까지!”

“이봐, 존.” 피터가 말했다. 

“응.”

“‘네, 네, 대장님’이라고 해.”

“네, 네, 대장님.”

피터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나를 따르는 소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그러니 너도 지켜야 해.”

존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건 우리가 후크와 정면으로 맞붙게 될 경우 그를 반드시 나한테 넘겨야 한다는 거야.”

“약속할게.” 존은 충성스럽게 대답했다.                     (P96-97)


오늘 저녁 네버랜드 섬에서 주요 세력들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까, 잃어버린 소년들은 피터를 찾고 있었고 해적들은 잃어버린 소년들을 찾고 있었으며, 인디언들은 해적들을 찾고 있었고 짐승들은 인디언들을 찾고 있었다. 이렇게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섬을 빙빙 돌았지만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속도로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02-103) 

    

가장 위험한 위치인 맨 뒤에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람은 타고난 공주인 타이거 릴리였다. 그녀는 흑인 여자 사냥꾼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피카니니 부족 중에서 가장 손꼽히는 미인이었으며, 요염하고 냉정하면서도 또 사랑에 약했다. 용사들은 누구나 이런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하는 대신 도끼를 들었다. 저들이 어떻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떨어진 나뭇가지 위를 지나가는지 살펴보라. 들리는 거라곤 왠지 거칠어진 그들의 숨소리뿐이다. 사실 그들은 그동안 배 터지게 먹어댄 탓에 저마다 몸집이 좀 불어 있었다. 물론 조만간 살이 다시 빠지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둔해진 몸이 가장 큰 위험이었다.                (P108)     


후크는 열띤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도 난 녀석들의 대장 피터 팬을 잡고 싶어. 왜냐하면 그 녀석이 내 팔을 잘랐으니까.” 그는 쇠갈고리를 무섭게 휘둘렀다. “이 손으로 그놈과 악수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지. 오, 그 녀석을 찢어 죽일 테다!”             (P111-112)     


그런데 싸움이 계속되는 내내 피터는 어디에 있었을까? 피터는 더 큰 승부를 찾고 있었다. 물론 다른 소년들 역시 용감했으므로 그들이 해적 선장에게서 도망쳤다 해도 나무라서는 안 된다. 후크의 쇠갈고리는 물결 위에 죽음의 원을 그렸고, 그로부터 아이들은 겁먹은 물고기처럼 달아났다. 

하지만 후크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그는 원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이 만난 곳은 물속이 아니었다. 후크는 숨을 고르기 위해 바위로 올라왔고, 때마침 피터 역시 반대편에서 바위를 오르고 있었다. 바위는 공처럼 미끄러워서 그들은 바위를 엉금엉금 기어오르다시피 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반대편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결국 잡을 것을 찾다가 서로 팔이 스쳤다. 그 바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그들은 서로 얼굴이 닿을 뻔했다. 둘은 그렇게 해서 만났다.               (P154)     

후크가 피터의 손을 깨문 건 그때였다. 

피터는 순간 당황했다. 그건 아파서 그런 게 아니라 부당함 때문이었다. 피터는 도통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저 충격을 받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모든 아이들은 처음으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이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자신들이 공정하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모가 아이에게 부당하게 대하더라도 후에 아이는 부모를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더 이상 예전의 그 아이는 아닐 것이다. 세상 그 누구도 처음 겪었던 부당함을 떨쳐내지 못한다. 물론 피터는 예외지만, 피터 역시 부당함을 자주 겪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그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에 그 점이야말로 피터가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진짜 다른 점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피터는 이번에 당한 부당함 역시 처음 겪는 것과 같았다. 그런 탓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사이 후크의 쇠갈고리 손은 두 번이나 피터를 할퀴었다.           (P155)     


사실 그건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그건 둥지에 탄 채 피터에게 가기위해 필사적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네버 새였다. 둥지가 물속에 빠진 후부터 배운 듯한 날갯짓으로 네버 새는 자신의 희한한 배를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새는 피터가 알아보았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네버 새는 둥지에 알이 있었지만 피터를 구하기 위해 둥지를 내주려고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다. 물론 이런 행동이 조금은 의외기도 하다. 피터는 그동안 네버 새에게 잘해 주긴 했지만 괴롭힌 적도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링 부인과 나머지 사람들처럼 네버 새 역시 피터가 젖니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P160)  

   

“몸이 아픈 게 아냐.” 피터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그럼 어디가 아픈데?”

“웬디, 엄마에 대한 네 생각은 틀렸어.”

피터가 느닷없이 내뱉은 심상치 않은 말에 소년들은 놀라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피터는 그동안 숨겨 왔던 사실을 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옛날엔 나도 우리 엄마가 날 위해 언제나 창문을 열어둘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난 밖에서 오래오래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어. 엄마가 날 까마득히 잊어버린 거야. 게다가 내 침대엔 다른 남자 애가 자고 있었어.”

피터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피터는 그게 사실이라 믿고 있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렸다.                (P179) 

    

하지만 피터는 마음이 몹시 아팠다. 피터는 모든 일을 망치기만 하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나무 안에 들어가 일부러 헉헉거리며 일 초에 다섯 번씩 숨을 쉬었다. 네버랜드에서는 숨을 한 번 쉴 때마다 어른이 죽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피터는 어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었다.               (P180-181)  

   

후크가 한참 어린애인 피터를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피터가 후크의 팔을 악어에게 던져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일로 오른손을 잃었다 해도, 그리고 그날 이후로 자신을 끈덕지게 쫓아다니는 악어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해도, 후크가 그렇게 냉혹하고 잔인한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건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실 피터에게는 이 해적 선장을 미쳐 날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피터의 배짱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외모도 아니고 또....... 사실 이리저리 둘러말할 필요는 없다. 우린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으며 이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피터의 건방짐이었다. 

이 건방짐이 바로 후크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건 후크가 쇠갈고리 손을 휘두르게 했고, 밤이면 성가신 벌레처럼 그를 괴롭혔다. 피터가 살아 있는 한, 후크는 참새가 성가시게 달려드는 철장에 갇힌 사자 꼴로 남을 것이다.                  (P191)     


살다 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때가 있다. 가령, 얼마 동안인지는 몰라도 한 삼십 분 정도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는 걸 갑자기 깨닫는 때도 있다. 그날 밤 피터도 그런 경험을 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피터는 한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단검을 꼭 쥔 채 섬을 조용히 누비고 있었다. 피터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악어가 지나가는 걸 보았지만 거기에서 째깍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처음에 피터는 겁이 덜컥 났지만 곧 시계가 멈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을 잃은 동료의 마음이 어떨지는 안중에도 없이, 피터는 어떻게 하면 이 비극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피터는 자기가 직접 째깍째깍 소리를 내면 사나운 들짐승들이 자신을 악어라 생각하고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피터는 누구라도 감쪽같이 속을 만큼 그럴싸하게 째깍째깍 소리를 냈지만 그 때문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악어가 그 소리를 듣고 따라온 것이었다. 악어가 잃어버린 시계를 되찾기 위해 피터를 따라온 건지, 아니면 그저 친구인 시계가 다시 째깍거리는 게 반가워서 따라온 건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모든 노예들처럼, 악어 역시 멍청한 짐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217-218)    

 

더 말할 것도 없이 피터와 후크는 결투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양쪽 모두 기세가 팽팽했다. 최고의 칼잡이인 피터는 눈부시도록 재빠르게 몸을 피했다. 가끔 피터는 적의 방어를 비켜서 찌르는 속임수 공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라 팔이 짧아서 후크를 정통으로 찌르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능수능란함은 절대 뒤지지 않지만 손목 놀림이 잽싸지 못한 후크는 무게감 있는 공격으로 피터를 제압하려 했다. 후크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바비큐에게 배웠던, 자신만의 장기가 된 세게 찌르기로 모든 걸 한 번에 끝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후크의 칼은 자꾸만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거리를 좁혀 와, 지금까지 계속 허공만 긁어대던 자신의 쇠갈고리 손으로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피터는 쇠갈고리 손 밑으로 몸을 웅크리면서 그의 갈비뼈를 있는 힘껏 찔렀다. 후크는 색깔이 이상한 자신의 피를 보고 놀란 나머지 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크는 결국 피터의 손아귀에 놓인 것이다. 

“이때다!” 소년들이 일제히 입을 모았다. 그러나 피터는 품위 있는 몸짓으로 적에게 다시 칼을 집어 들 것을 청했다. 후크는 잽싸게 칼을 집어 들었지만, 피터가 올바른 품행을 보였다는 사실에 비참해졌다. 

지금까지 후크는 자신의 적을 그저 지독한 악마 녀석쯤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문득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팬, 넌 도대체 누구며 무엇이냐?” 후크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젊음이자 기쁨이지.” 피터는 생각나는 대로 대충 대답했다. “난 알에서 깨어난 작은 새야.”

당연히 피터의 말은 순 엉터리였다. 그러나 비참한 후크에게 그 말은 피터가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게다가 그건 올바른 품행의 절절 그 자체였다.             (P227-228) 

    

당연한 얘기지만 소년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소년들은 대부분 3반에 들어갔고, 슬라이틀리만 처음에는 4반에 갔다가 나중에는 5반으로 옮겨졌다. 물론 제일 높은 반은 1반이었다. 소년들은 학교에 들어간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왜 네버랜드 섬에 남지 않았을까 하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소년들은 금세 여러분이나 나, 혹은 어린 젠킨스같이 평범해지는 것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애석하게도 소년들은 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처음에 나나는 아이들이 밤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발을 침대 기둥에 묶어놓았었다. 그리고 낮이면 소년들은 버스에서 떨어지는 척하는 놀이를 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년들은 침대에 묶인 발을 당기는 일이 줄어들었고, 버스에서 떨어지면 다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바람에 벗겨져 날아가는 모자를 쫓아 날아갈 수도 없었다. 소년들은 그걸 연습 부족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그건 소년들이 더 이상 날 수 있는 능력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P250)    

 

“잘 있어.” 피터는 웬디에게 인사를 했다. 피터가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제인 역시 뻔뻔스럽게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제인은 이미 걷는 것만큼 나는 게 능숙했다. 

웬디는 창가로 급히 달려갔다. 

“안 돼, 안 돼." 웬디가 소리쳤다. 

“봄맞이 대청소만 하고 올 거예요.” 제인이 말했다. “피터가 저보고 매년 봄맞이 대청소를 도와달래요.”

“내가 너희들과 함께 갈 수만 있다면!” 웬디가 한숨을 쉬었다. 

“엄마 이제 못 날잖아요.” 제인이 말했다. 

결국 웬디는 둘을 보내주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웬디는 창가에 서서 날아가는 아이들이 별처럼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여기 보이는 웬디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몸집이 다시 줄어든 모습이다. 앞서 한 이야기들은 모두 오래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제인 역시 어엿한 어른이 되어 마거릿이라는 딸을 두고 있다. 그리고 깜빡 잊을 때를 빼고는, 매년 봄맞이 대청소 때마다 피터가 마거릿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간다. 그곳에서 피터는 자신에 대해 마거릿이 해주는 이야기를 열심히 듣곤 한다. 그리고 언젠가 마거릿이 어른이 되면 딸이 생길 것이고 그 딸은 또 피터의 엄마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 쾌활하고 순수하고 매정한 한, 계속 그럴 것이다. 언제까지나.          (P260-261)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

할머니까지 피터 팬을 아시는 걸 보면 피터는 나이가 그만큼 많다는 걸 거다. 하지만 피터는 언제나 같은 나이이므로 그런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피터의 나이는 일주일이다. 피터는 아주 오래전에 태어나긴 했지만, 생일을 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럴 기회 역시 한 번도 없었다. 피터는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인간이 되길 포기했기 때문이다. 피터는 창문으로 도망쳐서 켄싱턴 공원으로 돌아갔다.                  (P279)     

 

엄마가 울고 있는 꿈을 꾼 피터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피터는 엄마가 무엇 때문에 우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훌륭한 아들 피터가 껴안아 주면 엄마가 금세 미소 지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 피터는 그것을 굳게 믿었고, 엄마 품에 빨리 안기고 싶어서 곧장 창문으로 날아갔다. 언제나 피터를 위해 열려 있던 그 창문으로 말이다. 

그러나 창문은 닫혀 있었다. 게다가 쇠창살까지 걸려 있었다. 안을 들여다본 피터는 엄마가 다른 남자 애를 팔로 껴안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았다. 

피터는 “엄마! 엄마!” 하고 목 놓아 외쳤지만 엄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피터는 헛되이 작은 몸을 쇠창살에 부딪칠 뿐이었다. 피터는 결국 엉엉 울면서 공원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그리운 엄마를 보지 못했다.                 (P322)     


켄싱턴 공원의 작은 집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야기를 들어 알 것이다. 이 집은 요정들이 인간을 위해 만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집이다. 이 집을 정말로 본 사람은 서너 명밖에 없는데, 그들은 이 집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이 집은 그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절대로 볼 수 없다. 이 집은 그 안에 누워 있을 때는 없지만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오면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여러분 모두 그 집을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이 본 건 진짜 그 집이 아니라 창문에서 나오는 빛이다. 공원 문이 닫히고 나면 여러분은 그 빛을 볼 수 있다.             (P323)     


피터는 자신도 한때는 인간이었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터는 섬에 찾아오는 제비들에게 유독 친절했다. 제비는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제비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인간이었을 때 살던 집의 처마에다가 둥지를 짓는다. 그래서 가끔 그들은 아이 방 창문으로 들어가려고도 한다. 아마도 그 점 때문에, 피터는 새들 중에서 제비를 가장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럼 작은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 합법적인 밤이면(무도회가 없는 매일 밤), 요정들은 공원에서 길을 잃은 인간 아이가 있을까 봐 작은 집을 짓는다. 그러면 피터는 염소를 타고 다니면서 길 잃은 아이가 있는지 찾아보는데, 만약 그런 아이가 있으면 염소에 태워서 이 작은 집으로 데려오곤 한다. 아이들은 잠에서 깼을 때는 집 안에 있고 집 밖으로 나오면 집을 볼 수 있다. 요정들은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작은 집을 지었지만, 피터는 마이미를 생각하면서 염소를 타고 돌아다녔다. 여전히 피터는 모든 걸 진짜 소년들이 하는 대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P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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