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우연과 필연사이
평범한 중생에게는 세상의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닌 것이 없다. 길에서 소매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전생을 모르는 우리에게는 우연일 수밖에 없다. 현실이 우연 아닌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사진 또한 우연성이 사진적 특성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와 영겁은 사진안에 녹아있다. 1000/1초라는 찰나가 현실세계의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성은 우연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영겁의 시간 안에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영겁의 시간안의 우연은 영겁의 한 단편이지만, 한 편의 장편으로 이어지는 시간성으로 연장되어진다. 실제로 어떤 사실과 맞닥뜨렸을 대, 사진가가 카메라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있어서 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항상 camera를 가지고 다니는 사진가도 있다. 이것은 우연을 놓치지 않겠다는 좋은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우연성으로 좋은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이 사진가의 노력보다는 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운(특종)은 준비하는 자에게 더 많이 찾아오기 쉽상이다. 그런데 이 우연성이 사진의 안에서나 밖에서 사진을 "예술"로 만드는데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요소로 오해되기도 한다. 우연히 그것도 극히 짧은 순간에 기계로 만드는 것이 예술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성이 사진의 특성중 하나라고 말한다. 사진이 시간을 바탕으로 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스냅사진의 대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이러한 점을 철저히 이용한다. 우연에만 의존하지 않고 미리 계산해두었다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대상과 작가의 호흡이 외적조건과 일치되는 극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는 우연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인간의 상상력 밖의 짧은 셔터 속도로 찍히게 되며, 어느 정도 예상은 하지만 움직임이 어떻게 찍혀 나올지 모르는 것이 사진의 매카니즘이다. 여러분은 우연과 필연사이에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프레임을 잡고 기다리는 사진가에게 그 프레임 속으로 등장한 물체들, 그 순간적인 우연적인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이 눌러대는 사진가. 우리에게 이런 우연한 상황과 필연적인 상황은 무엇일까?
“연기(緣起)를 보는 사람은 법(法, 다르마 dharma 규범, 속성)을 보며, 법을 보는 사람은 연기를 보느니라” 불자들의 수행담을 담은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연기란 모든 사물과 현상이 직접 원인인 인(因)과 간접원인인 연(緣)에 따라 생기며, 항상 서로 관계되어 이뤄지기 때문에 불변적이고 고정적인 실체란 없다는 가르침이다. 모든 상황은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어제의 우연들이 모여서 오늘을 살고 내일의 필연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우연’의 예술을 추구한 음악가, 미술가들이 있다. 존 케이지, 잭슨 플록의 경우가 바로 그들이다. 다이세쓰 스즈키의 선불교와 중국의 주역(周易)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존 케이지는 1954년 피아노곡 ‘4분33초’에서 우연성의 음악을 선보였고(피아니스트는 4분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가버린다), 잭슨 플록은 액션 페인팅으로 바닥에 펼친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고 붓는 이른바 ‘드리핑 기법(Drip Painting)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우연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차용함으로써 관객에게 낯설게 한다. 생물학적으로나 물리학적으로나 ‘우연’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 ‘필연’이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자크 뤼시앵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목적론적인 필연을 반대하고 우연을 왜 강조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연과 필연사이에서 이 자리에 서 있다.
데니스 루헤인의 대중소설 <미스틱 리버> 中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게, 명백하게 격분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왜냐하면, 분노는 감정이고, 감정은 명백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항상 짜증을 내는 것은 좋아. 이곳 의자가 너무 딱딱하다든지, 대학 친구들 모두가 아우디를 몰고 다닌다든지, 뭐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말이야. 우리 관할 구역에서 온갖 가증스러운 범죄를 저질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범인들의 아둔함을 짜증스러워하라고. 사건의 세부적인 사항에만 충실하다면 나중에 애매한 영장과 근거로 법정에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