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시선은 권력이 아니라, 관찰이다.
“시선은 권력이 아니라, 관찰이다”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교수)이란 책에서의 시선은 권력의 관계부분을 푸코의 권력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선의 비대칭에서 권력이 발생한다고 푸코가 말했을 때, 그것은 많이 보는 사람이 지배자이고, 많이 보임을 당하는 사람이 종속된다는 것이 권력이론의 요체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사람, 언론에 노출이 많이 되는 사람, 다수에게 보여지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결코 권력이 될수 없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시선은 감시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푸코는 말하지만 현대사회에서의 시선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감시자는 누구이고, 감시하는 권력자는 누구인가? 오히려 역으로 인증샷이나 찍음으로서 자신이 대중적인 사람, 유행을 바라는 남에게 보여주고자하는 강한 욕망은 어찌 설명할수 있겠는가? 동전의 양면성처럼 감시하고 싶은 욕망과 감시당하고 싶은 욕망이 전선처럼 얽혀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냉혹한 시선이 되어버린 황폐한 인간관계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시선은 ‘본다’는 행위이다. 우리가 눈을 가지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대상)를 바라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우리는 봄으로써 인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감정이 생기고, 대화를 하게 된다. 일차적인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누군가이든 무언가이든 관찰을 하게 된다. ‘보는 자’와 ‘보임을 당하는 자’를 정해두고 ‘보는 자’는 지시하고 명령하는 자이며, ‘보임을 당하는 자’는 구속을 받는 자라는 권력구조는 사실상 확대해석일지 모른다. 오히려 ‘많이 본 자’와 ‘덜 본 자’ 사이의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가 권력을 쥘지 모른다. 많은 정보를 가진자가 정보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보를 많이 쥐고 있는 권력자가 정보에 무지한 상대에게 권력을 행사할수 있다. 판옵티콘 감옥의 구조, 원형모양의 건물에서 죄수를 감시하는 것은 그 감시의 시선이라기보다 죄수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소위 퍼블리즌(Public Citizen)의 사회가 되었다. ‘공개된’과 ‘시민’을 합성한 ‘퍼블리즌’이란 말에서처럼, 현대사회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연출을 함으로써, 잘 보여지는 것이 오히려 권력인 것이다.
카메라라는 말은 ‘바늘구멍으로 본 방(camera obscura, 라틴어)’이란 뜻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의 경우에도 ‘어두운 방에서 그림 구경하기(漆室觀畵說, 칠실관화설)’란 글에서 방을 어둡게 하고 바늘구멍 하나만 뚫어놓으면 반대편 벽에 바깥의 풍경이 거꾸로 비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바늘구멍 방’에서 바라보는 사진기를 통해서 사진가는 대상을 사진에 담는다. 누군가든 무엇이든 사진가는 이 바라봄을 통해서 대상을 관찰하고,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사진의 기본은 관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바라본다는 응시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관찰은 필수인 것이다.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모이를 주는 사진을 찍기 위해선 새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관찰을 하게 되고,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러나 일부 사진가들은 가려져 있는 새들의 둥지를 잘 찍기 위해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처내고 사진을 찍는다. 이와 같은 행위는 사진가들의 욕심이 새들의 환경을 무시하고 개입한 무례한 행동이 아닐수 없다. 예전 소나무의 멋진 장면을 잡기 위해 주변 소나무를 베어버린 몰지각한 사진가의 행동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사진가의 이기심이 관찰한다기보단 연출해버린 권력적 시선이다.
사진은 영상인류학처럼, ‘눈으로 보이는 세계에 대한 연구(thestudyofvisualandpictorialworld)’이다. camera eye는 사진가의 눈의 확장인 셈이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통해서 현장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현지조사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라져가는 현장의 역사를 오래도록 담아놓을수도 있다. 문화와 관습, 인간의 행동을 카메라라는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하고, 해석한다. 물론 관찰자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관심사가 반영되긴 하지만, 무엇을 찍든 그것은 관찰을 기본으로 한다. 글이건 영상이건 객관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출발은 결국 관찰에서 비롯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본인에게 달려있다. 아름답게 바라보던, 삐딱하게 바라보던 그것은 본인의 관점에 달려있고, 그 출발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무엇을 관찰하고자 이 자리에 서 있으며, 나의 시선은 과연 권력적인 시선인가? 광화문에서 만난 어떤 놈은 내게 순수하지 못하다고 한다. 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사진이 얼마나 삐딱하다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말이 더 권력적이고 폭력적이다. 우리는 관찰이 참여가 될 수 있음을 안다. 참 웃프스런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