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돌멩이]
내리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는 작은 돌멩이들이 있었다. 무심코 걷어차기도 하면서 지나가기 십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돌멩이 하나가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 도 있고, 유심히 보다보면 예쁜 돌멩이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가져가기도 한다. 어디 쓰일지 모르지만 집에 돌멩이를 주어오면, 엄마는 이런 걸 주워 온다며 버리라고 한다. 수집광들은 돌을 모으기도 하고, 성냥갑을 모으기도 하고 어쨌든, 누군가에게는 귀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를 찍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도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5년간 알바를 뛰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작품으로 만들어지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운 좋게 금방 뚝딱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돌멩이 하나에도 나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의미를 만드는 것은 물론 사람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기억을 소환하는 의미에서 돌멩이일수도 있다.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물그릇처럼, 영험한 기운이 있는 돌은 마을 당산나무처럼, 돌도 그러하다. 기억을 되찾으려는 사람, 그 기억속의 돌멩이. 돌멩이를 보는 시선은 각기 다르다.
내리에 있는 자취방에서 사진학과 강의실에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라 부스러기 같은 자갈이 깔려 있는 길이다. 영수와 인철은 같은 해 입학한 동기이고, 신입생환영식 이후로 친해졌다. 둘은 자취방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둘은 생각하는 것, 성격 또한 달랐다. 인철은 지방 출신이고, 영수는 서울 출신이다. 가끔 주말에 서울에 가면 김치를 가져오고 해서 영수는 좋아했었다. “서울 본가에 가서 김치 좀 가지고 왔어.” 아침에 오뎅국을 끓이다 김치 한 봉지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처럼, 가치관이나, 예술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달랐지만 그런 상반된 것들이 오히려 끌리는 듯 했다. “강의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겠다. 강의시간 얼마 안 남았어.” 약간 경사가 있던 내리 초입에 다가왔다. “신발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 갔나봐”. 인철은 밑창에 조그마한 구멍으로 들어온 자갈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인철의 신발은 운동화였는데, 오래된 신발이었다. 신발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돌멩이는 그렇게 잠시 시간을 멈추게 했다. 강의실의 도착해서 맨 뒷자리에 둘은 앉았다. 강의실 맨 앞자리는 광한이가 앉아 있다. 광한이는 모범생이다. 잘 사는 집 아들이고, 깔끔한 옷차림에 약간 새침데기인 것 같아 보이지만, 이야기해보면 그런 데로 털털한 면도 있다. 광고를 전공하려고 그는 영락없는 넥타이를 맨 광고맨(廣告man)이다. 세 사람은 동기들 중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돌멩이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다. 현무암의 거친 돌도 있고, 맨질맨질한 자갈, 거칠지만 딱딱한 화강암 등등.
“돌멩이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표현해서 다음 주 과제로 해오세요.”
“각자의 표현을 사진으로 찍고, 한 장이든 여러 장이든, 프린트해서 가져오세요.”
교수는 두 사람의 작가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했다. 한 사람은 미술가 이우환이었고, 한 사람은 보도사진가 구보타 히로지였다. 이들이 다루는 돌의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이우환의 <Relatum-Dialogue>는 돌멩이 자체가 미술관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돌이라기보다는 크기가 큰 돌(바위) 자연석이다. 그의 미니멀리즘의 성격에서도, 점에서 출발할 그의 작업의 연장선일까. 이해하기 쉽지 않은 현대미술이다. 이우환의 설치물은 돌과 철, 재료가 주는 물성을 보여준다. “재료가 스스로 말할 수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돌이 말을 걸어오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동물과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더군다나 무생물인 사물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무언가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을까. 극사실주의자들은 돌을 사진보다 더 세밀하게 묘사한다. 돌은 작가에게 화가이든, 사진가이든, 설치미술가이든 소재로 많이 사용된다. 돌이 주는 영감은 돌이 주는 물성[物性]에서 출발한다.”
“구보타 히로지(Kubota Hiroji) 작가는 1978년 미얀마 불교성지 짜이티요의 황금바위를 찍은 사진으로 유명하다. 매그넘(magnum)의 멤버이기도 한 그의 사진은 돌의 영험함이 느껴진다. 그에게 있어서 황금바위는 사람의 영혼을 끌어내는 바위인 것이다. 그는 "철학가나 문호들은 생각을 먼저하고 그 생각을 풀어내지만 사진가는 객관적인 관찰자다. 순간순간 준비 없이 찍는 것이다. 찍는 행위는 '센서티브'(sensitive)한 게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이중인격같이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사진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찍게 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사실 객관적이라는 것, 중립적이라는 것, 그 어느 것도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양 극단은 쉬워도 중도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은 일단 돌을 선택하고, 돌을 주제로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을 해서 촬영한 다음, 다음주 과제 발표시간에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작년 과제는 달걀이었다. 올해 과제는 돌로 바뀌었다.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데미안을 좋아하는 교수는 열변을 토했다. 마치 꼬마 싱클레어로 보듯이 학생들에게 돌멩이 사진에 대한 의미부연을 전달했다. 돌이 말은 하지 않지만 사진가 가슴에 다가온 돌이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보라고, 그 안에 뭔가가 있고, 그가 이야기하는 걸 잘 듣고 오라고.
“저 교수는 말이 많지 않나? 전직이 국어선생이라 그런가?”
“하긴, 너는 어떻게 찍을 거야?”
“나는 돌멩이를 있는 그대로 찍었으면 해. 어떤 포장도 하지 않고, 내가 의도하는 것으로 덧칠을 하고 싶진 않아.”
“잔디밭에 가서 수업 끝나고 통닭이나 먹자.”
“웬 뜬금없이 통닭?”
“과 사무실 앞 잔디밭으로 나와.”
잔디밭 한 가운데에는 보도블록 3장이 세워져 있고, 석쇠도 준비하고, 번개탄도 준비되어 있었다. 마트에서 싸온 영계닭은 은박호일에 싸여 있다. “영수야, 저기 조소과에 가면 진흙 많이 있으니까? 좀 얻어 와라.” 은박호일을 진흙으로 덮어서 구울 참이었다. 불을 피워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영계닭은 노릿노릿해져 갔다. 즉석 바비큐인 셈이었다. 진흙을 떼어내고 영계닭은 먹음직스러워졌다. 삼계탕과는 다른 맛이었다. 술도 빠질 수가 없었다. 캔맥주와 막걸리, 소주 영계닭 하나면 술은 충분했다. 밤새도록 이야기하며 이런 낭만도 없구나, 학교 안에서 영계닭을 구워 먹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그렇게 젊은 날의 시간은 지나갔다.
영수가 찍어온 사진은 소변기에 돌을 넣어두고 ‘소변기와 돌’을 찍어왔다. 뒤샹의 소변기에서 착안하여, 그 안에 돌을 넣어둔 것이다. 뒤샹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인지, 오마주한 것인지 모르지만 고민 고민하다 내린 자신의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통조림(‘Your work is shit’)이나, 뒤샹(Marcel Duchamp)의 소변기 통이나 예술작품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것을 작품으로 내놓은 의도는 대량생산과 물질자본주의, 그리고 미술시장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역설을 넘어 이들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예술은 똥이야!”라고 외치는 듯싶다. 예술이라고 작업하는 이들에게 외치는 소리. 마구 뱉어놓은 작품들의 배설물들에 대한 외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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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멩이는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