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얼굴]
수잔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을 촬영한다는 것은, 그들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일이다. 촬영 대상 자신을 결코 볼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당사자들이 스스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들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철이가 들고 다니는 책이 있었다. 최민식 선생의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라는 책이다. 최민식 사진가는 해방후 부산에 정착하여 자갈치 시장의 모습을 주로 사진으로 담았다. 독재정권 하에서 수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던 그의 작품은 당시 정부(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정권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 뒤에 숨겨진 대한민국의 어둡고 가난한 모습을 왜 자꾸 들춰내서 국제적으로 망신을 시키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가 중정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준 것은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독일인 임인덕 신부였다. 그렇게 해서 사진집은 분도출판사에서 <휴먼Human>으로 출간되었다. 평소 꾀죄죄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그가 간첩으로 보여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이 파출소에 신고를 해 파출소에 끌려간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검열이 심했던 시대였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음반의 맨 뒷곡은 건전가요를 한곡을 집어넣어야 했다. 산울림의 <아니 벌써>의 원래 가사는 ‘밤이 깊었나 이 친구 벌써 취했나’였는데 검열로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밖이 훤히 밝았네’로 바뀔 정도였으니까. 어쨌든 일본 유학중 최민식에게 영향을 주었던 작품은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아마도 <인간가족>展에 등장하는 세계인들의 얼굴은 그가 자갈치 시장에서 관심을 가진 모티브가 된 우리들의 얼굴일 것이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팔아서 자신을 자랑하려는 거예요. 딴 사람은 매스컴 안 타고도 얼마든지 좋은 일 하잖아요! 왜 자꾸 응하세요? 난 아버지가 그러실 줄 몰랐어요!”
“찾아오는데 막을 수는 없잖니.”
“피하시면 되잖아요. 그건 위선이에요!”
보도사진(報道寫眞)이란 대중 매체 특히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사진을 말한다. 영어로는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 또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개념으로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동아리방에서는 포토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의 구분에 대해서 한창 이야기 중이었다. “포토저널리즘은 단순히 말 그대로 뉴스 보도를 위한 사진이지만, 다큐멘터리는 그보다 확장된 개념이야. 오랜 시간 작업을 통해서 자신의 기록들을 집대성하는 것이지.”
“우리의 작업도 다큐멘터리를 추구해야 하는 거야.”
제록스로 별명을 가진 승래형이 말했다.
“단지 사람들을 찍는 행위가 최민식 사진가가 말한 것처럼,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 돼. 그들과 꾸준히 이야기하고, 그들의 삶을 우리는 그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 뿐이야. 우리가 어떠한 생각과 표현으로 덧칠한 그들의 삶이 아니지.”
“나는 장애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음성 꽃동네에서 사진작업을 오래 해오고 있어.”
<사진 집단 현장>이란 동아리를 만들고, <민중의 땅> 전시로 고초를 겪었던 성수형이 좌중(座中)을 정리하며 말했다.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민중의 땅’展이야. 부제로 ‘우리시대의 얼굴들’이다.”
“다들 준비는 되어 있지, 아직 작업을 못한 사람은 여름방학때 좀 더 촬영해서, 가을에 마로니에서 거리 전시를 할려고 해.”
성수형의 작업은 빈민촌이 주제였다. 도시의 산업화로 밀려나는 서울의 달동네들의 철거 과정을 작업해 왔다. 영화작업으로는 <상계동 올림픽>이라고 김동원 감독하고 같이 작업하고 있었다. 그의 사진은 달동네 철거민의 이야기이다. 1971년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 청계천 도심의 철거민들은 서울 근교 부평으로, 성남으로 서울의 외곽도시로 강제 이주되었고,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원미동 사람들>이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 그리고 사진소설 김영종의 <난곡이야기> 고도 성장의 그늘 아래서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재개발이라는 이름하에 지금도 진행중이다. 내가 보았던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이나, 최근 무악동 옥바라지 골목에 이르기까지.
“내가 전하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대결하여 씨름하고 있는 슬프고 고독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사진이 사회 비판을 하지 않으면 대체 무엇을 추구한다는 말인가?”
원이 형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안성 시골장터의 우시장(牛市場)을 찍고 있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소를 사고팔기 위해 우시장이 열리는 데, 예로부터 안성 우시장은 유명하다. 애지중지 길렀던 소들은 그들에게 목돈을 안겨 줬다. 그들의 손을 떠나는 소들의 눈빛은 애절하다. 우시장에서 사회비판을 읽기에는 해석들이 분분했지만, 동아리 회원들 각자 자신의 생각들을 담아오기로 했다.
“아무튼 어거스트 잔더 식의 우리시대의 초상을 정리한다고 보면 돼.”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찍느냐야, 얼굴은 그만큼 무엇인가 강력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요소이자, 사진가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지.”
“잔더의 사진은 당시 독일인들을 유형별로 기록했어. 농부, 상인, 여성, 전문직, 지성인, 예술가, 실업자, 노숙자, 유랑자로 분류해서 스튜디오에서 증명사진 찍듯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어. 나치는 이 잔더의 사진이 맘에 들지 않았고, 잔더의 사진집은 금서 목록이야.”
“1929년 출판된 잔더의 첫 서적 우리의 시간의 얼굴(Antlitz der Zeit)이 우리가 전시회를 할려는 부제(副題)야.”
그렇게 밤새 토론은 이어졌다.
1941년 윈스턴 처칠 경의 초상사진으로 유명한 요셉프 카쉬(Yousuf Karsh)도 이렇게 말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음이야말로 카메라의 진정한 렌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