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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Oct 11. 2024

김훈의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  2017년

서북의 산하는 어떠한가. 청천강이 서해에 닿는 하구의 겨울은 어떠한가..... 다시 천장을 바라보는 임금의 눈에 어느 고을 땅인지 알 수 없는 산수화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눈이 멎고 하늘이 열리자 늙은 산이 오히려 우뚝하게 빛나서 검은 먹이 푸른빛을 뿜어냈고, 화폭 가장자리로 물러서는 먼 산의 잔영 너머에 석양이 깔리고 있었다. 빛나는 산하였다. 산과 들이 시간 속에서 출렁거렸다. 임금의 환영 속에서 그 화폭의 산하는 겨울이었고 눈보라가 들판을 휩쓸고 있었다. 

청병은 북서풍처럼 밀려왔다. 말의 산맥에 가로막혀 적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 탄 적들은 눈보라를 휘몰며 다가왔다. 고개 숙인 김류의 머릿속에서 이를 악문 겨울 강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그 위를 땀에 번들거리는 청병의 군마들이 건너오고 있었다. 헐떡이는 말들의 허파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눈보라도 보였다.

경은 늘 내 가까이 있으니 군율이 쉽게 닿겠구나......

임금의 말투는 장님이 벽을 더듬는 듯했다. 임금은 먼 곳을 더듬어서 복심을 찔렀다. 임금의 더듬는 말투 속에 숨겨진 칼의 표적이 도원수인지, 영의정인지, 김류는 알 수 없었다. 꿇어앉은 대열의 뒤쪽에서 정삼품 당상들은 더욱 몸을 낮추었다. 

..... 부딪쳐서 싸우거나 피해서 버티거나 맞아들여서 숙이거나 간에 외줄기 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터이고, 그 길들이 모두 뒤섞이면서 세상은 되어지는 대로 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P20)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는 아비가 죽자 형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청(淸)이라 내걸었다. 명령을 칙(勅)이라 하였는데, 가르침을 조(詔)라 하였고, 스스로 짐(朕)을 칭하였는데, 그의 백성들은 종족의 말 그대로 칸이라고 불렀다. 젊은 칸은 여자와 사냥개를 좋아해서 그의 진중 군막 안에는 허리 가는 미녀들이 가득했고, 사냥개들이 미녀들의 군막을 지켰다. 젊은 칸은 또 몽고 말을 귀하게 여겼다. 황제가 말의 입 속과 똥구멍을 직접 살폈는데, 입 속 냄새가 향기롭고 이빨에 푸른 기운이 돌며 입천장의 구름무늬가 선명하고, 똥이 가볍고 똥구멍의 조이는 힘이 야무진 말을 보면 여자와 바꾸었다. 

칸의 눈매는 날카롭고 광채가 번득였다. 상대를 녹일 듯이 뜨겁게 바라보았다. 아무도 칸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칸의 결정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칸은 구운 오리고기에서 뼈를 발라내며 군대의 진퇴를 결정했고, 입을 우물거려 오리 뼈를 뱉으며 명령을 내렸다. 그는 사냥개를 좋아해서 몽고와 티베트에서까지 종자를 구했고, 부족장들은 고을을 뒤져 영특한 개를 찾아서 바쳤다. 혓바닥이 뜨겁고 콧구멍이 차가우며 발바닥이 새카맣고 똥구멍이 분홍색이고 귓속이 맑은 개를 칸은 으뜸으로 여겼다. 개들은 깡마르면서도 날랬고, 사납고도 온순했다. 적게 먹고 멀리 달렸고, 멀리 달리고도 헐떡거리지 않았다. 개들은 자는 모습을 주인에게 보이지 않았다. 칸은 개들을 조련시켜서 수십 마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모여 똥을 누게 했다. 사냥에 나가는 아침에 개들은 일제히 똥을 내질러 몸무게를 줄였고 뒷발질로 흙을 파서 똥 무더기를 덮었다. 칸은 개들을 전쟁터에도 데리고 나갔다. 개들은 낯선 부족의 몸 냄새와 똥 냄새를 따라서 산속으로 군사들을 인도했다.                (P29-30)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P36-37)   

  

--강을 건너시렵니까?

--그렇다. 어젯밤에 어가행렬이 여기서 강을 건넜느냐?

--그러하옵니다. 소인이 얼음이 두꺼운 쪽으로 인도했습니다. 사람과 말이 모두 걸어서 건넜습니다.

눈이 움푹 꺼지고 솟은 이가 드러나서 늙은 사공은 들짐승처럼 보였다. 

--어가가 강을 건너서 어디로 갔다더냐? 남한산성이라 하더냐?

--모르옵니다. 묻지 않았소이다.

미숫가루 냄새를 맡고 개들이 다가와 댓돌 아래 엎드렸다. 사공이 돌을 던져 개들을 쫓았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너는 왜 강가에 있느냐?

--갈 곳이 없고, 갈 수도 없기로......

--여기서 부지할 수 있겠느냐?

--얼음낚시를 오래 해서 얼음길을 잘 아는지라......

--물고기를 잡아서 겨울을 나려느냐?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볼까 해서.....

....이것이 백성인가, 이것이 백성이었던가..... 아침에 대청마루에서 남쪽 선영을 향해 울던 울음보다도 더 깊은 울음이 김상헌의 몸속에서 끓어올랐다. 김상헌은 뜨거운 미숫가루를 넘겨서 울음을 눌렀다. 이것이 백성이로구나.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P52)  

   

밤새 강물이 굳게 얼어붙으면 밝은 날 청병은 사공의 인도 없이도 강을 건너올 것이고, 얼음이 물러서 질척거리면 청병은 사공을 앞세워 강을 건널 것이다. 십만이라든가 십오만이라든가, 대병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사나흘은 족히 걸릴 것이고, 그 사나흘동안 강물은 얼고 또 녹을 것이다. 

--가야 하겠구나, 그럼 가거라.

--서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그쪽이 빠릅니다. 그럼......

사공은 돌아서서 얼음 위로 나아갔다. 김상헌은 환도를 뽑아들고 선착장에서 뛰어내렸다. 인기척을 느낀 사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김상헌의 칼이 사공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사공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쓰러질 때 사공의 몸은 가볍고 온순했다. 사공은 풀이 시들 듯 천천히 쓰러졌다. 사공의 피가 김상헌의 얼굴에 튀었고, 눈물이 흘러내려 피에 섞였다. 김상헌은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강 건너 마을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마을에서 버려진 말이 길게 울었다. 말 울음소리가 빈 강을 건너왔다.               (P55)     

대장장이 서날쇠(徐生金)는 아내와 쌍둥이 두 아들을 앞세워 남문 위쪽 성벽의 배수구로 향했다. 성 밖으로 나가는 처자식을 배수구까지 데려다줄 참이었다. 서날쇠는 삼거리에서 남문 쪽으로 뻗은 큰길을 버리고 골바람이 눈을 쓸어내리는 산길을 따라갔다. 남문부터 동쪽으로 뻗은 성벽은 긴 옹성을 밖으로 내밀며 계곡을 건너 가파른 능선을 기어올랐다. 배수구는 그 능선을 따라가는 성벽 밑이었다. 아내는 작은 옷보따리를 머리에 이었고, 쌍둥이 두 아들은 곡식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은 열다섯 살이었다. 작은 손도끼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찬 채 멀리 가는 채비를 갖춘 꼴을 보고, 서날쇠는 이 녀석들도 대가리가 컸구나 싶었다. 

--새벽에 임금이 마을에 들어왔어. 조정 신하들도 따라왔다는군. 여기는 위태로워. 당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야 해. 서둘러. 머뭇거리다가는 나갈 구멍이 막힐 거야. 난 여기서 대장간을 지켜야 하니까.....

서날쇠가 식구들에게 그렇게 말했을 때, 아내는 울지 않았고 군소리도 없었다. 아내의 친정은 조안(鳥安)이었다. 강이 얼었다면 걸어서 이틀 길이었다. 아내는 합수머리 강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딸이었다.                      (P58)    

 

혈육 없는 세상은 짐을 벗어놓은 듯 가벼웠다. 어미를 묻고, 그 어미의 밑에서 나온 어린 누이를 묻을 때 정병수는 이제 죽지 말아야 한다며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는 동안의 추위가 죽어서 흙과 더불어 얼고 녹는 추위보다 견딜 만할 것 같았다. 죽지 말아야 한다는 복받침과 닥쳐올 날들의 캄캄한 어둠이 정명수의 마음속에 포개져 있었다. 

세습노비에게 나라는 본래 없었고, 태어난 자리와 고을을 버려야만 살 길이 열리리라는 예감은 운명과 같았다. 정명수가 태어난 관아의 행랑은 고향이 아니었다. 고향이 없으므로 정명수는 갈 곳이 많았다. 정명수는 젊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눈치로 단련된 천례(賤隷)의 총기는 예민했다. 정명수는 여진말과 몽고말을 쉽게 배웠다.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하는 정처 없는 말과 사물에서 비롯하는 정처 있는 말이 겹치고 비벼지면서, 정처 있는 말이 정처 없는 말 속에 녹아서 정처를 잃어버리고, 정처 없는 말이 정처 있는 말 속에 스며서 정처에 자리 잡는 말의 신기루 속을 정명수는 어려서부터 아전의 매를 맞으며 들여다보고 있었다. 매틀에 묶여 있을 때 말이 비벼지면서 매는 더욱 가중되었다. 정명수는 빠르게 그 신기루 속을 헤집고 나가면서 여진말과 몽고말을 익혔다. 압록강 이쪽의 신기루와 압록강 저쪽의 신기루가 다르지 않았다.            (P81)   

백성의 초가지붕을 벗기고 군병들의 깔개를 빼앗아 주린 말을 먹이고, 배불리 먹은 말들이 다시 주려서 굶어 죽고, 굶어 죽은 말을 삶아서 군병을 먹이고, 깔개를 빼앗긴 군병들이 성첩에서 얼어 죽는 순환의 고리가 김류의 마음에 떠올랐다. 버티는 힘이 다하는 날에 버티는 고통은 끝날 것이고, 버티는 고통이 끝나는 날에는 버티어야 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는데, 버티어야 할 것이 모두 소멸할 때까지 버티어야 하는 것인지 김류는 생각했다. 생각은 전개되지 않았다. 그날, 안에서 열든 밖에서 열든 성문은 열리고 삶의 자리는 오직 성 밖에 있을 것이었는데, 안에서 문을 열고 나가는 고통과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고통의 차이가 김류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김류는 느꼈다.                    (P104-105)   

  

성안에는 네 아비가 없다. 네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져서 모두들 알고 있는데 네 아비가 성안에 있다면 어찌 나타나지 않았겠느냐. 지금 성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 너는 여기 머물러 있어라. 내가 마땅한 자리를 알아봐주마...... 김상헌은 나루를 서날쇠에게 얹어주었다. 예판 대감의 부탁을 내칠 수도 없었지만 처자식을 성 밖으로 내보내고 홀로 된 서날쇠는 아이를 반겼다. 오랫동안 아비를 수발해온 나루는 간단한 부엌살림을 꾸렸다. 삭정이는 아궁이에 넣고 잉걸은 화로에 담았다. 성안의 물정이 신기해서 나루는 아비를 잊은 듯했다. 아비가 성 밖 세상을 떠돌고 있다 해도 이야기 속 하늘나라 같은 이 성안으로 언젠가는 들어올 것이라고 나루는 믿었다. 

임금은 민촌의 인심 동태를 살피는 일을 김상헌에게 맡겼다. 김상헌이 군병을 움직여서 성문을 열고 나가 도성을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묘당을 거침없이 질타하고 백성들에게 너그러운 그의 성품에 임금은 기대고 있었다. 임금에게 김상헌은 늙은 나뭇 등걸처럼 보였다.          (P127)  

   

이조판서 최명길이 헛기침으로 목청을 쓸어내렸다. 최명길의 어조는 차분했다. 

--전하, 적의 문서가 비록 무도하나 신들을 성 밖으로 청하고 있으니 아마도 화친할 뜻이 있을 것이옵니다. 적병이 성을 멀리서 둘러싸고 서둘러 취하려 하지 않음도 화친의 뜻일 것으로 헤아리옵니다. 글을 닦아서 응답할 일은 아니로되 신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말길을 트게 하소서.

예조판서 김상헌이 손바닥으로 마루를 내리쳤다. 김상헌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화(和), 전(戰), 수(守)는 다르지 않사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서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최명길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온데, 앉아서 말라 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더구나......

김상헌이 최명길의 말을 끊었다. 

--이거 보시오. 이판, 싸울 수 없는 자리에서 싸우는 것이 전이고, 지킬 수 없는 자리에서 지키는 것이 수이며, 화해할 수 없는 때 화해하는 것이 화가 아니라 항(降)이오, 아시겠소?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요?

최명길은 김상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임금을 향해 말했다. 

--예판이 화해할 수 있는 때와 화해할 수 없는 때를 말하고 또 성의 내실을 말하나, 아직 내실이 남아 있을 때가 화친의 때이옵니다. 성안이 다 마르고 시들면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P158-159)

         

최명길의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 최명길은 천천히 말했다. 

--상헌의 말은 지극히 의로우나 그것은 말일 뿐입니다. 상헌은 말을 중히 여기고 생을 가벼이 여기는 자이옵니다. 갇힌 성안에서 어찌 말의 길을 따라가오리까.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P160)   

     

정명수는 최명길에게 한 말을 여진말로 용골대에게 옮겼다. 용골대는 크게 웃었다. 벌건 입 속이 들여다보였다. 용골대가 말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인가. 돌담을 사이에 두고 겨루자는 말인가? 귀국의 뜻에 따르겠다. 원하는 바를 말하라.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방도를 말해달라.

--나는 이미 말했다. 

--하나, 세자와 조칙은 따르기 어렵다.

--귀국은 명의 조칙을 받아오지 않았는가. 황(皇)이 바뀌면 조가 바뀌는 것이다. 여름에 겨울옷을 입는가? 어찌 그리 답답한가.

--나도 답답하다.

--귀국이 서울을 버린 뒤에도 우리는 귀국의 대궐을 불 지르지 않았다. 칸의 뜻을 귀국은 깊이 헤아리라.

--그런데 어찌 사다리를 만드는가? 칸의 뜻인가?

용골대가 술잔을 내려놓고 낄낄거렸다. 정명수가 따라서 웃었다. 정명수는 입으로 술을 뿜어내며 허리를 꺾고 웃었다. 용골대가 말했다.

--칸의 뜻이 아니라, 나의 뜻이다. 사다리가 두려운가. 귀국이 토굴에서 나오지 않고 성문을 열어주지도 않으니 사다리를 만들고 있다. 그러니 나의 뜻도 아니고 귀국의 뜻으로 사다리를 만들고 있다. 

용골대는 또 한바탕 웃었다. 개가 웃는 용골대를 향해 짖었다.

--오늘은 이만하자. 육포를 싸줄 터이니 돌아가는 길에 먹어라.

--고맙다. 또 오겠다. 

--확답이 없다면 올 필요없다. 그러나 서둘러라. 칸이 오고 있다.               (P185-186)   

  

칸이 삼전도에 당도하면 성문은 깨뜨리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고 임금은 성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며, 칸이 오기 전에는 임금은 기어이 성안에 눌러앉아 있을 것이므로, 어쨌거나 칸이 와야만 포위가 풀려서 성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고, 칸이 와서 성 안팎이 통하려면 세자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칸을 맞아야 할 것이라고 동장대 쪽 늙은 군병들은 양지쪽에 모여서 말했다. 

용골대가 길을 열어놓아서 칸의 이동 속도는 매우 빠르며, 칸은 사만의 증원군을 몰아 대동강을 건너서 임진강을 향하고 있는데, 칸이 삼전도에 당도하면 성을 깨뜨리지도 못하고 세자를 잡아놓지도 못한 용골대의 목을 베어서 그 머리를 조선 임금에게 보내고 몸소 군사를 몰아 성을 부술 것인데, 그날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삼거리 훈장집 헛간에 모인 민촌의 늙은이들은 수군거렸다. 

칸이 오면 성이 열린다는 말과 칸이 오면 성이 끝난다는 말이 뒤섰였다.           (P201)     


--말해라. 다녀오겠느냐?

서날쇠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라에서 하라시니, 천한 백성이 어쩌겠습니까.

‘나라’라는 말이 천 근의 무게로 김상헌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녀오너라, 다녀오면 전하께 아뢰어 우선 종구품 참봉을 제수하고, 환궁 후에는 정칠품 참군으로 올려서 어영청에..... 터져 나오려는 말을 김상헌은 겨우 눌러서 속으로 밀어넣었다. 김상헌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상헌은 다급했다. 

--나라 얘긴 하지 마라. 그런 말이 아니다. 나를 도와다오. 

--하기사, 포위가 풀려서 조정이 돌아가야 성안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저도 대장간을 굴려서 먹고살 수 있을 터이니......

김상헌이 서날쇠의 두 손을 잡았다. 

--그렇다. 조정이 나가야 성안이 산다. 다녀오거라.

삼경 무렵 김상헌은 처소로 돌아갔다. 추위가 팽팽해서 별들이 닿을 듯했다. 가까운 별들이 성안에 가득 차서 아른거렸다.                     (P250-251)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조선이었다. 송파강은 날마다 부풀었다. 물비늘이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칸은 답답했다. 저처럼 외지고 오목한 나라에 어여쁘고 단정한 삶의 길이 없지 않을 터인데, 기를 쓰고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됨으로써 멀리 있는 황제를 기어이 불러들이는 까닭을 칸은 알 수 없었고 물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강자의 적이 되는 처연하고 강개한 자리에서 돌연 아무런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 그 적막을 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송파강에 당도하기까지 행군대열 앞에 조선 군대는 단 한 번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대처를 지날 때에도 관아와 마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의 누런 개들이 낯선 행군대열을 향해 짖어댈 뿐이었다. 도성과 강토를 다 비워놓고 군신이 언 강 위로 수레를 밀고 당기며 산성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내다보지 않으니, 맞겠다는 것인지 돌아서겠다는 것인지, 싸우겠다는 것인지 달아나겠다는 것인지, 지키겠다는 것인지 내주겠다는 것인지, 버티겠다는 것인지 주저앉겠다는 것인지, 따르겠다는 것인지 거스르겠다는 것인지 칸은 알 수 없었다.           (P305-306)    

 

김상헌이 앞으로 나왔다. 

--전하,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임금을 다그쳤다. 

--전하, 이제 칸을 황극으로 칭하였으니 문서가 적에게 가면 전하는 칸의 신이 되고, 신들은 칸의 말잡이가 되며, 백성들은 칸의 종이 되는 것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말했다.

--적이 비록 성을 에워쌌다 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명길을 멀리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나가소서.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夷)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셔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김류가 말했다.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이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임금이 겨우 말했다. 

--영상의 말이 어렵구나. 쉬고 싶다. 다들 물러가라.

밤중에 임금이 승지를 불러서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P339-340)   

  

임금은 새벽에 성을 나섰다. 신료와 호행의 대열이 행궁 마당에 도열해 있었다. 어두워서 신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이 내행전에서 마당으로 내려섰다. 임금은 대열 가운데를 지나서 행궁 대문으로 나갔다. 임금의 걸음은 빨랐다. 신료와 호행들이 뒤를 다르며 대열을 이루었다. 

대열은 행궁을 나와 서문으로 올라갔다. 임금과 세자는 말을 탔고, 신료들은 걸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성벽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성 밖의 계곡과 들판도 보이지 않았다. 

성안에 남는 사대부와 궁녀들이 서문 앞에 모여 통곡하며 절했다. 임금은 돌아보지 않았다. 서문은 홍예가 낮았다. 말을 타고 홍예 밑을 지날 때 임금은 허리를 숙였다. 서문 밖은 내리막 경사가 가팔랐다. 말이 앞쪽으로 고꾸라질 듯이 비틀거렸다. 말은 힝힝거리며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은 말에서 내려 걸었다.                      (P381)     


청의 사령이 목청을 빼어 길게 소리쳤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조선 기녀들이 풍악을 울리고 춤추었다. 기녀들의 소맷자락과 치마 폭이 바람에 나부꼈다. 풍악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멀리 퍼졌다. 홍이포가 터지고, 청의 군장들이 여진말로 함성을 질렀다. 

조선 왕은 오랫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있었다. 조선 왕은 먼 지심 속 흙냄새를 빨아들였다. 볕에 익은 흙은 향기로웠다.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아득한 날들이 흔들렸다. 조선 왕은 이마로 땅을 찧었다. 

청의 사령이 다시 소리쳤다. 

--이 배요!

조선 왕이 다시 절을 올렸다. 기녀들이 손을 잡고 펼치고 좁히며 원무를 추었다. 풍악이 자진모리로 바뀌었다. 춤추는 기녀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속곳이 펄럭이고 머리채가 흔들렸다. 다시 홍이포가 터지고 함성이 일었다. 조선 왕이 삼배를 마쳤다.              (P383)    

 

말(言)의 길은 마음속으로 뻗어 있고, 삶의 길은 땅 위로 뻗어 있다. 삶은 말을 온전히 짊어지고 갈 수 없고 말이 삶을 모두 감당해낼 수도 없다. 

말의 길과 삶의 길을 이으려는 인간의 길은 흔히 고통과 시련 속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을 전인미답이고, 우회로가 없다. 

임금은 성안으로 쫓겨 들어왔다가 끌려나갔고, 폐허의 봄에 냉이가 돋았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그 성안에 모여들어서 봄 농사를 준비하고 나루가 초경을 흘리는 대목으로 내 소설은 끝났다. 나는 정축년(1637년)의 봄을 단지 자연의 순환에 따른 일상의 풍경으로 묘사했다. 이념의 좌표가 없는, 진부한 결말이지만 억지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일상의 구체성 안에서 구현될 수 없는 사상의 지표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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