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은교> 2012년
내 죽음이 임박했다는 건 나의 확신이자 의사의 확신이다. 내가 한사코 원했던 결말이다. 당뇨로 인한 갖가지 합병증은 물론, 최종적으로 나를 찾아온 암종은 빠른 시간 안에 나의 전신을 장악했다. 진통제의 처방만 받았을 뿐 일반적인 치료를 줄곧 거부했기 때문에 암종은 재빨리 퍼져 곳곳에 제 집터를 만들고 마음놓고 나를 파먹었다. 게다가 치료 대신 독과 같은 술을 계속 마셔왔다. 최대한 길게 잡아도 매화가 피기 전에 나는 죽을 터이다. 틀림없다. 병원으로 가는 것은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다. 치료를 위한 어떤 처방도 나는 물론 계속 거부할 생각이다. 다만 이곳에 혼자 죽고 싶진 않다. (P9-10)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에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지는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 (P11-12)
“난 장르문학이란 말 안 받아들이네. 문학 앞에 붙는 어떤 관형사도, 알고보면 층위를 나눠 세우고 패를 가르려는 수작이야. 우리 문학판 너무 협소하고 못돼먹었어. 양반 상놈을 아직도 가르려는 패거리가 너무 많은 게 이 동네거든. 자네는 양반을 사고 난 필요한 돈을 얻으면 되지.” 우리 한번, 문학판을 갖고 놀아보세, 라고 마음속으로 나는 덧붙였다. (P66-67)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혁명을 꿈꾸던 젊은 날 배운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천박한 자신의 욕망을 갖은 말로 치장해 감추면서, 세상에 대고 밤낮없이 두 개의 나팔을 불었다. 이를테면 천박한 자라고 판결을 내리는 자에겐 트럼펫을 불고, 천박하지 않은 자라고 판결을 내리는 자에겐 우아하게 색소폰을 불어대는 식이다. 그런 자 중에서 자기 판결의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는 자는 사실 드물다. (P67)
오늘은 은교, 내게 첫 편지를 쓴다. 지금은 부치지 않을 편지를. 그래도 편지, 하고 발음하고 나니까 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혀끝이 달콤하다. 사실은 네게 편지를 쓰고 싶은 날이 그동안에도 참 많았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두컴컴하고 너는 시리게 푸르다. 어찌 그걸 부정하랴. 젊은 날에 만났다면, 그리하여 너와 나 사이에 아무런 터부도 없었다면 너를 만난 후, 나는 아마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네게 편지를 쓰면 되니까. (P90)
부디 내가 쓰는 문장들을 네가 보고 만지듯 받아들여줬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쉬운 문장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말은 근본적으로 추상일진대. 새내기 네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줄지 솔직히, 걱정이다. 가령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는 문장 같은 것. 알고 보면,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어휘 자체가 형태 없는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의미가 애매모호하고 어려우나,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한다”라는 문장은 아무런 추상과 거짓이 없으니 아무 쉬운 말인데, 사람들은 보통 거꾸로 느낀다는 걸 나는 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염려하는 게 그것이다. 그러니 얘야, 내가 그렇게 썼듯, 너는 내 말을 쉽게, 그 무엇도 덧붙이거나 빼지 말고, 순정적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P91-92)
그러나 다 헛된 상상이다.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다.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는 데 나이는 본원적으로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의 열일곱과 너의 열일곱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면 그것이겠지. (P107)
생은 결과론적으로 내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조심했고, 억눌려 견디었다. 시가 감정의 분출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여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감정은, 일종의 얼룩에 불과했다. 싸구려 얼룩들을 지워야 맑은 우리 너머로 참된 세계 구조가 보일 거라는 게 나의 시론이었다. 그것을 ‘내 시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내 것이었으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나는 다만 전투적으로 나를 억압하고 산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수인(囚人)으로서 나는 시간을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나의 생애는 머릿속에서, 단번에 제로베이스가 되었다.
오늘 일을 반면교사로 삼아, 걸어왔던 대로 더 피어리게 견딜 것인가, 감정을 좋아 파멸의 길로 갈 것인가, 길은 두 갈래였다. (P130-131)
문학에서까지, 층위를 제멋대로 나누어놓고, 모든 작가 작품을 마치 공산품에 품질 표시를 하듯 표시해서 칸칸마다 나누어 몰아넣으려는 듯한 지식인 독자들의 일반적 습관에 나는 경멸감을 갖고 있었다. 어디 문학뿐이겠는가. 문학을 떠나면 폭력적인 그 편견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든 장르에 걸쳐 메이져, 마이너리그가 있고, 양아치로 취급받는 아웃사이더 그룹도 있다. 스포츠처럼 정당한 시합에 따른 철저한 기록 분석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더러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현상’을 단서로 ‘내용’ 전체를 분류해버리고, 대중의 호응을 유도하여 그 분류의 정당성을 가짜로 확보, 굳히기 과정을 거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층위에 분류되어 넣어진 자는 아무리 변화를 꿈꾼다 해도 거의 평생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쉽다. 이를테면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 그런 식이다. 그들의 분류 기준이란, 말이야 그럴 듯하지만, 대개는 전근대적 ‘양반의식’이 이월상품처럼 전이돼온 것이다. (P141-142)
시인은 언젠가 신비주의는 ‘비겁한 짓’이라고 내게 말했다. 당신은 깨달음을 믿지 않으며, 더구나 깨달음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는 허무맹랑한 자기합리화라고 지적했다. ‘다 구라일 뿐이야, 내세가 어딨어?“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신성은 우리가 직관적인 영감을 통해 느낄 뿐이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P157)
그리움은 때로 이렇게 터무니가 없다. 사랑인가.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톨스토이처럼 사랑을 가리켜 ’자기 희생‘이라 말하고 싶지 않고, 오스카 와일드처럼 ’성찬이니 무릎 꿇고 받아야 한다‘고 떠들고 싶지 않다. 아내와 연애할 때에도 알고 보면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한 건 선생님인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에 데거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P185)
하얀 신작로 하나
시원하게 놓여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땅끝까지 갈 수 있다면 그 모든 길, 얼마나 등불처럼 환하랴. 그것은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길이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풍우설상(風雨雪霜)에 묻혀 있었고, 내가 보았던 길은 늘 안개가 가득했다. 왜 좀더 오래전에 이런 길이 가까이 놓여 있는 걸 보지 못했을까. 아니, 보지 못한 게 아니라 한사코 버리고 온 길이었다. 이십 분은 너무도 짧았다. 그러나 그 이십 분은 생애 전체와 맞바꿔도 좋을만큼 아름다웠다. “할아부지 언제 돌아오세요?” “으응, 아마 저녁 먹을 때쯤” “저도 그때쯤 끝나는 데요. 이따 할아부지 휴대폰으로 전화해볼게요.” 학교 앞에서 그애가 깡총, 차에서 내렸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부지!” 가로에 내려선 그애가 꾸벅하더니, 돌아서서 종종걸음을 쳤다. 따라가고 싶어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무릎과 발목 발가락 관절 마디 속으로 무수한 꽃잎들이 우수수수, 떨어졌다. (P196-197)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내가 스탕달의 말을 인용하자 서지우는 큭, 웃었다. “선생님, 요즘엔 뽀뽀도 그냥 하는 세상이에요.” “그럴테지.” 나는 미소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서지우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火印)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 내가 은교의 손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가 바로 그럴 때이다. (P200)
나는 스탕달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서지우 말에 따르건대, 세상 사람들과 내가 다른 점도 간단히 정리하자면 ’손‘에 대해 느끼는 그런 감각의 차이였다.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겠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간다.
라고 그 순간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관념적으로 연애를 상상할 때와 너무도 다른 결론이었다. 나는 은교를 만나기 전까지, 참된 연애란 남녀불문하고 영혼으로 시작된다고 믿었다. 감각은 하나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나는 은교를 통해 내가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실체 없는 관념이었는지 명백히 알게 되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 수준보다 늙은 내 육체가 사실은 얼마나 예민하고 건강하게 제 촉수들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지도. 늙은 육체는 외피에 불과했다. 은교와 만나는 나의 감각들은 모서리쳐질 만큼 살아 있었다. ’뽀뽀도 그냥하는 세상‘을 알고는 있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세계였다. (P201-202)
조금만 더 귀를 열면 바람에 솔잎 하나가 떨어져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고요였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유리창과 얇은 커튼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그애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것은 우주적인 거리였다. 내게는 그애보다 죽음이 훨씬 가까웠다. (P232)
그애가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이 빠르게 거실 앞을 돌아 목재 계단을 내려갔다. 한 번 발걸음을 내딛고 나자 망설임이 없었다. 목재 층계는 쫑, 쫑, 쫑, 울지 않고 통통통, 울었다. 대문을 열고 나가는 그애, 제 그림자를 톡톡 차면서 숲으로 둘러싸인 텅빈 골목을 걸어나가는 그애가 떠올랐다.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나는 비로소 길게 엎드렸다. 갑자기 가슴 한켠을 어떤 단검이 깊게 에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시간을 따라 물처럼 차오르는 건, 슬픔이었다. ’눈 감으면 송장‘ 혹은 ’썩어가는 관 같은‘ 나는, 그래서 엎드린 채 조금 울었다.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통했다.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날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 (P233-234)
나는 원래 문학잡지를 잘 읽지 않는다. 문학지가 다루는 문제들은 흔히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일쑤이고, 정략적 전술로부터 자유롭거나 초연하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발표되는 작품들도 대동소이했다. 비평 그룹이 암시하는 방향을 맹목적으로 따라간 작품이든, 일시적인 충격으로 다른 이의 눈에 띄기 위해 쓴 듯이 보이는 작품이든, 문단 트랜드를 무조건 고려해 쓴 작품이든지간에, 늙은 나에겐 젊은 작가들의 모든 노림수가 손금처럼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스트레스일 뿐이었다. 깊은 감흥을 받지 못하면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P266-267)
늙는다는 것이 생물학적 기능과 신진대사의 스트레스에 의한 적응능력이 감소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원시인들은 늙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시간의 개념을 몰랐었으니까. 시간은 생명의 순환구조를 운행하는 핵심적 원리이다. (P279)
고백하거니와, 나는 노화나 죽음의 극복에 대해 말하는 어떤 관념적 논리에도 순종하지 않았다.
나라고 해서 죽음을 넘어서기 위한 많은 길을 찾아보지 않은 건 아니다. 마음을 닦으면 된다고 해서 길을 따라 끝없이 떠돌아 다닌 적도 있었고, 모든 걸 극복한 현자들이 있다 하여 선인의 말을 찾아 수많은 책도 읽었으며, 영원히 사는 법이 교회나 절간에 들어 있는지 알고 교회당에 찾아다닌 적도 많았다. 하지만 다 도로(徒勞)에 불과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하고 나는 최종적으로 생각했다. 노화와 죽음은 다만 무자비한 법칙에 불과하다. 그것은 절대성을 갖는다. 생명이 갖고 있는 가장 비극적인 운명은 노화와 죽음으로부터, 그 지옥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잔인하게 유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유린당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일흔이 되지만 병이 깊으니 노화의 속도가 더 빠르다. 은교를 만나기 전에 그랬고, 그애와 이별하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말했던 것이다.
죽음이여, 어서 와, 자, 나를 찢고 해체하라. (P280-281)
사형 선고는 인간이 가진 최상의 가치를 증명하는 표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 이외엔 오로지 죽임만 있을 뿐 사형 선고는 없으니까. (P315)
오늘 선생님은 불현 듯 내게 말했다. “나는 다음 세상에선 킬러로 태어나고 싶네. 자네도 작가니까 알겠지만, 작가라는 것도 그래. 좋은 작가는 킬러같이 정밀하고 철저하고 용의주도해야 돼. 킬러는 바람의 방향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거든. 예술이 그렇다네. 완전한 예술가는 곧 완벽한 킬러라 할 수 있지.” 문학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 말을 했지만, 나는 단순히 듣지 않았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P323-324)
내 마음속 영원한 젊은 신부, 은교.
나의 마지막 길이 쓸쓸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비참하지도 않다. 너로 인해, 내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것을 나는 짧은 기간에 너무나 많이 알게 되었다. 그것의 대부분은 생생하고 환한 것이었다. 내 몸 안에서도 얼마나 생생한 더운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를 알았고, 네가 일깨워준 감각의 예민한 촉수들이야말로 내가 썼던 수많은 시편들보다 훨씬 더 신성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세상이라고, 시대라고, 역사라고 불렀던 것들이 사실은 직관의 감옥에 불과했다는 것을, 시의 감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시들은 대부분 가짜였다. (P394)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 주었던, 나의 등롱같은 누이여.
이제 마지막으로, 나처럼 맑은 소주에 의지해, 나보다 먼저 생으로부터 홀연히 걸어나간 한 시인의 시 중에서, 그 일부를 여기 옮겨 적는다. 나의 시는, 네게, 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 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손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에서 (P399-400)
다 쓰고 났을 때, 몸 안에서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장들이 쑥 빠져나간 듯했다. 나는 쭉정이가 되어 어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웠다. 그리고 보았다. 저만치 흘러가던 나의 젊은 날이 어느새 돌아와 내 옆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5월의 물푸레나무처럼 내가 다시 푸르러졌다고 느꼈다. (P405,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