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용헌 Sep 11. 2024

김하인의 <국화꽃향기>

영화 <국화꽃향기>  2003년

[1]

남자는 성근 미소를 지었다.

아가야.... 꽃잎이 피어나듯 곱고 부드럽게 엄마 속에서 나와 줄 수 없겠니? 지금 네 엄마는 무척 힘들단다. 이 아빠가 두려움에 떨 만큼. 하지만 널 생각하면 한없이 맘이 설렌단다. 너를 몸속에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아니? 조금 있으면 네 엄마가 너를 볼 수 있겠구나. 너를 꽃처럼 촛불처럼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보듬어 키웠던 네 엄마..... 사랑하는 아가야. 네가 세상으로 오는 것을 더없이 환영하지만 이 아빠는 네 엄마가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구나. 난 네가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단다. 꽃처럼 마냥 엄마 몸 바깥으로 피어나길 꿈꾼단다. 아무 일이 없이. 그렇게..... 그냥 그렇게 됐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싶구나.                  (P19)     

머릿결에서 국화 향이 나는 여자...... 멀대같이 큰 키에 부지깽이같이 길다란 다리를 가진 그는 껑충거리는 걸음으로 그녀를 이내 따라잡았다. 

“저...... 뭐 좀 여쭤 보겠습니다.”

“네?”

“이 근처에 <황금 가면>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생맥주 집이라던데요?”

승우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하철 안에서의 면박을 앙갚음하려는 속 좁은 인간이나 치한으로 비쳐질까 싶어서 얼른 말을 덧붙였다. 

“그 집을 낀 골목 끝에 <매직 넘버>란 카페가 있는데 오늘 그곳에서 모임이 있거든요!”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미간과 코의 주름을 살풋 잡았다가 천천히 다림질하듯이 폈다.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두 개의 무거운 인쇄 뭉치를 억울하다는 듯 잠시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았다.

“들어요!”

“....... 네?”

“신입생이죠?”

“네? ......... 아, 네에, 그렇습니다.”

승우는 그제야 바닥에 놓여 있는 인쇄 뭉치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시네마. 드림. 솔저!’의 약자인 CDS란 대문자 영문 표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서울권 열두 개 대학 영상 연합 서클의 공식 명칭이자 이니셜이었다.               (P26-27)     


"허 선배님! 선배님은 인체를 공부하죠?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어떤 여자 머리카락에서 언제나 국화 향이 나거든요. 그런데 샴푸를 쓰지 않는대요. 성격이 털털한 편이어서 머리도 사나흘에 한 번씩 감는다는데, 신기하게도 언제나 야생 국화 향기가 나거든요. 비누도 목욕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비누를 쓴다는데.... 근데 그게 의학적으로 가능하기는 해요? 아님 제 코 기능이 잘못된 건가요?”

승우의 질문은 의학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차라리 향을 제조하고 취그하는 조향사에게 물어 보거나 심리를 전공하는 사람에게 물어야 할 터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 여자 머리카락에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그러던?”

“아뇨, 저만 맡아요.”

“네가 개코라 그런가?”

“선배님! 저한테는 꽤 심각한 질문이에요.”

장난기 없는 얼굴이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건 인체가 내뿜는, 증명되지 않는 자장력의 파동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를테면 운명적으로 끌리는 사람들 사이에는 해석이 안 되는 영역이 있다.                  (P53-54)     

남녀간의 사랑에는 참으로 심술맞은 구석이 있어서 특별한 이유 없이 엇나가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승우와 영은, 미주의 관계가 그러했다. 누가 봐도 좋은 집안의 예쁘고 총명한 영은이 낫다고 할 테고 탐내겠지만, 승우는 영은이 여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승우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를 남자로조차 여기지 않았다.

하필이면 3년 연상이고 선배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다니, 정말이지 사랑은, 초보자는 도무지 다룰 수 없는, 핸들 없는 자동차를 모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나라로, 행복의 나라로, 아무리 애써 몰아가려고 해도 사랑의 감정은 그를 점점 더 헤어나기 힘든 슬픔의 수렁이나 고독의 늪 속으로 몰고 가는 기분이었다.           (P76)     

눈부신 것들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 그러므로 사랑의 속살은 광휘로우나 그 빛의 여운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자는 기억을 놋그릇처럼 성실하게 인내하며 닦는 자이다. 

단편영화 촬영을 마치고 승우가 바닷가에서 단 한 번 미주와 키스했던 그날로부터 햇수로 7년이 흘렀다. 

미주는 1989년 2월 대학을 졸업한 후 충무로의 한 영화사에 소속되었고 잡다한 홍보 현장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그 이듬해 조연출 일을 시작했다. 

1991년, 미주가 장장 10개월에 걸쳐 찍은 저예산의 독립 영화가 여러 가지 이유로 개봉관에 걸리지도 못하고 바로 비디오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버렸다. 

영화판 현실의 높고 두꺼운 벽을 절감한 미주는 1992년 초부터 집에서 나와 전세를 얻어 칩거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요즘 들어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시나리오를 자신이 직접 써서 자본을 끌어들이고 스태프 진을 구성하여 감독으로 화려하게 데뷔하는 흐름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자신과 싸워 나가는 절치부심의 시간들. 미주는 CDS 오비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 동안 두 번의 사랑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들은 모두 미주가 속한 세계에서 만난 남자들이었다.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과 승부를 겨루는 인간형. 바로 미주가 좋아하는 타입의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치열함을 원하는 미주에게서 오히려 편안한 쉼터를 원했다. 관계는 단기간에 끝장나 버렸다. 한 남자는 그가 먼저 그만 만나자고 통고했고 또 한 남자는 미주 자신이 먼저 돌아섰다. 남자에게 빠지기보다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미주에게는 훨씬 속 편한 일이었다. 남자 때문에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던 것이다. 가슴의 결핍을 감수하더라도 차라리 혼자 일하며 사는 게 낫다고 미주는 어느 순간 결정해 버렸다. 

비 오는 날이나 화창한 날, 커피를 끓이거나 창문을 열었을 때 아주 드물게 승우 생각이 나곤 했다.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분명 졸업은 했을 텐데 뭘 하는지 궁금하군. 하지만 거기에서 그칠 뿐 그의 소식을 수소문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미주의 마음속에 승우는 여전히 재능 있고 인간성 좋으며 잘생긴 남자 후배 정도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었다.            (P87-89) 

    

처음에 ‘김승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You're My World>란 곡명이 나오자 미주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곡은 경포대 옆 커다란 해송이 있는 안목 백사장에서 승우가 비스듬히 누워 바닷빛의 음색으로 불렀던 곡이었다. 틀림없는 승우였다. 미주는 갑자기 킥킥킥. 웃음을 터뜨렸고 계산대로 바구니를 들고 가면서도 연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녀석! 팝송을 잘 부르더니 팝송 PD가 됐네. 언젠가 CDS를 탈퇴했다는 소리를 듣고 경제학과 본업인 대기업 사원이 돼 있을 줄 알았는데, 어쨌든 실력이 있다 했더니 금방 자기 자리를 잡았군. 

미주는 조금 묘하고 조금 즐거워진 기분으로 원룸으로 돌아와 FM 라디오 채널을 맞춰 놓고 라면을 끓이고 김치에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어 가며 먹었다.              (P97)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내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향기로 이미 눈 멀고 귀 멀어 버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지상에 살아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의 여자가 된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무심함이 내게는 참기 힘든 가혹함이었지만 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20년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급하게 내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내가 미력하나마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추구해야 할 일이 있고 열정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혼자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당신이 꿈꾸는 세계를 조금 더 빨리 이루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일을 사랑하며 당신이 일하는 모습까지 더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탁입니다. 나를 남자로 받아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이미 잠들었는지, 일에 열중하는지,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내 간절한 마음이 당신에게 전달되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던 바닷가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내 마음이 그때 그곳에 이미 영원히 붙박여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나의 사랑은 어느 누구라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내 사랑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만 뿌리를 박고 살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이니까요.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P124-125)     

“....... 응. 정말 미안하다.”   

“사과는 싫어. 내가 자초한 걸 뭐. 내가 필리핀에서 15년째 살고 있잖아. 그 나라에, 여자한테 눈물을 흘리게 한 남자는 꼭 열 배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주문이 있어. 남자의 불행을 부르는 일종의 저주이지. 재미있어서 외워 뒀거든. 근데 내가 오빠를 향해 그 주문을 외울 것 같아, 안 외울 것 같아?”

“........ 글쎄?”

영은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엉거주춤 승우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두 손으로 승우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구륵, 하고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이 승우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빠, ......... 잘 살아야 돼? 응? 꼭이야!”

“그래.”

“나 같은 여잘 놔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할 정도라면 오빠는 그 여자와 매일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야 돼. 알았지? 응? 꼭 그러겠다고 대답해 줘!”

“그래...... 그래, 약속할게.”

“됐어, 안심이야. 나 그 주문 안 외울게. 혹 못 참아서 외우더라도 그 저주를 지우는 해독 주문도 알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 어쨌든 난 오빠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니까 정말 마음이 놓이고 기쁘기도 해.”                    (P149)     

미주가 마신 조영제는 위 전체를 하얗게 사진 촬영하게 하는 것으로, 위점막 전체를 희게 바르는 역할을 했다. 불만 섞인 입을 삐죽 내밀면서 기기 앞에 선 미주를 보며 정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주는 대학 때부터 몸을 학대시켰다고 할 수 있다. 술과 담배에 불규칙한 식사. 심지어 하루를 한 끼조차 안 먹은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대학 4학년 때부터는 위장약을 입에 달다시피 하며 지냈다. 정란은 그게 오래 전부터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종합 병원에 근무하게 되면서 정란은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져 죽어 나가는 일이 허다한 게 병원이었다. 응급실과 내과 병동만큼은 아니겠지만 산부인과 병동도 위태로운 목숨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병원에 근무하면 누구나 건강을 자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죽음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일상사였다.                  (P173)     

미주는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자가 임신 진단을 한 후 그 기쁨이 하루를 채 못 갔다. 정란에게 임신을 확인받고는 그냥 한번 받아 보자고 한 위 촬영 검사에서..... 정말 너무나 잔인하고 매정한 처사였다. 생명을 확인한 뒤 곧바로 머잖아 죽을 거라는 통보를 동시에 알려 주다니.

그러고 보면 미주에게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인스턴트 커피 한잔 마시는 시간, 담배 한 대 피울 시간에 상황과 감정이 극과 극으로 바뀐 것이다. 누군가 그 무렵에 동전을 두 번 던진 것 같았다. 한 면은 천국의 기쁨, 한 면은 지옥의 초대장. 그렇게 누군가 미주의 운명의 동전을 두 번 던졌고 공교롭게도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 같은, 희비극을 동시에 즐기려는, 빌어먹을, 그 작자가 대체 누구인가? 신은 너무나 멀리 있었고 그 두 현장에는 미주와 정란이 있었다.                      (P180-181)

     

그런데 막상 자신에게 선고가 떨어지자 분노와 슬픔, 허둥거림과 착잡함, 불안과 공포가 수시로 엄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주는 어느 정도 차분해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결정을 빨리 내려야 했다. 미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중 하나뿐이었다. 병원에 들어가 투병 생활을 시작하는 것, 아니면 병실 침대를 거부하고 사는 데까지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그 양 갈래 선택 길에서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태아였고 남편 승우였다. 

미주는 그 동안 여러 곳에서 자문을 구했다. 암이 이 정도로 진전되었다면 의료적인 힘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정말 태아는 포기하는 방법밖에 없는가. 투병을 시작했을 때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낫거나 재발할 확률은? 의료 조치를 받을 때 얼마만큼 살 수 있는가? 연장은 얼마나 가능한가? 의료 행위를 거부하고 그냥 버틴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고통은 어느 정도인가? 그렇다면..... 과연 아기를 낳을 가능성은 있는가? 건강한 아기는 가능한가?

당혹스러운 것은...... 경악스러운 것은....... 미주의 갈급한 의문에 대해서, 선택의 기로에 선 그녀에 대해서, 아무도 속 시원한 확신감을 주거나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는 거였다. 수많은 병원이 있고, 첨단 의료 기기가 만들어지고, 암에 대한 무수한 이론과 학설이 쉼 없이 쏟아지고 있다고 해도 암 당사자에겐 너무나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것이 현대 의학이었다. 추측만이 난무하거나 ‘그건 아무도 모르죠’ 하는 투의 대답 일색이었다. 또 한 가지는 미주 상태라면 현대 의학으로도 그리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암시의 말투와 인상을 풍기는 전문의들이 여럿이었다는 거였다.                (P188-189)  

   

“정란아!”

“응.”

“네가 좀 도와 줘.”

“물론이야. 잘 생각했어. 최선을 다 할게. 승우 씨도 널 살려 낼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난 결정을 내렸거든. 내 뜻대로 할 수 있도록 네가 옆에서 좀 도와 줘. 부탁이야. 정란아!”

“...... 미....... 주야? 서....... 설마 너.......?”

“그래, 아기를 낳을 거야.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아기만 생각하기로 결정했어. 내 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니까 너도 그런 쪽에 서서 나를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의료적인 도움도 필요하게 될 테니까 네가 도와 줘야 돼.”

“마....... 말도 안 돼. 미주야. 그건 너무나 어리석어...... 정말 너 바보처럼 굴 거니? 독종처럼 굴 거니?”

“정란아, 너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누구보다도 충분히 이해할 거야. 생각해 보렴. 내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암 퇴치 같은 게 아니고 내가 가진 아기를 무사히 낳는 거야. 나와 승우 씨 사이에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아기잖아. 너무나 소중해. 이해하지?”

“...........”                      (P195)   

[2]

어떤 날..... 어떤 날 말이야. 승우 씨 혼자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앞머리칼을 흩뜨려 놓거나..... 어느 순간 공기 속에서 

국화꽃 향기가 난다면, 내가 승우 씨 옆에 와 있다고 생각해 줘.

그래서 내가 근처에 있는 걸 알았다면..... 눈을 감고 손을 펴서

가만히 앞을 향해 뻗어봐. 그러면 뭔가 느껴질 거야.

내가 승우 씨 손에 뺨을 대고 있을 테니까. 온기든 서늘한 감촉이든 틀림없이...... (P7)   

  

하지만 미주의 표정은 마른 빵처럼 굳어 있었다. 라디오 음악 프로 앞으로 날아오는 엽서는 1년 정도 모아 둔다. 나중에 예쁜 그림과 사연, 시가 담긴 엽서전도 따로 열 정도니까. 승우가 농담으로 그런 얘길 한다는 걸 미주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현 듯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아팠다. 이 남자는 나 없이 어떻게 하나. 겨우 나이 서른하나의 남자가 평생을 혼자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른 여자에게 이 남자를 보내야 한.....다. 순수해서 곧잘 어리광까지 부리는 이 남자를 포근하게 잘 안아 주고 재워 줄 여자..... 내 발 씻겨 주기를 좋아하고 내가 자기 얼굴 씻어 주는 걸 좋아하는 이 좋은 남자의 새로운 여자가 될..... 여자.....

생각만 해도 가슴이 쓰렸다.                (P18)     

정란은 몸에 통증이 올 때 먹으라고 미주에게 조그만 병에 진통제를 담아 주었었다. 보라색 알약인 MS콘틴. 정란은 이제 미주에 대해서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다만 미주가 바라는 대로 무사히 아기를 낳으려면 산모에게 극심한 고통은 금물이었다. 그러다가 아기가 유산되거나 잘못될 수도 있었다. 

다행히 깡체질인 미주는 자궁이 튼튼한 편이었고 아기집도 건강했다. 정란이 우려하는 건 암에 의한 고통이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하는 거였다. 그 점이 정작 미주 본인과는 달리 정란에게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속없는 친구는 그런 기미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면 까르륵 웃어대는 게 아닌가. 미주의 목소리는 확실히 밝고 건강해진 것 같았다.          (P36-37)  

   

“미, 미주야, 왜 그래?”  

“체한 거 아냐?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냐?”

“괜..... 괜찮아요. 승우 씨..... 무...... 물 좀 갖다 줘.”

미주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자. 이게 웬일이야? 임산부는 함부로 약을 먹어선 안 되는데, 하는 표정을 주철 선배 부부는 짓고 있었다. 

MS콘틴의 위력은 빨랐다. 배를 싸쥐고 웅크린 쥐 1분이 채 안되어 단말마적으로 들이친 통증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미주의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었군. 놈이 선전포고를 해 왔어.

이쯤 해서 쉬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승우는 미주를 기숙사로 데리고 들어갔다. 미주의 얼굴은 눈에 띄게 창백하고 핼쑥했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승우에게 엄습했다. 미주는 괜찮아졌다고 하면서 벽에 잠시 기대앉았다. 

“체했나 봐.”

“그러면 급첸가? 어떻게 약을 주머니에 갖고 있었어? 누가 처방한 약이야? 먹어도 아기한테는 괜찮은 거야?”

“응, 내가 요즘 속이 안 좋고 꽉 막혀서 척추 중간이 아플 때가 있다고 하니까 정란이가 조제해 준 거야. 먹어도 괜찮대.”                    (P43-44)   

  

“승우 씨...... 모르는구나. 아직, 그치?”

“대체 무슨 말이에요? 뭐가요? 정확히 얘기해 봐요!”

그러나 맘이 여린 편인 정란은 말을 꺼내기가 부담스럽고 곤혹스러운지 소주잔을 다시 비워 냈다. 술에 의지하는 것은 분명 정란 선배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큰일이 터졌다는 느낌이 들자 다리부터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미...... 미주 일이죠? 그렇죠?”

“그래,...... 지금껏 너무 미뤄 왔어. 이제 모근 걸 얘기할게. 미주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어...... 어떤?”

“걔..... 걔...... 아...... 암이야. 위암.”

“.......”

처음에 승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잠시 말을 못 알아들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정란의 표정을 다시 보고는 현실감이 돌아왔는지 삽시간에 경악하는 눈빛으로 얼어붙었다. 

“미안하다. 승우 씨에게 이런 말을 하게 돼서. 또 너무 늦게 얘기하게 돼서..... 정말 미안하다. 어쩌면 좋니! 나로서도 아무 방법이 없었어. 어떻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어.”

“암....... 이라고요? 어느 정돈데요?”

“늦었어. 이젠 손쓸 방법이 없어.”                   (P55-56) 

    

어쩌면 부인의 선택이 현명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나 의사 모두 답이나 결과를 모르는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버리고 태아를 선택한 것 말입니다. 위암 3기면 살 수 있는 시한이 6개월에서 5년까지의 예가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진행 속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거죠. 암 처치의 경우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될 거라고 저희는 믿지만 반드시라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결국 현대 의학이 암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진행된 암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력하다는 거죠.

...... 네,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부인께서 최소 1년을 산다고 가정할 때 아기는 태어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외국의 임상 사례를 보면 암 말기의 환자가 건강한 아기를 낳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부인의 경우는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선 부인이 의료를 거부하셨으니 혼자서 암과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아기를 가진 채로요. 환자의 영양 상태며 불안전한 심리 상태, 극심한 동통(疼痛), 죽음에 대한 공포 등 예상되는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인께서 아기를 낳겠다는 신념이 대단했습니다만.                   (P62)  

   

“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 일 생겼어?”

“별일 아냐. 근데...... 예전에 그 주술을 푸는 주문도 알고 있댔잖아. 그거 가르쳐 줄 수 있니?”“오빠가 그런 걸 믿다니 정말 이상하네.”

“다른 얘긴 하지 말고. 몰라? 잊은 거야?”

“아니, 가르쳐 줄게. 옛날 티벳에서 수도를 닦고 온 필리핀 고승(高僧)이 퍼뜨렸다는 설이 있는데, 이래. ‘라흐마니 나도루 마타부부 가이타. 사자가니 바메, 바메바메 라흐마니!’ 이걸 세 번 외우고 자신의 미간 사이에 점을 찍고 합장하면 돼. 물론 그 저주에 걸린 사람이 외워야지 효험이 있겠지.”

“한 번만 하면 돼?”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오빠, 정말 무슨 일 있어?”

“그래, 고맙다.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 잘 있어.”

승우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종이에 적은 주문을 외워 보았다. 

‘라흐마니 나도루 마타부부 가이타. 사자가니 바메, 바메바메 라흐마니!’

승우는 아예 외워 버렸다. 그리고 그날 밤 예쁜 아기를 낳는 주문이라며 미주에게도 외우게 했다. 승우는 미주에게 예쁜 딸을 낳으려면 수시로 외워야 한다고 말했다. 미주는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혼자서도 곧잘 그 주문을 외우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주의 몸 속에서 암세포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승우가 보기엔 별로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미주의 얼굴은 더 핼쑥해졌다. 미주는 최후까지 자신의 병을 숨기기로 작정한 모양인지 승우에겐 두려움이나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게 화가 나기도 하고 그지없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승우도 내색하지 않았다. 

승우는 방송국에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P67-68) 

    

“미주가 요즘 매일 승우 씨 프로에 사연 보낸다고 하던데, 방송에도 나왔다며?”

“네? 금시초문인데요?”

“이상하다..... 방송을 여러 번 탔다고 해서 승우 씨가 뽑아 줬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그...... 그럼? 승우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3주일 넘게 매일 팩스로 오던 무명의 편지...... 암 선고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떠나야 하는 애절한 사연의 주인공이 바로 미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눈과 마음이 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도 미주의 마음을 알아볼 수 없었단 말인가. 몇 번이나 그녀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정말 바보, 멍청이, 얼간이였다. 

미주는 매일매일 자신에게 남은 날들을 세며 암호 같은 연서(戀書)를 한밤에 띄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자신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만 여겨 오지 않았던가. 매일 한 침대에서 자는 여자, 그리고 죽어 가는 여자. 자신의 아기를 낳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여자인 미주의 마음을 받아 들고서도 몰라 보다니. 

힘없이 고개를 떨군 승우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와락 싸안았다. 여태껏 참았던 격한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정란은 깜짝 놀라 승우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승우는 마치 죄책감에 빠진 사람처럼 참담한 슬픔을 토해 내고 있었다.               (P76-77)  

   

“텔레비전 켜 줄까?”

“아니. FM 라디오 음악. 승우 씨 없으면 FM 방송국 문닫을 줄 알았더니 돌아가긴 돌아가네.”

 미주는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 보는 것이 싫어졌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연속극, 개그 같은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하잘것없는, 문제가 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서로 헐뜯고 싸우고 웃고 떠드는 것이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싫었다. 살 시간을 넉넉하게 가진 자들의 횡포 같았다. 

상황이 변해서일 것이다. 미주도 건강을 잃기 전에는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같이 킬킬대며 웃었으니까.

하긴 라이오 프로그램에도 그런 요소가 적잖았다. 시시콜콜한 것을 가지고 떠들어대는, 인생이, 살아 있는 시간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인생을 가볍게 경박하게 만들기 위해 갖은 용을 써대는 것 같은, 하지만 라디오는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음을 어느 정도 멈춰 주는 음악이 중간중간 흘러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P102-103)  

   

미주와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 슬프지만 영혼이 깨끗해지는 이런 시간들 속에 미주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면, 승우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자장가처럼 미주의 귀에, 자신의 마음에 입술을 달싹거려 노래를 속삭였다. 

내 눈빛이 등불처럼 걸린 아래에서 미주야, 주미야, 평화롭게 잠들렴. 내 눈은 새벽까지 타오를 수 있어. 이렇게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데, 그저 옆에서 영원히 바라볼 수만 있어도.

“If I could saved time in a bottle. The first seen that I'd like to do, is to save everyday till enough passes a way just to spent them with you......"

팝송의 장점 중의 하나는 그 노래에 담긴 의미를 아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자기의 마음을 조금은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팝 음악과 해석에 정통하지 않고서는 멜로디에 흐르는 가사 내용을 다 알아듣긴 힘들 테니까. 미주의 귀에 대고 부르는 승우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속절없는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붙잡아 보고 싶어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담긴 애절한 노래였다.                 (P112-113) 

    

“궁금했어. 나무에 이름과 글씨를 새기는 사람들 마음은 어떤가 하고.” 

“응?”

“킥킥킥. 좀 몰상식하잖아. 나무가 아플 것 같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만 그거 반드시 그렇게만 볼 건 아냐. 브라질인지 페루인지. 아무튼 그쪽 나라 한 지방에서는 아이가 출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나무에 이름을 새겨 넣는대. 자기 나무가 한 그루씩 있고, 그 나무가 사랑을 이어준다고 믿기 때문이지. 그리고 사는 동안 기쁘거나 슬픈 일이 있으면 그 나무를 찾아가는 거야. 나무는 변함없이 한 자리에서 기다려 주니까. 난 그것을 유치한 짓이나 자연 훼손 같은 가치 척도로 재고 싶지 않아. 한 인간의 삶과 한 나무가 그처럼 합일된 경우도 또 없을 테니까. 또 그만큼 그 나무와 다른 나무를 보는 각도가 다를 것은 당연하고, 이를테면 영혼을 위한 거라고도 볼 수 있어. 나무가 자신의 영혼을 지켜 주고 언제까지 오래도록 푸르게 해 준다는 것이지.”

“그렇구나. 난 그런 건 전혀 몰랐었지.”

“밑둥치 지름이 40센티미터 이상 되는 나무에겐 심각한 해는 전혀 입히지 않아. 핑계 같지만 내 해송은 아마 문신쯤으로 알걸. 병충과 해충들조차 그 문신을 보고 겁이 나서 달려들지 못할 거야. 남자들은 문신에 관심이 많아. 그건 바로 열망을 뜻하는 거니까. 어쨌든 그 나무는 내가 새긴 사랑의 징표를 가지고 있어. 내가 혼자서 너를 생각하고 기다리는 동안 그 나무가 내게 많은 힘을 줬다는 걸 넌 모를 거야. 난 언제나 그 나무를 생각했고, 그날 밤 우리의 첫 키스를 생각했고, 내 맹세를 생각했거든. 나무가 쓰러지지 않는 이상 미주 너를 향한 내 사랑도 쓰러지지 않는다, 하는, 인간의 의지는 사실 나무의 굳건함에는 비교가 안 되니까.”

미주는 살풋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가 커지고 굵어지면서 그 상처 같은 글씨들도 점점 더 커져. 자라는 거지. 상처와 맹세가 흐려지거나 지워지지 않고 함께 자란다는 게 깊이 생각하게 만들잖아. 다 된 거야?”           (P123-124)

     

사흘에 한 번씩은 끝도 없는 가수면 상태에 빠졌다. 승우는 영양 링거 병에 모르핀 열 개, 10cc를 주사해서 하루 종일 아주 천천히 미주의 몸 속에 투여했다. 그것은 미주에겐 휴식이었다. 그럴 때면 승우는 밤새 미주를 들여다보거나, 근육과 뼈가 저리다고 잠꼬대를 하는 그녀의 전신을 주물러 주며 밤을 보냈다. 낮과 밤. 특히 정적의 성채를 이루는 밤은 진지에 두 병사만이 남아 거대한 적의 습격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형국이었다. 

미주는 상운 폐교 안을 승우와 자신만의 세계로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란이 몇 번이고 오겠다고 했지만 미주는 화를 내며 거절했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현대병원 내과 전문의도 내방하길 원했으나 거절했다. 그것 때문에 미주와 승우는 다투기도 했다. 

승우도 꺼칠하게 말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술로 보라색이 되어 버린, 그리고 열꽃으로 딱딱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주의 입술을 축이고 촉촉하게 만드는 노력을 잊지 않았다.            (P133)

     

미주가 임신한 사실을 처음 말했던 날 밤, 승우는 자신이 오리온자리를 타고 태어났다는 것을 말했었다. 

“오리온자리?”“응, 별 네 개가 바깥에 네모나게 위치해 있고 그 네모 속에 한 줄로 세 개의 별이 일렬로 반짝이잖아.”

“근데?”

“어릴 때부터 난 별이 보이는 곳에 가면 늘 서쪽 하늘에 기울어져 있는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곤 했어. 겨울 성좌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에 항상 봤던 기억이 나고.....”

“........?”

“난 참 행복하게 살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오리온좌는 아주 아름다운 집과 가족을 뜻하는 거라고 해석했거든. 그러니까 바깥 사각진 네 개의 별은 집이고 세 개의 별은 그 집 속에 든 가족이야. 엄마 별, 아빠 별, 아기 별! 오리온자리를 보고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역시 사람은 운명이 있나봐. 꼭 그렇게 됐잖아. 우린 집이 있고 미주 당신과 나, 그리고 아기......!”

그 말에 목이 메어 와 고개를 돌렸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의 소박하고 단정한 운명을 자신이 망쳐 놓았다는, 그때 미주는 슬며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하늘에 있는 우리 집 주소는 오리온자리구나.”                 (P153-154)   

  

정란은 아연 실색했다. 미주의 눈빛에서 여자만이 알아챌 수 있는 절망감과 질투심을 읽은 것이다. 

미주는 절친한 친구인 정란이가 자신의 자리에 있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부지불식간에 해 왔다. 승우의 새로운 여자, 그리고 주미의 엄마 자리, 미주는 정란이가 대학 때부터 승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란이가 원하는 남자가 바로 승우 타입일 거라는.

미주가 구체적으로 정란을 승우와 연결시키게 된 계기는 아기 때문이었다. 정란이라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다시피 한 더없이 소중한 딸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정란은 그렇게 할 것이다. 아이를 꼭 가져 보고 싶고 키워 보고 싶다고 했던 그녀였다. 정란의 차분하고 품위 있는 성격을 잘 아는 미주로서는 정란이가 아기를 키워 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딸의 엄마로서는 정란이 더없이 안성맞춤이고 고맙기까지 했지만, 승우의 여자가 된다는 생각은 미주로 하여금 입술을 질끈 깨물게 했다. 부탁을 해서라도 아기를 맡기고 싶었지만, 승우를 친구에게 넘겨주는(?), 빼앗기는(?), 아니, 정란이가 승우의 여자가 되는 것은 정말 싫었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생각이라고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불현 듯 마음에 찬바람이 불고 앵돌아눕는 자신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심정이었다. 

정란은 미주의 눈빛에서 그런 마음을 읽었다. 미주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정란은 마음이 씁쓰레했다.                 (P170)     


미주의 내장 기관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화상 자국과 같은 암의 흔적이 장기 곳곳에 있었다. 미주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 아기가 무사히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같이 느껴졌다. 암세포는 비정상적인 혈관 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부위에 칼을 대면 도저히 피가 멎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세 명의 노련한 의사가 달라붙어 쩔쩔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 의사는 필사적이었다. 절개면 가까이에도 암세포가 들러붙어 기생했는지 꿰매도 실밥이 살갗에서 그냥 북 터졌다. 도저히 안 되겠군. 두 남자 의사는 마치 얼기설기 꿰매는 것처럼 X자로 크게 살갗을 기워 졸라맸다. 서로의 눈을 보는 의사들의 눈빛은 당혹 그 자체였다.            (P178)  

   

꺼멓게 타 들어간 미주의 갈라진 입술이 꽃결같이 부드러운 주미의 볼에 닿았다. 미주는 미소를 지었다. 한 줄기 환희의 눈물을 유성처럼 뺨에 그으며 주미의 두 눈에 눈빛을 맞추었다. 그 직전이었을 것이다. 미주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 네 개의 별로 벽을 이루고 세 개의 가족 별이 든 오리온자리도. 지구를 혼자 떠나는 우주 미아의 고독한 마음은 아니었다. 주미! 딸을 지상에 남겼으므로 이룰 것은 다 이룬 평화스런 마음이었다. 

미주의 눈동자 속에서 파르르 퍼런 불꽃이 다시 한 번 살풋 일더니 완전히 고요한 수면을 이루었다. 

모든 게 일시에 하얀색으로 탈색되었다.                 (P186)    

 

승우는 혼자 오고 싶었다. 미주와 함께 사투를 벌이던,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웠던 둘만의 세계가 돼 주었던 공간이었기에. 그러나 정란도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고 무척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승우로서는 박절하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란도 미주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마음을 공유할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주철 선배와 경희 선배는 미주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할말을 잃었다. 어떤 말로도 승우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미어지게 가슴이 아팠다.          (P189)    

 

푸르른 하늘에서 불현 듯 거대한 은행나무 잎들을 흔드는 한줄기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다. 승우의 앞머리칼을 바람이 흩뜨렸다. 그리고 그 바람 줄기 속에서 문득 국화 향기가 났다. 싸하고 달콤하며 연한 국화 향..... 국화 향이었다. 

승우는 눈을 크게 끔벅였다. 도자기를 만들 때 미주가 했던 말..... 승우는 미주를 떠올리며 거대한 은행나무를 향해, 사방을 행해 코를 큼큼거렸다.

아...... 이건....... 이건........ 분명히 국화향이었다. 또렷이. 바람결 끝이 완연한. 미주의 머릿결에서 나던 국화 향기 말이다.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이 퍼뜨리는 사랑의 향기를.

수만 개의 작은 손바닥을 흔드는 것 같은 은행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며 승우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향해 떨리는 흰 손을 뻗으며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미주야........ 너....... 너니? 너 거기 올라앉아 있는 거니?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수많은 은행잎으로 안녕........ 안녕이라고 지금 내게 말하고...... 있는 거니?              (P196-197)


작가의 이전글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바스커빌 가문의 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