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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28. 2024

안소영의 <시인, 동주>

영화 <동주>  2016년

윤동주와 송몽규. 스물두 살 동갑내기에 사촌 간인 이들은, 머나먼 북간도 용정에서 경성의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여러번 기차를 갈아타고 온 것이다.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어 마냥 푸근한 마음은 아니었다. 세 살 위인 라사행은 용정의 은진 중학교 선배다. 중국에 있는 임시 정부 군관 학교에서 몽규와 함께 훈련받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생한 적도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뒤 경성으로 올라와 지금은 감리교 신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 

고종사촌 몽규가 선배 라사행과 그간의 안부를 나누는 동안, 동주는 역 광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은 지 10여 년이 된다는, 원형 돔이 얹힌 붉은 벽돌의 역사(驛舍)는 장중했고 들고 나는 사람의 수도 용정역에 비할 바 아니었다. 인력거 정거장에는 인력거들이 느런히 늘어섰고, 자동차나 승합차도 꽤 보였다. 지게꾼들은 고리짝이나 보따리 등 짐을 잔뜩 든 사람에게 다가가 짐삯을 흥정했고, 전차가 올 시간이 다 되었는지 많은 사람이 정거장으로 뛰어갔다. 광장 건너편에는 비스듬히 놓인 대로를 따라 신식 상점들이 줄지어 섰고, 번듯하고 높은 건물도 여럿 보였다. 그 끝에, 반쯤 가려지긴 했으나 높다랗게 기와지붕을 얹어 놓은 문루가 눈에 띄었다. 말로만 듣던 남대문인가 보았다. 잇대어 있던 성벽은 모두 잘리고 대문만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어릴 때 지내던 북간도 시골 마을 명동촌에 비하면 중학 시절을 보낸 용정도 번화하긴 했으나, 경성은 과연 대도시였다. 용정역 부근 신시가지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해도, 조선 사람보다는 중국 사람이나 제복 입은 일본인이 많았고 간혹 러시아나 다른 서양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경성역 광장에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더러 양복이나 학생복을 입긴 했어도 거의가 조선 사람이었다. 손님을 끄는 소리, 일행끼리 서로 부르며 찾는 소리. 깎아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흥정하는 소리, 신문팔이 아이들이 “신문 사려!” 외치는 소리..... 봄 하늘 위로 흩어지는 저 수많은 소리는 모두 조선의 소리, 조선말이었다.              (P9-10)     


“사람의 생각을 소리로 나타낸 것을 말이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본디 소리도 없고 꼴도 없어 도무지 밖에서는 알 수 없지요. 생각이 먼저 소리 내는 틀, 즉 발성 기관을 빌려서 낸 소리로 사람의 귀청을 건드리고, 이렇게 해서 알리는 것이 곧 말입니다.” 

언더우드 홀이라 부르는 학관 강의실에서는 문과 1학년 수업이 한창이었다. 

4월 9일 토요일에 입학식을 한 뒤 일주일간 이어지는 신입생 주간인 데다, 부활절과 학교 창립 기념일까지 앞두고 있어 학내는 들뜬 분위기였다. 학기 초의 첫 수업은 으레 인사를 나누고 교수의 강의 계획과 당부를 들으며 가볍게 넘어가기 마련인데, 이 수업만은 예외였다. 교수는 강의실 정면의 칠판이 모자라 복도 쪽 벽에 걸린 보조 칠판까지 자리를 옮겼다. 융통성 없는 첫 수업에 누구 하나쯤 불만스러워도 하련만, 교수의 입과 백물 끝을 따라가는 학생들의 눈길은 흐트러짐 없었다. 우리말 연구로 유명한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시간이었다.          (P17-18)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좌경 교수, 우경 교수’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나란히 잡지에 소개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 ‘적색(적색) 교수’라는 색깔을 붙이고 몰아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양한 교수님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좋아 그때부터 연전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김삼불이 투덜거렸다. 유영도 근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자꾸 교수님들이 사라져 가셔야 원.....”

고초를 겪기는 이른바 ‘우경 교수’로 불리던 스승들도 마찬가지였다. 안창호 선생이 연루된 ‘수양 동우회’ 사건과 기독교 지식인들의 친목 모임인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교수들은 경찰서를 드나들어야만 했다. 최현배 교수도 이미 한 차례 경고를 받은 터였다. 한문학의 대가 정인보 교수는 조선의 학문과 얼을 가르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병을 핑계하며 사직하고 말았다. 수박색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은 정인보 교수와 늘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있는 백남운 교수가 교정에서 담소하는 모습은 연전의 자랑거리였다. 고전적인 한문학과 현실 비판적인 사회주의 경제학,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학문을 하는 두 교수가, 출간한 책의 서문에서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하는 것도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두 분의 그러한 교유는 이제 연전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광경이 되고 말았다.             (P37-38)  

   

검은색 교복 바지에 흰색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더러 사각모도 쓴 청년들 열댓 명이 걸어가는 모습은 한눈에 띄었다. 6월 18일 토요일. 중간시험을 마치고 경성 시내로 나온 동주와 벗들이었다. 입학한 뒤 처음 치른 시험이어서 결과가 궁금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문법과 독해, 작문과 회화로 나뉜 연전의 영어 시험은 확실히 만만치 않았다.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시험은 분량이 많고 문제가 까다로운 편이었는데도, 다들 얼마나 열의를 내어 공부했는지 답안지 뒷면까지 빽빽이 써서 제출했다. 선배들 말로는 유달리 만점자가 많이 나오는 과목이라는데, 가르치는 교수와 배우는 학생들의 열의가 함께 만들어 낸 뿌듯한 결과일 것이다. 마음먹고 나온 학생들은 동주네만이 아니어서 상급생 선배들과 이과와 상과 동기들도 있었다.

광화문통 비각 앞에서 내린 일행은 보기 싫은 총독부를 등지고 태평통으로 향했다. 스러져 간 왕조에 대한 절개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청년들이건만, 왕궁을 가로막고 둔중하게 서 있는 조선 총독부 건물은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광화문통에는 광화문도 없었다. 총독부를 짓느라 경복궁 동쪽으로 쫓겨 간 뒤로 지붕 한끝만 아스라이 보일 따름이었다.             (P39)     


구보와 이상은 동주네보다 겨우 일고여덟 살 많은 형님뻘이었다. 연배가 좀 더 위인, 쌍꺼풀진 그윽한 눈매가 인상적인 소설가 이태준과, 동그란 로이드 안경 뒤의 눈빛이 침착하고 차분한 시인 정지용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발표되던 때만 하더라도 조선 문단은 활기가 있었으나, 이즈음은 예전만 못했다. 도쿄로 떠난 이상은 ‘불령선인’으로 의심받아 일본 경찰에게 조사받던 중, 결핵이 도져 지난해 봄에 세상을 떠났다 했다. 벗을 잃은 구보는 안 그래도 처진 어깨로 두 딸의 아비 노릇을 하느라 경황이 없다 하던가. 이태준은 다니던 신문사가 문을 닫은 뒤 만주로 떠났고, 시집을 낸지도 오래인 지용은 그저 신문과 잡지에 간간이 작품을 발표할 따름이었다. 이상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 경성 어딘가에는 동주 같은 문학청년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또 다른 문인들이 살아가고 있으리라. 어쩌면 오늘, 이 젊은이들처럼 어두워져 가는 여름밤 거리를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은 문학으로 인해 더욱 빛나고 있을까. 아니면 더욱 남루해져 가고 있을까.                 (P48-49)     

고향인가 타향인가, 오락가락하는 상념에 젖어 있는데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용정역에 도착한 것이다. 역 주변에 줄지어 펄럭이는 오색기는 여전했으나 색이 많이 바랬다. 오색기는 일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새로 만든 만주국의 깃발이었다. 청, 홍, 흑, 백, 황의 다섯 색깔은 한족, 일본족, 만주족, 러시아족, 몽고족을 뜻하며 이들의 화합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팽창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기세에 나머지 민족들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오로지 일본 민족을 뜻하는 붉은 빛깔만 선명했다. 그 옆에 따로 내걸린 일장기의 붉은빛도 한여름의 태양 아래 더욱 찬란했다. 하늘 위에는 태양, 땅 위에도 오직 일본의 저 붉은 태양기 뿐인 듯했다. 처음 고국에 도착하던 날, 경성역에서도 그러했듯이.

“형님!”

열차에서 내려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여름 햇살보다 더 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르듯 뛰어온 것은 동주의 열두 살 난 동생 일주였다. 형이 온다는 전보를 받은 그날부터 일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역으로 나와 보았다. 생글거리며 웃는 일주의 콧잔등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역 광장의 뜨거운 햇볕 아래 얼마나 기다린 것인지 머리칼도 온통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동주는 와락 일주를 얼싸안았다. 

“일주, 잘 지냈나? 그새 많이 컷구나!”                (P56-57)  

   

비둘기가 모여드는 바위가 있다 해서 중국어로 ‘부걸라재(鳧鵠褶子)’라 불리던 북간도의 작은 황무지 땅은, 조선 사람들이 오면서 ‘명동(明東)’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동쪽 나라, 즉 조선을 환하게 밝힌다는 뜻이었다. 교회도 ‘명동 교회’, 학교도 ‘명동 학교’였다. 명동 사람들은 조선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미련 없이 신학문을 받아들였고, 독립의 길을 찾다가 기독교도 받아들였다. 고향을 떠나오긴 했으나, 한시도 고국을 잊은 적 없는 이들의 절절한 모색이었다. 교회당 옆 너른 기와집에 살던 동주네 식구들도 모두 돈독한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집안뿐 아니라 마을에서도 큰 어른인 동주의 할아버지는 장로로 선출되어 ‘윤 장로님’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빼앗긴 나라 조선에서 지낼 수 없었던 뜻있는 지사들은 국경 너머 동포들이 모여 사는 북간도 명동 마을로 모여들거나, 이곳을 거쳐 갔다.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인 안중근 의사가 한때 명동 마을에서 육혈포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는, 어린 동주와 벗들의 가슴을 두고두고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만주의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조선 독립군에 호되게 당한 일본군은 북간도 조선인 마을을 잔혹하게 짓밟았다. 동주가 아직 어렸을 때의 일로, 이른바 ‘간도 대토벌’이다. 조선 독립군에는 명동 학교 출신이 유달리 많았기에 학교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그 뒤에도 조선 사람들을 못살게 구니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결국 동주네 집안도 도회지 용정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동주와 몽규가 중학생이 될 무렵이었다.            (P62-63)    

 

몽규가 그렇게 떠나 버린 것은 신춘문예 당선 소식보다도 더 충격이었다. 동주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한 제안을 받았을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민족의 처지에 분개하는 마음과 조선 독립에 대한 뜨거운 의지는 자신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가족과 벗들과 헤어져, 문학도 배움도 포기하고, 삶마저 내려놓아야 할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선뜻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럴수록 몽규 생각이 간절했다. 동주는 몽규를 생각하고, 몽규에게 감탄하고, 몽규를 그리워하며 잠들지 못하고 오래 뒤척였다.                 (P79)    

 

비단 총독부의 강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도 어느새 30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또 그의 아이가 자라나는 시간이었다. 지식인들 사이에는,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중일 전쟁 뒤로는 더했다. 일본군이 연이어 중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쫓겨 가는 것을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패배감이 함께 생겨났다. 조선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일본의 식민 통치는 영구하고도 견고해 보였다. 그러니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아래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 것이다. 예리한 눈으로 식민 사회를 바라보던 시인과 비평가도, 간결하고도 서정적인 문장으로 문학청년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소설가도, 서구 문단의 동향을 소개하던 자유롭고 낭만적인 영문학자도, 문단의 원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조선 문단은 총독부의 요구대로 ‘황군 위문 작가단’을 꾸렸다. 김동인과 소설가이자 평론가 박영희, 시인 임학수가 이른바 ‘위문사’로 뽑혀, 지금 경성역에서 저렇게 길 떠날 차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P98-99)     

지금 주로 삼십 대인 선배 문인들이 돌이켜 볼 때 자신들의 이십 대는 여러 주의와 주장이 난무하던 뜨거운 시대였다. 조선뿐 아니라 서구와 일본에서도, 세계적으로 거듭되는 대공황으로 현 사회 체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이웃한 러시아에서 황제와 귀족들이 쫓겨나고 노동자와 농민 등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새로 세워지는 것을 보면서, 조선 청년들의 가슴도 뜨겁게 끓어올랐다. 앞날이 없고 가진 게 없기로는 식민지의 지식 청년들도 이른바 ‘무산자(無産者)’ 대중과 마찬가지이기에, 기꺼이 그들과 연대했다. 당시의 젊은이들치고 ‘주의자’가 아닌 이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청년 문인들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가진 것 없고 억압받는 이들 편에 서서 활동했다. 그로부터 10여년 만에 수많은 카프 작가들이 투옥되고 내부의 갈등과 분열까지 겹쳐 결국 흩어지고 말았지만, 그때의 열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한창나이에 인간 내면의 심연을 탐구한다며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후배 문인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P102-103)   

  

엄달호가 꺼낸 이야기를 몽규가 받았다. 

“말이 안 통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게도 생겼지. 양쪽 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인간을 이야기해도 내용이 다르거든.”

“어떻게?”

“한쪽에서는 지금 거리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인간을 제대로 보라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기 ‘내면’의 깊은 동굴을 들여다보며 인간을 제대로 알라 하네.”

“그것참, 둘 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사람들의 생활도 보아야 하고, 인간의 내면도 그려야 하고......”

“자네 말처럼 그 두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면 오죽 좋겠나? 하지만 신진 작가들은 사람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분석하는 데만 힘을 기울이고, 정작 그 인물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 현실은 외면하고 있네.”

“그렇지만 거리의 구호나 현실의 모사가 그대로 문학이 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런 작품들에서 나는 그리 감동을 받지 못했네.”

“문학적 성취로 보자면 물론 아쉬움이 있지. 하지만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 문학의 역할을 고민했던 것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야.”

몽규와 달호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P104)     

“그런데 순수하다는 게 과연 무얼까? 순수다, 순수가 아니다 하는 게 선언한다고 되는 걸까? 순수를 염두에 두고 쓰면 순수한 작품이 나오고, 현실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으면 순수하지 않은 작품이 되고 마는 걸까?”     

“..........”

혼잣말 같은 동주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어떤 것을 쓰건 혼신의 힘을 다해 진실하게 그리면, 그리고 그 진심이 읽는 이에게 전해지면 순정하다. 순수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내면에 치중하건, 그를 둘러싼 아픈 현실을 그려 내건..... 순수는 작가가 먼저 정해 놓은 작품의 성격이 아니라, 읽는 이의 가슴에서 비로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처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순수한 작품이라 말해도 순수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있고, 흔히 말하는 순수의 세계는 아닌데 가슴이 뻐근하고 왈칵 눈물이 나는 작품도 있지.”

“거참, 점점 복잡해지는군그래. 그런 논쟁이랑, 기왕 해 오던 문인들에게 맡기고 우리 청년 한도들은 밥이나 먹으러 가세. 방학이라 식당 문도 일찍 닫을 거야. 문학이니 세대니 순수니 해 봐도 끼니를 놓치고서야 눈에건 귀에건 들어오겠나?”               (P107-108)   

  

조선에서 이광수만큼 유명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신문학 시절부터 민족의 울분과 시름을, 말하듯 쉬운 어투로 쓴 이야기로 달래주었고, 작품마다 주제를 담아 그 나름대로 동포들을 계몽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민족에게 받은 사랑과 명성을 엉뚱한 데 쓰고 있었다. 총독부의 시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따르는 것이 조선 민족을 위한 길이라며 동포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몸담고 있는 단체와 쓰고 있는 감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총독 관저를 거리낌 없이 자주 드나들었다. 초창기 조선 문단에서 이광수와 쌍벽을 이루던 최남선은 지금, 일본이 세운 만주 건국 대학의 교수로 가 있다고 하던가, 오늘 조선 문인 협회 회장 취임사에서 이광수는 “반도 문학의 새로운 건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때, 황군 위문 작가단을 만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황군을 위문하러 가더니 이젠 내선일체까지 발 벗고 나서는 건가? 조선 문학의 출발이 내선일체부터라고?”            (P120) 

    

비단 정인섭 교수만이 아니었다. 동주가 신문에 난 작품이나 비평들을 오려 스크랩해 둔 문인들도 많았다.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비평으로 눈길을 끌던 김문집은 총독부가 만든 ‘국민정신 총동원연맹’의 간사가 되어 이미 충격을 주었기에, 이번에 문인 협회 간사를 맡았다 해도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하지만 총독부 관리의 축사에 김용제가 답사한 것은 충격이었다. 전향 성명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일본 감옥에서 꼬박 5년을 갇혀 있다가 조선으로 추방된 작가였다. 그의 꿋꿋한 지조와 기개를 흠모하는 조선 청년들이 많았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세대가 어떠니, 순수가 무엇이니 하며 논쟁하던 선후배 문인들도 이번만큼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사실 수리’라고 했던가, 프랑스 시인 발레리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을 바라보면서 20세기는 ‘사실의 세기’라 말했다. 인간 이성의 힘이 작용해 오던 유럽 사회가, 이성으로는 해명할 길 없이 혼란과 갈등으로 가득한 새로운 ‘사실’들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우울한 진단이었다. 또다시 전쟁의 광기가 지배하게 될 야만의 시대를 예감하는 유럽 지성인의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에 전해진 이 말은 엉뚱하게 쓰였다. 젊은 평론가 백철은 ‘사실 수리론’을 들고 나오면서, 눈앞에 드러나고 있는 ‘사실’들을 ‘수리(受理)’해야, 즉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서구의 세련된 개념으로 치장하여 얼핏 보면 객관적이고 냉철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결국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현재의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이고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공연히 독립이니 저항이나 하는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에 눈을 돌리지 말자는 소리이기도 했다. 문인 협회에 참여한 작가뿐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스며들고 있는 논리였다.            (P121-122)         


앉은뱅이책상 위, 펜과 잉크 옆에 단정히 놓인 습작 노트를 새삼 펼쳐 보았다. 동주의 시작(詩作) 첫 번째 과정은, 떠오르는 시상을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구상한 뒤 먼저 습작 노트에 펜으로 써 보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생각날 때마다 펼쳐 보고 조금씩 고치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 정식으로 원고 노트에 옮겨 썼다. 중학 시절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이어, 두 번째 원고 노트의 제목은 ‘창(窓)’이었다. 동주는 책꽂이 한 칸에 따로 정리되어 있는 몇 권의 습작 노트와 두 권의 원고 노트를 마저 꺼냈다. 그리고는 방 한쪽에 놓인, 잘 쓰지 않는 잡동사니가 담긴 사과 궤짝에 넣고 뚜껑을 덮었다.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P123-124)   

  

병욱이 지난번에 빌려 본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어, 지금 한창 보고 있는 “말테의 수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보는 법을 새로 배우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모든게 지금보다 더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가, 과거에는 항상 끝이 났던 곳에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내면이 새로 생겼다. 모든 게 그곳으로 간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모르겠다.”

“말테의 수기”는 릴케의 고백이자 동주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동주는 자신의 마음속에 예전보다 더 깊은 내면이 새로 생겨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점점 깊어져 가던 그곳에서 무언가 서서히 일렁이며 차츰 솟아 나오려 하는 것도 조금씩 느껴졌다. 

지난겨울 이래 동주가 여태껏 붙들고 있는 책은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제목에 끌려 센티멘털한 젊은이들이 유행처럼 들고 다니기는 했으나, 끝까지 읽어 낸 이는 아마 드물 것이다. 원래 책을 정독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동주는 이 책만큼은 유달리 오래 들고 다녔다. 다른 책을 보다가도 다시 꺼내 보곤 했다. 그야말로 종이 뒤가 뚫어지도록 보았다. 그럴 때면 꼭 다문 입술이 팽팽히 조여지고 눈에서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P135-136)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제가지 신학자들이 힘겹게 쌓아 놓은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체계를 신앙에서 걷어 버렸다. 오로지 신과 인간이라는 두 실존만을 바라보았다. 한 실존적 존재인 인간은 산업 혁명 이후 대량 생산 체제로 접어들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자신이 생산한 물질로부터, 자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 나아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소외’된 것이다. 소외는 ‘불안’을 낳고, 불안은 다시 ‘절망’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본질’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는 ‘현상’의 깊숙한 끝까지 가 닿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과도 같은 절망의 끝까지 가 봄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애초부터 본질적 존재이며, 또 다른 실존적 존재인 신과 마주 대할 수 있다고 했다.                (P137)     


1940년 8월에는 ‘조선일보’와 ‘종아일보’가 폐간되었다. 총독부 경무국 검열관들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조선 사회의 현실을 알리고,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읽을거리와 논쟁거리를 제공해 오던 양대 조선어 신문이었다. 신문사 사옥에 보도보국이니 내선일체니 하는 현수막을 길게 내걸고, 총독부의 비위를 맞추어 봐도 소용없었다. 삼삼오오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며 핏대를 올리던 모습은 이제 경성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떠들썩하게 호외를 알리던 신문팔이 소년들도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조선 사람들에게서 나라뿐 아니라 말과 이름을 빼앗고, 조선어로 된 신문을 빼앗고, 조선 청년들을 강제로 전쟁터와 노역장으로 보내면서 경성은 한창 축제 중이었다. ‘동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뀐 청량리역에서, 조선 총독부의 시정 30주년을 기념하는 조선 대박람회가 개최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올해 1940년은, 일본의 초대 신무 천황이 나라를 세운 지 2600주년이 되는 해라며, 경성 조지아 백화점에서 ‘기원 2600주년 봉찬 전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과 대만, 만주에서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축제는 축제이되 전쟁으로 달려가는 축제였다. 경성을 비롯한 전 조선, 나아가 아시아 여러 나라들도, 일본 군부가 이끄는 ‘대동아 성전’의 열차에 올라 전쟁의 광기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P147) 

    

동주가 특히 좋아하는 음반은, 러시아의 위대한 베이스 표도르 샬라핀의 것이었다. 샬라핀의 저음에는 광활한 북국의 침엽수림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 소리가 담겨 있었다. 고향 북간도의 겨울이 느껴지기도 하는 목소리였다. 한때 볼가 강의 배 끄는 노동자였다는 샬라핀이 어깨 근육을 움직이며 불렀을 ‘볼가 강의 뱃노래’나, 러시아 농민 반란군 지도자를 노래한 ‘스텐카 라진’은 몇 번이고 레코드판을 돌려 가며 들었다. 샬라핀의 저음에 취해 있으면 진규도 옆에 다가와 ‘스텐카 라진’의 한 소절을 발을 구르며 따라 부르기도 했다.           (P161-163)     


애국일이나 반상회 날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생활도 통제되었다. 전 조선인은 오전 6시 사이렌 소리에 일어나 집 안팎을 청소한 뒤, 라디오에서 나오는 구령에 맞춰 다 같이 체조해야 했다. 12시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길을 가다가도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출정 황군의 무운 장구와 전몰장병 영령에 감사하는 묵도를 올려야 했다. 복장도 통제했다.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고 국민복을 입어야 했고, 여자는 거추장스러운 치마 대신 근로 활동복인 몸빼를 입어야 했다. 여자는 전발이라고도 하는 파마머리를 하거나 화려한 화장을 하는 것,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도 금지 되었다. 장차 황군의 어머니가 되겠기에 이를 위한 정신 교육도 수시로 받았다.                  (P180-181)  

   

문우회 회장 처중은 벗들과 의논하여 마지막 “문우”를 발행하기로 했다. 발행인은 강처중, 편집인은 송몽규였고, 동주와 다른 벗들은 원고 정리나 교열을 하며 회지 발간을 도왔다. 

“문우”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교의 승낙은 받았으나 총독부 경무국의 잡지 발행 지침에 따라야 한다는 조건이었고, 당연히 일본어로 만들어야 했다. 지금 연전 교장은 언더우드 2세 교장이 물러나고 과도기라며 부임해 온 윤치호로, 이제는 일본식으로 이름이 바뀌어 이토 지코(伊東致昊)라 했다. 식민 통치 초기부터 조선 민족에게는 ‘독립’보다 ‘자강’이 필요하다며 3.1 운동마저 반대했던 회의주의적 지식인이었다. 서양에서 공부하면서 아시아 황색 인종에 대한 차별을 뼈아프게 겪었던 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으나 중일 전쟁 뒤 일본의 승승장구에 점점 압도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제까지의 회의적인 태도를 걷어 버리고, 같은 아시아인인 일본의 세계 재편과 대동아 공영의 실현을 열렬히 지지했다. 일흔일곱의 고령에도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에 이어 총력 연맹 등 여러 친일 단체의 대표로 왕성히 활동했다.        (P184-185)   

    

1941년 11월 5일, 동주는 시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자 마지막에 실을 작품 “별 헤는 밤”을 마무리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이런 미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P195-197) 

    

동주는 열여덟 편의 시를, 400자 세로 원고용지에 펜으로 깨끗이 옮겨 썼다. 날카롭거나 모나지 않은 획에 적당한 힘이 실려 있으면서, 글자 획을 이어 가는 흐름이 부드러워 벗들이 감탄하던 글씨였다. 다 옮겨 쓴 다음, 원고지 가운데를 접어 양면으로 만들고, 옛 책처럼 철끈으로 맸다. 시집이라면 머리말이나 후기가 있어야겠기에 한동안 고심했으나, 시로써 보이면 그뿐 구구한 이야기를 길게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서문을 대신한 짧은 글을 썼다. 쓰고 보니 그도 한 편의 시 같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P198-199)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1941년 12월 8일, 새벽. 하와이 시간으로는 일요일인 7일 아침, 일본군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미군 함대와 비행기들을 격파했다. 말레이 반도의 영국군도 공격했다. 전쟁은 이제 중국 대륙만이 아니라 태평양 일대까지, 상대도 영국과 미국 등 서양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두 달 전, 전쟁론자인 육군 대신 도조 히데키가 내각을 맡을 때부터 예견되던 일이다.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과 대만, 만주국의 대일본 제국 ‘국민’들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필리핀 등 동남아 일대의 아시아인들까지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늪에 빠져들어 갔다.                   (P203) 

    

“조선인들은 대일본 제국에 필요 없는 존재들이다. 도무지 대화혼이 스며들지 않는 미개한 족속이란 말이다. 미영귀축에 아세아의 혼을 팔아 더러운 스파이가 되는 짓도 서슴지 않고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황공하게도 천황 폐하께옵서는, 이런 놈들에게 황군 입대의 은혜를 내리시다니!”  

천황 폐하란 말을 할 때, 대좌는 옆에 찬 총검을 철거덕거리며 요란스레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때 입을 연 학생이 있었다. 

“조선인들이 원한 일은 아닙니다.”

순식간에 훈련장이 고요해졌다. 감히 이지마 대좌의 이야기에 대꾸를 한 것도, 더구나 조선인 신입생이 나선 것도 놀라웠다. 대좌조차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뭐라? 누구냣!”

조용히 동주가 일어섰다. 노려보는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이지마 대좌가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아랏!”

“조선인들은 입대를 요청한 적 없습니다. 내각의 발표이고, 내각의 결정입니다.”

담담한 어조로 동주가 말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전 회의를 거쳐 군부와 내각이 내린 결정에 교관이 계속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앉아라! 히라누마 도주.”                 (P227-228)   

  

외국 문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의 책들을 두루 읽다 보니, 새삼 발견되는 게 있었다. 연전에 있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말과 글이 다르고 지내는 곳이 달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점이다. 자신이 놓인 시대와 사회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삶이 던져 주는 질문을 붙들고 열심히 해답을 찾으며 살아간다.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혹은 다음 세대에게 넘겨준다. 이 세상에 사유하는 인간이 스러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를 이어 가며,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거쳐 가며, 더욱 깊어지고 풍부해질 것이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남의 나라도 빼앗고,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심지어 다른 사람의 자유와 생명마저 빼앗아 버리는 야만의 시대라 해도....  

동주는 당숙의 이부자리 속 탕파를 꺼내 뜨거운 물로 갈아 주었다. 처음 도쿄에 도착해 이곳 교토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일본에서 보낸 첫해가 저물어 갔다. 그리고 1943년,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과 총궐기의 함성에 휘둘려야 하는 것은 새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묵묵히 생각하고, 책을 읽고, 시를 쓰는 동주의 삶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P245)     


다음 날 동주는 취조실로 불려 갔다. 동주의 뺨을 때렸던 작달막한 특고 형사가, 담당인 고로키 순사 부장이었다.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는데, 특고 경력이 오래된 만큼 교활하고도 노련한 자였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순사가 고로키 부장을 보조했다. 치켜 올라간 눈이 낯익다 했는데, 지난봄 야세 유원지에 목판을 메고 불쑥 나타났던 사내였다. 고로키 부장보다는 나이는 어렸지만 상관인 계장도 있었다. 특고과에서도 조선인과 관련된 수사를 맡아 하는 내선계(內鮮系) 형사들이었다. 몽규는 이미 지난 토요일에 잡혀 와 있었다. 동주가 체포되던 그날, 졸업 시험 보러 가던 희욱도 붙잡혀 왔다.               (P254-255) 


1944년 2월 22일, 동주와 몽규는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치안 유지법 제1조에 해당하는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라 하는 것은 검사가 보기에도 지나쳤다. 그래서 제5조, ‘그 실행을 위하여 협의, 선동, 선전’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P266)     

역까지 오는 동안 머리에 쓰고 있던 용수를 기차에 올라서 벗을 때, 열 달 만에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찌르르했으나 의외로 담담했다. 동주의 고초를 몽규가 겪었고, 몽규의 시간을 동주도 지내 왔다. 새삼 울컥대는 감정을 끄집어낼 필요가 없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나이 든 순사가 통로 건너편 젊은 순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가? 자네들도 후쿠오카인가?”

“예, 교토 구치감에서 이송되는 둘은, 조선인에다 치안 유지법에, 더구나 공범이라 합니다. 공범은 분리 수용이 원칙인데 같은 곳으로 보내라니, 행형국(行刑局)의 조치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군요.”

“조선인 사상범들은 모두 후쿠오카나 구마모토로 보내게 되어 있어. 나는 지난달에도 다녀왔네.”  

교토에서 규슈의 후쿠오카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일이십 분가량의 운동 시간을 제외하고 내내 구치감 독방에만 갇혀 지내던 동주는, 오랜만에 느끼는 기차의 속도감에 멀미를 했다. 다른 죄수들도 얼굴이 입은 옷처럼 퍼렇게 되거나 창백해지는 게 동주처럼 괴로운 모양이었다. 동주는 시선을 멀리 창밖에 두며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             (P271)     

간수들이 마소를 몰고 가듯 이들을 데리고 간 곳은 병감(病監)에 있는 의무실이었다. ‘규슈 제대 의학부’라는 글자가 박힌 흰 가운을 입고 마스크로 입을 가린, 동주 또래의 젊은 의사와 두어 명의 조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이 지긋한 원래 형무소 의사는 뒷전에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죄수들은 키와 몸무게와 혈압을 재고 혈액 검사도 했다. 그런 다음 팔뚝을 걷고 투명한 약물 주사를 맞았다. 한 사람씩 측정하고 기록한 뒤 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제법 시간이 걸렸다. 병감은 일반 사동보다 추위가 덜했고, 날마다 똑같은 일과에 이처럼 색다른 일이 끼어든 것도 나쁘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잡담해도 간수들은 내버려 두었다. 무슨 주사인지 물어보았으나 대답이 없었고, 맞지 않겠다는 이도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혼자만 맞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잘못되거나 쓰러지는 사람도 없어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차례를 기다려 동주도 검사를 하고 주사를 맞았다.                  (P279)   

  

"어잇! 왜 기대어 있는가? 어서 똑바로 앉아랏!“

동주의 방을 들여다보던 간수가 호통쳤다. 아침 묵상 시간이라 반드시 정좌(正坐)하고 있어야 하는데, 어지럼증이 밀려와 벽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다. 이즈음 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추위가 심해지면서 몸이 더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두어 달 전부터 맞기 시작한 주사 때문인 것 같았다. 처음에는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어지럼증이 자주 찾아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이 노래지고 주위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그래도 주사는 계속 맞아야 했다. 기다랗게 늘어선 행렬에서도, 처음 같지 않게 상한 얼굴들이 꽤 보였다. 형무소의 겨울이 원래 힘든 법이라며,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P282-283)  

      

이 무렵 만주의 일본군은 중국군이나 조선 독립군 등 포로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페스트균이나 콜레라균을 주사하기도 하고, 사람의 몸이 동상에 걸리는 시간과 정도를 본다며 포로를 냉동고에 가두기도 했다. 전방에서 관동군 731부대가 그러한 실험을 하고 있다면, 후방에서는 육군성의 지원을 받은 제국 대학 의학부가 맡아 하고 있었다. 규슈 제국 대학 의학부도 그중 하나였는데, 실험 대상자는 감옥 안의 죄수들이었다. 규슈 제대 의학부의 제1외과장 이시야마 후쿠지로는 혈장 대신 생리적 식염수를 사람의 혈관에 넣어도 되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만약 식염수로 대체해도 된다면 식염수는 전쟁터에서 그 어떤 무기보다도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시급하게 수혈해야 할 부상병들은 많았고, 필요한 혈장을 다 감당할 수도, 공급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나 죄수들이 생체 실험 중 사망해도 책임지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실험을 계속해 갈 포로와 죄수는 많았다. 독립운동 관련 조선인 사상범들을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형무소로 모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시야마 교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실험을 계속했다. 포로가 된 미군 B29기의 조종사와 승무원들도 실험 대상이었는데, 그들은 농도 짙은 식염수 주사를 맞고 생체 해부까지 당하다 결국 죽어 갔다.                 (P283-284)     

1945년 2월 16일.

자정도 지난 깊은 밤에 동주는 잠에서 깨었다. 열과 한기가 번갈아 오가는 몸은 제 것이 아닌 듯 감각조차 없었다. 오래된 이불솜 같은 자신의 몸이, 남의 것을 멀리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낯설고 서먹했다. 

작은 철창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은 남빛으로 시리도록 맑았다. 점점이 빛나는 별들도 보였다. 동주는 누워 있는 제 몸을 내버려 두고서, 창밖의 별에게 갔다. 형무소의 높은 담장도, 독방의 쓸쓸한 벽도, 높이 걸린 창틀도, 질러 놓은 창살도, 동주와 별 사이에는 없었다. 오로지 별이 가득한 밤하늘과 자신뿐이었다. 동주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보았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P288)     


처중과 벗들은 이듬해인 1948년 1월에 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했다. 동주의 시집은, 모두가 숨죽여 살아가던 암흑의 시대에 우리말로 묵묵히 시를 써 온 청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선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과 위안이 되었다. 고단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지금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도 위로가 되고 맑은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시이기도 했다. 

북간도 용정의 동산(동산)에 있는 동주의 묘지 앞에도 벗들이 만든 시집이 놓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워 놓은 ‘시인 윤동주의 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빗돌과 잘 어울렸다. 

시인 정지용은 동주의 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일제 헌병들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의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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