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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Aug 15. 2024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영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995년

[1]

한동안 산길을 달린 후 중턱쯤에 이르렀나 싶을 때쯤 최영수가 순범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아마 여기쯤이라고 말한 것 같아.”

“‘여기쯤이라니요?”

“아까 말했던 사건 현장 말이오.”

“사건 현장이라고요? 여기가 어딘떼요?”

“북악스카이웨이.”

순범은 사건 현장이라는 말에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가다듬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도심의 불빛이 간혹 보이고 가까운 곳에는 도로를 비추는 승용차의 헤드라이트 불빛만 비칠 뿐이었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얼마 없지만 걸어가는 사람은 아예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사람이 죽는 장소가 따로 있을 턱이 없지만 차에 깔려 죽기에는 전혀 경우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장소였다.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죽었을까? 순범은 박성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영수는 바로 이런 점을 노리고 2차를 핑계로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도 몰랐다.

“최 부장이 2차를 사겠다는 뜻을 이제 알겠군요. 사건 현장에 기자를 끌고 가면 반드시 사건의 진상에 매달리게 마련이라는 거지요?”

“아니요,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소. 내가 잘 아는 곳이 있어서 이리로 왔는데 권 기자도 마음에 들 거요. 그리로 가다 보니 우연히 현장을 지나게 된 것뿐이고, 그리고 내가 2차를 사겠다는 것은 사실 오늘 기분이 좋은 날이기 때문이오.”

최 부장은 조직폭력배 소탕 결과가 좋아 표창과 함께 얼마간 휴가를 받았다고 했다. 오늘 실컷 마시고 내일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P24-25) 

    

자동차가 다다른 곳은 이런 산속에 이런 집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대문부터 으리으리하게 전통 한옥 양식으로 꾸며진 집이었다. 

삼원각. 문에 걸린 현판과 건물 규모를 훓어보던 순범은 소문으로 듣던 삼원각이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경적을 두어 번 올리자 자동으로 대문이 열리고 자동차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안에 들어와서 보니 비원을 연상시키는 듯한 깊은 정원에, 연못이며 정원석 하나하나까지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화려하지만 가볍게 보이는 일반 요정의 상업적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두 사람은 고풍스런 정갈함이 돋보이는 방으로 안내되어 갔다. 최 부장이 웨이터에게 몇 마디 하자 잠시 후에 젊은 여자가 나타나 다소곳하게 인사를 건넸다. 

“모처럼 오셨어요, 최 부장님.”

“그동안 범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

“저희는 서너 달 동안이나 안 오시길래 이제 다른 집으로 가시나 보다 했죠.”

“그럴 리가 있나. 신 마담 보고 싶은 거 참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P26-27)  

   

전과 11범. 폭력으로 시작된 박성길의 전과 기록은 그의 반세기 넘는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1978년 8월 폭행치사로 지명수배. 공범 오창수, 전만호.’

박성길이 얘기한 대로 1978년에 폭행치사로 지명수배된 적이 있고, 오창수와 전만호가 공범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1979년 3월부로 특별한 이유 없이 살인 혐의에 대한 ‘지명수배 해제’가 ‘무혐의’라는 고무인과 함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박성길의 말은 사실이란 얘기가 아닌가?

누군가가 지명수배 중인 조직폭력배를 시켜서 신원 미상의 남자를 살해했다. 살해되어 북악스카이웨이에 버려진 남자는 뺑소니차에 치여 죽은 교통사고 변사자로 처리되고 조직폭력배의 지명수배는 해제된다. 그렇다면 살해된 남자는 누구이며, 살인을 교사한 자는 누구인가?

순범은 새삼스럽게 사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P41)   

  

조 전무와 헤어진 주익은 <아사히신문>의 스즈키 기자를 찾아갔다. 

“요미우리 석간을 보셨나요?”

“물론입니다. 내일 아침 조간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오늘 저녁에 편집회의를 할 것입니다.”

“당신도 편집회의에 참석하나요?”

“그럼요.”

“사실은 내가 평소에 항상 스즈키 씨에게 도움만 받고 있어서 혹시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싶어 찾아왔어요. 오늘 요미우리 석간에는 안 나온 내용이 있는데, 지금 북한에는 이은혜와 같은 피랍 일본 여성이 상당히 많고 그중에는 성적 학대를 강요받는 여성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김현희한테 확인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이죠. 외신 회견이 끝난 김현희를 우리 신문사에서 추가 취재를 하다 나온 내용인데, 우리 신문에선 내일 아침 조간에 실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P100)     


“또 하나 알고 싶은 것은 야마구치파에서 한국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배후에 관한 겁니다. 야쿠자들이 경영하는 사업 중 가장 장사가 안 되는 곳이 한국이라는 것은 소문난 사실인데, 왜 그들이 그토록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입니까?”

“좋은 질문을 해주었소. 이것도 보수 우익의 발호와 관련이 깊은 문제요.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흐름의 배후에는 구로다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소. 우리도 예의 주시하고 있지만 이 기자도 새로운 사실이라도 알게 되면 연락해주시오.”

조 전무는 이 대목에서는 몹시 조심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대방이 기자인지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지 뒤를 감추었다. 그러나 주익으로서는 구로다케라는 이름을 들은 것만 해도 대단한 정보를 얻은 셈이었다. 

이 구로다케라는 인물은 일본인에게도 수수께끼의 존재였다. 소문에 따르면 내각의 멤버 한둘 갈아치우는 것쯤은 누워서 식은 죽 먹듯이 한다는 이 사람은 폭력세계와 줄을 대고 정계에까지 진출했으며, 자민당 중의원에 당선된 후 일본의 각종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거였다. 또한 일본 자위대의 해외파병안 통과, 급속한 일본의 재무장, 핵무기 개발 등에 구로다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러한 그가 야쿠자 자금의 한국 유입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P113-114)  

   

“1978년에 시립묘지나 화장터에 보낸 시체 가운데 이용후라는 이름은 없었어. 1979년에도 마찬가지였지.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더라구, 무연고자이면서 시립묘지나 화장터에 시체를 보내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 시체가 어디로 갔을까? 그래서 냉동실로 갔더니 영감이 대낮부터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게 아니겠어? 아무리 물어봐도 못 들은 척 대답이 없길래 데리고 나와서 실컷 술을 사줬지. 영감태기가 웬 술을 그리 잘 마시는지, 좌우간 실컷 마시고 나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러더라구 ...... 화장터에 안 갔으면 시립묘지에 갔을 테고, 시립묘지에 안 갔으면 국립묘지에 갔겠지, 기가 차더구만.”  

순범은 거기서 개코의 말을 끊었다. 

“이봐, 개코! 그게 웬 선문답이야? 국립묘지가 어디 아무나 가는 데야?”

“물론 우리 같은 사람은 살인범을 수십 명 잡아도 못 가는 곳이지. 권 기자 자네도 국립묘지 가기는 틀린 사람일 테고, 근데 도대체 미국에서 건너와 차에 치여 죽은 신원 불명자가 국립묘지에 묻힌다는 게 상상이나 돼? 그렇지만 영감 말대로 사실이더라구. 영감이 그토록 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간단한 이치더군. 연고자가 찾아가지 않고 시립묘지나 화장터에도 안 갔다면 국립묘지 밖에는 갈 데가 없으니까, 국립묘지 송시기록부를 보니까 바로 이 사람이 올라 있질 않겠어? 그래서 어제 당신한테 부리나케 전화를 했지. 자리에 없더구먼. 나 혼자 쫓아와서 관리사무소에 확인을 하니 여기 묻혀 있더라구.”                   (P120-121)   

  

북악스카이웨이와 이용후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나가던 순범은 최영수의 태도로 여러 가지로 미심쩍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는 술을 사달라고 하여 함께 마셨고, 순범이 셈을 치른 술자리가 끝나자 굳이 소매를 당겨서 생전 가본 적이 없는 고급 요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그러는 동안 구치소에 수감된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를 붙여 13년이나 지난 사건을 던져주고 해결해 보라면서 자신은 몸을 사린다. 요정의 마담인 신윤미를 소개해주고선 구미호니까 조심하라는, 경고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 어제 윤미를 만난 일까지 손바닥에 놓고 보듯이 훤히 알고 있다. 도대체 그의 의도는 뭔가? 그는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P149) 

순범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 기자가 전화를 넘겨주었다. 마침 기다리던 전화였다.

“권 기자, 전에 부탁했던 그 사람 신상 말이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의외로 없는데, 그 사람이 맞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베일에 싸인 사람이 한 사람 있더군.”

“베일에 싸인 사람?”

“응, 기록은 전혀 없고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가 왜 몰랐지?”

“잠시 떠돌다 사라진 소문이라 제법 나이가 든 사람들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것 같았어.”

“어떤 소문인데?”

“미국에 있던 한국인 핵물리학자가 다리뼈 속에 원자탄 설계도를 감춰서는 한국으로 왔다는 거야.”

“뭐? 뼛속에 설계도를 감춰?”

“그리고는 박 대통령에게 주고 바로 돌아갔다는 거야.”

과학기술처에 출입하는 동료 기자의 전화는 허황되기 짝이 없었지만 순범은 한 귀로 넘겨버릴 수 없었다. 뭔가가 찡하고 가슴에 울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문과 이용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머리를 무겁게 파고들자 순범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순범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신음소리를 냈다. 

“음...... 핵개발, 재미 물리학자 이용후.”

순범은 이제껏 누구도 추적하지 못했던 엄청난 사건에 자신이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P184-185)     


“최 부장이 권 기자님을 여기에 데리고 올 때부터 오늘 같은 일이 있을 줄 짐작은 했어요.”

“짐작하다니요?”

“그 사람이 일없이 권 기자님을 데리고 왔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딱히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박사님이 혹시 제게 무슨 중요한 사실이라도 말씀하신 것이 없을까 해서 끈질기게 파고들었죠. 그러나 저는 박사님에 대해 단 한마디도 그에게 말한 것이 없어요. 박사님의 사망에 대해 뭔가를 알아내려고 집요하게 추궁하더니, 지난번에는 권 기자님과 같이 왔더군요. 그래서 저는 오늘과 같은 날이 올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윤미 씨는 왜 박사님과 관련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믿을 수 없어요.”

“무엇이 믿을 수 없다는 얘긴가요?”

“이 나라의 관리들, 나아가서는 이 나라 정부를요.”

“정부를 못 믿겠다는 얘기는?”

“박사님과 박 대통령이 살아 계실 때는 민족의 영웅 운운하던 고급 관리들이 박사님 사후에는 위험한 사람으로 몰아붙이더군요. 최 부장 같은 사람도 박사님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저는 박사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맹세했어요.”

“그런데 그토록 오랫동안이나 하지 않고 있던 얘기를 어째서 내게 해주겠다는 겁니까?”윤미의 얼굴에 약간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느낌 때문이죠. 권 기자님은 다른 느낌을 줘요. 최 부장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 분이 아니란 느낌이 들어요.”                       (P206-208)    

 

“말하자면 뭔가 흔적이 있어야 정상인데, 너무나도 깨끗하니까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오. 미국이나 소련에서는 통치자의 권한과 관련하여 핵가방, 또는 블랙박스란 말을 사용하지 않소? 어느 나라나 핵문제는 통치전략의 일환이기 때문에 전임 대통령의 핵개발 계획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찾아내야만 하는 거요. 물론 박 대통령이 직접 주도하여 은밀하게 추진하다 갑자기 죽는 바람에 흔적을 찾아낸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이용후 박사가 귀국한 후에 핵개발과 관련하여 활동한 실적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말이군요?”

“물론이오.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핵개발 계획이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도는 걸 보면 틀림없이 뭔가 비밀이 있을 거요.”

“박 대통령의 죽음과 핵개발 계획이 관련되어 있다는 얘긴가요?”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오?”

핵물리학자 이용후 박사가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죽었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청부살인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용후 박사가 죽은 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핵개발이라고 짐작되는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해온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일 년 사이에 모두 죽음을 당했다면, 이거야 말로 보통 일은 아니었다. 순범은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단순히 이용후의 죽음과 최 부장과의 관련 부분을 캐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그를 만났는데, 최 부장은 진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순범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부분까지 털어놓았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P225-226)

     

“북한의 핵개발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 핵개발은 소련과 동구의 변화에 겁을 집어먹은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 내세우고 있는 고육지계이지.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흔들리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분출하는 민주화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전 인민에게 새로운 허상을 씌워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고, 특히 북한 정권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단 말이오. 게[다가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한 후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북한 정권은 핵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정권을 확고하게 하려는 것이지, 실제로 북한이 핵개발을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나서부터 북한 주민의 들뜬 분위기가 무척 가라앉았소. 핵개발 때문에 미국도 북한과 고위급관리회담을 계속하고 있는 판국이니 어느 정도는 그들의 의도가 맞아 들어가고 있다고 봐야겠지.”                      (P233) 

    

“핵에 관해서만큼은 미국은 우리나 북한이나 똑같이 위험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마 과거에 박 대통령이 핵개발을 아주 깊숙이까지 진척시켰던 것에 대해서 놀랐던 모양입니다.”   

“그랬던 것 같소. 지난번에 부시와 공동선언을 하러 미국에 갔을 때 배석한 미국 관리들 중 하나가 박 대통령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왜 쓸데없이 우산을 잘 씌워주고 있는데 굳이 우비를 입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조크를 던지더구먼.”          (P235)    

 

“그래서 차제에 북한의 핵개발과 더불어 우리 쪽의 잠재적 가능성도 뿌리부터 잘라버리려는 것이군요.”

“심지어 그들 중에는, 지금 북한 핵개발의 중심인물인 그 경 모라는 박사 있잖소?”

“예, 경원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기부에서도 그자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원자탄 제조에 관여하다가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용후 박사와는 미국에서 친했던 사람이라고 하더군. 그 사람과 이용후 박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소.”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입니다. 얼마 전에 들어왔던 그 스텐퍼드대학의 루이스 박사라는 자도 북한에 가서 꽤 을러댔던 모양입니다. 남북 핵사찰에 대한 조건을 놓고 북한 측과 갈 데까지 갔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용후 박사 주변에 대해서는 부장이 알아보시오.”

“알겠습니다.”                    (P237-238)     


“통일에는 반드시 통일 반대세력이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야. 국내에선 주로 기득권층이고 국외에는 주변 국가들이지. 이들은 늘상 교묘한 수법으로 통일의 유해한 측면을 부각시키기 마련이지.”

“예를 들면?”

“자네 그 통일비용 논의라는 게 가끔 신문에 등장하는 것을 볼 거야. 학자에 따라 무척 차이가 많은 이 통일비용이라는 것을 신문을 통해 본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별로 내켜하지 않게 돼. 엄청난 비용을 통일의 대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굳이 당대에 고생을 하면서 통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게 돼 있지. 그러나 통일의 형태가 어떻게 그들이 생각하는 방식만이 있겠어. 왜 우리가 꼭 독일식의 통일만을 해야 하고 그런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야 하겠어?”

“그럼, 자네는 어떤 방식의 통일이 우리나라에 가장 맞다고 생각하나?”

“당분간은 1국가 2체제가 좋겠지. 북한의 국가 구조를 그대로 두어 안정성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본과 기술을 대거 이전해주어 북한을 경제적으로 부흥시켜야 해. 그렇게 하면 독일식의 순간 흡수에서 오는 충격을 대단히 완화시킬 수 있지. 게다가 북한의 뛰어난 노동력과 주민들의 잘살고 싶은 욕구에 조금씩 불을 지펴놓으면, 북한은 순식간에 신흥공업국으로 일어서게 될 가능성이 많아. 이렇게 되면 우리는 먼저 경제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거지. 그 다음에 남북 간의 산업구조를 적당히 조정하여 세계 무대에 같이 대응하게 되므로, 남한으로서도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이문이 남는 장사가 될 수도 있는 거라구.”       (P278-279)


<뉴욕 저널리스트 신디게이트>에 소속된 프리랜서 기자라는 앤더슨 정은 언론인이란 과연 무엇을 위해 봉사해야 하느냐를 주제로 발표했는데, 아시아라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인지 세미나에서 가장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졌던 주제이기도 했다. 

“세상은 흔히 언론인에게 다음 세 가지의 덕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정의란 무엇인가?

세계의 평화란 무엇인가?

아마도 여러분은 진실은 진실이고, 정의는 정의고, 평화는 평화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대답은 동어 반복적인 토톨로지의 세계에서는 논리적으로 결코 틀릴 수 없는 말이겠습니다만, 복잡한 현실 사회와 밀착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언론인의 가치판단으로서는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틀린 대답이라면 언론인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유, 사회의 정의에 이바지할 수 있는 자유,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진실은 계급과 언론 자본의 이익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여러분의 정의는 권력의 압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여러분의 평화는 국가이기주의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나는 여러분과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P306-308)     


앤더슨 정의 이 말은 순범의 머리를 둔탁한 뭔가로 내려치는 듯했다. 이것이 대체 가능한 얘기인가? 미국이 한국에서 대통령이 초청한 사람을 살해한다? 물론 그랬다면 사람을 시켜서 했겠지만, 남의 나라에서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란 권부 깊숙이에서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틈만 있으면 세계평화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미국이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사람을 죽인다는 발상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왜 진작 미국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추리가 진전되지 못했던 것은 오직 박 대통령만이 그 당시 한국에서는 유일한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던 데 있었다. 미국이라는 가정을 도입하면, 이 박사의 살해에서부터 박 대통령의 뒤처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다. 

미국은 하수인을 시켜 이 박사를 살해한 후 시체를 북악스카이웨이에 버린다. 이것은 첫 번째 추리에서 생각했던 대로 박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경고이다. 여권을 남겨두어 신분이 즉각 확인되게 한 것이나 사고사를 가장한 것이나, 파문을 극소화하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즉, 사건이 쓸데없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고 은밀히 대통령에게만 협박을 가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상한 것은 박 대통령의 대응이 아닌가? 박 대통령은 어째서 이 박사의 죽음을 파헤치지 않고, 심지어는 그 하수인들조차 밝혀내지 않고 이들이 의도했던 대로 사고사로 사건을 묻어두었을까?                    (P322-323) 

    

“그런 이 박사가 어떻게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귀국했단 말입니까? 박 대통령으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박사가 눈엣가시였을 텐데요? 이 박사로서도 독재자를 위해 핵개발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고요.”

“거기에는 사연이 있지. 박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리 유신헌법을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미군철수가 코앞에 닥친 입장에서 매달릴 수 있는 인물이 이 박사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박사는 또 유신에 반대하는 입장과 귀국하는 동기를 서로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소. 이를테면 유신에 반대하는 것은 독재자인 박 대통령에 대한 반대고, 귀국을 한 것은 국가의 존망에 관한 결정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핵무기 개발이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믿었단 말입니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 아니겠소? 1974년엔가 귀국했을 때 초청을 받아 청와대로 가서 박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때의 화제가 주한 미군의 철수였다고 들었어요. 이 박사는 박 대통령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면 미국의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박 대통령은 주한 미군을 움직이는 건 반드시 그 때문만이 아니라 미국이 자기 나라의 이익에 너무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온 이용후 박사는 한때 주한 미군의 철수를 중단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소.”                (P333-334)     

“그렇소, 지금 남쪽의 인구가 대략 4천5백만, 북쪽의 인구가 대략 2천3백만인데 해외에서 사는 동포가 5백만이라고 하질 않소? 이 5백만을 두고 남북이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법석을 떨어요. 이런 작태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애쓸 게 아니라 남북의 당국자끼리 교류하고 협력하는 문제는 아무래도 제약도 많을 테고 속도를 낼 수도 없을 테니까 해외동포들을 이용해보라는 거지. 해외동포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윤활유 구실을 해주겠소?”     

“해외동포들이 윤활유 구실을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구요? 흔히 범민련이라고 하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문제가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실 이 문제가 바로 남북의 당국자가 해외동포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교적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돼요. 남쪽은 범민련 남쪽 본부가 재야 단체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있다고 하여 전혀 포용할 뜻이 없는 것 같고, 북쪽은 북쪽대로 당국자 간의 접촉에는 무성의하면서 남쪽에 대한 공작 차원에서 범민련을 이용하려고만 하니까, 뜻이 훌륭한 단체인데도 성과가 없을 수밖에.”                (P341)     


맥주 한 잔을 더 시켜 마시면서 순범은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보고 있었다. 평소 한국에서만 있을 때는 통일에 대한 문제를 그다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고, 통일 논의는 정부의 몇 개 부처와 학생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왔지만,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이 통일에 대한 조국의 태도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을 대하자 순범의 마음속 깊이에서 잠자던 애국심이 굼틀거렸다. 

자신은 한국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매일 시경 기자실에 눌러앉아 무슨 특종 기사나 없을까 하며 두리번거리고, 선정적인 정보나 쫓아다니고, 가끔 신문에 주변 사람들을 실어주고 거들먹거리던 것이 자신이 하던 일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철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오직 자신의 이기적 목표에만 열중해왔지 언제 한 번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현대가 국가관을 가지기 힘든 시대라고는 하지만, 같은 동포가 남북으로 갈라져 강대국의 입김에 정신을 못 차리는데도 자신은 진정으로 민족과 국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본 적은 없지 않은가?                      (P354-355)   

  

“이 박사님께서는 고귀한 생명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진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상황을 상세히 알아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이 박사님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자는 의도로 취재를 하고 있으니, 아시는 대로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었으면 합니다.”

“호호,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희생해요? 그것은 틀린 말이에요.”

“그렇다면 박사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바보들의 게임에 희생되신 거죠.”

“바보들이라니요?”

“조국이란 뭐고 민족이란 또 뭐예요? 그런 걸 들먹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바보들이죠. 세상에 그런 것들은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은 한때의 기분이고 환상이에요. 아버지는 있지도 않은 조국과 있지도 않은 민족의 환영에 사로잡혀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신 거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단위는 국가 아닙니까?”    

“국가가 국가다워야죠. 아무리 몽매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제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들어간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기예요?”             (P396-397)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말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 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 개발, 핵무기 개발, 인공위성 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은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 박사님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 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번 일어서 주십시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대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이에 대한 이 박사의 태도는 또 어땠는가? 이 박사의 일기를 보면 그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 듯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비록 박 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지만.... 죽는다...... 내가 죽음으로 조국을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죽어 조국이 조국으로 남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을 구할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일까? 나의 운명...... 나의 어머니, 아이, 그리고 형제들..... 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안내해주소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귀국하여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하다 결국은 죽고 만 이 박사..... 순범은 결코 가벼울 수만은 없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자신을 엄습해오자 전율을 느꼈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던 세계적 물리학자가 비명에 갔다. 박성길이 저지르긴 했지만 그는 한갓 하수인일 뿐 대단한 세력이 배후에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철저히 밝혀내야 한다. 이제 그 책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는 것이었다. 순범은 다시 사건의 개요를 정리해 들어갔다.                  (P430-431) 

    

“예전에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닐 때는 국민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가 지옥 같았어요. 물론 옷이 성할 날도 없었구요. 우리는 옷이 아무리 찢기고 낙서가 되어 있어도, 때로는 오물이 묻혀 있어도 집에 돌아와서는 깨끗이 세탁해서 그 다음날엔 반드시 입고 나갔지요. 누가 봐도 조선인이란 표시가 나니까 다들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했지만, 우리는 기죽지 않고 다녔어요. 그러나 그중에는 시달리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도 생기고, 때로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옷이었지만 결국은 자식의 고통을 보다 못한 부모님들이 협의를 해서 안 입히기로 했어요. 마지막으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던 날, 우리는 모두 울먹였지요. 뭔지 모르지만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오르더군요. 왜 우리가 우리의 옷을 못 입고 버려야 하나 생각하니 분해서 하루 종일 공부도 되지 않더군요.”

“그래, 이제는 말까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민단 동포들도 단결을 하면 좋은데, 그쪽은 돈 벌고 출세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민족성 같은 것에 대해 의식이 약해요. 우리가 치마저고리를 입으면서 그렇게 고생할 때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를 비난했으니까요. 거추장스러운 옷을 뭐하러 입고 다니면서 말썽을 일으키느냔 거죠. 때때로 지하철 같은 데서 행패를 당할 때 도와주는 일본인은 있어도 민단 동포들은 없어요. 그들은 조선말도 쓰지 않아요. 일본인처럼 행세하려 하죠. 물론 귀화하는 사람도 아주 많죠.”

“통일이 되지 않는 한은 일본인들의 멸시에 맞서서 당당하게 대응할 수 없어요. 일본인들은 조총련과 민단으로 나뉘어 사사건건 대립하고 싸우는 우리 재일동포들을 얼마나 멸시하는지 몰라요. 본국이 통일이 돼야 우리도 어깨 펴고 다닐 수 있을 텐데........”         (P456-457)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묻겠습니다. 1980년 8월 15일은 무슨 날입니까?”

“아니,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지하핵실험 예정일이었소.”

“지하핵실험 예정일이었다구요?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플루토늄이 없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나도 알 수 없소. 아마 박 대통령과 이 박사 두 사람밖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일 것이오. 어떤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이 박사의 죽음에 이어 박 대통령도 그 뒤를 이었으니, 설사 어떤 비밀이 있었다 하더라도 없었던 것과 똑같은 일 아니겠소?”“그간 핵개발의 자취 같은 것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세한 것은 나도 알 수 없소. 다만.....”

“다만 뭡니까?”

“다만 1980년 당시 신군부의 핵심들만이 알고 있을 거요.”                 (P473)   

  

‘공무원이 미국의 하수인이 되어 애국자를 죽이고, 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란 사람은 외국의 영주권을 갖고 있고, 깡패들은 야쿠자의 하수인이나 되고, 온 세계가 무섭게 변하는데도 국민들은 점점 개인적,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미현, 미안하오, 나 당신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고 당신을 자랑스럽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소. 이 나라는 너무도 썩었소.’  

“이런 나라는 망해야 해, 망해야 한단 말이야!”                 (P481-482) 

     

[2]

“추돌당하는 순간 급정거라구요?”

이 대목이 순범에게는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추돌사고라는 것이, 뒤에서 들이받은 차가 급브레이크를 잡았다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전혀 상황을 모르고 앞서 가던 차가 뒤를 받히자마자 바로 급정거를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운전사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은 더욱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추돌당한 차의 운전사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면 왜 사라져버렸을까?

순범은 누군가가 개코를 살해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개코이 시체를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이 느낌은 점점 확신으로 다가왔다. 같이 청주에 내려갈 때 자신의 과속에 대해 개코가 보이던 조바심이나 평소 개코의 신중함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달리는 차를 들이받고 죽을 개코는 아니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사건이오.”                   (P34)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며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던 시절, 그들은 눈에 보이는 침략에 앞서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 중 하나가 화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우리나라에 보내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화투를 배워주고 화투 치는 사람들에게 돈을 대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고 빠져들지 않을 수 없도록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화투를 성행시켰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제강점기에 본격적인 지배를 하면서 더욱더 화투를 퍼뜨렸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부터 전국에 화투로 집과 전답을 잃은 농민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망국의 병은 해방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잡히지 않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이런 무서운 흉계가 있었음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범은 박 국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영국 정부가 중국인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아편을 택했듯이 일본이 한국인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기 위해 화투를 유행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P59)     


순범은 박 국장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에서는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각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사키에 의해 와해된 시모노세키파의 잔당이 마사키를 급습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죠. 그 내막을 미리 알고 있던 홍성표, 즉 가네히로는 칼에 찔리면서까지 전력을 다해 마사키를 보호했습니다. 물론 시모노세키파의 잔당이 급히 모집한 행동대원 중에 끼여 있던 우리 요원과의 약속된 칼부림이었습니다. 마사키 피습사건으로 가네히로는 일약 야마구치파의 간부로 올라섰습니다. 이것이 바로 홍성표 탈주사건의 비밀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얘기군요.”

순범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뭔가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나 엄청난 계략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박 국장은 순범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네히로의 정체가 비밀에 부쳐져야 합니다. 그런데 권 기자님이 박 주임을 집요하게 추긍하자 박 주임은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내막도 모르는 채 우리 직원의 부탁을 받고 탈주극을 연출했을 뿐인데, 권 기자님의 추궁을 받고 무척 괴로워했습니다. 그 자신은 끝까지 비밀을 지킬 사람이었지만, 권 기자님으로부터 가네히로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모든 것을 다 밝히고 권 기자님의 협조를 얻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랬군요.”                       (P62-63)    

 

네 아버지와 나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 말고도 똑같이 식민지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냈어. 네 어머니와 할머니도 참 좋은 분이셨지.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한 가족처럼 지냈고, 참으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조국의 부름을 받았어. 간디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불러 조국의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인도로 돌아와 핵폭탄을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나는 무척 고심하다가 결국 인도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결정했지. 연구소에는 잠깐 다니러 간다고 얘기했어. 연구소가 바로 미국 정부인셈이니까 곧바로 보고가 됐겠지? 그런데 같이 올 예정이던 하버드대학교의 물리학 박사 아운디는 공항으로 오던 도중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하고 말았지.

대형 덤프트럭 사이에 끼여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죽고 말았어.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CIA의 음모라고 생각했어. 미국은 제3세계에 핵 기밀이 유출되는 걸 무엇보다고 경계했으니까. 아운디 박사를 설득하다가 뜻대로 안 되니까 죽여버린거지.

나는 운 좋게 귀국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핵무기를 개발했네. 핵무기를 개발하기 전에 우선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다했지. 왜냐하면 당시만 해도 핵 보유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밖에 없었고, 제3세계 국가가 핵폭탄을 보유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때라 플로토늄 생산이 요즘처럼 어렵지 않았지.

나는 많은 양의 플루토늄을 확보하고는 핵폭탄의 제조를 시작했고, 마침내 폭발시험까지 성공적으로 마쳤어. 나의 조국 인도는 5대 강국에 이어 세계 역사상 여섯 번째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지. 간디 수상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포옹한 건 말할 것도 없었네.                 (P118-119)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순범의 어지러운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몰랐다. 한국에 플루토늄 80킬로그램이 있다는 사실. 그 비밀을 자신과 미현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를 무겁게 짓눌러왔다. 

비행기의 창밖으로 보이는 시베리아의 하얀 설원을 내려다보며 순범은 생각을 정리했다. 이 박사의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벌써 몇 번의 살인이 일어났고 몇 번의 위기를 당했다. 플루토늄의 비밀을 알고 난 지금부터의 위험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과 미현의 생명을 지키는 것만 해도 힘에 겨운데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검은 코끼리의 석상을 찾아 이 박사의 유업을 완수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순범은 고개를 가로 흔들 수밖에 없었다.           (P129-130)   

  

“박 국장, 나가면서 별관 뒤의 연못을 권 기자에게 보여주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박 국장도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잔디밭을 지나 별관 쪽으로 잠시 걸어가자 무궁화나무 사이로 분수대가 보였다. 분수 맞은편에는 소년의 동상이 있었고, 소년의 오른손은 비스듬하게 들려져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순범과 박 국장의 시선이 소년의 손끝을 따라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아!”

두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우러나왔다.

오석인지 대리석인지는 구별이 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검은 색 돌로 만든 웅장한 코끼리의 조각상이, 코를 하늘로 치켜들고 힘찬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상아가 주는 섬뜩함과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 눈의 부드러움이 잘 어우러진 석상이 순범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있었구나!‘

순범은 다가가서 코끼리의 두툼한 다리에 입술을 갖다 댔다. 초겨울의 차가운 날씨라 석상에서 흘러오는 한기가 순범을 잠시 움츠리게 했지만, 이내 순범은 양팔을 벌려 코끼리의 다리를 얼싸안았다. 몸살 기운에 어질어질하던 순범의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P159-160)  

   

“따지고 보면 북방정책의 핵심은 통일과 핵이랄 수도 있소. 나는 늘 이 문제를 생각해오고 있었소. 결론은 아까 권 기자의 생각, 아니 박 대통령의 생각과 같은 것이었소.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민족의 이익이지만, 당장은 우리의 위협이 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현명하게 타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소. 북한의 핵 위협도 해결하고 우리도 핵을 갖추면서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묘책이 없을까 하고 늘 생각해왔소. 미국과 일본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핵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극비리에 북한과 합작하는 것밖에 없었소. 남북 핵 합작 말이오. 그러나 지금껏 내색하지 못했던 것은 여건이 도저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소. 바로 80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이 있지 않소. 강대국들의 감시 때문에 국내에서는 할 수 없지만 북한에 가서 한다면 가능할 거요.”

대통령의 목소리는 점점 열기를 띠어갔다. 부장은 역시 최고통치자의 생각은 독특한 데가 있구나 생각하면서 대통령의 빈 술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부장, 모든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시오. 남북대화든 경제협력이든 통일이든 궁극적으로는 남북 간의 신뢰가 좌우하는 것이 아니겠소? 우리는 북한을 못 믿고 북한은 또 우리를 못 믿으니 이 천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최고의 신뢰를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이 핵 합작을 과감하게 시작함으로써 오히려 최고의 신뢰를 쌓을 수 있지 않겠소? 강대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남북이 진정으로 가슴을 열고 가장 위험스런 일을 극비리에 같이 수행하는데 다른 일들이 안 될 리가 있겠소? 지금 남북이 사소한 자기 입장만 주장하며 시간을 잃으면 앞으로는 엄청난 속박과 굴종만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질 거요. 우방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피를 섞은 민족 이상으로 가까울 수는 없소.”                (P163-164) 

    

“본인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남북이 핵무기를 공동으로 개발하려고 한다면,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오히려 핵무기의 배치를 둘러싼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문제겠죠.”

“거기에 대해서는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좌중은 모두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잠자코 앉아만 있던 과학기술처의 주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레이저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중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과학기술처에 근무하고 있는 젊은 박사였다. 

“바로 레이저 잠금장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핵탄두에 레이저 시건장치를 해두고 열쇠를 둘로 나누어 가질 경우, 두 개의 열쇠가 합쳐져야만 핵탄두의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핵탄두를 어디에 배치해두든 남과 북이 레이저 열쇠를 따로 갖고 있는 이상, 어느 한쪽의 결정만으로 독자적인 사용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도 불안하다면, 아예 핵폭탄의 설계 단계에서부터 핵탄두를 둘로 쪼개는 것입니다. 핵탄두를 둘로 쪼개서 각각의 부분에 레이저 처리를 하면 일개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거든요. 그러나 일단 유사시에 쪼개놨던 두 개를 합치게 되면 보통의 핵탄두와 똑같아집니다. 이것은 최첨단의 레이저 봉합 장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미국의 레이저 연구소에서는 이미 이 방법으로 위험한 지역의 핵탄두를 쪼개놓음으로써 예기치 못한 핵폭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습니다 둘로 쪼개진 핵탄두는 어떤 경우에도 혼자서는 절대로 폭발할 위험이 없을 뿐 아니라 해체도 불가능합니다. 레이저 잠금장치를 해제하지 않은 채 해체 작업을 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충격을 가하면, 그 충격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핵연료는 누출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부분적인 방사능 오염사고만 생길 뿐이죠.”                     (P180-181)     


“나는 야마모토를 만나 그의 미술품 약탈 행위에 대해 꾸짖고 그가 나의 조국에서 훔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아간 문화재를 반환하라고 했소. 그리고 붙잡아 갔던 수많은 한국 여인들에게 사과하는 참회록을 써서 신문에 내라고 했소.” 

“피고! 피고는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야마모토 선생이 여기 안 계시다고 마구 얘기하는 것 아니오?”

“이보시오. 검사! 야마모토가 당신네 일본인들에게는 양심 있고 교양 있는 존경할 만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도둑놈에다가 인간 백정이었소.”

“닥치시오! 당신을 사자의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겠소.”

“당신은 이미 나를 살인죄로 기소해놓았으니 당신 말대로 된다면 나는 사형이나 무기형에 처해질 텐데, 그까짓 명예훼손죄가 뭐 그리 대수겠소?”이 말에 방청객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건 야마모토 선생은 피고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소?”

“그는 딱 잡아뗐소. 한국에 있을 때 그런 일이 없었다는 거였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소. 내가 당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데 어째서 당신이 모른다고 하는 거요? 그는 나더러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소. 그래서 내가 누군지 대답해주었소.”

“피고는 도대체 누구요?”

“나는 야마모토가 나의 어머니를 정신대로 끌고 갈 때 십리 길을 울며 쫓아갔소. 당시 나의 나이 일곱 살이었소. 마침 트럭에 태워지던 어머니와 나는 헤어지지 않으려고 살갗이 벗겨지고 팔이 빠지도록 꼭 껴안고 있었소. 야마모토는 몽둥이로 내 어머니를 머리 어깨 할 것 없이 사정없이 내리쳤소. 끝까지 나를 놓지 않던 어머니는 결국 실신하고 말았소. 나는 야마모토에 의해 달리는 트럭 위에서 내던져지고 말았소. 다리가 부러진 채로 언제까지나 엄마를 부르고 있던 일곱 살 어린이, 그게 바로 나요.”

방청석에서 잠시 탄성이 흘러나왔다.                (P203-204)     

부장은 김 주석이 이 정도로 대화에 빨려 들어오면 문전축객의 신세는 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김 주석이 슬쩍 말머리를 돌리는 품으로 미뤄봐서는 북쪽의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는 핵무기 개발에 대해 통일조국의 안보를 내걸고 설득해오는 부장의 말을 귓등으로 들어 넘길 처지는 아닐 것이었다. 

부장은 엄숙하고 솔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대통령의 지시로 비밀리에 작성한 암호면 ‘무궁과꽃이 피었습니다’ 계획이었다. 

작성하면서 고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 주석을 설득하기 위해 거의 달달 외우다시피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온 내용이었다.

“주석님. 남과 북은 전쟁이 아니라 이제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통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소망이요 염원입니다. 이것은 남북의 의지가 확고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통일 후의 한반도 안보는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한반도가 통일이 되고 나면 우리 민족은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등 세계 최강국들에 의해 둘러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운명은 마치 서커스의 줄타기 연기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에 우리 민족이 당했던 역사적 상황이 한반도에서 그대로 되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P233-234)   

  

좌석에 앉자마자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순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행위가 과연 옳은 것인가? 나의 행위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오늘 나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사람을 죽이는 행위 자체는 범죄가 아닐까? 우주의 법칙에 의해 생겨난 고귀한 생명,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타인의 생명. 이 생명을 어떻게 나는 그의 의사에 반해 죽일 수 있을 것인가? 그가 더 큰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는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내가 그를 죽이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범죄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가? 법적으로는 틀림없는 살인죄. 그러나 나라와 동포를 위해 반역자를 죽이는 것을 어떻게 범죄라 할 것인가? 지금처럼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라를 대신하여 반역자를 처단하는 것은 전쟁에 나선 군인과 같이 오히려 떳떳한 일이 아닌가? 전쟁. 이것이 바로 전쟁이 아닌가?’

막상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이한수를 떠맡았다는 것이었다.               (P314-315) 

    

순범은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떨리는 순범의 손끝으로 38구경 리벌버가 냉기를 뿜고 있었다. 

아직은 아무도 순범의 행동을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순범은 마지막으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휘장 사이로 보이는 조종실을 관찰했다. 문이 약간 열려 있는 것이 보이자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범은 서서히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이한수의 머리를 겨눈 총이 불을 뿜음과 동시에 순범은 번개처럼 조종실로 뛰어들어갔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한 이한수의 머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불의의 총격에 소스라치게 놀라 조종실 문을 잠그려던 부조종사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검은 총구를 보고는 황급히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순범은 재빨리 문을 잠그고 권총을 조종사의 뒷머리에 겨누었다. 

“고우 투 평양, 노스 코리아.”

일부러 매우 서투른 억양으로 이렇게만 말하고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조종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차디찬 총구를 의식하면서 그는 항로를 급선회하여 기수를 북으로 돌렸다.                 (P317-318)   

  

노스웨스트 730기는 평양의 순안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북한 당국은 납치범 1인과 시체 1구만 제외하고는 나머지 승객 모두와 비행기를 곧바로 이륙시켜 원래의 목적지인 미국으로 향하도록 영공까지 전투기들이 호위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언론은 북한의 조치를 극찬했다. 북한의 이러한 조치는 세계 항공기 납치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신속했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인도주의적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항공기 납치범에 대해서는 자국 법률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이었다. 

며칠 후 어둠이 짙게 깔린 백령도 부근 서해상의 한 지점에서는 남북한의 어선 한 척씩이 조우했다. 북에서 내려온 어선에서 옮겨 탄 순범은 두꺼운 재킷 차림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얼굴을 발견하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권 기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P323)   

  

산에서 순범은 진정 쓰고 싶은 것을 남김없이 그대로 썼다.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나 보고 느끼고 판단한 것에 의거하여 전쟁의 시기와 가능성,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과 양태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했다. 처음에는 생소하게 생각되어 어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맑은 정신으로 깊이 생각하면 훤히 보이는 듯도 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순범은 차츰 외국의 전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느꼈다. 한 지역의 특수성을 임의로 해석하여 몇 개의 큰 흐름 속에 얽어서는 그것을 거드름 피우며 내놓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을 무슨 금과옥조라도 되는 양 떠받드는 약소국의 정치인이나 지식인도 허위의 것을 농락하는 연기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 몸을 담고 수십 년 이상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나라의 제반 문제를 더 잘 아는 외국인이 있다는 것이나, 그 외국인의 생각을 진리로 떠받들고 사는 것이나, 모두 이치에 맞을 턱이 없었다. 

순범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것을 그대로 써낸 것만으로도 자신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아예 국방부에 들러 직접 제출해버리고는 바로 동네의 목욕탕으로 갔다. 뜨거운 물에 그간의 피로와 생각이 찌꺼기들을 녹이는 기분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이었다.                 (P351)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던 검푸른 바다 위에 폭발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붉은 해가 수평선 너머에서 나타나 남쪽 하늘로 느릿하게 무거운 발길을 옮겨가고 있었다. 초겨울 바다의 한 점 외로운 섬 독도에 들끓던 가슴들은 한 전경대원의 ‘전원 장렬히 전사했음’이라는 마지막 보고를 끝으로 조용히 그 동작을 멈추었다. 비록 그들의 손은 얼어붙고 무기는 빈약했으나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과 불굴의 기개는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항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목숨을 던지게 했던 것이다. 

다섯 척의 함정과 1개 대대의 병력을 가지고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섬에 상륙할 수 있었던 일본군의 지휘관이 본국 기지에 보고하는 내용은, 이들 독도경비대원들이 얼마나 악착같이 독도를 방어하고자 했던가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기동타격대장 나카무라 제1좌 본부에 보고함. 08시 50분 현재 작전 끝. 모두 17명의 한국경비대 전원 사살하고 레이더실 점령함. 일본 자위대 다케시마수비대의 현판을 달고 18명의 수비대원 주둔시킴. 아군 피해는 전사 36명, 부상 75명. 이상.”              (P424-425)     


미국의 배신, 아니 이것은 배신은 아니었다. 사실상 한국과 일본의 전쟁에 미국이 반드시 한국의 편이 되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과의 사이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은 일본과도 미일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으며, 한일 간에 일어난 분쟁에 대해 미국이 언제나 중재인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미국에게는 한국보다는 일본이 훨씬 중요한 나라이며, 미국이 반드시 서태평양에서 일본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도 분명했다. 일본과 미국 간에는 수많은 이익이 서로 얽혀 있으므로 오히려 타협이나 흥정의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대통령은 육해공군 합동참모회의를 주재했다. 

“적의 제1차 공습은 우리 측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소. 앞으로의 군사적 상황 전개에 대해 각군 지휘관들은 설명해주기 바라오.”

공군 참모총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각하,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 것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P455)  

   

"대사, 본국 정부에 통보해주시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한민족은 한일 간의 모든 문제를 우호선린의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지금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내로 일관해오며 귀국 정부의 자제와 각성을 기대했으나, 이제 우리나라의 근본을 뿌리째 뽑아버리려는 간계를 간파한 이상 더 이상 이대로 묵과할 수 없소. 우리는 임진왜란과 일제 36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용서하고 같이 살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귀국의 태도와 근본적 정신자세는 도저히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단정하게 되었소. 또한 우리는 다시 귀국의 야욕에 희생되어 비참하고 구차한 역사를 반복하느니 참혹하기 그지없지만 우리 민족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줄 화근을 영원히 제거해버리고 역사 앞에 떳떳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였소.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백 년이 걸려도 회복되지 못하는 불모의 나라로 전락하고 말 것이며, 귀국의 국민들은 전세계가 혐오하고 기피하는 기형의 인간들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설사 귀국과 마찬가지의 운명이 된다고 해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모두 이 길을 택할 것이오. 멸망하고 말지언정 치욕당하는 역사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오.

지금 즉시 귀국 정부에 통보하시오. 이제 한 시간 내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 고베, 교토 다섯 도시에는 히로시마급 원자탄의 다섯 배의 위력을 가진 핵폭탄이 투하될 것이오. 도쿄는 특별히 크고 중요한 도시이니까 다른 도시의 세 배를 드리겠소. 한민족의 이 결정은 결코 번복되지 않을 것이오. 자, 그럼 그만 가보시오.“

우시로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P466-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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