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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4. 2024

하니프 쿠레이시의 <친밀감>

영화 <정사Intimacy>  2003년

소설 <친밀감>(Intimacy)은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는데 특히 <정사>는 '여왕 마고'로 잘 알려진 파트리스 셰로 감독의 연출로 영화화돼 200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금곰상, 은곰상(여우주연상), 최우수 유럽 영화에 주어지는 블루 엔젤 상까지 무려 3개 상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전미 비평가협회상, 각본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화제를 뿌렸다.     

누군가를 떠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최악의 선물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애쓰는 중이다. 우울하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비극이 될 까닭은 없다.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떠나지 않는다면 새로움을 맞을 여지는 없을 것이다. 옮겨 간다는 건 당연히 사람들과 과거와 옛 자아에 대한 배반이다. 하루하루가 적어도 하루 한 번은 완벽한 배반이나 필연적인 배신으로 채워져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떠난다는 건, 내일에 대한 신념을 보증하는 낙관적이고 희망 넘치는 행위이자,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더 나은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수전과 아이들, 내 집과 욕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대마초 무성하고 벚꽃 만발한 정원을, 빅터 집의 외풍 들고 바닥엔 먼지 쌓인 그 방과 맞바꾸려는 참이다.      (P10)     

더 중한 게 뭘까? 인생의 중반에서 혼란에 빠졌고 집으로 가는 길도 없는데, 이런 생활을 놓아 버리면서까지 무슨 경험을 기대하는 걸까? 정서적 경험이라면 그동안 남자들, 여자들, 동료들, 부모, 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넘칠 만큼 겪었다. 수년 동안 나는 읽고 생각하고 말했다. 오늘 밤, 그 가운데 무엇 하나 내게 어떤 길을 일러 줄까? 아마도 스스로 그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아픔이 되면 걸어 나갈 만큼 느슨하고 자유롭다는 사실에 감명 받아야 하겠지. 하지만 난 뭣 때문에 자유로운 거지? 분명 궁극의 자유란, 누군가를 삶에 묶어 두고 연루시키는 의무를 위해 자유 없이 살기를 택하는 자유일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움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둘 것 같지 않다. 아침이 되면 어떤 일들이 마음에서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는 안 된다. 여하튼 필요 이상으로는 말이다. 내게 좌절감을 주는 건 침울함이 아니라, 침울함의 깊이와 끝 모를 지속이라는 건 알아냈다. 희미한 울적함이 찾아들면, 한 일 년 동안 우울증에 빠질까 두려워진다. 한때 여자 친구였던 니나가 거리를 두거나 예민해지면, 그녀가 내게서 영원히 멀어질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오늘 밤,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 내 감정을 뒤덮는다.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뭔가 두려운 것이 지겨운 것보다는 낫고, 사랑 없는 인생은 길고 긴 권태라고. 두려울지는 몰라도 냉소적이진 않다. 나는 결연해지려 애쓰는 중이다. 걱정할 거 없어. 오늘 밤, 내가 그 기록을 일그러뜨릴 테니.

내 삶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내가 사랑하는 건 무엇인지 역시 곰곰이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미래는 무엇 하나 나아지기 전에 가능성부터 압사당하는 황무지가 될 테니까. 죽지 않은 채로 자살하기란 쉽다. 불행히도 미래에 이르려는 자는 반드시 현재를 통과해서 살아야만 한다.              (P18-19)    

 

그는 전에도 집을 나간 적이 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부부 싸움을 할 때면, 어머니든 아버지든 한쪽이 상대를 죽여 버리고 자살할 거라고 생각하며 겁에 질려 귀를 틀어막곤 했다. 당시 그는 어깨에 짐을 걸머지고 홀가분하게 걸어 나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행선지를 정할 수가 없었다. 사춘기가 되어서 친구들과 함께 진짜로 가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밥 딜런 공연을 보고 난 후 달리 갈 데가 없었기에 티셔츠 한 장에 해진 청바지만 입고 밤새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누워 있다가, 다음 날 실망과 두려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가끔 반항을 했지만 "소풍 같은 내 탈선은 학교 주위를 맴도는 게 전부였다. " (P32)    

 

“당신 초조해 보여.”

“내가?”

“나이 탓이야.”

“아마 그렇겠지.”

어른들은 내가 아이였을 적에 “지나가는 한 시기일 뿐이야.”라고 말하곤 했었다.    (P46)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삶의 목표는 ‘성공적인 활동’, 그러니까 행복이고, 그 행복은 쾌락과 동일하지는 않다 해도, 최소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불행은 그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수전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하지만 행복이란 음악이 그렇듯 후천적인 취향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지닌 완벽함이라는 조건이 행복에는 필요할 테고, 그 행복을 찾지도 않고 애써 행복을 느끼지도 않았던 게다. 분명 기회는 있었다. 그때 그 오후..... 미소 짓던 그 얼굴들. 그녀의 손.....

하지만 벨벳 커튼과 크림치즈, 나를 짓누르는 일과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이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충분치 않다면, 그건 아닌 거다. 거기엔 삶이 없다. 세계는 우리의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눈은 생기를 돋우고 손으론 형태를 빚는다. 갈구해야지 풍성해진다. 의미는 부여하는 것이지, 샘솟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며, 그 너머는 없다. 새로움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P50-51)     


사람들은 우리가 과도한 쾌락에 빠지는 걸 원치 않는다. 우리에게 해로우리라 여긴다. 어쩌면 우리는 내내 쾌락을 바라게 될지도 모른다. 욕망이란 얼마나 어지러운 것인가! 그 악마는 잠들거나 침묵하지 않는다. 욕망은 음탕해서 우리의 이상에 순응하지 않으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욕망을 갈구하는 이유인 것이다. 욕망은 모든 인간의 전력투구를 조롱하고 욕망을 욕망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무정부주의자이고 은밀한 대리인이어서, 인간들이 욕망을 포박해서 안전한 곳에 가두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가 욕망을 통제 아래 두었다고 생각할 때, 욕망은 우리를 낙담시키거나 희망에 부풀게 한다. 욕망은 우리를 기만하기에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러니 욕망이란 파시스트라기보다는 오히려 광대일 것이다.           (P54)     

보편적인 교양 없이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보편적인 교양은 오늘 밤 나를 어디에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내 외로움과 떠나고픈 심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뭔가 해야만 한다. 게다가 더 중요한 건, 대체 왜?             (P58-59)  

   

무엇보다 나를 당혹스레 만드는 건 무엇인가? 똑같은 질문과 강박관념, 반복되는 우둔함과 쓸데없는 응답들에 이토록 오래, 지난 십 년 동안 어떤 앎의 진전도 경험하지 못한 채로, 혹은 알아야 할 필요성을 면제받지도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시달려 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이것을 넘어서 떠날 수가 있을까? 나는 벗어나는 와중이다.

몰락이 돌파구가 된다는 사실이 내겐 탈출구다. 중요한 건 그것이다.        (P60)     


누구나 실수하고 길을 잃고 빗나간다. 우리가 겪는 굽이진 진전을 어떤 실험이라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안전함을 바라지만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고요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감행하지 않는다면 흥미로운 일은 벌어지지 않을지니.

우린 우리 자신의 인생을 물론 실험할 수 있다. 남의 인생을 갖고서는 안 되겠지만.    (P60)  

   

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걱정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불안이 우리를 서로에게 붙들어 매어 주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도 뭔가 함께 나누는 게 있는 셈이었다.          (P71)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나중에 적당한 공책에다 그들의 이름을 써 둘 것이다.)을 떠올리자니 그들 가운데 누가 잘 사는 법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만약 삶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그건 기이한 기술이며 모든 것에 관한 기술이고 특히 영적인 즐거움에 관한 기술이다. 진화된 삶의 기술은 여러 자질들이 서로 꿰메인 형태여야 할 것이다. 지혜와 취향, 지식과 이해력에다 고뇌와 갈등을 삶의 일부로 인식하는 재능 등의 자질들과 더불어 지성과 매력, 부와 자연스러운 미덕들이 말이다. 부유함은 필수적이진 않을 테고, 다만 어딘가 소용 닿을 만한 곳에 부를 쌓아두는 총명함은 필요할 것이다. 생각해 보니 재주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고 있으며, 대단한 계획을 품고 스스로를 채워 가며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또한 최고의 동료이기도 하다.             (P75-76)

     

담요와 베개가 어지러이 포개져 있는 사이로 당신 머리칼이 보인다. 나는 서서 당신을 쳐다본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따스하고도 완벽한 친밀감을 원하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누군가 기꺼이 내어 주는 품속에서 잠들고 싶은 욕심은 과한 것일까?          (P90)     

사랑이 그늘진 노동이란 걸 나는 안다. 사랑으로 당신의 손은 피할 길 없이 더러워진다. 관계에서 멈칫대면 흥미로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당신은 사람들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찾아내야 한다. 너무 가까우면 상대가 당신을 압도할 것이고 너무 멀면 당신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상대와 적절한 관계를 지속시킬 방법은 무엇일까?              (P110)     


“내게 견해가 있어.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아. 견해란 매일 바뀌니까. 특히 문화나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지 않는 편이 늘 안전하지.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나는 지금 믿음이 과잉되어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

“무슨 믿음?”

“친밀감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사랑에 대한 믿음 말이지.”                (P155)     


거짓말을 나는 권하지 않는다. 특정한 상황만 제외하곤 말이다.

수전, 당신이 나를 안다면 내 얼굴에 침을 뱉을 거야. 나는 매일같이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고 당신을 배신했어. 하지만 내가 그 여자들과 놀지 않았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지는 못했을 거야. 거짓이 우리 모두를 보호하지. 그건 중요한 것들이 지속되도록 만들어 주거든. 

그 시절들 동안 내가 착한 사람이었다면 누가 감동 받았겠어? 신께서? 거짓 없는 세계는 불가능할 거야. 거짓이 비난받지 않는 세계 또한 불가능하고. 불행히도 거짓은 우리에게 전능함의 느낌을 주지. 그건 지독한 외로움이 만들어 내.           (P159)   

  

우리는 각자 생각에 몰두한 채, 나란히 걸었지. 나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인지도 잊었어. 그때 네가 가까이 다가와 내 머리칼을 쓰다듬고 내 손을 잡았었지. 네가 내 손을 잡고서 나직이 얘기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이런 행복 혹은 만족에 덧붙일 것도 없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어. 이것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었고,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이 순간 지고의 것이 쌓였다고. 어쩌면 이게 고작 사랑인지도 몰라.        (P181)     


우리 모두를 보호하는 것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이 국가를 움직이는 것은, 그러므로 ‘거짓’이다. 이를 인정할 때 여행은 시작된다. 68혁명 이후의 현대 소설이 정치가 아니라 개인을 찾아 나선 까닭은 이 때문이다.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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