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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3. 2024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

영화 <블랙 달리아>  2006년

《블랙 달리아》(The Black Dahlia)는 미국, 프랑스, 독일에서 제작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2006년 범죄, 드라마,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이다. 동명의 소설 블랙 달리아를 각색한 작품이다. 조쉬 하트넷 등이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루디 코엔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2006년 8월 30일 제6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006년 9월 15일 미국에서 개봉되었다.    

 

<블랙 달리아> 사건은 1947년 1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당시 22세의 여성 엘리자베스 쇼트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엽기살인사건이다. 쇼트는 1947년 1월 15일 로스앤젤레스 레이머트 공원에서 허리가 잘려서 상반신과 하바신이 분리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살인범을 찾을 수 없었던 영구 미제 사건이다. 미 작가 제임스 엘로이는 1987년 쇼트 살해 사건을 주제로 ‘블랙 달리아’란 범죄소설을 썼다. 사건 이듬해인 1948년 태어난 엘로이는 10살 때 자신의 어머니가 성폭행 당해 살해를 당했으나 범인이 잡히지 못한 것을 계기로 쇼트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블랙 달리아’처럼 큰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미제 사건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소설은 2006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조쉬 하트넷과 스칼렛 요한슨 등 할리우드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흥행엔 실패했다.   

  

[1]

[프롤로그]

나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 단지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말로써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사람에 미친 영향을 통해서만 그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 뿐이다. 난 과거를 회고하고 사실을 수집하여 그녀를 재구성해 냈다. 그녀는 슬프고도 귀여운 여자였고 또 창녀였다. 아무리 좋게 봐 주어야 ‘잘나갈 뻔하다가 샛길로 빠져 버린’ 여자였다. 어쩌면 그런 표현은 내게도 똑같이 적용될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그녀의 종말을 모르고 있는 편이 더 좋았다. 나는 그녀의 죽음이 차라리 강력사건 보고서에서 몇 줄로 간단히 처리되고, 검시소의 시체 해부 보고서 사본 위에 형식적으로 기록되어, 마지막에는 신원 불명자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무명(무명)의 삶으로 조용히 생을 마감하길 바랐다. 그러나 나의 소원은 속절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묻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하게 피살된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얽힌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모두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나는 그녀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으며, 사건 전모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회고록을 쓰기로 작정했다.               (P7-8)

[제1장 불과 얼음]

나는 몸을 쭉 펴고 아직 잠들지 않은 인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쳐다보면서 케이 레이크를 생각했다. 기사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면밀히 재구성하면서 보비 드 위트의 여자였던 케이가 어떤 생활을 했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보비 드 위트에게 육체적으로 농락당하고 보비의 친구들에게까지 몸을 팔았을 것이다. 또 마약도 팔았을 것이고, 마약에 중독된 은행털이범의 정부. 그 기사는 진실이었지만 지저분한 냄새를 푹푹 풍기고 있었다. 그 지저분함은 그녀와 나 사이에 번쩍하고 일어났던 성적 도발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그런 지저분함이었다.

나는 케이가 헤어지면서 한 말이 사실임을 점점 더 믿게 되었다. 블랜처드가 그녀의 육체를 소유하지 않고서 어떻게 동거를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인가의 불빛은 하나씩 꺼져 갔다. 그리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산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왜 리가 섹스를 하지 않는지 그 해답을 알아냈다.

그는 시합에서 승자가 되어 링에서 내려선다. 땀에 젖어, 피를 맛보며, 별처럼 기분이 아득해진 채로, 아직도 몇 라운드 더 뛸 듯한 기세로. 그에게 노름돈을 걸어 큰돈을 만지게 된 노름 거래꿈들은 그에게 삼삼한 계집을 하나 갖다 안긴다. 프로든 아마추어든 가릴 것 없이 권투 선수라면 누구나 경기 후 안겨진 계집의 피를 흠뻑 들이마신다. 마치 사냥꾼이 사슴의 모가지에다 입을 갖다 대고 분출하는 피를 들이마시듯.

섹스는 분장실에서 할 수도 있고, 너무 비좁아 다리조차 쭉 펼 수 없는 자동차 뒷좌석에서도 할 수 있으리라. 차가 너무 비좁으면 옆문을 발로 걷어차 연 채로 할 수도 있다. 그 짓을 끝내고 바깥으로 나서면 사람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환호한다. 그는 다시 별이 된 것처럼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 환희의 기분은 권투 경기의 또다른 면이다. 말하자면 제11라운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그건 하나의 약점, 혹은 상실이 된다. 비록 블랜처드가 오랫동안 권투를 그만두었다지만 그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케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사슴의 모가지에다 대고 피를 빠는 행위로 전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케이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섹스는 피, 송진, 짓이겨진 상처 같은 맛이 나기 때문에 여자의 육체를 탐하지 않았다고.      (P61-62)    

 

넉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전 순찰차를 타고 야간 근무나 돌아다니는 별 볼일 없는 순찰 경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백만 달러의 시체 통과에 기여한 영장국 소속 형사이다. 그리고 이미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인 기록을 갖고 있다. 다음 달이며 나는 서른이 되고 경찰에 근무한 지 5년이 된다. 그리고 반장 시험을 볼 자격이 주어진다. 시험에 합격하고 처신만 잘한다면 서른다섯이 되기 전에 형사과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장도 따지고 보면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온몸이 근지러웠다. 그래서 집 안으로 들어가 거실에서 잡지를 뒤적거리며 뭐 재미난 읽을거리가 없을까 하고 찾았다. 그때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뒤쪽으로 걸어가 활짝 열린 목욕탕 문을 보았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수증기를 느끼는 순간 케이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알았다.

케이는 샤워기 밑에 알몸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도 무표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깨알 같은 반점이 있는 유방과 검은 젖꼭지와 풍만한 골반, 쏙 들어간 배를 보았다. 그때 그녀가 몸을 돌렸다. 나는 보았다. 그녀의 등에 난 뱀같이 기어가는 커다란 상처를. 그것은 허벅지에서 어깨까지 X자로 깊게 벤 칼자국이었다. 온몸이 떨리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거실로 되돌아왔다. 사람을 두 명이나 죽인 오늘 같은 날 왜 그녀가 그런 상처를 보여 주는 건지 좀 언짢았다.           (P118-119) 

    

[제2장 39번 노턴 로]  

나는 차고에서 나와 노턴 로로 뛰어갔다. 리도 내 바로 뒤에서 쫓아왔다. 거미관의 왜건과 사진 차가 급정거하는 것을 보고 나는 더욱 빨리 달렸다. 해리 시어즈는 대여섯 명이나 되는 경찰관들 앞에서도 술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엔 공포가 어려 있었다. 사진사들은 공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한 곳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부챗살처럼 주위에 퍼졌다. 나는 순찰 경관 둘을 지나쳐 앞으로 나서면서 도대체 거기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젊은 여자의 알몸 시체였다. 허리 부분이 절단되어 동강나 있었으며 양다리는 쫙 벌려져 있었다. 왼쪽 넓적다리 부분은 살점이 커다란 삼각형으로 잘려 나가 버렸고, 절단된 허리 부분에서 시작하여 음모 바로 윗부분까지 깊고 넓게 베인 상처가 있었다. 성기 부분도 심하게 난도질되어 있었다. 상처 양옆의 피부는 뒤로 젖혀져 있었으며 안쪽에는 내장 기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반신은 더욱 참혹했다. 양쪽 유방에는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오른쪽 유방은 축 늘어져 몇 조각의 피부만 남은 채 간신히 붙어 있었고 왼쪽 유방은 유두 주위가 예리하게 베어져 있었다. 그 자상은 너무 깊어서 뼈가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가장 참혹한 것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차라리 보라색의 상처 덩어리라고 해야 더 적절했다. 코는 짓이겨져 축 꺼져 있었고 입은 귀 있는 곳까지 양옆으로 찢겨 기괴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에게 가해진 이 참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온 몸에 서늘한 기운이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는 내 어깨와 팔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었다.

“피라고는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군.”              (P126-127)     


“난 마치 여고생처럼 당신에게 홀딱 빠졌어요. 보비 드 위트와 리는 나를 억지로 권투 경기장에 데려갔어요. 그래서 스케치북을 가지고 갔어요. 남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게임을 억지로 좋아하는 척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죠. 내가 좋아한 것은 당신이었어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는 것이 좋았고, 상대방의 펀치에 얻어맞지 않기 위해 가드를 올리는 모습도 좋았어요.

그러다가 당신은 경찰이 되었고, 리는 당신이 일본인 친구들을 밀고했다는 얘기를 내게 해 주었어요. 나는 밀고질을 했다고 해서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당신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더군요. 다만 그 동화는 동화를 끝나지 않는 현실 속의 얘기였지요. 비록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리와의 경기 얘기가 나왔어요. 나는 그 경기가 싫었지만 리에게는 해 보라고 했어요. 우리 세 사람은 운명적으로 그렇게 엮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죠.”            (P164)     

나는 밀라드에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여자가 창녀였다는 확신만 얻었을 뿐입니다. 도대체 블랙 달리아라는 얘기가 어디서 튀어나온 겁니까?”

밀라드는 의자의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건 베보 민즈 기자가 만들어 낸 거라네. 그가 롱비치로 가서 그 여자가 지난 여름 묵었던 호텔의 접수계원과 얘기를 해보았는데 접수계원 말이 베티 쇼트는 언제나 몸에 꼭 끼는 검은 드레스만 입었다는 거야. 그래서 베보 민즈는 그 순간 앨런 라드가 주연한 영화 <푸른 달리아>가 떠올라 쇼트에게 블랙 달리아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는군. 하루에도 가짜 자백자가 열 명씩이나 나서는 판이니 블랙 달리아라는 이미지도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해리는 자백자 몇 명을 조사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네. ‘범인이 아니었더라도 결국에는 할리우드가 그 여자를 망쳐 놓고 말았을 겁니다.’ 버키, 자네는 아주 유능한 경관이야. 이 건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영장국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 로에게 잘 말해 주시겠습니까?”

밀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네. 아까 자네의 생각을 물었네. 이제 대답해 주겠는가?”

나는 반항하고 싶은 충동, 아니 애걸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여자는 엉뚱한 시간, 엉뚱한 장소에서 시원찮은 남자에게 ‘예스’라고 하기도 하고 ‘노’라고 하기도 했어요. 뭐 닳아빠지는 것이냐고 생각하면서 수많은 남자에게 몸을 내맡겼지요. 말하자면 진실을 얘기하는 방법을 몰랐던 겁니다. 그러니 무수하게 많은 남자들 중에서 범인을 찾는 것은 바다를 말려 진주를 찾아내는 거나 다름없을 겁니다.”          (P173-174)     

보고서의 나머지 내용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리가 주니어 내시의 아지트 창문에서 잠복하면서 수집한 차량 번호들은 아무런 소득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하루 평균 300건씩 예전에 달리아를 보았다는 제보가 LA 경찰 본부와 경찰서로 접수되었다. 자기가 달리아를 죽였다는 가짜 자백도 아흔세 건에 달했다. 그중 알리바이가 석연치 않은 중증 정신병자는 형무소에 구금시켜 놓고 정신 감정을 의뢰 중인데, 아마도 카마리요 정신병원으로 후송될 것이다. 현장 조사는 전속력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19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하루 종일 이 사건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지금 남은 유일한 희망은 나 블라이처트가 1월 17일에 제출한 현장 탐문 보고서 중에 나오는 린다 마틴 즉 로나 마틸로바라는 여자이다. 이 여자는 엔시노 지역의 칵테일 라운지 한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 일대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이 여자를 잡으려는 노력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는 보고서의 타이핑을 마치면서 엘리자베스 쇼트를 죽인 범인은 절대로 잡히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경관 대기실의 도박표 중 “미해결: 2대 1로 지불”에 20달러를 걸었다.   (P236-237)        

“..... 잭, 호럴 청장은 달리아 사건에 배정된 병력 중 4분의 3을 철수시키고 싶어 해. 당초 이 사건에 많은 병력을 투입한 것은 시체를 통과시켜 주어 고맙다는 표시를 하겠다는 게 시발이었지만, 이제 그 문제와 별개로 호럴은 유권자에게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수첩에 나온 이름을 100프로 활용해서 호럴의 조치를 우회해 나갈 수 있단 말이야. 이 사건에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될수록 우리는 호럴을 저지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젠장, 엘리스........”

“아니야. 내 말을 끝까지 들어 봐. 얼마 전까지 나는 그 여자가 창녀로 비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그러나 이젠 그 여자에 관한 정보가 너무 많이 흘러나가 그런 식으로 사태를 끌고 갈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어. 우린 그 여자의 정체가 뭔지 알았어. 그리고 수첩에 나와 있는 남자들을 만나 보면 그 사실을 골백번도 더 확인할 수 있겠지. 아무튼 사람을 풀어서 수첩에 나와 있는 남자들과 계속 접촉하라고 해. 그리고 나는 기자들에게 그 남자들 이름을 계속 제공할 거야. 그러다 보면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질 것이고 우리는 범인을 검거하면 되는 거야.”

“엘리스, 그건 바보 같은 짓이야. 살인자의 이름은 수첩에 없을 거야. 그자는 정신병자야. 우리에게 뒷모습만 보이면서 내가 누군지 맞혀 보라고 약을 올리고 있단 말이야. 엘리스, 달리아는 힘들이지 않고 돈을 버는 여자였어. 난 당신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이 사건에 너무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어. 지금 살인국의 다른 과들은 서너 명도 안 되는 적은 인원으로 간신히 일을 꾸려 나가고 있어. 그리고 수첩에 나온 유부남의 이름이 신문에 나가는 날엔 그들의 가정 생활은 파탄이 나고 말 거야. 베테 쇼트라는 여자와 오입 한 번 잘못한 죄로 말이야.”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잭, 나는 곧 검사보에서 검사가 될 거야. 내년에 안 된다면 다음번에는 된다고. 그리고 그린 본부장은 몇 년 안에 은퇴할 거야. 그러면 그 후임으로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도 당신도 잘 알 거야. 잭, 나는 서른여섯이고 당신은 마흔아홉이야. 나는 블랙 달리아 같은 대형 사건을 또 맡을 기회가 있어. 하지만 당신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조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보라고.”

또 침묵이 흘렀다.

잭 티어니 국장은 엘리스의 유혹에 영혼을 팔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곧 로스앤젤레스 시청 산하의 검찰을 지휘하게 될, 머리 좋은 악마의 속삭임 앞에서 잭 티어니는 흔들리고 있었다.

“좋아, 엘리스.”

나는 티어니의 말소리를 듣고서 그 자리에서 전보 신청서를 찢어 버렸다. 그리고 대기실로 되돌아와 소란스러운 서커스에 다시 합류했다.                 (P321-322)     

[2]

순찰 경관 업무는 정말 힘이 들었다. 나는 메인의 이스트 5번가와 스텐퍼드 숙박소 거리를 순찰해야 했다. 그 거리에는 혈액 은행, 싸구려 술을 파는 술집, 하룻밤에 50센트 하는 싸구려 여인숙, 부랑자 수용소 따위가 늘어서 있었다. 그래서 그 거리를 도는 순찰 경관들 사이에는 무조건 완력을 써야 한다는 불문율이 지켜지고 있었다. 술꾼들은 곤봉으로 두들겨 패서 제압하고, 직업소개소에서 취직을 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흑인은 강제로 끌어내야 한다. 단속 인원 할당 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술주정꾼과 넝마주의를 무조건 잡아들여 음주 단속 호송차에 쑤셔 넣어야 한다. 그건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잘하는 경관은 전쟁 중에 경찰 병력이 부족해 특별히 채용한, 이동 농업을 전문으로 했던 떠돌이 촌놈들뿐이었다.

나는 별 의욕 없이 순찰을 돌았다. 곤봉도 잘 휘두르지 않았고, 술꾼들에게는 10센트나 25센트 짜리 동전을 주며넛 거리에서 사라지거나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버리라고 일러 주었다. 일단 술집으로 들어가면 잡아들일 필요가 없으니까. 자연히 나의 음주 단속 실적은 자꾸만 떨어졌다. 나는 센트럴 순찰 경관들 사이에서 ‘감상적인 자선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P57)   

  

바로 거기에 리의 포스터도 있었다. 그리고 베니 시겔이 시키는 대로 했으면 리와 한판 싸웠을지도 모르는 조 루이스의 포스터도 걸려 있었다.

블라이처트와 블랜처드.

유명하던 두 백인은 그만 잘못 풀리고 만 것이다.

나는 포스터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주위의 소음이 사라졌고 나는 의자가 놓인 시궁창에서 1940년과 1941년의 과거로 되돌아갔다. 당시 나는 권투 시합에서 이기면 베티 쇼트처럼 생긴 잘 대 주는 여자와 그 짓을 하면서 몸을 풀었다. 그리고 리는 KO 행진을 계속하면서 케이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하게 우리 셋은 한 가족이 되었다.            (P103)    

 

나는 베티 쇼트와 케이가 잘 구분이 되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들과의 관계를 상호 간의 유혹이라고 규정지었다. 내 안에 달리아 같은 기질이 있기 때문에 베티를 탐했던 것이고, 또 케이에겐 나를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케이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 6개월을 잘 반성해보았다. 거기에 모든 내용이 들어 있었다.

리가 멕시코에서 흥청망청 쓴 돈은 아마도 따로 감추어 두었던 은행 턴 돈이었으리라. 새해 아침에 나는 그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 박스터 피치가 그 며칠 전에 그에게 협박을 했던 것 같다. 그해 가을 올림픽 경기장에 권투 경기를 보러 갈때면 리는 나 몰래 베니 시겔을 만나고 왔을 것이다. 아마 그때 시겔에게 보비 드 위트를 죽이자고 했을 것이고.   (P128)     

[제3장 케이와 마들린]

나는 멀찌감치서 달리아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된 친구들과 적들의 동정을 파악해 나갔다. 리스와 해리는 엘 니도 호텔의 파일들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야근까지 하면서 쇼트 사건을 해결하려고 애썼다. 내게도 그 방의 열쇠는 있었으나 나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 지랄 같은 여자를 잊어버리겠다고 한 케이와의 약속 때문에. 그저 가끔 점심때 파드레를 만나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을 뿐이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러스는 결코 범인을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래도 수사는 계속할 것 같았다.

1947년 6월 베니 시겔은 베벌리힐스에 사는 여자 친구의 집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프리츠 보겔이 자살한 뒤에 77번가 지서에 배속된 빌 쾨니히는 1948년 초 와츠 가에서 얼굴에 총알 세례를 맞고 사망했다. 이 두 살인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다. 엘리스 로는 1948년 공화당 예비 선거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나는 분젠 버너에다 밀주(密酒)를 한 주전자 만들어 그의 패배를 자축했다. 덕분에 나의 자축을 함께했던 검사실 요원들은 모두 시뻘겋게 취하고 말았다.     (P136)     


뉴턴 스트리트 지서는 LA 번화가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다. 관할 지역의 95퍼센트가 슬럼가이니 당연히 주민의 95퍼센트는 흑인이었다. 문제가 그칠 날이 없었다. 주정뱅이와 노름꾼들은 골목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고 동네마다 술집, 미장원, 당구장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지서에는 하루 24시간 내내 커드 스리 비상 경계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도보로 순찰하는 경관은 앞부분에 쇠가 박힌 곤봉을 들고 다녔고, 대기실에 근무하는 형사는 규정상 금지된 덤덤탄이 장전된 45구경 자동소총을 휴대했다. 이 동네 주정뱅이들은 ‘녹색 도마뱀(콜론 향수에 올드 몬터레이 백포도주를 약간 탄 것)’을 마셨다. 창녀와의 쇼트 타임은 1달러이고, 창녀가 제공하는 ‘장소(56번가와 센트럴 사이의 폐차장에 버려진 차 속)’에서 하면 1달러 25센트였다.            (P160)     

[제4장 엘리자베스]

이제 사태는 아주 지저분하고 추잡하게 돼 가고 있었다. 베티가 버스 정류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나를 향해 “잘 가세요, 잘 가세요, 그 한 마디였네.”라고 속삭이는 모습이 자꾸만 나의 의식을 강타했다.

그녀가 “이 별 볼일 없는 경관, 한물간 경관,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경관.”하고 놀리는 것 같았다.

블라이처트, 당신은 말이야, 선량한 여자를 고약한 냄새나 풍기고 다니는 화냥년으로 몰아붙였어. 당신은 말이야. 당신에게 주어진 좋은 단서들을 전부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어. 당신은 말이야, 뭐든지 열심히 해 보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뭐지? 경찰대학 체육관에서 벌어진 블랜처드와의 시합에서 깝죽거리고 까불다가 블랜처드의 라이트 훅을 맞고 캔버스에 벌렁 나자빠져 곤죽이 되고 말았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뭐가 있어? 당신은 말이야, 겉은 번드레하지만 따지고 보면 호랑말코 같은 놈이야. 빛 좋은 개살구라고.

바이바이 베티, 베스, 베시, 리즈. 우린 한 쌍의 어울리는 부랑배였지. 39번가 노턴 로 이전에 서로 만나지 못한 게 유감이군. 우린 어울리는 한 쌍이 되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서로 의지할 수도 있었을 테고, 구제받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인생을 망쳐놓지는 않았을 텐데......       (P218-219)   

  

인사 기록의 페이지의 맨 밑에 지문이 나와 있었다. 손가락 아홉 개가 채취해 온 지문과 일치했다. 세 개가 일치하면 유죄를 입증할 수 있고 여섯 개가 일치하면 일방적으로 가스실로 보낼 수 있었다.

안녕, 엘리자베스. 오래 기다렸지?

나는 서류함을 닫고 청소원의 입을 확실히 틀어막기 위해 또 10달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증거 채취 도구를 집어 들고 인사국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보니 1949년 6월 29일 오후 8시 10분이었다. 아주 재수가 좋은 순찰 경관이 캘리포니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제 사건을 해결한 순간이었다. 

나는 풀잎을 만져 보면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 보았다. 지나가는 사무실 근로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사건 해결 소식을 파드레, 태드 그린, 호럴 청장 등에게 보고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또 본부로 소환되어 1년도 안 돼 차장이 되는 모습을 꿈꾸어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얼음 씨가 불과 얼음의 야심 찬 기대를 달성하는 순간을 상상했다. 내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날 것이고 케이는 당연히 내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스프레이그가는 닦달을 당하는 것은 물론 살인 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불명예를 입을 것이며, 그들의 많은 돈도 이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나의 공상은 끝났다.

이들을 체포하려면 나는 1947년에 매들린과 린다 마틴에 대한 정보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했다. 그러니 사건 해결은 훈공 없는 영광 아니면 공식적인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P228-229)  

   

엘리자베스 쇼트는 그녀를 보고 달아나려 했다. 라모나는 그녀를 때려 기절시킨 다음, 조지에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입에다 재갈을 물리라고 시켰다. 그리고 여자를 매트리스에다 묶었다. 라모나는 조지에게 여자의 내장을 영원히 갖도록 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손지갑에서 <웃는 남자>를 꺼내 그중 일부를 커다란 소리로 읽으면서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그 여자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라모나는 그녀를 칼로 베고 담뱃불로 지지고 야구 방망이로 마구 때렸다. 그리고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에다 그 과정을 낱낱이 적어 넣었다. 베티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절했다. 조지는 옆에서 지켜보았고 그들은 함께 콤프라치코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이틀 뒤 그녀는 베티의 입을 기플랭처럼 양 귀까지 짝 찢어 놓았다. 그렇게 해야 그녀가 죽은 뒤에도 자기를 증오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지는 시체를 두 토막 낸 다음 그것들을 오두막 바깥에 있는 냇가에서 깨끗이 씻고 라모나의 차에 실었다. 그날 밤 그들은 그 시체 토막을 39번가 노턴 로로 싣고 갔다. 그곳은 조지가 시청에서 쓰레기 처리 일을 맡아 하던 공터였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쇼트를 거기에 내다 버려 블랙 달리아로 알려지게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조지를 그의 픽업 차에다 데려다 주었고 에멧과 매들린에게 돌아가, 곧 내가 어디 있다 왔는지 알게 될 것이며 마침내 내 의지를 존중하게 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녀는 정화(정화)의 일환으로, 싸구려 미술품을 좋아하는 엘드리지 챔버스에게 기플랭 그림을 팔았고 그 거래에서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마사가 자기의 소행을 알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녀는 공포를 잊기 위해 더 많은 아편, 코데인, 수면제 등을 먹게 된 것이다.              (P276-277)  

   

나는 도덕적 타락과 경관의 품위 손상을 이유로 로스앤젤레스 경찰에서 파면되었다. 그것은 경무관과 부 본부장급으로 구성된 특별 인사위원회의 만장일치로 결론 났으며, 나는 소청 제기 없이 깨끗이 승복했다. 나는 라모나를 검거하여 경찰 고위층의 마음을 돌이켜 볼 생각도 해 봤지만, 부질없다고 판단하고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되면 러스 밀라드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자백해야 할 테고, 결국 그까지 피해를 입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의 이름에는 더 많은 모욕이 덧붙게 될 것이다. 마사도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나의 파면은 매들린을 만난 2년반 전에 이미 벌어졌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콘피덴셜>에 난 기사는 경찰 본부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지막 한계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사자인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P288-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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