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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용헌 Nov 12. 2024

피에르 르메트르의 <오르부아르>

영화 <맨 오브 마스크>  2017년

르메트르의 오랜 화두는 프랑스의 근대사다. 이에 대해 10여 권의 소설로 다루겠다고 공언한 그는 '오르부아르'를 비롯해 '화재의 색'과 '우리 슬픔의 거울'로 이어지는 '재앙의 아이들' 3부작으로 이미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시기를 다룬 바 있다. '대단한 세상' 4부작에서 르메트르는 프랑스 현대사에서 영광의 30년으로 일컬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를 다룬다. 

    

《맨 오브 마스크》(Au revoir là-haut)는 2017년에 개봉한 프랑스의 영화이다.    

 

1.전쟁 후의 가면들 – 영웅과 기념비

가면이 벗겨질 때 - 부조리한 국가묘지와 기념비 사기극

2.희생된 개인의 가면 - 에두아르의 가면, 알베르의 말머리 가면

가면이 벗겨질 때 - 자기파괴 충동, 해방, 감사의 마음, 도피와 새로운 신분    

 

알베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관자놀이가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고동친다. 몸속 혈관들이 죄다 터져 버릴 기세다. 그는 세실을 부른다. 그녀의 다리 사이에 들어가고 싶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꽉 조여지고 싶다. 하지만 세실의 모습은 그에게까지 와 닿지 못한다. 마치 너무 멀리 있어서 올 수 없는 것 같고, 이것이 그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다. 지금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옆에 있지 않다는 것이. 이제는 그녀의 이름만이 남아 있다. 왜냐면 지금 그가 빠져드는 세계에는 몸이 없고, 다만 말들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애원하고 싶다. 죽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무섭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그는 그녀 없이 홀로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안녕, 천국에서 다시 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안녕, 나의 세실.     (P37~38)   

  

그는 말 대가리를 부여잡는다. 살덩이들이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미끌미끌한 주둥이를 간신이 붙잡은 알베르는 그 커다랗고 누런 이빨들을 틀어쥐고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아가리를 쫙 벌리고 그 속에 남은 한줌의 썩은 숨결을 허파 가득 들이마신다. 이렇게 그는 몇 초 동안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다. 속이 뒤집히고, 구토를 하고, 온몸이 다시 격하게 떨리지만, 그는 실낱만큼의 산고를 찾아 다시 몸을 뒤집으려 해본다. 희망은 없다. 흙은 너무도 무겁고, 빛도 거의 사라졌다. 땅 위에서 계속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들에 박살나는 대지의 경련들만이 느껴지다가, 결국에 더 이상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단 한 번의 헐떡임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나서는 깊은 평화가 그를 감싼다. 그는 눈을 감는다. 어떤 불편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심장은 딸깍 무너져 내리고, 이성은 꺼져버리고, 그는 어둠속으로 잠겨 든다. 병사 알베르 마야르는 죽은 것이다.     (P38~39) 

    

문제는 저 프라델이 모두가 싫어하는, 정말로 위협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노라면, 군인에게 진정한 위험은 적 아니라 계급이라는 격언이 실감난다. 정치와는 거리가 먼 에두아르는 이런 것이 위계질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진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P50)   

  

수첩을 뒤적이면서 알베르는 가슴이 꽉 조여 왔다. 이 모든 것 안에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상자도 없었다. 시체 한 구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산 자들만이 있었다. 이게 더욱 끔찍한 이유는, 이 모든 그림들이 절하듯 외치는 것이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죽을 것이다.>              (P74)     

포탄 파편은 그의 하악골 전체를 날려 버렸다. 코 아래로는 휑하니 아무것도 없다. 목구멍, 입천장, 위쪽 치아가 훤히 들어나있고, 아래쪽에는 진홍색 살덩이들의 마그마 같은 것이 보이는데,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은 아마도 성대인 듯하고, 혀는 더 이상 없었으며, 식도는 축축한 빨간 구멍을 이루고 있다. 에두아르 페리쿠르는 스물세 살이다. 그는 기절한다.       (P88)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쓸데없는 말>은 알베르의 삶을 이루는 한 축이다. 살아오면서 열정에 휩싸여 바보 같은 일에 뛰어든 게 모두 몇 번이나 될까? 그 답은 어렵지 않다. 좀 더 충분히 생각해 볼걸, 뒤늦게 후회할 때마다 그랬다. 보통 알베르는 그의 후한 마음과 순간의 실수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긴 하지만, 그의 성급한 약속은 비교적 사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것이다.        (P103)     


“전쟁에서 우리는.....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까요.” 알베르가 힘들게 말을 끝맺었다. (P140)     

.... 불쌍한 외젠, 이게 바로 이 전쟁이 끝난 꼬락서니라네. 집으로 돌려보내지도 못한 기진맥진한 친구들이 널려 있는 거대한 기숙사 같은 꼬락서니야.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사람, 손 한번 잡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 신문은 우리에게 화려한 개선문을 약속했지만, 결국 우린 사방에서 찬바람이 들이치는 곳에 짐짝들처럼 쌓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감격에 겨운 프랑스가 드리는 감사의 인사> (내가 [르 마탱]지에서 읽은 구절인데, 정말로 한 자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옮긴 거야)는 어딜 가나 마주치는 까다로운 행정 절차들로 둔갑해 버렸고, 우리에게 급료 52프랑 주는 것에도 벌벌 떨고, 의복과 수프와 커피 지급에도 인색하기 짝이 없지. 우릴 도둑 취급하고 있어.          (P142-143)    

 

인근 도시의 사람들이 와서 병사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량한 얼굴들이었다. 여자들은 아들을, 남편을 찾는다며 팔을 쭉 뻗어 사진들을 내밀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따로 없었다. 아비들은 뒤에 머물러 있었다. 몸부림을 치고, 질문하고, 조용한 투쟁을 계속해 가고, 또 아침마다 아직 남아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다시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여자들이었다. 사내들은 희망의 끈을 놓은 지 이미 오래였다. 질문을 받은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진들은 모두가 비슷비슷했다.             (P146)   

  

전쟁이 산업에 가져다주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심지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말이다.           (P180)     


앙리가 보기에 세상은 두 종류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죽을 때까지 뼈 빠지게, 그리고 맹목적으로 일하면서 그날그날을 불쌍하게 연명해 가는 마소 같은 존재들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엘리트 들이다. 그들의 <개인적인 요소들> 때문에 말이다. 앙리는 어느 날 이 표현을 군사보고서에서 읽은 후, 너무도 마음에 들어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P264)     


결국 모든 게 이 둘로 환원된다. 쌩쌩 날아다니는 것들, 그리고 뒈져버리는 것들.     (P265)     

에두아르는 가족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마들렌을 많이 생각했다. 그녀에 대해선 꽤 많은 추억들이 있었다. 터지려는 폭소를 꾹 참던 것, 문가에서 보내던 미소, 그의 머리통을 긁어 주던 구부린 손가락들, 그리고 그들의 공모 의식.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웠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누군가를 잃은 여자들이 다 그렇듯 그녀도 상심했으리라.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시간, 그 위대한 의사가 온다……. 사람들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P284)     


에두아르는 외출하는 법이 없었고, 온종일 이 아파트 안에서, 이 비참한 가난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니, <비참한 가난>이란 좀 심한 말이고, 지금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것은 여유가 없는 이 초라한 삶, 이 쪼들리는 삶이었다. 사람은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라고 말들을 하지만, 천만에, 에두아르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이 있을 때는 거울 앞에서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아니 아픔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이 턱뼈도 혀도 없이 활짝 노출된 목구멍에서 뭔가 사람다운 것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거였다. 저 어마어마한 이빨들.... 살은 다시 단단해지고, 상처는 불로 지져 놓았지만, 그 휑하니 똟려 버린 구멍이 주는 격렬한 아픔은 이전 그대로였다.               (P285)     

「자, 내가 뭐가 윤리적인지를 말해 주지. 그건 프라델 대위, 그 개자식의 몸뚱이에 총알구멍을 내버리는 거야! 그게 바로 해야 할 일이라고! 왜냐면 이 엿 같은 삶은, 지금 우리의 이 한심한 꼬락서니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그놈한테서 왔기 때문이야! (…) 그 훈장과 표창장들 덕분에 놈은 결혼을 아주 잘 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영웅은 여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니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시름시름 뒈져 가고 있는데, 놈은 분명히 크게 사업을 벌였을 테지……. 자넨 이게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나?」

놀랍게도 에두아르는 알베르의 기대와는 달리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는 눈썹을 꿈틀 올리고는, 종이 위로 몸을 숙이고 이렇게 썼다.

「이 모든 것은 우선은 전쟁 탓이야. 전쟁이 없었다면 프라델도 없었을 테니까.」

알베르는 숨이 막힐 뻔했다. 물론 실망감도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너무 슬펐다.  (P355~356) 

    

지구는 늘 대재앙이나 역병으로 황폐화되기 일쑤도, 전쟁은 이 둘의 조합에 불과하다. 그를 탄환처럼 꿰뚫은 것은 죽은 이들의 나이였다. 대재앙은 만인을 죽이고, 역병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이지만, 젊은이들을 그렇게 대량으로 학살하는 것은 오직 전쟁뿐인 것이다.   (P386)   

  

그는 아침마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이 나무로 된 광고판을 받아서 메고 다니다가, 간단히 요기만 하는 점심시간에 다른 걸로 바꿨다. 아직 정상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제대 군인들이 대부분인 직원들은 한 구(區)에 열 명 정도 됐으며, 여기에 감독관이 하나 있었는데, 항상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는, 어깨나 좀 주무르려고 잠시 멈춰 설라 치면 번개같이 튀어나와서는, 당장에 다시 움직이지 않으면 해고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 주머니 속의 모자를 꺼내기 위해 잠시 서는 것도 금지된 일이었다.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게 바로 자네들 일이야.」 감독관은 말하곤 했다. 「자넨 군대에서 《땅개》였지 않았어? 이것도 마찬가지라고.」                 (P391~392)     


진짜 기적이었다. 그 만남은 엄청난 기회였고, 거기서부터 그의 성공이 시작되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줄 아는 것, 여기에 모든 게 달려 있다.          (P417)     


그가 이 일을 상상해 낸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이 지고의 행복, 이 비할 바 없는 도발의 쾌감 때문이었다. 이 얼굴없는 사내는 세상에 대고 주먹 감자 한 방을 먹인 거였고, 이것은 그에게 미칠 듯한 행복감을 안겨 주었고, 그가 잃을 뻔했던 과거의 자신과 다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P479)  

   

완전한 빈털터리인 그는 익명으로 가난하게 죽을 거였고,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거였다. 어차피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급여에 대한 질문은 직위에 대한 것보다도 훨씬 모욕적이었다. 직위는 부처내에 한정된 문제인 반면, 궁핍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어디에나 따라다니면서 삶을 직조하고, 삶을 완전히 결정해 버린다. 그것은 매순간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더러운 액체처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궁핍은 오히려 극빈보다도 나쁜 것인데, 왜냐하면 폐허 속에서도 위대함을 간직할 수 있는 반면, 부족함은 당신을 째째함과 치사함과 비열함과 인색함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바, 왜냐면 그것 앞에서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자긍심과 존엄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P536)    

 

에두아르는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거센 충격에 휩싸이진 않았다. 사람이란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슬픔은 그대로였다. 그의 내부에 벌어진 어두운 균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커졌을 뿐이고, 앞으로도 계속 커져 가리라. 문제는 그가 삶을 너무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삶에 애착을 갖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 현실이 보다 간단해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P546)   

  

모든 이야기는 그 끝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이 삶의 본질이다. 심지어는 비극적일지라도, 심지어는 견딜 수 없는 것일지라도, 심지어는 우스꽝스러운 것일지라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아버지와는 아직 끝이 없었다. 그들은 원수로 헤어진 후에 다시 보지 못했다.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죽지 않았지만, 둘 중 누구도 아직 <마지막>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P547)     

언제나 파리를 사랑해 온 그는 전쟁 때 말고는 이 도시를 떠난 적이 없었고, 또 다른 곳에 가서 살 것을 고려해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는 오늘까지도 그랬다. 참 이상하게도 무엇도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고, 확실하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들은 도무지 현실 같지 않고, 생각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리고, 계획들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어떤 꿈속에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P616)     


오랫동안 메를랭은 자신이 노다지를 포기했던 그 밤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노다지를 포기함은 그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윤리의 편에 가깝다고 느껴진 뭔가를 위해서였다. 평소 고담준론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말이다, 은퇴하고 나니 발굴된 병사들의 사건이 계속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신문들을 읽기 위해서는 은퇴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 신문들을 통해 그는 앙리 도네프라델의 체포 소식, 그리고 이른바 <죽음의 모리배들>에 대한 떠들썩한 재판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짜릿한 만족감을 느끼며 자신의 법정 진술을 보고한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그에게 전혀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있었다. 기자들은 인상이 너무 고약한 데다가, 최고 재판소 앞 계단에서 그를 인터뷰하려는 자신들을 거칠게 밀쳐 버린 이 음산한 증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세상의 관심사는 바뀌었고, 사람들은 이 사건에 흥미를 잃어 갔다.     (P665~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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